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왕의 말에 경왕비는 멍하니 굳어버렸다.그녀는 제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저, 전하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분명 입궁하셨는데, 어, 어찌...."황제가 왜 배현준을 질책하지 않았는지, 왜 세자의 자리를 박탈하지 않았는지 당장 따져 묻고 싶었다.하지만 그녀는 끓어오르는 충동을 억지로 억눌렀다.배영준은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아버지! 형님은 절 낙마시켰다고 제 입으로 똑똑히 시인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 앞에서 절 구타하여 무과 선발전에도 못 나가게 만들었는데, 저는 이 억울함을 누구에게 호소해야 한단 말입니까!""영준아,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부모 눈에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거늘, 네 아버지께도 무슨 사정이 있으실 게다."경왕비는 배영준에게 눈치를 주었다.하지만 잔뜩 화가 난 배영준에게는 그 권고가 들리지 않았다.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쳤다."어머니마저 형님 편을 드시는 겁니까? 의원 말로는 자칫 잘못하면 평생 불구가 될 뻔했다고 합니다!""영준아...."경왕비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이때 경왕이 손을 내저어 주변의 시종들을 모두 물렸다.그는 배영준을 보며 말했다."영준아, 아비가 널 아끼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앞으로는 현준이 일에 절대 관여하지 마라. 머지않아 경왕부 세자 자리는 네 차지가 될 것이다."잔뜩 화가 치밀었던 배영준은, 그 말을 듣고 찬물을 뒤집어쓴 듯, 분노가 사그라들며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경왕비 역시 뛸 듯이 기뻐하며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폐하께서 현준이를 세자의 자리에서 폐한다 하신 겁니까?"경왕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경왕비의 눈에는 그것이 암묵적인 긍정으로 보였으나, 경왕의 얼굴에 스친 복잡한 감정은 읽어내지 못했다.세자 자리가 비게 되는 건 맞지만, 결코 폐위 때문이 아니었다.경왕은 건양제가 배현준을 눈여겨보고 그를 태자로 세우려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만약 배현준이 태자가 된다면, 경왕부 세자의 자리는 자연히 배영준에게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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