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사극 로맨스 / 피안을 거슬러 / Chapter 121 - Chapter 130

All Chapters of 피안을 거슬러: Chapter 121 - Chapter 130

324 Chapters

제121화

두 사람은 조용히 뒤뜰 정원으로 나갔다.유지영은 손짓하여 뒤를 따르던 시녀들을 물렸다.혹시 모를 배준형의 위협에 대비해 운민을 대동하긴 했으나, 배현준은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그간 내가 경성을 비운 사이 고생이 많았구나.”배현준의 검은 눈동자에 분노가 스치더니, 유지영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한 가지 일러둘 게 있어서 찾아왔다. 경왕부 사람들이 곧 경성으로 복귀할 테니, 앞으로는 어떤 일도 참지 말고 사람을 보내 내게 알리거라.”유지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 말을 하려고 일부러 오신 겁니까?”배현준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당시 네가 왜 내게 수구를 경쟁하라 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잡은 이상 그것은 내 선택이었다. 누가 뭐라 하던 너는 그저 나만 믿으면 돼.”갑자기 진지해진 배현준의 태도에 유지영은 어색했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의 기억이 있기에 그의 말은 당연히 신뢰할 수 있었다.“지영아, 난…. 널 이용해 지위를 탐하려 한 적이 없다.”배현준 스스로도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태후와 폐하의 눈에 들어 온갖 규율에 얽매이게 되고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배우며 산더미와 같은 상소문을 읽어야 했다. 예전처럼 홀가분하게 풍류를 즐기기는커녕, 곁에 시중들던 이들마저 모두 시위로 바뀌었다.사람들은 배현준이 유지영과 약혼한 덕에 태후의 신임을 산 것으로 보고 있었다.유지영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세자.”배현준의 능력이라면 그가 황권을 다툴 마음만 먹었어도 배준형은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혹여 그가 오해할까 걱정된 유지영은 차분히 속내를 털어놓았다.“세자께서 수구를 받으신 그날부터 저는 세자만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향후 혼인을 하더라도 일편단심으로 지아비만을 섬길 것입니다.”후계 경쟁은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기에 그녀는 구태여 언급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리 오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고 배현준은 얼마 안 가 자
Read more

제122화

하필이면 가장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그날 밤, 유국공부의 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서옥혜였다. 그녀는 동이가 아프다며 유정남을 만나게 해달라고 소란을 피웠다. 하지만 이미 상전에게 귀띔을 받은 문지기들은, 즉시 서옥혜를 거칠게 밀쳐내며 쫓아냈다."예가 어디라고 찾아와서 행패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국공부의 땅을 더럽히지 말거라!"바깥이 한창 소란스러울 때, 유지영은 잠들지 않고 소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낮에 유정남을 서류골목으로 유인해, 서옥혜가 다른 사내에게 안기는 모습과 동이의 출생의 비밀을 직접 목도하게 만들었다. 기만당했다는 사실에 수치심과 분노를 느낀 유정남은 그 자리에서 폭발하는 대신 소매를 뿌리치며 돌아섰다. 목적을 달성한 유지영은 곧장 위림에게 은자를 챙겨주고 자취를 감추게 했다. 졸지에 빈털터리가 된 서옥혜는 다급한 마음에 유국공부로 달려와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반 시진쯤 지나 홍주가 돌아와 보고했다."장 부관께서 국공 나으리께 소식을 전했지만, 나으리께서는 얼굴도 비추지 않으시고 그저 심복인 상래를 보내 쫓아내셨습니다."싱글벙글 웃는 홍주의 얼굴을 본 유지영은 뒷이야기가 더 있음을 직감했다."그 상래라는 자가 워낙 입담이 매섭지 않습니까. 서 낭자가 근래 서류골목에서 사내와 어울려 지낸 일을 대번에 까발려 버리니, 서 낭자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습니다. 게다가 남동생을 아들로 속인 것까지 들추며, 국공 나으리께서 죽은 부장의 체면을 봐서 덮어두는 것이니 한 번만 더 소란을 피우면 관아에 고발해 가문을 모욕하고 사기를 친 죄로 잡아넣겠다고 엄포를 놓았답니다."홍주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웃어댔다."그 말을 들은 서 낭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허겁지겁 도망쳤습니다. 제 생각에 다시는 국공부에 얼씬도 못 할 것 같습니다."유지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들고 있던 서책을 덮었다. 유정남이 서옥혜의 본색을 완전히 파악했으니, 이제 서옥혜도 전생의 죗값을 치를 때가 되었다.
Read more

제123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송씨가 유선주를 데리고 대청에 들어섰다. 정씨 역시 유지란을 대동해 나타났다.두 자매는 류 부인에게 정중히 예를 행했다.“류 부인을 뵙습니다.”온화하고 예의 바른 세가 규수의 자태였다.류 부인도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편히들 앉게.”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류 부인은 두 자매를 연회에 초대하겠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송씨는 근래 친정 일에 연루되어 시어머니의 눈밖에 난 상황이었다. 만약 유선주가 정왕부와의 혼사를 앞두고 있지 않았다면 진작에 벌이 내려졌을 것이다.그래서 송씨는 류 부인이 유국공부에 초대장을 들고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유선주를 데리고 정원으로 달려왔다.딸이 연회에서 재능을 한껏 뽐내어 실추된 명예를 조금이나마 만회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정씨는 송씨와 속셈이 조금 달랐다.그녀는 유지란이 연회에서 얼굴을 알리면 좋은 혼처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기대했다.유씨 노부인은 두 며느리의 얄팍한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었으나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류 부인은 두 사람을 연회에 초대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기에 슬쩍 바깥을 살피더니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진국공부의 경치는 참으로 수려하군요. 특히 귀한 화초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제게도 가서 안목을 넓힐 기회를 주실 수 있으십니까?”마음이 급해진 유지란은 류 부인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덜컥 요구를 내뱉었다.류 부인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애초에 초대할 마음이 없어 말을 아낀 것인데, 대놓고 물어보니 그녀의 경솔한 처신에 경멸감마저 들었다.그러나 유지영을 정중히 초대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국공부의 체면을 봐서 가까스로 감정을 자제하며 웃어 보였다.“아가씨는 어떤 꽃을 좋아하는가?”유지란은 멈칫하더니 생각나는 대로 꽃 이름을 몇 개 읊었다.“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군. 돌아가는 대로 사람을 시켜 화분을 몇 개 보내도록 하지.”대답을 마친 류 부인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유지란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Read more

제124화

유지영은 이번에 처음으로 연회에 참석하는 자리인데다 경왕부 일가도 만나야 하니 두 숙모들은 그녀가 망신을 당하기만 손꼽아 바라는 모양이었다.심지어 아침상으로 올라온 음식도 문제가 있었다.유지영은 아예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는 홍주에게 여벌의 깨끗한 의복을 한벌 더 챙기라고 당부했다.유씨 노부인에게 문안 인사를 간 유지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안했다.“할머니, 가만히 생각해보니 할머니께서 저와 함께 진국공부에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할머니께서 곁에 계셔야지 제가 마음이 놓일 것 같습니다.”유씨 노부인은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할머니, 지난번 둘째 삼촌네가 일으킨 불미스러운 사건은 이미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께서 혁혁한 전공도 세우고 당당히 복귀하셨으니, 그 누구도 할머니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오히려 깍듯이 예우할 것입니다. 게다가 지난번 류 부인께서도 할머니께 함께 오라고 청하지 않았습니까.”유지영은 유씨 노부인의 손을 잡고 애교를 부렸다.그 말은 유씨 노부인의 마음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사실 근래 국공부에 날아든 수많은 초대장 중에는 노부인을 초대하는 집안도 제법 있었다.하지만 유씨 노부인은 그간의 일 때문에 체면이 안 선다고 바깥출입을 일절 사절해 왔던 터였다.오늘 유지영의 얘기를 들으니 노부인의 마음에도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차남네가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지만 든든한 장남이 있지 않은가!유씨 노부인은 절로 어깨가 으쓱해졌다. 게다가 유지영이 이리도 간곡히 청하니, 마침내 승낙하며 시종들에게 예물을 준비하라고 일렀다.“할머니, 마침 제 창고에 최상급 옥여의 한쌍이 있으니 그걸 예물로 가져가는 게 어떨까요?”유지영의 말에 노부인은 그녀의 손등을 다정하게 다독였다.“지영이 네가 마음을 많이 썼구나.”그리하여 노부인은 유지영의 정성 어린 권유에 못 이기는 척 옷을 갈아입고 함께 문을 나섰다.이동하는 내내 유지영이 부드럽고 다정한 말로 말동무를 해주니, 노부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예상대로 정문
Read more

제125화

마차가 앞으로 나아가던 그때, 별안간 날카로운 비명이 울리더니 순식간에 마차가 요동치기 시작했다."아이고!"유씨 노부인의 몸이 크게 덜컹거리며 앞으로 세차게 쏠리자, 유지영은 노부인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조심하세요, 할머니!"말은 비명을 지르듯 길게 울부짖더니, 번화가 한복판을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할머니!"유지영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마차가 격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유씨 노부인의 등이 쾅 소리를 내며 마차 벽에 부딪히면서, 노부인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겁에 질린 유씨 노부인은 유지영의 손을 악착같이 쥐고 놓지 않았다."이,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군주님, 마차가 통제를 잃었습니다!" 밖에서 운민의 급박한 외침이 들려왔다.찰나의 순간, 유지영은 가슴속에서 깊은 증오가 치밀어 올랐다. 차라리 노부인을 마차 밖으로 밀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이내 이성을 찾고 감정을 추슬렀다. 그녀는 노부인을 꽉 붙잡아 제 등 뒤로 안전하게 감쌌다.이어지는 비명 소리와 함께 마부석에서 급박한 외침이 들려왔다."군주님, 전방에 짚더미가 보입니다! 어서 마차에서 뛰어내리십시오!"어느새 마부석에 오른 운청이 양손으로 고삐를 미친 듯이 잡아당기며 외쳤다."말이 완전히 미쳐서 도무지 제어가 되지 않습니다!"유지영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유씨 노부인을 끌어안고 마차 밖으로 몸을 던졌다. 유지영 덕분에 유씨 노부인은 수북한 짚더미 위에 무사히 착지했으나, 육중한 상반신이 유지영의 다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뒤따라온 시녀들은 사색이 되어 두 사람을 황급히 부축해 일으켰다. 유씨 노부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물었다."지영아! 괜찮니?"유지영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일부러 극심한 고통을 참고 있는 듯, 눈물 어린 눈으로 유씨 노부인의 전신을 살폈다."할머니, 어디 다치신 건 아니죠?""기특한 내 새끼, 할미는 괜찮다."유씨 노부인은 위기의 순간에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한 유지영에게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Read more

제126화

유지영은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옷매무새를 다시 정돈했다. 다행히 의복은 더러워지지 않았고 살짝 흐트러진 머리만 새로 정돈한 뒤, 노부인은 유지영의 손을 잡고 진국공부로 향했다.마차 사건은 저택으로 돌아간 뒤에 다시 추궁할 생각이었다.송씨와 유선주는 진국공부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유국공부의 마차가 사고가 났는데 장녕군주가 몸을 던져 노부인을 구했다는 내용이었다.얘기를 들은 송씨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어머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요?”유선주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손을 써둔 마차는 분명히 바꿔치기 한 후였다.송씨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젓던 순간, 유씨 노부인과 유지영이 모습을 드러냈다.이윽고 마주친 노부인의 눈빛은 칼날처럼 싸늘했다.송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어머니.”송씨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다가가 노부인을 살폈다.“방금 마차가 사고를 당했다 들었습니다. 몸은 괜찮으신지요?”유씨 노부인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영이가 날 구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이 늙은이는 그대로 저세상 갈 뻔했다!”주변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오자, 노부인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둘러댔다.“경성의 번화가에 익숙하지 않아 말이 좀 놀란 모양이다. 별일 아니다.”노부인이 담담하게 해명하니 사람들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이날 진국공부의 꽃맞이 연회는 꽤나 성대하게 치러졌다.넓은 정원 가득 만개한 화초들이 싱그러운 향기를 풍기고 뜰 한가운데는 무대까지 설치되어 경성의 유명 악단이 무대에 올라 악기를 연주하니, 흥겨운 분위기가 흘러넘쳤다.정왕비는 유선주를 대동할 생각이 없었으나, 배준형의 간청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데려온 거였다.진국공 부인이 유지영을 따로 초대한 자리에 정왕부 세자비 후보인 유선주가 빠진다면 정왕부의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다.그리하여 정왕비는 이번 한 번만 유선주의 기를 살려주기로 했다.연회의 주인인 류 부인이 대청에서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나왔
Read more

제127화

경왕비의 온화한 얼굴에 송구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그녀는 유지영의 손을 다시 잡아주며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장녕군주, 방금 류 부인께서 네가 참으로 단아하고 현명한 처자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구나. 향후 우리 현준이를 곁에서 많이 단속하고 이끌어 주거라.”비단 유지영뿐만 아니라 유씨 노부인이 듣기에도 어딘가 껄끄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경왕비의 지위가 있으니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반면 그 속뜻을 알아챈 정왕비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유지영은 황망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경왕비를 바라보며 말했다.“마마, 가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소녀는 세자와 고작 몇 번 마주친 게 다입니다. 게다가 엄연히 부모님이 계신데 소녀가 어찌 감히 세자를 가르치려 들 수 있겠습니까?”경왕비의 고운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지나친 염려이십니다, 경왕비 마마. 근래 경세자께서는 폐하의 곁에서 보필하며 가르침을 받느라 유흥에는 발길을 끊은지 오래이니, 이제 행실을 바로잡으신 듯합니다.”진국공 부인 류씨가 웃으며 부드럽게 대화를 중재했다. 다른 이들도 기다렸다는 듯 거들었다.“그러게 말입니다. 경세자께서 근래 중책을 맡으시더니 얼마 전에는 소주로 직접 가셔서 사건을 해결하시지 않았습니까. 듣자 하니 부 대인께서 하마터면 송씨 가문의 거짓말에 현혹될 뻔한 것을 세자께서 은밀히 내막을 파헤쳐 단서를 잡으셨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도 이를 두고 세자를 크게 치하하셨다지요.”이렇듯 놀라운 변화는 좌중에 모인 이들 모두가 주시하고 있는 바였다.경왕비는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안도하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과연 그랬군. 내 경성을 오래 떠나 있느라 아이가 성정을 죽이고 자중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지.”이내 경왕비는 유지영의 손등을 가볍게 다독였다.“현준이가 너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된 것이야말로 그 아이의 복이로구나. 네가 아니었다면 태후마마께서도 현준이를 그리 중용하지 않으셨을 테지. 따지고 보면 네가 우리 경왕부의 복덩이인
Read more

제128화

무심코 던진 말 같지만 실상은 유지영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속셈이 가득했다. 예물 교환 같은 중대사는 으레 양가 어른들끼리 상의하는 법이거늘, 경왕비는 이를 대놓고 어린 그녀에게 물었다. 유지영에게 두 번의 삶을 산 경험이 없었다면 고스란히 그 덫에 걸려들었을 것이다.유지영은 순간 얼굴을 붉히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척했다. 그러고는 눈시울을 붉히며 유씨 노부인을 향해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오늘 몸을 던져 노부인을 구했으니, 이런 때에 당연히 나서줄 거라 믿었다.유씨 노부인은 즉시 찻잔을 내려놓고 유지영을 돌아보았다."마마께서 방금 예물 교환에 대해 물으셨는데... 할머니, 저는 아는 것도 없어서 어찌해야 할지..."목소리는 작았지만 주변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기엔 충분했다.유씨 노부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경왕비를 향해 말했다."혼례도 안 올린 어린 아이가 어찌 그런 중대사를 알겠습니까. 마마께서 의논하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이 늙은이와 말씀하시지요."그 말에 경왕비는 황급히 유지영에게 사과했다."이런, 내 성미가 급해 실언을 했구나. 마음에 두지 마렴. 며칠 뒤 경성의 혼례 예법을 명확히 알아본 후 정식으로 국공부에 사람을 보낼 테니, 결코 너를 서운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란다."그녀는 추호의 무안한 기색도 없이 당당하게 사과했다.유지영은 그제야 며칠 전 배현준이 국공부를 찾아와 했던 당부의 진의를 깨달았다. 눈앞의 경왕비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유씨 노부인은 웃으며 화답했고, 이후 연회장은 잠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되찾았다. 경왕비는 아는 이들과 담소를 나누면서도 간혹 유지영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식사가 끝나고 꽃구경이 시작되자, 정왕비가 어느새 다가와 유지영의 곁에 서서 모란을 가리켰다."참으로 탐스럽고 화려하군. 과연 만꽃의 왕다워."난데없는 소리에 유지영이 속내를 가늠하기도 전에, 정왕비가 고개를 돌려 살포시 웃었다."경세자가 아무리 날뛰어 봐야 우리 준형이에게는 한참 못 미치지. 지금
Read more

제129화

“내 기억이 맞다면 민 소저와 경세자는 어릴 적에 정혼한 사이라지?”정왕비는 짐짓 놀란 척 목소리를 높였다. 그 소리는 주변 사람들의 귀에 똑똑히 전해졌다.아니나 다를까, 좌중에 모인 부인들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예? 민 소저와 경세자가 정혼한 사이라니요?”한동안 잠자코 있던 송씨가 즉시 다가와 입을 가리며 경악한 시늉을 했다.“그럼 우리 지영이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소란을 감지한 경왕비가 서둘러 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송씨는 경왕비를 향해 다그치듯 물었다.“경왕비 마마, 민 소저가 참으로 경세자와 정혼한 사이가 맞습니까?”뭇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경왕비가 고개를 끄덕였다.“어릴 적 선왕비께서 정하신 일일 뿐, 정식으로 혼서를 교환하진 않았네.”“그렇다면 결국 혼담이 오간 건 사실이라는 말씀이군요. 지난날 정왕부와 담씨 어르신께서도 구두 약조만 하셨지만 정왕부에서는 신의를 지켜 정왕 세자와 담씨 가문 적장녀의 혼사를 추진하지 않았습니까.”송씨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담시령이 딸 유선주와 동등한 지위를 누린다는 건 개의치도 않는다는 듯, 유지영을 몰아세웠다.“경세자에겐 엄연히 정혼자가 있거늘, 어찌 네가 세자와 혼례를 올린단 말이냐?”“송씨!”안색이 차갑게 변한 유씨 노부인이 송씨에게 매서운 경고를 날렸다.그러나 송씨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어머니, 지영이가 경세자에게 속은 겁니다. 애당초 수구 경쟁을 할 때 정혼자가 없는 사람만 참여할 수 있다고 공언하지 않았습니까. 경세자는 뻔히 혼약을 약조한 사람이 있으면서 어찌 경쟁에 참여하여 훼방을 놓았단 말입니까?"송씨가 사정없이 몰아치자, 유씨 노부인 역시 가문의 안위와 체면이 걸린 문제라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수군거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정왕비는 입꼬리를 올린 채, 유지영에게 비웃음을 흘리며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지영아." 유씨 노부인이 떨리는 손으로 유지영의 손을 움켜쥐었다. "진정 사실이 그러하다면 이 혼사는
Read more

제130화

조령 장공주의 독설은 정왕비마저 내버려두지 않았다.정왕비의 안색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그녀는 불쾌한 기색으로 조령 장공주를 흘겨보더니, 불만스레 말했다."장녕군주가 원한다면, 우리 정왕부야말로 약조를 이행하여 군주를 가문으로 들일 용의가 있습니다."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송씨는 사색이 되었고, 뒤에 서 있던 유선주 역시 경악을 금치 못하며 서러움에 바들바들 떨었다.경왕비가 곤란한 얼굴로 만류했다."장공주, 이미 확정된 혼사를 어찌 그리 쉽게 번복할 수 있겠습니까?"조령 장공주는 지영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순진한 네가 경성에 발을 디딘 이래 줄곧 안 좋은 일만 당하는구나. 하나같이 음흉한 속내를 품고서는 자기들 이익만 따지려 드니, 자기들이 뭐 그리 대단한 위치라도 되는 줄 아나 보다."정왕비를 대놓고 비꼬는 말이었다.유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저와 정왕 세자는 진정 아무런 친분도 없습니다. 이미 숙태비 마마의 생신 연회 날, 평생 정왕부에는 한 발짝도 들이지 않겠다고 명백히 밝힌 바 있습니다."거듭 면박을 당한 정왕비의 얼굴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험악해졌다."또한 민 소저와 경왕부의 정혼 역시 저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저는 아직 경왕부 문턱을 넘지 않은 몸이며, 오직 태후마마의 의지를 받들 뿐이니 국공부로서도 명을 거역할 순 없습니다. 만약 민 소저가 여전히 그 정혼을 주장하려거든, 원망할 대상은 따로 있고 제게 따질 일이 아니지요. 마침 경왕부의 안주인이신 분이 여기 계시지 않습니까."유지영은 의연한 태도로 경왕비를 지목했다."마마께서 진정 민 소저가 안타까우시다면, 당장 입궁하시어 윗분들께 이 사실을 명백히 고하시면 될 일입니다.""하지만 당신이 경세자비의 자리를 가로챘...""아직 혼례도 올리지 않았거늘, 가로챘다니 민 소저는 당치도 않은 소리를 하는군."지영이 민경주의 말을 매섭게 자르며 다그치자, 민경주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고 말았다.조령 장공주도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맞다. 수구
Read more
PREV
1
...
1112131415
...
3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