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경왕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일이 너무 갑작스러워, 정리하려 해도 시일이 제법 걸릴 것입니다.”“우선 명세부터 찾아 그에게 넘기시오.”당장 내놓으라는 서슬 퍼런 기세였다.경왕비는 입술을 짓씹었다.속이 쓰렸지만, 경왕의 완고한 얼굴을 보니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사람을 시켜 명세를 가져오게 했다.잠시 후, 그녀는 가져온 명세를 경왕에게 건네며 은근히 말을 꺼냈다.“오늘 황실 내무부에서 백예순 상자를 유국공부에 보냈다 합니다. 거기에 선왕비의 혼수까지 얹어주면, 그 규모가 황후의 격식마저 뛰어넘을 판입니다. 자칫 조정 대신들의 비난을 살까 염려됩니다.”여기에 아직 경왕부 명의로 보낼 예물은 포함되지도 않은 상태였다.경왕이 경왕비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우선 명세부터 넘겨주고, 선왕비의 혼수는 굳이 왕부의 명의로 국공부에 보낼 필요 없이 현준이 녀석이 알아서 처리하게 하시오.”그것은 배현준의 생모가 남긴 유품이었기에, 경왕 역시 단 한 번도 손을 댄 적이 없었다.“현준이 녀석이 아무리 미워도 엄연한 적장자이니, 그 아이의 몫을 빼앗을 수는 없소. 경왕부의 명의로 스무 상자를 준비하여 한 시진 뒤에 유국공부로 들여보내시오.”경왕비는 더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예물과 혼수가 이리 과하면, 장차 경성의 다른 공자들이 혼인할 때 머리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장녕군주의 성격이 어떤지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너무 치켜세워 주었다가, 훗날 왕부의 법도를 가르치기 어려워질까 염려됩니다.”전부 합치면 삼백 상자에 육박하는 규모였으니, 경왕비로서는 속이 뒤집힐 노릇이었다.역시나 경왕의 얼굴에도 망설임이 스쳤다.“내무부에서 보냈든 왕부에서 보냈든, 남들 눈에는 모두 경왕부의 예물로 보일 것입니다. 오늘 이리 과하게 이목을 끄는 것은 결코 왕부에 득이 될 것이 없습니다. 제가 아까워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소문이 그만큼 무섭다는 말씀입니다.”경왕비는 깊이 우려하는 척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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