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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피안을 거슬러: Chapter 111 - Chapter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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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화

어린 정연은 초췌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미천한 소인이 무슨 그런 걱정을 하겠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허튼소리. 넌 내 사람이고 결코 천한 목숨이 아니다.”유지영은 부드럽게 정연의 손을 쓰다듬었다.“상처가 잘 회복되면 일등 시녀로 삼아주마.”정씨가 한 시진이 넘도록 정연을 묶어놓고 독하게 매질을 했는데도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유지영은 이미 정연을 온전한 제 사람으로 품었다.정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다짐하듯 말했다.“죽는 한이 있더라도 군주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그래, 일단은 푹 쉬거라.”방에서 나오니 홍주가 즉각 보고를 올렸다.“지금 거리 곳곳에서 송씨 일가가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긴다며 욕하고 난리도 아닙니다. 국공 나으리께서는 방금 궁으로 가셨고요. 둘째 부인은 충격으로 기절했고, 선주 아가씨는 눈이 붓도록 울고 계신다고 합니다.”전생에 그 무고한 인명 피해의 끔찍한 죄를 뒤집어쓴 사람은 유지영이었다.이제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으니, 진범들이 응당한 대가를 치를 차례였다.“할머니 쪽은 어떠하냐?”유지영이 물었다.“노부인께서는 별다른 동요가 없으십니다.”깊은 밤이 되어서야 유정남은 집으로 돌아왔다.온 집안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그의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었다.“폐하께선 엄벌을 내리셨습니다. 송씨 가문은 평민으로 강등되고 삼대 동안 과거시험을 볼 수 없게 되었지요. 주모자인 송 부인에게는 장형 서른 대를 내리셨고, 억울하게 죽은 열두 명의 수녀 가족에게는 각자 은 삼천 냥을 배상하라 명하셨습니다. 송씨 가문을 위해 선처를 구하던 대신들도 줄줄이 문책을 당했고요.”유정남은 무거운 표정으로 유씨 노부인을 바라보며 상황을 전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송씨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유선주가 달려와 그녀의 인중을 눌러 가까스로 눈을 뜨게 했지만, 그 얼굴에는 공포와 절망이 가득했다.“모든 책임은 송씨 가문이 떠안기로 하였소. 문제의 부광 비단은 송 부인이 제수에게 준 것이고, 제수는 영문도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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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유정혁이 아무리 반대한들, 결국 서신은 유씨 노부인에게 전달되었다.그녀는 밤새 분을 삭이지 못해 뜬눈으로 지새웠고, 곧이어 송씨를 불러서 송정원과 송원령 두 자매를 집안에 들이기로 타협했다.“만약 그 계집들이 집안을 소란스럽게 한다면, 내 경고를 무시한 네 탓인 줄 알거라!”유씨 노부인의 서늘한 경고에 송씨는 그저 고개만 주억거렸다.저녁 무렵 두 자매가 당도하자, 송씨는 자신의 처소 근처 별채를 내어주고 심복 어멈을 붙여 감시하게 했다.한편, 유선주는 이들 중 한 명이 귀첩 신분으로 자신과 함께 정왕부로 시집갈 거라는 사실을 알고는 길길이 날뛰었다.아직 혼례도 올리기 전인데 담시령에 이어 귀첩까지 굴러들어 왔으니 속이 뒤집힐 노릇이었다.송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차가운 얼굴로 해명했다.“부광 비단 사건을 우리 대신 뒤집어써 준 게 송씨 가문이다. 여기서 소란을 피우다간 정왕 세자와의 혼인은 고사하고 이 어미의 목숨조차 장담할 수 없어. 그러니 이 일은 물릴 수 없다.”그 말에 유선주는 얼굴을 감싸며 통곡했다.며칠 후, 조회를 마치고 돌아온 유정남은 시녀 두 명을 데리고 유수각을 찾았다.“이 아이들은 내 수하였던 운청과 운민이다. 무공이 뛰어난 아이들이니 앞으로 네 곁에 두거라.”유지영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해요, 아버지.”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딸을 보며 유정남은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저릿해졌다.그는 반드시 딸을 지켜주리라 다짐하며 입을 열었다.“며칠 뒤 경왕 일가가 경성에 당도한다고 하더구나. 혼례까지 석 달밖에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야겠어.”두 제수가 딴마음을 품고 있는 이상, 유지영의 혼사를 제대로 준비해 줄 리 만무했다.유씨 노부인마저 연로해 기력이 부족하니 유정남의 근심은 깊어만 갔다.안뜰 부인들이 챙겨야 할 살림을 사내인 자신이 직접 챙기려니 여간 막막한 게 아니었다.하지만 유지영은 아버지가 돌아갈 때까지 그의 짙은 근심을 알지 못했다.곁을 지키던 동금이 다가와 낮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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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유지란은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큰언니는 안 가시나요?”두 사람의 얄팍한 속셈을 유지영이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그때, 장 부관이 급히 안으로 뛰어들어왔다.“태후마마께서 이틀간 금운대에 기도를 올리러 가시며 군주님의 동행을 명하셨습니다. 지금 태후마마의 마차가 대문 밖에 당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지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자매를 내려다보았다.“너희도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늦을 텐데?”그러고는 이내 유씨 노부인을 향해 돌아섰다.“저는 이만 채비하러 가보겠습니다, 할머니.”유씨 노부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태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매사에 각별히 조심하라 당부했다.“염려 마세요, 할머니. 제가 알아서 조심하겠습니다.”유지영은 짤막한 답을 남긴 채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남겨진 유선주와 유지란의 얼굴은 당혹감을 넘어 수치심으로 벌겋게 물들었다.특히 유선주는 도대체 유지영의 어디가 그리 잘나서 태후가 이토록 그녀를 끔찍이 아끼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국공부 앞에는 화려하고 기품 있는 황실 마차가 멈춰 서서 길을 지나던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유지영의 뒤를 따라온 두 자매가 인사를 올린다며 마차에 접근했지만, 궁인들에게 가로막혔다.소 상궁이 차가운 얼굴로 경고했다.“태후마마의 행차를 방해하지 마십시오!”두 자매는 눈앞에서 유지영이 마차에 올라 유유히 멀어져 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유선주는 이를 악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저 고약한 성질머리에 머지않아 태후께서도 싫증을 내실 거야. 우리도 이만 가자.”그 시각, 넓고 안락한 마차 안에서 서 태후는 유지영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요 며칠간 성안에 돌던 소문은 내 다 들었다. 이제 막 경성에 왔으니, 시간은 많아.”유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곁에 있던 소 상궁이 넌지시 말을 보탰다.“하지만 경성의 귀부인들이 정왕부의 눈치를 보느라 감히 군주님께 초대장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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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산 중턱에 다다를 때쯤 유지영은 뒤를 돌아보았다.귀부인들은 방금 전 서 태후가 넌지시 던진 말 때문에 다들 착잡한 기색이었다.곧이어 내전에 들어서니 스님들이 일찌감치 대기하고 있었다.“아미타불, 태후마마를 뵈옵니다.”서 태후는 합장한 뒤, 궁인들이 들고 있는 시주함을 가리키며 물었다.“불가에 자비가 깃들길. 계운대사는 사찰에 계시는가?”주지스님이 정중히 답했다.“태후마마, 사숙께서는 뒷산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그 말에 귀부인들의 안색이 밝아졌다.계운대사는 경성에서 가장 명망 높은 스님으로, 지극히 특별한 날이 아니면 좀처럼 뵙기 어려운 분이었다.그런 대사를 만나게 되었으니 다들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귀부인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린 뒤, 서 태후의 뒤를 따라 뒷산으로 향했다.역시나 계운대사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염주를 굴리며 어린 승려들에게 불경을 가르치고 있었다.서 태후는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한쪽에 자리를 잡았고, 귀부인들 역시 서둘러 앉아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어느덧 두 시진이 흐르고 대사의 가르침이 끝났음에도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자리에서 일어난 계운대사는 서 태후에게 다가와 예를 갖추었다.“태후마마를 뵈옵니다.”“예는 거두시오, 대사.”대사는 자애로운 얼굴로 귀부인들의 소소한 질문에 하나하나 답해주었다.그러다 한 부인이 슬그머니 운을 뗐다.“대사께서는 사주팔자는 물론 인연과 앞날까지 잘 짚어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실은 제가….”부인은 서 태후의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태후의 표정이 나쁘지 않은 것을 보고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부끄럽지만 제 자식 놈의 앞날을 여쭙고 싶습니다.”계운대사는 조용히 염주를 굴리며 부인이 내민 사주단자가 적힌 종이를 보더니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공자께서는 복을 타고난 분이라 장차 귀인의 조력을 얻을 상입니다. 다만 혼인의 인연은 약관의 나이를 지나야 찾아올 터이니, 부디 조급해하지 마십시오.”그 말에 부인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기색이 스쳤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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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얼마 지나지 않아 연회석의 자리가 벌써 반이나 비게 되었다.급히 돌아온 시녀가 조심스레 고했다.“태부인, 알아보니 귀부인들께서 모두 금운대로 불공을 드리러 가셨다고 합니다. 오늘 계운대사께서 산에 머무시며 사람들의 고민을 풀어주고 계시답니다.”그 말을 들은 태부인의 안색이 순간 굳어졌다.옆에 있던 숙태비 역시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왜 하필 오늘 같은 날에 거기 간단 말인가.”불만을 토로해 보았자 이미 벌어진 상황을 막을 수는 없었다.게다가 이번 행차는 무려 서 태후가 직접 앞장선 행차였다.현재 조정을 장악한 서 태후와 장차 권세를 잡을지도 모르는 숙태비, 둘 중 누구의 무게감이 더 큰지는 명확했기에 귀부인들은 재빠르게 계산을 끝낸 것이다.앞서 몇몇 귀부인들이 물꼬를 터주자, 남은 이들도 더는 눈치를 보지 않고 줄줄이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순식간에 연회장의 태반이 텅 비어버리자 태부인은 수치심에 낯을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십 년 만에 대대적으로 연 팔순 잔치를 서 태후가 완전히 망쳐버린 것이다.“이리도 사람을 무시하다니!”태부인은 분을 참지 못하고 탁자를 내리쳤다.눈치를 보던 순안후 부인이 의견을 냈다.“어머님, 차라리 저희도 금운대로 가 동참하는 게 어떻겠습니까?”태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며느리를 흘겨보자, 숙태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이 맞습니다. 다른 부인들이 모두 갔는데 우리만 빠질 수는 없지요.”그제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태부인은 마차를 준비하라 명했다.순안후 부인은 연로하신 태부인을 만류하려 했으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함께 길을 나섰다.한 시진도 채 되지 않아 금운대 산기슭은 몰려든 마차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숙태비도 일행에 동행했기에 먼저 와 있던 이들은 알아서 길을 양보했다.막 산중턱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디디려는 찰나, 아래를 지키고 있던 시위들이 앞을 가로막았다.숙태비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시녀가 앞으로 나서며 호통쳤다.“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앞을 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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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유선주도 바보는 아니었다.소 상궁은 숙태비의 체면조차 봐주지 않았는데, 하물며 일개 어린 규수의 체면을 봐줄 리는 만무했다. 그녀는 남들 앞에서 자존심을 짓밟히는 짓 따윈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난 해답을 바라는 것도 아닌데, 산에 올라가서 대체 뭘 하려고.”유선주는 콧방귀를 뀌며 시종들에게 마차를 돌려 저택으로 돌아가자고 명했다.유지란은 유선주가 제 꾀에 넘어가지 않자 입을 삐죽이며 돌아앉았다.산기슭에 홀로 남겨진 숙태비는 멀어지는 마차들을 보며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한참이 지난 후에야 숙태비는 한숨을 쉬며 명했다.“돌아가자!”그 시각 금운대.산 아래에서 벌어진 소동을 전해 들은 서 태후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서 태후는 유지영의 손을 꼭 쥐고 편채로 향했다.어딜 가든 늘 유지영의 손을 잡고 동행하는 모습은 절에 머물던 수많은 이들의 눈에 똑똑히 각인되었다.“태후마마, 방금 진국공 부인께서 산을 내려갔사옵니다.”고 상궁의 보고에 서 태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도 그럴 것이, 진국공 부인 류씨는 서 태후의 눈을 피해 슬그머니 혼인 점괘를 뽑아 계운대사에게 해답을 청했다.그러나 돌아온 결과는 최악의 흉점이었다.부인 된 사람이 현명하지 못해 삼대에 걸쳐 화를 미치리라는 점괘는 류씨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다음 날, 서 태후는 오전 내내 절에 머물며 불경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궁으로 발길을 돌렸다.배웅하는 부인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했다.유지영이 전해 듣기로, 계운대사는 어젯밤 자정이 되어서야 겨우 휴식을 취할 수 있었고, 오늘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산을 내려가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했다.그녀가 유국공부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태후의 호화로운 가마가 그녀를 처소 앞까지 직접 배웅해 주었으니, 한층 더 유지영의 위세에 힘을 실어주었다.유지영이 유수각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장 부관이 수십 장의 초대장을 받쳐 들고 찾아왔다.“오늘 아침 각 세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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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동금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예, 군주님.”비록 원래는 서옥혜는 송씨의 속을 뒤집어놓을 요량으로 남겨둔 패였으나, 지금은 사정이 급했다.어차피 둘째네는 지금 골칫거리도 충분히 많으니, 눈앞의 화근부터 하나씩 치워버리는 게 상책이었다.그 시각 정왕부.순안후부 적장녀가 진국공부로부터 파혼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숙태비는 완전히 정신상태가 나가버렸다.“멀쩡한 혼약이 어찌 그리 갑자기 깨진단 말이냐!”순안후 부인의 심복이 조심스레 아뢰었다.“진국공 부인께서 어제 금운대에 가셔서 사주단자를 맞춰 보았는데, 양가의 사주가 맞지 않는다며 파혼을 요구했답니다.”금운대라는 말만 들어도 숙태비는 속이 뒤집혔다.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휘 저어 어멈을 물렸다.정왕비가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어머님, 혹 이 일이 태후마마의 의중은 아닐까요?”숙태비는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그 인간 말고 또 누가 있겠느냐! 요새 부쩍 우리 정왕부의 앞길을 방해하며 체면을 깎아내리더니…. 도대체 유지영 그 계집애 어디가 그리 예쁘다고 보물단지 모시듯 감싸고 도는지 원.”정왕비 역시 유지영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을 똑똑히 간파하고 있었다.서 태후는 단순히 유지영을 아끼는 게 아니라, 그 아이를 빌미 삼아 대놓고 정왕부를 압박하고 있었다.“아침에 경성의 수많은 가문에서 그 아이에게 초대장을 보냈다고 하네요.”정왕비는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레 고했다.“어머님, 어차피 어리고 철없는 계집일 뿐이고 저희에게 당장 해가 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굳이 그 애를 건드려 태후마마의 심기를 거스르고 경왕 세자에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줄 필요는 없는 듯합니다.”서 태후와 척을 져서 득이 될 게 하나도 없었다.그 말을 들은 숙태비가 미간을 찌푸렸다.“경왕 세자가 근래 연이어 중책을 맡고 있고, 심지어 태부에게 단독 수업까지 듣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경성에 경왕 세자에 대한 추문이 끊긴 지도 제법 오래되었지요.”정왕비는 유지영을 저격하기보다는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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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유지영은 평소처럼 유씨 노부인에게 문안을 올리러 갔다.유선주도 일찌감치 와서 고개를 숙인 채 노부인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큰언니!”유지영을 본 유선주는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살갑게 아는 체를 했다.유지영은 저도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사람이 이토록 안 하던 짓을 할 때는 필히 구린 구석이 있다는 뜻이었다.특히나 유선주는 평소 그녀를 원수 보듯 날을 세우던 사람이니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할머니께 문안 올립니다.”유지영은 먼저 노부인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린 뒤, 조용히 유선주를 바라보았다.유선주는 한참 기다려도 유지영이 입을 열지 않자, 멋쩍은 듯 뒤를 돌아보았다.이에 유씨 노부인이 헛기침을 하더니 짐짓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지영아, 어젯밤 정왕부에서 선주와 네 앞으로 초대장을 보내왔단다. 왕부에 와서 함께 차라도 한잔하자고 청했으니 어서 채비해서 선주와 같이 다녀오려무나.”“큰언니, 분명 지난번 숙태비의 생신 잔치 때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언니에게 사과하려는 자리일 거예요.”유선주는 속이 뒤틀려 비명이 나올 지경이었으나,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혹여 일이 틀어져 정왕부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전전긍긍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유지영은 턱을 까딱이며 탁자 위에 놓인 초대장을 집어 들었다.서신에는 그저 유국공부 딸들을 청한다고만 적혀 있을 뿐, 구체적으로 누굴 초대하는지는 쓰여 있지 않았다.유지영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여기에 제 이름 석 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요.”“큰언니, 정왕부에서 전갈을 보내 언니와 저, 두 자매가 꼭 같이 오라고 신신당부했단 말이에요.”유선주가 다급히 해명했지만 유지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그날 숙태비께서는 내게 평생 정왕부 문턱은 얼씬도 하지 말라고 축객령을 내리시지 않았더냐. 명색이 유국공부 적장녀인데, 이리 줏대 없이 부른다고 쪼르르 달려가야 해?”정체불명의 초대장 한 장으로 자신을 오라 가라 한다니, 참으로 오만하기 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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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유지영의 설명을 듣고 나니, 유씨 노부인은 정왕부로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진 것 같았다.“큰언니의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에요. 반드시 사실이라는 보장도 없지 않나요?”유선주가 다급히 반박했지만, 유씨 노부인의 태도는 단호했다.“지영이 말이 백번 옳다. 하필 이 미묘한 시기에 초대장을 보냈다는 건 필히 그런 속셈이 있어서겠지.”만약 정왕부에 갔다가 유지영이 도움을 거절하더라도, 초대장에 이름조차 명시하지 않았으니 저들은 체면을 구길 일도 없었다.저들의 얄팍한 꿍꿍이를 간파하자 유씨 노부인의 가슴에서 분노가 치밀었다.노부인은 즉시 사람을 불러 초대장을 돌려보내라 명했다.“군주가 요 며칠 감기 기운이 있어 외출하기 어렵다고 전하거라!”시녀가 명을 듣고 물러가자, 유선주는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너도 참 경솔하구나. 어찌 이런 골치 아픈 일에 큰언니를 끌어들이려 들어? 지금 우리 국공부가 경성에서 어떤 위치더냐? 정왕부가 진정 우리와 함께할 뜻이 있었다면 진작에 네 아비의 복직을 나서서 도왔어야지. 말을 빙빙 돌려서 지영이를 장기말로 이용하려 들다니!”유씨 노부인은 유선주를 매섭게 몰아세우더니, 이내 유지영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영이 너는 요 며칠 처소에서 푹 쉬며, 바깥 활동을 삼가거라.”유지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일이 완전히 틀어지자 유선주의 안색은 흙빛으로 변해갔다.한편, 정왕부 쪽에서는 초대장이 그대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정왕비는 뜰 가득 정성스레 차려진 다과상을 바라보며 손님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정작 돌아온 대답이 고작 감기 핑계이자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 버렸다.“감기는 무슨 얼어 죽을! 대놓고 우리 정왕부를 무시하겠다는 심산이로구나!”“왕비마마, 선주 아가씨가 은밀히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장녕군주가 초대장에 제 이름이 쓰여 있지 않아 불쾌하다며 발길을 돌렸다고 합니다. 또한 진정으로 사과할 마음이 있다면 정왕부에서 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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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배준형은 유지영과의 혼사가 엎어진 뒤로 매사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태후마저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며 온갖 좋은 기회는 배현준에게 쥐여주기까지 했다.유지영을 총애하니 장차 그녀의 부군이 될 배현준까지 어여삐 보이는 것일까?배준형의 마음속에서는 지독한 원망이 피어올랐다.자신은 배현준보다 백 배는 더 출중하건만, 태후는 오직 유지영의 정혼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망나니에게 매번 힘을 실어주고 자신의 피나는 노력은 봐주지도 않았다.그는 이런 비굴한 상황을 참을 수가 없었다.숙태비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사내대장부란 굽힐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사소한 자존심에 얽매이지 말고 판세를 읽을 줄 알아야지. 지금 시국이 우리에게 불리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기회를 잡은 뒤, 훗날 되갚아주면 될 일이다!”“할머니의 가르침을 명심하겠습니다.”배준형은 전생에 유지영과 몇 년간 부부로 지내며 제법 다정했던 기억을 떠올렸다.그는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되뇌었다.‘이번 생에 그 계집은 아직 산적에게 납치되지도 않았고 정조를 잃는 수모도 겪지 않았으니 온전히 깨끗한 몸이야. 일단 먼저 혼례를 올리자.’이러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훗날 전생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자비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면 그만이었다.“선주는 대업을 위해 잠시 기다리게 한다 쳐도, 담씨 가문의 아가씨는 어찌합니까? 그 아이는 엄연히 황실 교지로 맺어진 세자비 아닙니까. 순순히 정실 자리를 양보하려 들지 않을 텐데요.”정왕비가 우려를 표했다.유지영을 감히 첩이나 측실로 들이는 무모한 짓은 정왕비로서도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었다.숙태비 역시 그 생각은 완전히 접었다.서 태후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그때 배준형이 단호하게 말했다.“염려 마십시오, 할머니. 제게 다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담시령이 황실에서 정해준 세자비라면, 유지영을 평처로 맞이하면 될 일이었다.그가 직접 설득에 나선다면 전생에 그토록 자신을 위해 헌신했던 유지영이라면 결코 거절하지 못할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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