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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피안을 거슬러: Chapter 221 - Chapter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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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1화

"유씨 노부인."이때 대문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뜻밖에도 숙태비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다가와 유씨 노부인의 손을 잡았다."마음이 많이 아프시겠습니다."경사스러운 날 뜬금없는 말에, 유정남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었다."숙태비 마마, 오늘 제 여식이 시집을 가는 날입니다. 부디 말씀 조심해 주시지요."그 말에 숙태비는 짐짓 놀란 척하더니, 유씨 노부인의 시선을 묘하게 피했다.유씨 노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첫째야,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 오늘 나한테 똑똑히 설명하거라.""아니, 노부인께서는 아직 모르고 계셨단 말입니까?"숙태비가 호들갑을 떨었다."제가 오늘 쓸데없는 말을 꺼냈군요. 하지만 선주네는 저희 정왕부의 예비 사돈 아닙니까. 조문을 가려다 보니 국공부의 혼사가 예정대로 치러진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유국공, 이건 자네가 잘못했어. 송씨도 어찌 됐든 가문의 번듯한 어른이거늘, 시신을 아직 장례도 치르지 않았는데 어찌 혼사를 강행한단 말이오. 며칠 미루는 게 도리이거늘."입만 열면 조문이니 시신이니 불길한 단어뿐이었다.유씨 노부인은 숙태비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태비 마마, 대체 무슨 일입니까! 누가 잡혀갔단 말입니까!"숙태비가 머뭇거리는 시늉을 했다."숙태비 마마!"유정남이 차갑게 경고했다."태비 마마께서 말씀하시게 너는 가만히 있거라!"유씨 노부인은 유정남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했다.화기애애했던 혼례식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숙태비가 우물쭈물하자 뒤따라온 어린 시녀가 재빨리 입을 놀렸다."며칠 전 둘째 부인께서 돌아가셨고, 둘째 나으리도 관아에 잡혀가 생사를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지란 아가씨는 밖에서 함정에 빠졌다가 생판 모르는 사내에게 구출되어 명성이 더럽혀져, 어제는 자결 소동까지 벌여 온 경성이 시끄러운 상황이지요."그 말에 유씨 노부인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유국공도 참 너무하군. 이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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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2화

서 태후가 국공부 혼례에 친히 행차하리라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게다가 수많은 빈객 앞에서 숙태비에게 그 모욕을 줄 줄은 더더욱 몰랐다.장내는 일순 당혹감과 놀라움, 그리고 서늘한 공포에 휩싸였다.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사라지자 서 태후의 굳었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유국공, 내가 대청 상석에 앉아도 되겠는가?"유정남은 황망히 두 손을 모았다."태후 마마께서 상석에 앉아 주시는 건 지영이에겐 더없는 영광이옵니다. 부디 상석으로 모시겠습니다."서 태후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중앙 상석을 차지했다.반면 유씨 노부인은 그 곁에서 화도 내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어야 했다.서 태후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한마디라도 꺼냈다간 당장 사약이 내려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감히 태후와 나란히 상석에 앉을 자격은 애초에 없었으니, 그저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속만 끓일 뿐이었다.그때 밖에서 귀를 때리는 요란한 폭죽 소리가 터졌다."경세자께서 신부를 맞으러 당도하셨습니다!"우렁찬 외침과 함께 굳었던 분위기가 다시 잔치 분위기로 변했다. 반 시진 후, 왁자지껄한 축하 속에 두 신랑 신부가 부모에게 인사를 올릴 차례가 되었다.유지영은 상석에 서 태후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과 감동에 휩싸였다.두 사람은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서 태후는 진귀한 옥여의 한 쌍을 하사하며, 북받치는 눈물을 애써 누르고 유지영을 일으켜 세웠다."오늘 나는 지영이의 든든한 친정 어른으로 온 것이다. 현준아, 네가 만약 우리 지영이를 조금이라도 섭섭하게 한다면 내 결코 널 용서치 않을 것이다."배현준은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저는 지영이를 목숨처럼 아끼고 보호할 것입니다."확고한 대답에 서 태후는 비로소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배현준을 일으켜 세웠다."지영이 생모인 담씨는 생전에 이 아이를 몹시 아꼈지. 너희가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돌아가신 어미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올려야 마땅하다."말을 마친 서 태후는 흔쾌히 상석에서 비켜섰다.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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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3화

경왕비의 미소는 몹시도 억지스러웠다.반 시진 전, 서 태후가 국공부에 친히 납시어 숙태비의 뺨을 후려쳤다는 소문이 경왕부까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황실의 최고 권력자가 궁 밖까지 나서서 유지영의 뒷배를 자처할 줄은 그녀조차 상상 못한 일이었다.유지영을 바라보는 경왕비의 눈빛이 몹시 복잡해졌고 미간엔 숨길 수 없는 불안이 스쳤다."신랑 신부, 천지신명께 첫절!"매파의 선창이 떨어졌다.배현준은 유지영과 나란히 밖을 향해 세 번의 큰절을 올렸다."부모님께 큰절!"일어선 배현준은 서서히 고개를 돌려 경왕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경왕비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곧이어 성산이 선왕비의 위패를 받쳐 들고 나왔다.위패가 등장하자 경왕비의 안색은 잿빛으로 변하며 간신히 유지하던 평정심이 바스러졌다."배현준!"경왕이 얼굴을 굳히며 호되게 꾸짖었다."이 좋은 날에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배현준은 당당하게 맞받아쳤다."부모님께 절을 올리는 순서 아닙니까. 어머니께 제가 오늘 경성에서 제일 귀한 여인을 부인으로 맞았음을 고하는 게 뭐가 잘못입니까!"유지영은 배현준이 이렇게 나올 줄 진작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놀라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았다."당장 치우지 못할까!"경왕이 탁자를 치며 분노했다.빈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와 사색이 되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경왕비를 보자 경왕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네 생모에겐 내일 따로 사당에 가서 향을 올리면 될 일이다. 혼례 날 어찌 왕비의 가슴에 대못을 박느냐! 지금 네 어머니는 여기 계신 이 사람이다."경왕비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사방에서 쏟아지는 빈객들의 적나라한 눈총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배현준이 턱을 치켜들며 싸늘한 조소를 흘렸다."황실 족보에도 오르지 못한 한낱 후비 따위가 어찌 저의 절을 받는단 말입니까?"그 한마디는 경왕비의 체면을 짓밟은 것과 다름없었다.경왕비는 충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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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4화

방비원.하루 종일 시달려 지친 유지영은 배현준의 손에 이끌려 침상에 걸터앉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가 쓰고 있던 붉은 너울이 걷었다.고개를 들자 수려한 얼굴의 사내가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유지영은 저도 모르게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뭘 그리 빤히 보십니까?"배현준은 허리를 굽혀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지영아. 우리가 혼약을 맺은 그날부터 난 이 순간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게 혹여 달콤한 꿈일까 두려워 밤잠을 설친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어."배현준은 남몰래 제 손바닥을 꼬집어보고 밀려오는 통증에 이내 안도했다.유지영은 배시시 웃었다."저번 수구 행사 때 나서주셔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배현준이 없었다면 그녀는 경성 전체의 웃음거리로 전락했을 것이다."난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이제 당당히 그녀를 부인이라 부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배현준은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다.두 사람이 애틋한 분위기를 풍기는 와중에 밖에서 지키던 성산이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깼다."세자, 밖에 빈객들이 아직 기다리고 계십니다."배현준은 아쉬운 듯 그녀의 손을 놓으며 일어섰다."세자, 소월이 찾아왔습니다."성산이 조용히 고했다.배현준이 날카로운 눈짓을 보내자 그는 곧장 눈치를 채고 소월을 물렸다. 배현준은 약속대로 배영준을 돌려보내라 지시하고는 유지영을 향해 몸을 숙였다."이제부터 방비원은 네 집이다. 모든 건 네 뜻대로 하거라. 눈에 거슬리는 자나 귀찮은 일이 생기거든 일일이 상대할 것 없이 나에게 말하면 내가 다 치워줄 것이다."배현준은 그녀의 손에 흙먼지 하나 묻히고 싶지 않았다.유지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아쉬운 발걸음을 뗐다."군주님, 소인이 아까 둘러보았는데, 방비원은 참으로 정갈하고 아름답습니다."홍주가 속삭였다.유지영도 그제야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사계절의 꽃을 그린 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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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5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빈소에 드리운 흰천이 스산하게 펄럭였다.예민해져 있던 숙태비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순간 칼바람이 공기를 가르더니 촛불이 꺼지며 짙은 어둠이 내렸다.챙!허공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번뜩였다.숙태비는 공포에 질려 다리가 풀리며 털썩 주저앉았다."태, 태비 마마?"유선주가 기겁하며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어둠 속에서 복면을 쓴 자들이 검을 들고 나타나더니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렀다.비명 소리에 놀란 금위군들이 들이닥쳐 자객들과 난투극을 벌였다.유선주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자, 자객이다!"그녀의 날카로운 비명에 자객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숙태비는 곧바로 유선주의 입을 틀어막았다."이 멍청한 것! 다 같이 죽을 셈이냐!"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자객의 시퍼런 검날이 두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두 사람은 살기 위해 허둥지둥 물러섰다.그 찰나, 유선주가 무의식중에 숙태비의 옷자락을 홱 잡아당겼다. 중심을 잃은 숙태비는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서걱!숙태비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허공을 가른 검날이 그녀의 왼쪽 팔뚝을 날려버렸다.사방으로 피가 튀었다."악!"숙태비는 비명을 내지르며 눈을 뒤집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둥! 둥!밖에서 야경꾼의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날씨가 건조하니 불조심하시오!"금위군들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자객들은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철수한다!"순식간에 자객들이 빠져나가고 사방에 적막이 맴돌았다.구석에 처박혀 숨을 죽이던 유선주는 한참 뒤에야 덜덜 떨며 기어 나왔다.그녀의 손에 무언가 물컹하고 뜨거운 것이 잡혔다. 달빛에 비친 그것은 잘려 나간 태비의 팔뚝이었다."꺄악!"유선주는 질겁하며 팔뚝을 집어 던졌다.기절한 태비의 어깨에선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방금 전 저 살겠다고 태비를 방패막이 삼아 밀어버린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세자가 이 사실을 안다면 나랑 파혼하려 들 거야!'순간, 정왕부에서 담시령에게 보낼 예물을 준비 중이라던 소문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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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6화

그 말에 배현준은 한 손을 놓고 유지영을 이끌어 의자에 앉혔다. 그가 술잔을 건네자,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합근주를 단숨에 들이켰다.왕씨 어멈은 역시 노련한 어멈답게 즉시 손짓하여 시녀들을 모두 밖으로 물리더니 문까지 닫아주었다.유지영이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배현준이 상체를 숙이며 다가왔다. 그의 차가운 입술이 그녀의 뺨을 스치고, 눈빛에는 점차 짙은 열망이 서렸다. 길게 찢어진 눈매를 살며시 내리깐 그가 유지영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지영아, 내가 꼭 잘해줄게."유지영의 눈가에 감돌던 긴장감이 조금은 누그러졌다.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배현준은 그대로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침상으로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유지영이 부끄러워 고개를 돌려 피했지만, 그는 기어이 붉은 입술을 머금어 버렸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그녀의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이날 밤은 유지영에게 참으로 고된 밤이었다. 배현준은 마치 파계를 하고 처음 고기 맛을 본 사람처럼, 처음에 조금 서툰가 싶더니 얼마 안 가 능숙하게 그녀를 몰아붙였다."이제 더는 힘들어요..." 유지영은 피로에 눈조차 뜨지 못하고, 그의 단단한 가슴을 밀어내며 사정했다.배현준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며 나직하게 사과했다."내 잘못이야. 참지 못했어."그는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연신 입을 맞추며 밖을 향해 목욕물을 들라 일렀다.문틀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시녀들이 욕탕에 물을 채우고 조용히 물러갔다. 배현준은 전혀 졸음이 오지 않는지, 얇은 이불로 유지영의 몸을 감싸 안고는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따스한 물이 채워진 욕탕에 앉자 유지영은 나직한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기운이 없는지 욕탕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졌다.도자기처럼 희고 고운 살결 위에 붉고 푸른 흔적이 가득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배현준은 죄책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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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7화

날이 밝았다."세자비 마마, 일어나실 시간입니다."홍주가 조심스레 유지영을 깨웠다.유지영은 눈을 떴으나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니 이불이 흘러내리며 붉은 흔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뒤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유지영은 정신이 번쩍 들어 얼굴을 붉히며 그를 쏘아보았다."오늘 어른들께 인사를 드려야 하니 늦어선 안 됩니다.""알겠다."배현준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방 안을 보며 유지영은 민망함을 감추지 못했다.동금과 홍주가 들어왔다. 어린 홍주는 얼굴을 붉히며 침상을 정리했고, 동금은 덤덤하게 수건을 건넸다."세자비 마마, 세면을 돕겠습니다."유지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왕씨 어멈이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더니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세자비께서 하루빨리 득남하시기를 축원합니다."어멈 침상으로 다가가 흰 손수건을 거두었다. 선명한 붉은 자국을 확인한 어멈은 그것을 쟁반 위에 조심스레 올렸다.단장을 마치고 방을 나서자, 배현준은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대청.경왕이 상석에 앉아 있었고, 경왕비는 곁에 선 채 섣불리 앉지 못했다.경왕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대는 이 집안의 어른이니 차 한 잔 받을 자격은 충분하오."말을 마친 그는 경왕비의 손을 끌어당겨 자리에 앉혔다.경왕비는 짐짓 불안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왕비께서 차를 받으시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곁에서 거든 자는 황실의 종친이었다. 그리 높은 위치는 아니지만 인사를 받을 자격은 충분했다.대청 안은 경왕이 불러온 종친들과 일가친척들로 가득했다."세자 내외는 어찌 이리 늦는 건가요?"누군가 불만을 터뜨렸다.은근슬쩍 안하무인이라는 수군거림이 번졌다.경왕은 묵묵히 앉아 위압감을 뿜어내며 손님들의 입을 닫게 했다.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부관이 황급히 안으로 들어섰다.경왕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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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8화

대청 안의 종친들은 험악해진 분위기를 살피더니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전하, 집에 급한 일이 생겨 이만 가보겠습니다.""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무리가 허둥지둥 대청을 빠져나갔다.배현준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경왕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호통쳤다."이 불효 막심한 자식! 아침부터 아비의 속을 긁는구나!""아버지께서 먼저 아무 증거도 없이 저를 탓하시니 해명한 것뿐입니다."두 사람의 언쟁이 길어지자, 경왕비는 유지영을 향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지영아. 전하의 성정이 다소 불같으시긴 하나 어찌 됐든 가문의 어른이시다. 너도 시집을 왔으니 앞으로 부군을 잘 타일러야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윽박지르는 건 예법에 어긋나지 않느냐."유지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배현준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새로 시집온 신부가 누굴 타이른단 말입니까? 왕비께서 그리 현숙하다면 저 완고한 아버지나 잘 타이르시지요. 지난 수년간 당신이 중간에서 말릴 때마다 내게 돌아온 건 매질뿐이었습니다. 지영이는 당신처럼 음침한 사람이 아니니 애먼 사람 잡지 마십시오."배현준은 거침없이 쏘아붙였다.경왕비의 안색이 일그러졌다."현준아, 네가 나에 대해 뭔가 오해를 갖고 있나 본데...""저놈과 무슨 말을 섞겠소!"경왕은 버럭 화를 내며 대청을 나가버렸다.상석에는 경왕비 홀로 남았다. 그녀가 억지로 인사를 받으려 하자, 배현준은 유지영의 손을 이끌었다."늦었으니 어서 입궁해 궁에 계신 분들께 차를 올려야지."그는 경왕비를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대청을 빠져나갔다.상석에 홀로 남은 경왕비의 얼굴은 처참하게 굳어졌다."오만방자한 놈!"경왕비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마마, 오늘 아침 일찍 궁에서 사람을 보내 세자비의 흰 손수건을 챙겨갔습니다."소월이 조심스레 속삭였다.그 말에 경왕비는 찻잔을 바닥으로 쓸어버렸다."이것들이 작정하고 날 무시하는구나!"첫날밤의 흰 손수건은 시어머니가 먼저 확인하는 것이 예법이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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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9화

유선주는 눈물을 흘리며 가녀린 손으로 배준형의 소매를 붙잡았다."저희 집안 때문에 태비 마마께까지 화가 미친 모양입니다. 세자, 제가 인주에 있을 때는 부모님도 화목하시고 가문에도 경사만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경성에 온 후론 사사건건 남에게 꼬투리를 잡히고 주변 사람을 해한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그녀는 목이 메어 오열했다."제 어머니께서도 그리 참혹하게 돌아가셨는데..."배준형은 연민이 솟구쳐 그녀를 품에 안았다.유선주의 말을 듣던 배준형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인물이 있었다.전생과 비교해 유독 뒤틀린 흐름, 바로 유지영이었다!유지영 역시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 작정하고 무슨 수를 쓴 것이 분명했다."선주야, 내가 은밀히 고승을 찾고 있으니 염려 말거라. 필히 네 팔자를 고쳐줄 것이니 바깥의 헛소문은 신경 쓸 것 없다. 난 결코 흔들리지 않아."배준형은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배현준이 승승장구하며 황실의 총애를 거머쥔 배후에는 분명 유지영의 조언이 있었을 것이다.그게 아니라면 멍청한 배현준이 자신을 능가했을 리가 없었다."세자..."유선주는 감동한 얼굴로 배준형의 소매를 쥐었다.그때 밖에서 정왕이 돌아왔다는 전갈이 들려왔다.배준형은 유선주의 어깨를 토닥이며 일어섰다."안심하고 몸을 추스르거라. 이따 다시 오마.""예, 세자."밖으로 나간 배준형은 잔뜩 화가 난 정왕을 맞이했다."네 할머니는 좀 어떠시냐?"어제 건양제의 부름으로 입궁했던 정왕은 오늘 새벽에야 풀려났다. 궁을 나서자마자 소식을 듣고 달려온 참이었다."왼쪽 팔이 잘려 나가셨습니다. 다행히 선주가 막아선 덕에 겨우 목숨을 건지셨습니다."정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숙태비의 처소로 향했다. 의식을 잃고 누운 숙태비를 본 정왕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그는 한숨을 쉬며 배준형을 보았다."어제 국공부에서 네 할머니가 태후 마마께 훈계를 당해 체면을 구겼거늘, 어젯밤엔 자객의 습격까지 받았다. 게다가 너마저 무과 장원을 빼앗겼으니... 지금 온 경성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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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0화

"아버지, 제가 은밀히 알아본 바에 따르면 폐하께서는 과거 민간에 남겨두신 핏줄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만약 그 잃어버린 황자를 찾아낸다면, 굳이 저희가 손을 쓰지 않아도 배현준은 알아서 물러나야 할 것입니다!"배준형은 이미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였다.그는 그때가 되어 건양제가 배현준을 감싸고 돌지 두고 보리라 작심했다."무슨 단서라도 있느냐?"정왕의 두 눈이 번뜩였다.배준형은 그의 귀에 대고 은밀히 속삭였다.정왕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긴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배현준의 기세를 꺾을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한편, 배현준은 유지영과 함께 자녕궁(慈寧宮)으로 가서 서 태후에게 차를 올렸다.서 태후는 친히 두 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용봉옥패 한쌍을 하사했다.배현준은 태후에게 오늘 아침 경왕부 대청에서 벌어진 일을 낱낱이 아뢰었다.서 태후의 눈썹이 사납게 일그러졌다."태후 마마, 경왕 전하의 편애가 선을 넘은 듯하옵니다. 세자께선 이미 가정을 이루셨거늘 어찌 사람들 앞에서 윽박지르고 모욕을 주신단 말입니까."소 상궁이 은근슬쩍 거들었다.배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서 태후은 당연히 배현준과 유지영을 두둔했다."며칠 뒤 경왕을 조용히 불러 단단히 타이르겠다. 나이를 먹을수록 어찌 저리 사리분별을 못 하는지."차를 올리는 자리에서 유지영에게 눈치를 준 것만으로도 서 태후는 용납할 수 없었다."경왕부의 가풍이 본래 저 모양이니, 네가 중심을 잘 잡거라."서 태후가 배현준을 향해 당부했다.배현준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태후는 두 사람을 자녕궁에 남겨 함께 점심을 들었다. 황궁을 나서기 전, 서 태후는 배현준을 밖에서 대기하게 하고 유지영만 따로 남겼다.주변을 린 서 태후는 유지영의 손을 감싸 쥐었다."경왕부 사람들이 널 구박하거든 눈치 보지 말고 내게 고하거라. 내가가 네 뒤를 봐주마.""어머니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다정한 안부를 주고받은 후에야 유지영은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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