LOGIN어둠이 내려앉은 황궁의 으슥한 길목.하륜이 매몰차게 떠난 자리에 홀로 남겨진 미옥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이대로 물러설 수는…….'수치심과 초조함이 동시에 밀려들며, 미옥이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던 찰나였다.달빛조차 두터운 먹구름에 잡아먹힌 칠흑 같은 밤.완벽한 어둠뿐이어야 할 그녀의 시야 한구석으로, 돌연 이질적인 붉은빛이 스며들었다.바닥을 향해 있던 미옥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칠흑 같은 후원의 너머, 수십 개의 붉은 청사초롱 불빛이 뱀처럼 구불거리며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황제의 행
'그의 사랑 따윈 이제 필요 없어.'초희의 서늘한 눈동자 속에는 오직 단 하나의 목적만이 독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귀인의 자리를 내어주며 안심하게 만들더니, 제 몸에 독을 부어 안락당으로 향하게 만든 미옥.그년의 목줄을 끊어낼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몸통이 짐승의 먹이로 던져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우의정의 개가 되어서라도, 내명부의 권력을 다시 틀어쥘 그 시간.초희가 피가 맺힌 입술을 천천히 달싹였다."폐하. 아이가 들어서는 데는, 그리 많은 수고가 필요치 않습니다.""……뭐?""단 한 방울이면 충분
농월당(弄月堂)의 내실.싸늘한 정적만이 감도는 방 안, 연호가 무심한 손길로 초희의 저고리 고름을 툭 뜯어내듯 풀었다.스윽-.앙상하게 마른 어깨와 달리, 서늘한 공기 중으로 고스란히 드러난 초희의 젖가슴은 기형적일 만큼 풍만했다.연호가 무심한 손길로 그 거대한 가슴을 한 손에 거칠게 움켜쥐었다.손아귀에 넘치도록 묵직하게 들어차는 크기. 그러나 연호의 짙은 눈동자에는 일말의 욕정이나 동요도 일지 않았다.‘그녀가 질투할 가치조차 없는 몸뚱이야.’크기만 비대할 뿐, 손바닥에 착 감겨들던 미옥의 그 쫀득한 탄력도, 숨 막히도록
어둠 속에서 미옥의 뜨거운 숨결이 하륜의 입술을 탐했다.그녀는 발돋움까지 해가며 제 몸을 바짝 밀착시켜 왔다. 급하게 타액을 얽어오던 미옥이, 기어이 뒷짐을 지고 있던 하륜의 한쪽 손을 억지로 끌어당겼다.스르륵-.미옥이 입고 있던 어두운 장의(長衣)의 앞섶이 벌어지고, 그녀가 하륜의 크고 단단한 손을 제 옷자락 안으로 거침없이 밀어 넣었다."……!"하륜의 눈동자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미세하게 흔들렸다.손끝에 닿은 것은 부드러운 내의의 감촉이 아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뜨겁고 매끄러운 여인의 맨살.온전히 드러
깊은 밤, 연화당.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향내 속에서 연호의 크고 단단한 손이 미옥의 허리를 은밀하게 감싸 안았다.그가 나른한 숨결을 내뱉으며 미옥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려던 찰나였다."오늘은 가세요, 폐하."미옥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연호의 가슴을 툭 밀어냈다."……왜. 네가 내 손을 쳐내는 날도 다 있군.""우의정이 용종까지 들먹이면서 기껏 안락당 문을 열어놨잖아요. 그 귀하신 초 귀인이 복권된 첫날인데, 오늘 밤마저 제가 폐하를 독차지하고 있으면 내일 아침 조당에서 영감들이 얼마나 들고일어나겠어요."미옥의 입에서 나온
"폐하께서 결국 우의정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안락당 문이 열렸습니다."텅 빈 연화당. 하륜의 건조한 보고에 찻잔을 매만지던 미옥의 손끝이 멈칫했다.'결국 밖으로 기어 나온다는 거네.'미옥의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황제의 애정을 뺏길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천유희로서 겪었던 뼈저린 경험들이 그녀의 본능을 날카롭게 깨우고 있었다.황궁에서 황제의 총애만으로 부족했다.진짜 무서운 것은 조정 대신들의 뒷배였다. 그들의 권력이 등에 업히는 순간, 황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판은 뒤집힌다.초희가 저 늙은 구렁이들과 결탁해
'주인님을 놈이라고 부르다니 필시 높으신 분이구나.'미옥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어느 정도의 신분일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시, 신선님입니까?”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에 남자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흑발 사이로, 갈증에 젖은 눈동자가 번뜩였다.“신선이라…… 하긴, 이 향에 취하면 이곳이 극락인지 지옥인지 분간이 안 가긴 하지. 가까이 와서 확인해 보거라. 내가 신선인지, 아니면 너를 잡아먹을 괴물인지.”미옥은 침을 꿀꺽 삼키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었다. 발이 어찌나 무겁게 느껴지는
“으아, 이 한겨울에 빨래 담당이라니! 세수도 하기 싫은 날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원래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잖아!”동기의 칭얼거림이 차가운 냇가에 울려 퍼졌다. 미옥은 대꾸 대신 얼음장 같은 물에 방망이질을 해댔다.“입 말고 몸을 움직여. 그럼 좀 덜 추울 테니까.” “그러지 말고, 미옥아.”콧소리 섞인 목소리에 미옥이 경계 서린 눈초리로 고개를 돌렸다.“또 뭔 소리를 하려고?” “노 씨한테 가서 뜨거운 물 좀 달라고 해봐. 네가 부탁하면 물이 뭐야, 빨래도 대신 해줄걸?”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방망이질이나
눈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쏟아졌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진 백색의 지옥이었다.북방의 잔혹한 겨울바람이 여인의 비단 옷자락을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겹겹이 껴입은 비단옷이 종잇장처럼 얇게 느껴질 정도의 혹한이었다. 드러난 살결은 이미 감각이 마비된 지 오래였고, 눈꺼풀 위로 내려앉은 서리는 속눈썹을 무겁게 짓눌렀다.하지만 미옥은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금속의 소름 끼치는 서늘함, 그리고 그 칼끝에 매달린 누군가의 지독하게 뜨거운 생명력 때문이었다. 자신의 손을 타고 흐르는 액체는 차가운 대기와 만나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스며드는 처소.초희는 두 손에 쥐어진 황금빛 교지를 매만지며 주체할 수 없는 환희에 몸을 떨었다.‘귀인(貴人)이라니. 설마 내게 내려진 자리가 종1품 귀인일 줄이야!’미옥이 제 첩지를 내려달라 황제에게 청했을 때만 해도, 초희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기껏해야 후궁의 말단인 재인(才人)이나 숙의(淑儀) 정도를 던져주며 선심을 쓰는 척할 줄 알았다. 무 귀인이 제 곁에 저와 동급인 후궁을 둘 리가 없지 않은가.그런데 후궁 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귀인의 자리라니.초희의 붉은 입술이 마침내 교만하게 말려 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