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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화

"영준아,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어찌 되었든 장녕군주는 장차 네 형수가 될 분이신데 예의있게 굴어야지."경왕비가 엄하게 꾸짖었다."너는 무과 시험을 준비하는 데만 전념하거라. 그간 흘린 땀방울을 헛되이 만들지 말고."배영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곁에 있던 경왕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배현준이 혼사를 취소하는 일에 협조하지 않으니, 직접 유정남을 만나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판단했다.이대로 장남이 멋대로 날뛰게 둘 수는 없었다.아직 교지만 내려졌을 뿐 정식 절차를 밟은 것은 아니니, 지금 막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해도 늦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경왕은 곧바로 시종을 불러 마차를 준비하게 했다."전하..."경왕비가 말리는 듯했으나, 경왕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경왕비는 멀어지는 그의 마차를 보며 나직막히 한숨을 쉬었다.그렇게 배현준은 경왕부를 나와서 얼마 안 가 밖으로 나서는 경왕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세자, 보아하니 전하께선 지금 국공부로 향하시는 듯합니다."호위가 나직이 고했다.배현준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기어코 제 앞길을 막으시려는 겁니까.'그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호위에게 지시했다."뒤를 따라가거라."호위가 명을 받들고 빠르게 사라졌다.배현준이 다른 호위에게 명했다."경왕이 언제, 누구에게 사주를 보았는지 알아내거라.""세자, 경성에서 혼인 사주를 신통하게 보기로 이름난 곳은 금운대입니다. 그곳의 주지 중 한 분이신 남희대사라는 분이 계시는데, 의술로 유명한 북명대사와 동문이라 합니다. 고관대작들도 친히 만나 뵙기 어려운 분이라고 하더군요."'남희대사라...'배현준이 말고삐를 꽉 움켜쥐었다."지금 즉시 금운대로 간다!"유국공부.동금이 다급히 들어와 유지영의 귀에 속삭였다."경세자의 호위가 후문으로 전갈을 남겼습니다. 경왕이 사주가 맞지 않는다는 핑계로 이 혼사를 무르려 하니, 세자께서 방도를 찾을 동안 군주께서는 마음 쓰지 마시라고 전하셨다 합니다."유지영은 기가 막혀 실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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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화

경왕은 말문이 막혔다.유정남은 경왕의 눈빛을 보고 단번에 알아차렸다. 경왕은 그저 결과만 전해 들었을 뿐, 교지가 내려지고 정식 절차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사주단자를 교환한 적이 없거늘, 대체 무엇으로 사주를 보았단 말인가!연달아 추궁을 당하자 경왕은 다소 민망한 기색을 띠었다."국공부의 어른에게 전해 듣고 사사로이 맞추어 본 모양이오."유정남은 이 핑계를 믿지 않았지만, 경왕에게 대놓고 무안을 주지는 않았다."이 일을 전하의 일방적인 말씀만 듣고 물릴 수는 없으니, 조만간 양가가 함께 사주를 봐준 대사를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보는 편이 어떻겠습니까?""국공은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오?"경왕이 미간을 찌푸렸다.유정남은 고개를 저었다."전하, 오해하셨습니다. 혼사의 성사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이대로 파혼하면 제 딸아이가 장차 부군에게 해를 끼친다는 악명을 뒤집어쓰게 된다는 점입니다. 아비가 되어 아이의 앞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처자가 평생 시집도 못 가고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이 말에 경왕은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경성에 집안 좋은 자제들이 널렸는데, 국공부의 적녀가 굳이 염치 불고하고 경세자에게 시집가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혼사를 물리더라도 절차가 있는 법인데, 국공부에서 해명을 요구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배현준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더욱 모질게 말했을 것이다.경왕은 분노한 그의 얼굴을 보며, 유지영이 유정남의 유일한 적녀임을 떠올렸다.사주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혼약을 깨면 여인에게 오명이 남을 테니, 확실히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그럼 날을 다시 잡아 사주를 다시 보도록 하지. 만약 양가가 진정 맞지 않는다고 하면...""진정 사주가 상극이라 나온다면, 저 역시 전하와 함께 직접 태후 마마를 뵙고 혼약 취소를 청할 것입니다. 결코 구차하게 매달리지 않겠습니다."유정남은 단호하게 말을 가로챘다.경왕은 잠시 생각하더니 덧붙였다."정말 맞지 않는다면,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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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화

유정남은 정중히 예를 올렸다."신, 명을 받들겠나이다."어명을 전한 젊은 내관은 바로 물러가지 않고 은밀하게 말을 덧붙였다."오늘 경조 판사가 이씨를 심문하여 단서를 잡았고, 몇몇 수상한 자들도 포박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씨가 국공부와 모종의 연줄이 닿아 있더군요. 폐하께서는 유국공께서 오랜 세월 충성을 다해 직분을 지켜온 공을 보아 이번만큼은 엄벌을 내리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다만, 공석이 된 상서의 자리에는 임 대인을 임명하셨습니다."내관은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처소를 나섰다.유씨 노부인은 그 말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들었다. 서풍각에서 유정남을 함정에 빠뜨린 자가 유씨 집안 사람이며, 유정혁이 직무 정지를 당해 비어 있던 자리를 임 대인이 꿰찼다는 뜻이었다.즉, 이 모든 음모가 유정혁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었다."이, 이를 어찌하면..."유씨 노부인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유정혁이 이토록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으리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노부인은 격앙된 어조로 유정남을 향해 말했다."둘째가 참으로 미련한 짓을 했구나!"유정남은 유씨 노부인을 부축했다."국공부에 조만간 혼례를 치를 예정이니, 폐하께서 가문의 체면을 배려하시어 엄벌을 유예하신 것입니다."황제로서도 여러모로 고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유씨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유정남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둘째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 네가 때리든 꾸짖든, 이번만큼은 나도 화내지 않으마."그 대화를 듣고 있던 유지영은 고개를 숙이고 비웃음을 머금었다.노부인이 정말로 유정혁을 내칠 리가 없었다.그저 아버지가 모질지 못해 마음을 돌릴 것을 확신하고 부리는 수작이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노부인도 유정남의 결단을 과소평가했다.유정남은 유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지영이 넌 먼저 처소로 돌아가 있거라."유지영을 물러가게 하고 주위의 시종들까지 모조리 물리고 나서야, 유정남은 굳은 표정으로 유씨 노부인을 응시했다."어머니께서도 방금 들으셨을 테지요. 둘째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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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화

곤장을 맞고 요양 중이던 유정혁은 경왕이 친히 찾아와 파혼을 요구했다는 소식을 듣고 반응하기도 전에, 유정남이 무과 선발의 시험관이 되었다는 소식까지 접했다."아주버님은 돌아온 뒤로 아주 거침없이 영전하시더니, 정작 우리에겐 눈길 한 번 안 주는군요. 참으로 매정하세요."송씨는 유정혁에게 약을 발라주면서도 쉬지 않고 원망을 쏟아냈다."그 오랜 세월 본인은 변방에서 속 편히 지내고 가문의 책임을 우리에게 다 떠넘겼으면서, 우리가 군말 없이 고생한 것은 알아주지도 않으니 말이에요."송씨는 지금 가슴속에 울화가 가득 차 있었다.원래 계획대로라면 유정남이 돌아온 후에도 가문의 살림권은 여전히 자신이 쥐고 있어야 했고, 집안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국공부의 진정한 안주인으로 군림했어야 했다.하지만 경성에 돌아온 이후로 단 한 가지도 뜻대로 풀리는 일이 없고, 심지어 친정인 송씨 가문까지 화를 입어 안팎으로 온갖 원망을 듣고 있었다.유정혁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유지영은 망나니에게 시집을 가는데 형님이 무슨 수로 정세자와 맞서겠소. 정세자가 병권을 거머쥐기만 하면, 이 수모를 돌려줄 날이 반드시 올 것이오!"그때가 되면 유정남이 제 발로 찾아와 큰집을 보살펴달라고 애원하게 만들 작정이었다.그렇게 한창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밖에서 유씨 노부인이 당도했다는 전갈이 들려왔다.송씨는 서둘러 일어나 마중을 나갔다.노부인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모두 물러가거라."유씨 노부인은 손을 내저으며 주변을 물렸다.유정혁은 서슬 퍼런 기세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하는 가운데, 그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노부인을 바라보았다."어머니, 무슨 일인데 그리 안색이 안 좋으십니까?"유씨 노부인은 평상에 걸터앉으며 복잡한 눈빛으로 유정혁을 응시했다."방금 네 형이 분가를 하겠다고 하더구나."유정혁 부부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어,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유정혁이 경악하며 물었다.먼저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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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화

"부인, 소인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닙니다. 방금 노부인께서 둘째 나으리네에 전갈을 전하러 가셨고, 둘째 나으리와 부인께서도 대청으로 향하고 계십니다."시녀가 말했다.정씨는 흠칫하며 되물었다."둘째네가 동의했단 말이냐?"시녀는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분가를 하라니, 정씨는 전혀 내키지 않았다.국공부의 셋째 부인이라는 이름을 누리는 것만큼 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나으리는 어디 계시느냐?""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국공 나으리께서 이미 사람을 보내 찾고 계십니다."정씨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청으로 향했다.예상대로 대청에는 이미 종친들이 가득 모여 있었고,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족장이 가장 눈에 띄었다.유씨 노부인 역시 잔뜩 굳은 얼굴로 입을 꾹 닫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정씨는 송씨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어찌 영문도 없이 갑자기 분가를 한답니까?"송씨가 코웃음을 치며 입술을 삐죽였다."누구는 이제 출세하셨으니 우리가 눈에 차겠어? 혼자서 영광과 부귀를 누리시겠다는 게지."정씨는 미간을 찌푸렸다.잠시 후, 셋째 유정명도 돌아왔다.오는 길에 대략의 전말을 전해 들은 그는 한마디 거들까 했으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파악하고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형님께서 분가를 원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유정혁이 상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다만 두 아이의 혼례가 코앞인데 이 시국에 분가를 논하는 것은 다소 성급한 듯합니다. 아이들을 먼저 시집보낸 후에 분가해도 늦지 않을 텐지요."국공부 일원의 신분으로 시집을 가는 것과 초라한 별원에서 혼례를 치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큰애야, 분가를 한두 달 미룬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지 않느냐. 선주가 그래도 너를 큰아버지라 부르며 따랐거늘, 아이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조금만 유예해 주려무나."유씨 노부인도 곁에서 거들었다.유정남이 눈을 가볍게 치켜뜨며 담담히 대꾸했다."정세자가 애초에 선주로 혼약 상대를 바꿀 때,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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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화

유정혁의 질문에 유정남은 회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 다만 그날이 이리 빨리 오게 될 줄은 몰랐다."경성에 막 돌아왔을 때, 부광 비단 사건을 들은 순간 유정남의 마음속에는 이미 분노가 도사리고 있었다.그 뒤 서옥혜의 일도 따지고 보면 둘째네가 개입한 흔적이 있었고, 마차 사건으로 유지영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이 모든 일들이 겹치면서 유정남은 둘째 동생이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었고, 이 집안에서 유지영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을지 알아차렸다.아비로서 더는 그들의 방종을 두고 볼 수 없었다.여기서 더 참는다면 아비라 불릴 자격조차 없었다."형님..."유정혁은 그가 이토록 흔쾌히 인정하자 오히려 당혹스러웠다.유정남의 시선이 유정혁을 지나쳐 송씨에게 닿았다.이어서 그는 장부 한 권을 집어 들며 말했다."이것은 그간 조정에서 내린 하사품으로, 내가 전공을 세워 바꾼 것이니 유씨 가문의 자산이 아니오."송씨는 유정남의 매서운 시선에 가슴이 서늘해지고 조바심이 났다.몇 달 전 여기저기 끌어모아 겨우 유지영의 혼수를 돌려주느라 적잖은 빚까지 진 마당에, 이제 와서 그 하사품들을 어디서 찾아온단 말인가.그렇다고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앞에서 내놓지 않겠다고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라, 송씨는 노부인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당초 조정의 하사품 중 절반은 노부인이 챙겼고, 나머지 절반은 가문에 귀속되었으나 진작에 송씨가 탕진한 뒤였다.일부는 구멍 난 곳을 메우거나 장사를 하다 밑천을 까먹어, 지금은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족장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유국공의 요구는 지극히 정당하다. 이것들은 국공 어른의 사유 재산이니 나누면 안 되지."송씨는 급히 유정혁의 소맷자락을 잡아끌며 나직이 속삭였다."나, 나으리."유정혁 역시 사정을 빤히 알고 있었으나 체면 때문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워낙 오랜 세월이 흘러 당장 장부를 명확히 따지기는 어려우니, 형님께서 총액을 계산해 주시고 저희 몫으로 분배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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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화

유정명은 정씨에게 슬쩍 눈치를 주자, 정씨가 즉시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큰아주버님, 이는 공평하지 않습니다. 형님께서 오랫동안 가계를 맡아오셨는데, 아버님께서 살아 계실 때의 재산은 절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동서, 만약 큰댁까지 재산을 나누어 가졌다면 오늘 동서가 받을 몫은 지금보다 훨씬 적었을 거야. 욕심을 너무 부리지 말아!"송씨가 낮은 소리로 윽박지르듯 말했다.그 말에 정씨는 냉소를 지었다."그것과 이것이 어찌 같습니까? 저희야 많이 받든 적게 받든 상관은 없지만, 셈은 바르게 해야지요. 공평하게 반으로 나누기로 해놓고, 그간 생긴 적자까지 저희더러 함께 떠안으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기고만장하여 물러서지 않는 정씨의 모습을 보며, 송씨는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그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유정혁은 수치스러운 마음에 제 몫에서 점포 두 곳을 떼어 정씨에게 넘겨주었다."둘째 아주버님, 그 오랜 세월 동안 생긴 적자인데 고작 점포 두 곳이라니요..."정씨가 여전히 물러서지 않고 투덜대자, 유정혁이 싸늘한 얼굴로 일갈했다."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오늘 아주 낱낱이 장부를 들추어 계산해 보자고!"정씨는 그제야 마지못해 점포를 받아 챙기며 입을 다물었다.유정명은 그제야 슬그머니 중재에 나섰다."둘째 형님, 화를 가라앉히십시오. 속 좁은 아녀자의 고집이니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지요."유정혁은 이 마당에 유정명과 따지고 싶지 않아 시선을 유정남에게 돌렸다."형님의 하사품 중 절반은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쓰였으니, 남은 절반은 저희가 은자로 변상하겠습니다."이미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유정혁 역시 남들에게 손가락질당하고 싶지는 않았다.유씨 노부인도 더는 시치미를 뗄 수 없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내 창고에 일부 보관되어 있다."그러나 내어줄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방금 유국공의 말처럼 그동안 받은 녹봉 삼만 오천 냥을 노부인께 효도한 셈 치겠다고 하였소. 하지만 하사품은 엄연히 사유 재산이니 돌려주어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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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화

“네 처가 집안 살림을 맡아 하면서 저지른 비리를 낱낱이 파헤치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형제간의 정을 생각해서 여기서 끝내주겠다는데 둘째 너는 정녕 내 처사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냐?”유정남이 나직하게 되물었다.송씨는 제 발이 저려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유정혁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품 안에서 은표를 꺼내 유정남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은표를 받아 든 유정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단호하게 말했다.“이틀 내로 모두 이곳에서 나가거라. 시종들은 함께 데려가도 좋다. 어머니께서는 여전히 송죽당에 머무실 거고 내가 모실 것이다. 너희가 문안을 오고 싶다면 언제든 와도 상관없다.”유정남은 말을 마치자마자 종친들을 향해 정중히 예를 올렸다.“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종친들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젓고는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이번 분가에서 그나마 만족한 유정명 내외를 제외하고, 유정혁 부부와 유씨 노부인은 가슴에 울화가 가득 찬 상태였다.하지만 결국 그들은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 즉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한편, 유선주는 초대를 받아 온종일 외출했다가 돌아와서야 집안에 큰일이 터졌음을 알게 되었다.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떡하니 분가가 결정된 것이다.유선주는 앞뒤 잴 겨를도 없이 서둘러 부모님의 처소로 달려갔다.역시나 그곳은 한창 짐을 싸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아버지, 어머니!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유선주는 속이 상해 발을 동동 굴렀다.이제 불과 몇 달 뒤면 혼례날이었다.현재 아버지는 관직조차 박탈당한 상태인데, 평민의 딸이라는 신분으로 시집을 갈 수는 없었다.하지만 이미 속이 뒤집어질 대로 뒤집어진 유정혁은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이때, 송씨에게 신세를 지러 왔던 송정원, 송원령 자매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지금 너희 집은 관직도 박탈당하고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다는구나. 앞으로 밖에 나가도 국공부의 일원이 아니라, 친척이라고 말하고 다녀야 할 판이야!”말을 마친 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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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화

“군주님, 경세자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동금이 안으로 들어와 나직이 고했다.유지영은 상념을 거두고 지시를 내렸다.“안으로 들라 하라.”곧이어 동금이 배현준의 측근 호위인 성산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성산은 유지영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군주님께 문안 인사 올립니다.”“예는 되었다. 세자께서 무슨 말을 전하라 하였느냐?”성산은 품에서 서신 한 통을 꺼내 정중히 바쳤다.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유지영의 안색이 점차 무거워졌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성산에게 말했다.“돌아가서 경세자께 알았다고 전하거라.”이어 그녀는 동금에게 분부했다.“배웅해 드리거라.”유지영은 서신을 화로에 던져 태운 뒤 깊은 생각에 잠겼다.그때 유정남이 처소로 들어왔다.“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아버지…”유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예를 갖추어서 말했다.“방금 읽은 문장을 곱씹던 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경왕께서 방금 사람을 보내 내일 함께 금운대에 가자고 하시더구나.”유정남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혹여 정말로 사주가 맞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찌해야 할까?정녕 혼사를 물려야 하는 것인지 걱정이 앞섰다.“아버지께서는 제 사주에 정말 문제가 있다고 보십니까?”유지영이 되묻자, 유정남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 있겠느냐! 내 딸은 태어날 때부터 복을 타고났거늘, 어찌 지아비를 해한단 말이냐. 터무니없는 모함이다!”“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분명 누군가 고의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저를 헐뜯으려는 것이겠지요.”유지영은 유정남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그의 귓가에 다가가 나직하게 몇 마디를 속삭였다.유정남은 처음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견한 듯 말했다.“역시 내 딸은 영리하구나. 유언비어를 지어낸 자가 있다면 그게 누구든 이 아비가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감사합니다, 아버지.”날이 저물어가고 있었기에 유정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이튿날 아침 식사를 마친 유정남은 경왕 부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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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화

배영준의 말에 경왕비는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역시나 경왕이 따지듯 물었다.“터무니없는 소리! 오늘 사주를 보지도 않았거늘, 어찌 이런 유언비어가 돌아다닌단 말이냐?”한바탕 화를 낸 경왕도 뒤늦게 무언가 미심쩍었는지, 굳은 표정으로 호위에게 지시했다.“가서 이 소문이 어디서 흘러나온 것인지 당장 알아보고 오너라!”“혹시 형님이 퍼뜨린 것 아닐까요?”배영준이 불쑥 말을 내뱉었다.경왕비는 즉시 미간을 찌푸리며 나무랐다.“영준아,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배영준은 억울하다는 듯 투덜거렸다.“아버지,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틀 전에 형님이 금운대에 다녀온 적이 있단 말입니다.”“이런 망나니 같은 놈을 다 보았나!”경왕이 험악한 얼굴로 분노를 터뜨렸다.“한시도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를 않는구나.”이튿날이 되자 경성에는 유언비어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하나같이 경왕부를 비난하는 내용이었다.경왕비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녀는 이내 심복인 소월에게 물었다.“아직도 소문의 근원지를 찾지 못했느냐?”소월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처음에는 몇몇 노숙자의 입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만, 그 노숙자들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종적을 감추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경왕비는 누군가 고의로 경왕부를 노리고 벌인 일임을 직감했다.유지영이 아니면 배현준의 짓이 분명했다.“왕비 마마, 지금 밖에서는 경왕부가 일부러 세자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고 수군거립니다. 세자께서 명문가의 적녀를 맞이해 세력을 얻는 것을 막으려고 온갖 구실을 붙여 혼사를 방해한다는 소문입니다.”소월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고했다.그 말을 들은 경왕비는 눈살을 찌푸렸다.일이 이 지경까지 꼬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잠시 생각에 잠겼던 경왕비가 소월에게 지시했다.“유국공부의 노부인이 정말로 앓아누웠는지 다시 한번 은밀히 알아보거라.”“그 일이라면 소인이 이미 알아보았습니다. 사주를 보러 가기 전날 유국공부에서 분가 소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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