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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피안을 거슬러: Chapter 171 - Chapter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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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화

유정혁은 안으로 들어오는 유지영을 보자마자,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큰언니, 아버지는 평생 할머니 곁을 떠나신 적이 없어요. 분가로 마음이 쓰여 몇 마디 당부하신 것뿐인데 말이 너무 심하네요. 설마 할머니마저 내쫓을 생각인가요?”유선주는 울컥 화가 치밀어 쏘아붙였다.큰댁과 완전히 틀어진 이상 더는 적의를 숨길 이유도 없었다.그 말에 유씨 노부인도 콧방귀를 뀌며 불만을 드러냈다.“할머니를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저입니다. 제가 왜 할머니를 내쫓으려 한단 말인가요?”유지영은 억울하다는 듯 맞받아쳤다.그 말에 유씨 노부인은 마차 사고 당일의 위기와, 차남네가 말에게 독을 먹인 일을 떠올렸다.유선주를 바라보는 노부인의 눈길에서 온기가 싹 가셨다.“선주야, 비록 분가를 했을지언정 지영이는 엄연히 맏언니이다. 무례하게 굴면 안 되지!”오히려 꾸중을 듣게 되자 유선주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변명하려 했으나 유정혁이 눈치를 줘서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할머니의 가르침을 명심하겠습니다.”하지만 송씨는 딸이 당하는 꼴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너희 자매도 이제 곧 시집을 가는데 어릴 때처럼 아웅다웅해서야 되겠느냐. 지금 경성에는 지영이 네가 팔자가 드세서 지아비를 해칠 운명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더구나. 경왕부에서도 혼사를 물리고 싶어 한다니, 이렇게 흉흉한 때일수록 성격을 죽이고 자중해야지.”이 일을 전혀 모르고 있던 유씨 노부인은 깜짝 놀라 유지영을 돌아보았다.“경왕부에서 혼사를 물린다고?”유지영 역시 황당하다는 듯 송씨를 바라보았다.“숙모님은 그 말을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제 사주는 아버지를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거늘, 경왕부에서 대체 어떻게 사주를 봤다는 말씀이십니까?”그 말에 송씨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유지영의 사주는 황궁에 계신 그분 말고는 아는 이가 없었다.과거 담혜정이 그녀를 입양하기로 하였을 때, 유씨 노부인은 계집아이라는 이유로 소홀히 대했고 심지어 대놓고 저택을 비우기까지 했다.게다가 혼인 전에 사주가 필요한 일도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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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2화

그 모습을 본 유지영은 이번 일도 분명 송씨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경왕부에서 꼭 사주를 맞춰봤다기보다는... 어쩌면 담씨 가문에 물어보았을지도 모르지.”송씨가 허둥지둥 핑계를 대며 둘러댔다.하지만 그 말은 유씨 노부인을 설득하기에도 부족했다.세가에서 딸의 사주는 극도로 중요한 일이고,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 법이었다.유씨 노부인은 송씨와 오랜 세월 고부로 지내온 만큼, 송씨의 미심쩍은 거동을 단번에 알아챘다.노부인은 굳은 표정으로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근거도 없는 해괴한 소리를 시집도 안 간 조카 앞에 꺼내어 귀를 더럽히다니. 날이 늦었으니 어서들 가거라.”조금 전의 아쉬움은 온데간데없고 노여움으로만 가득했다.“잠깐!”밖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정남은 뒤늦게 낌새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잠깐 송씨를 바라보다가 이내 유정혁에게 시선을 돌렸다.“형님.”유정혁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유정남은 시선을 거두고 유씨 노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며칠 전 경왕부에서 저를 찾아와 은밀히 사주를 맞춰 보았다고 했습니다. 지영이가 지아비를 해칠 불길한 팔자라며, 저더러 함께 태후 마마를 뵙고 혼사를 물리자고 하더군요.”“뭐라, 정녕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냐?”유씨 노부인이 경악한 얼굴로 되물었다.유정남은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분가를 결정한 다음 날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몸이 안 좋으시어 말씀을 안 드렸던 것뿐이지요. 양가가 만나 금운대로 가서 대사께 다시 사주를 맞춰볼 예정이었는데 일이 생겨 결국 지체되었지요. 그런데 이미 경성에 온갖 유언비어가 퍼졌더군요.”여기까지 말하자, 유정남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경세자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황제께 찾아가 상소를 올렸을 터였다.이제 와 생각하니 그 사주단자는 도대체 어디서 흘러나갔단 말인가.“아버지.”유지영이 서러운 얼굴로 눈시울을 붉혔다.유정남은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경왕부가 고귀한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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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그 말을 들은 건양제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스쳤다.“사주를 맞춰보지도 않았는데 이런 유언비어가 돈단 말이냐?”“예!”건양제가 주위를 둘러보자, 자리에 있던 대신들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증언했다.“경왕을 들라 하라!”얼마 지나지 않아 경왕이 전각 안으로 들어왔다. 배현준이 자신을 고발한 것을 알게 된 그는 분통이 터져 다짜고짜 발길질을 해댔다.“이 막돼먹은 놈! 이 아비가 다 너를 생각해 한 일이거늘, 감사도 모르고 감히 고자질을 해?”배현준은 재빨리 몸을 비틀어 발길질을 피했다.경왕은 허공을 차고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그는 건양제를 향해 고했다.“폐하, 이 녀석이 그저 철없이 부리는 투정일 뿐입니다. 너무 오냐오냐해주시니 갈수록 도를 넘는 것입니다.”“인과관계를 따져야 하는 일을, 어찌 예법과 효도를 들먹이십니까? 설마 아버지께선 찔리는 구석이 있어 제 입을 막으려는 것입니까?”“이 불효막심한 놈!”두 사람은 조정에서 한마디도 지지 않고 설전을 벌였다.멱살잡이라도 할 기세였다.“그만두지 못할까!”건양제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호통을 치고 나서야, 두 사람은 한 걸음 물러섰다.배현준은 여전히 억울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할마마마께서 내리신 혼사이옵니다. 설령 파혼을 당하더라도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거늘, 이제 처를 해칠 팔자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썼으니 앞으로 어느 가문에서 저와 혼인을 기약하겠습니까?”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긴 건양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왕을 매섭게 쏘아보았다.“네가 정녕 사주를 맞추어 보았느냐?”“폐하, 신이 사사로이 사주를 한 번 맞추어 본 것은 사실입니다. 유국공을 은밀히 찾아가 원만하게 파혼하려 했으나, 유국공이 직접 대사의 말을 듣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 고집을 부렸습니다. 하여 이틀 전 함께 금운대에 올랐으나, 그의 노모가 급한 병환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먼저 자리를 뜬 것입니다.”“두 분께서 산에 오르자마자 경성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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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4화

내전에서 대기하는 동안, 경왕은 못마땅한 눈길로 배현준을 노려보았다.“내가 듣기로 네가 며칠 전 금운대에 다녀왔다던데… 거긴 왜 간 게냐? 경성의 유언비어가 혹 네놈이 고의로 퍼뜨린 것은 아니겠지?”배현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반문했다.“그래서 제게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왕비를 모함하고 네놈은 피해자인 척 가장해 사람들의 동정을 사려는 것이겠지.”경왕은 깊이 고심한 끝에, 이 일이 배현준의 소행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배현준은 평소에도 경왕비에게 엄청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배현준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제게 그럴 능력이 있었다면, 지난 세월 악명을 떨치며 살지도 않았을 테지요.”곁에 있던 건양제가 한심하다는 듯 배현준을 흘겨보았다.“네놈은 스스로도 평판이 나쁜 줄 아는구나!”건양제의 질책에 배현준은 공손한 태도로 미소를 지은 채 다가섰다.“폐하, 사실이 그러하니 숨길 것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철없던 시절은 있는 법이니까요.”“그렇다면 금운대에는 왜 갔는지 어디 말해 보거라.”건양제가 묻자 배현준은 공손히 답했다.“할마마마의 분부를 받들어 절에 경전을 가지러 갔을 뿐입니다.”지극히 정당한 이유라 한 치의 흠도 잡을 수 없었다.경왕은 헛기침을 할 뿐, 감히 태후를 찾아가 진위를 따질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윽고 밖에서 경왕비가 당도했음을 고했다.“들라 하라!”경왕비는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느끼고 긴장한 마음으로 건양제에게 예를 올렸다.“폐하께 문안 인사 올립니다.”“경왕비는 예를 거두거라. 짐이 오늘 물을 말이 있어서 불렀으니.”건양제는 용상에 다시 앉으며 위엄 서린 눈빛으로 말했다.“짐이 듣기로, 며칠 전 그대가 사사로이 장녕군주의 사주단자를 가져다 현준이의 사주와 맞추어 보았다지?”경왕비는 오기 전부터 이 일로 자신을 부른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게다가 경왕까지 자리에 있으니 발뺌할 수도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하옵니다.”“그렇다면 장녕군주의 사주단자는 어디서 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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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화

전자라면 경왕비가 경솔하게 남을 쉽게 믿은 탓이고, 후자라면 배후의 인물이 고의로 혼사를 망치기 위해 배현준과 맞지 않는 사주를 골라온 것이었다. 건양제는 윤허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경왕비는 손에 식은땀을 쥔 채, 억울한 표정으로 경왕을 바라보았다.경왕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사주가 잘못된 것이라면 한낱 오해일 뿐이거늘, 어찌 이리 사람을 몰아세우느냐?”“저와 군주의 명예가 더럽혀질 뻔했는데, 내막을 명백히 밝히려 하는 게 잘못이란 말씀입니까?”배현준이 반문했다.유국공이 자리에 있는 마당에 배현준이 조금이라도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다면, 유국공의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배현준은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라, 매서운 일침으로 상대의 허점을 찔렀다.“경왕 전하, 저는 경세자의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다고 봅니다. 한낱 오해라는 말로 내 딸의 명예를 짓밟을 수는 없습니다.”유정남의 일갈에 경왕은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흠천감이 당도해 사주를 살피더니 그 자리에서 안색이 변했다.“이 사주는 실로 불길하옵니다. 시댁을 해치고 자손까지 해칠 운명이니, 누구에게 시집을 가든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각 안의 시선들이 경왕비에게 쏠렸다. 다들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경왕비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녀는 애써 미안한 기색을 지어 보였다.“현준아, 내가 경솔하여 송씨에게 속았구나.”지금 상황에서는 잘못을 송씨에게 떠넘기고 부주의한 죄만 짊어지는 게 상책이었다.도인을 매수해 고의로 세가의 딸을 모함한 죄보다는 훨씬 가벼웠기 때문이다.“그 유국공부 차남댁은 매번 가증스러운 짓만 저지르는군!”대신들이 나직하게 수군거렸다.경성에 들어온 이후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정세자가 차남댁 적장녀에게 구혼했을 때, 그 아가씨가 복덩이라 불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 자식 귀한 줄만 알고 남의 자식을 이토록 짓밟으니 유국공께서 진노하여 분가를 결정한 것도 무리가 아니지. 저 같았으면 진작에 내쫓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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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화

배현준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폐하, 오해가 풀리기도 했으니 이번은 너그러이 넘어가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저에게는 웃어른이시기도 하니까요.”건양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자리에서 장녕군주에게 위로의 뜻으로 귀중한 하사품을 내리고 손을 저어 모두를 물러가게 했다.배현준은 이에 몹시 만족했다.궁을 나선 후, 마차에 오른 경왕비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모두 제 불찰입니다. 하마터면 이 소중한 혼사를 오해로 망칠 뻔했습니다.”경왕은 담담하게 말했다.“부인 탓이 아니오. 부인도 어쩔 수 없었으니, 사주를 잘못 가져온 송씨를 탓해야지.”경왕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지만, 경왕비는 아까부터 이상함을 눈치채고도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송씨가 유지영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면, 어찌 제 친딸의 사주를 적어 보냈겠는가.분명 누군가가 이를 역이용해 덫을 놓은 것이리라.“전하, 송씨가 감히 저를 이토록 기만하다니, 유국공부로 가 송씨에게 따져야겠습니다.”경왕비는 일부러 분통을 터뜨렸으나, 경왕은 미간을 찌푸렸다.“이제 와 송씨와 엮여서 좋을 것 없소. 폐하께서 그들을 언급하실 때 안색이 좋지 않으셨으니, 이 일은 이쯤에서 끝내시오.”경왕의 안색을 살핀 경왕비는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러고는 슬그머니 경왕의 곁으로 다가갔지만, 경왕은 교묘하게 몸을 피했다.경왕은 두 눈을 감은 채 마차 벽에 기대어 휴식을 취했다.방금 보여준 차가운 태도는 평소의 세심하고 다정한 모습과 사뭇 달랐다.이 미세한 변화에 경왕비의 마음속에는 은근한 불안감이 스쳤다.“전하, 혹 사주가 맞지 않는다는 소문이 제게서 흘러나갔다고 의심하여 저를 원망하시는 것입니까?”경왕비가 목이 메어 물었다.흐느끼는 소리에 경왕은 눈을 뜨고 그녀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지나간 일이니 쓸데없는 생각은 마시오.”사주를 맞춰보는 일은 경왕비가 사사로이 진행한 일이었고, 경왕도 그 후에야 알게 되어 유국공을 찾았었다.이 일을 아는 사람은 경왕비, 경왕, 그리고 유국공 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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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7화

원망 섞인 아들의 말에 유씨 노부인도 부끄러움을 느낀 듯, 서둘러 유정혁 일가를 내보냈다.송씨는 지체 없이 유정혁을 이끌고 허둥지둥 국공부를 나섰다.그들이 떠나기 무섭게 유정남은 부관을 불러들였다.“오늘부터 둘째네와 셋째네 사람이 오면 반드시 먼저 통보하고, 내 허락을 받은 후에 들여보내거라. 그리고 시종들의 명단을 정리해 오거라. 인신 계약서가 없는 자들은 새로 쓰게 하거나 당장 내쫓거라.”이는 국공부를 철저히 단속하겠다는 뜻이었다.한편 새 저택으로 온 유정혁은 아무래도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지영이에게 그런 악명이 돌았는데 형님께서 우리에게 따져 묻지 않다니 이상하군.”송씨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오해가 풀렸으니 더 소란을 피웠다간 지영이의 혼사에 해가 될까 두려웠겠지요.”공들여 짠 판을 허망하게 날려 버린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이때 문밖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리더니 시종이 들어와 아뢰었다.“대감, 정왕 세자께서 오셨습니다.”유정혁은 이미 어두워진 바깥을 내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이 늦은 밤에 배준형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왔을까?돌려보낼 수도 없었기에 유정혁은 배준형을 안으로 초대하고 사람을 보내 유선주도 불러오라 일렀다.“차를 내오거라.”유정혁이 명령했다.대청은 예전 국공부만큼 넓고 화려하지 않아 유정혁 스스로도 누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마중을 나갔다.“세자, 이 늦은 밤에 어쩐 일이십니까?”마주한 배준형의 안색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음침했다.유정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얼른 손을 저어 시종들을 물러나게 했다.“세자...”배준형이 불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송 부인께서 어찌하여 선주의 사주를 경왕비에게 건네어 궁합을 보게 하셨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제 장안에 선주가 지아비를 해치고 집안의 대를 끊어놓을 사주라는 소문이 파다한데, 제가 어찌 선주를 부인으로 맞이하겠습니까?”유정혁이 유선주의 친부만 아니었다면, 배준형은 이 자리에서 주먹질이라도 하고 싶은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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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8화

“지영이에요!”송씨는 마침내 기억이 떠오른 듯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지영이가 우연히 저와 경왕비가 사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저를 노린 게 분명합니다!”경왕비는 경왕부의 안주인으로서 본래 배현준의 혼사를 도맡아 준비해야 했다.은연중에 경왕비가 유지영의 사주단자를 언급하자, 송씨는 나쁜 마음을 품은 것이다.송씨는 남몰래 사람을 보내 태어난 해와 달은 같지만 날짜와 시진을 바꾸어 지극히 불길하게 만든 사주를 구했다.송씨는 유지영에게 망신을 주고 악명을 씌워, 경성에서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로 만들고자 했다.불길한 사람이 되면 태후 역시 더는 유지영을 총애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뜻대로 송씨는 아주 나쁜 사주를 몇 개 손에 넣었고, 그중 하나를 골라 베껴 적은 뒤 경왕부에 보냈다.송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단주예요! 이 사주는 단주만 알고 있어요.”“단주는 어디 있소?”유정혁이 분노한 얼굴로 물었다.단주의 얘기가 나오자 송씨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단... 단주는 며칠 전 집에 급한 일이 있다며 휴가를 얻어 나갔습니다.”유정혁이 기가 막혀 크게 꾸짖었다.“어리석군! 단주는 당신이 몇 년이나 부린 시녀이거늘, 어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할 수 있소?”송씨는 야단을 맞자 숨이 턱 막혔으나, 정말로 단주가 자신을 배신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그녀는 즉시 사람을 보내 단주의 집을 찾아가게 했다.배준형은 대화를 들으며 전말을 파악했다.유지영이 송씨와 경왕비가 사주를 가지고 수작을 부리려는 것을 알아채고, 이를 역이용한 게 분명했다.경왕부에서 사주 문제를 제기하기를 기다렸다가 유유히 해명하여 제 억울함을 씻어내는 동시에, 지아비를 해칠 흉한 명이라는 낙인을 유선주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게다가 경왕비마저 그 오명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게 만들었다.“아버지, 언니는 왜 저를 이런 식으로 모함한 거죠?”유선주는 억울함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배준형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세자, 이제 저는 어찌해야 하나요?”“어쩌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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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9화

송씨는 국공 부인이었던 담혜정과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못했다.담혜정은 가문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적장녀로서 유정남에게 시집올 때 호화로운 혼수 행렬을 자랑했지만, 가문의 서출이었던 송씨는 당초 혼수도 체면치레나 겨우 하는 수준으로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딸의 말에 정곡을 찔린 송씨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너...”“두 동생은 아직 어리니 지금은 온 집안이 저를 우선해야 해요. 제가 정왕부에 시집을 가서 자리를 잡으면 반드시 아버지를 도와 친정을 일으켜 세울 거예요.”유선주는 눈물을 훔치며 턱을 치켜들고 오만한 기색을 드러냈다.“세자께서 저를 대하는 정분은 남달라요. 장차 세자께서 크게 출세하시면, 저희를 모함한 자들에게 반드시 무릎 꿇고 빌며 용서를 구하게 만들겠어요!”송씨는 그제야 분노를 억지로 삼키며 미소를 짜냈다.“선주 네 말이 맞다.”유정혁 역시 반박하지 않고 묵인했다.온 집안이 유선주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는 처지였다.하룻밤이 지나자, 곳곳에서 유선주가 불길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심지어 부랑자들까지 동요를 지어 부르며 배준형을 눈이 멀어 옥석을 두고 돌멩이를 택했다며 비웃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유선주는 미칠 것 같았다.송씨를 찾아갔더니 마침 안에서 시녀가 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부인, 단주는 닷새 전에 다리가 아픈 어미를 데리고 고향을 떠나 행방을 감추었다고 합니다.”“역시 그년이었군요!”유선주는 분에 못 이겨 욕설을 퍼부었다.송씨 역시 분노가 극에 달했다.“찾아라! 그년이 어디에 있든 반드시 찾아내거라! 내 기필코 그년의 가죽을 벗겨 버릴 것이다!”어젯밤 방으로 돌아가 계약서를 뒤져보았을 때 유독 단주의 것만 사라져 있었으니, 송씨는 단주의 배신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유선주는 분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려는 송씨의 앞을 가로막았다.“어머니, 어디 가시려고요?”“국공부로 가서 따져야겠다!”유선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렸다.“어머니, 지금은 가시면 안 돼요. 큰아버지는 현재 무과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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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0화

대략 두 시진 뒤, 배준형은 숙태비를 부축해 산에 올랐다.시주를 내고 전각의 불상에 절을 올린 후에야 숙태비는 남희대사를 찾아갔다.굳게 닫힌 사찰 대문을 바라보며 숙태비는 동자승에게 말했다.“선황의 숙비가 남희대사를 뵙고자 한다고 전하거라.”동자승은 숙태비와 배준형을 번갈아 보더니, 마지못해 안으로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동자승이 돌아와 합장하며 고했다.“아미타불. 대사님께서 말씀하시길, 선황의 숙비라는 분은 알지 못하며, 오늘 그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태비마마,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숙태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그럴 리가 없다! 나는 현 정왕의 모친이요, 삼십 년 전 궁중 연회에서 대사와 대화도 나누었거늘 어찌 모른 척하신단 말이냐?”동자승은 상대가 집요하게 나오자 다소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다시 가서 전하거라!”숙태비의 어투가 자못 험악해졌다.동자승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안으로 향했지만, 돌아온 건 그저 만나지 않겠다는 답변뿐이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숙태비는 안으로 쳐들어갈 태세로 동자승을 밀쳤다.동자승은 다급히 그녀를 가로막았다.“아니 됩니다! 대사님께서는 그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그러나 결국 막지 못하고, 숙태비 일행은 안으로 들이닥쳤다.선방 안에서는 한 노승이 합장한 채 경전을 읊고 있다가,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자 한숨을 쉬며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남희대사, 우리 전에 뵌 적이 있지요.”숙태비가 말했다.남희대사는 무덤덤한 얼굴로 숙태비를 바라보며 답했다.“제 기억으로 삼십 년 전 선황의 후궁 중에는 숙비라는 분이 없었습니다.”숙태비는 흠칫하더니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그때 나는 고작 귀인이었으니까요.”그제야 남희대사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숙태비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오늘 이렇게 찾아온 것은 대사께 도움을 청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이 처자의 사주를 한번 보아주셨으면 합니다.”그러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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