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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진우의 감정

김 여사의 거대한 의뢰를 접수한 지수는 양손 가득 팀원들이 좋아하는 달콤한 디저트와 음료를 들고 RV 본사로 향했다.육중한 자동문이 열리자, 평소처럼 활기차면서도 분주한 사무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사라는 오션블루 대표직에 이어 스타게이트의 대표이사직까지 맡게 되어 일이 배로 늘었다며 진우에게 귀여운 투정을 부리던 참이었다.“대표님, 진짜 이러다 저 과로사해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다니까요?”그 옆에서 강이현은 소소하게 개인 자금을 투자하는지 모니터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 마우스를 딸깍이고 있었다. 김철수는 리모델링 시작 단계에 접어든 제이아우라의 정식 매장, ‘더 문’의 보안 프로그램 설계를 위해 현지답사를 나가 자리에 없었고, 박성재 변호사는 오랜만에 꿀맛 같은 휴가를 내어 사무실은 평소보다 조금 한산했다.문을 열고 들어오는 지수를 가장 먼저 발견하고 용스프링처럼 튀어나온 것은 역시나 사라였다.“지수! 오늘도 여전히 아름답구나! 아, 참, 이혼 완벽하게 끝난 거 축하해!”사라의 시원시원한 목소리에 진우와 이현의 시선이 동시에 지수에게로 쏠렸다. 이현 역시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장난스레 박수를 치며 축하를 건넸다.지수는 그들의 진심 어린 축하에 그동안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 듯, 전에 없이 환하고 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짜 왕관을 쓰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시절의 그늘은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하게 자유로워진 여자의 얼굴이었다.그리고 진우는, 그 환하게 웃는 지수의 얼굴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따스한 봄볕처럼 부서지는 그녀의 미소가 진우의 가슴속 깊은 곳을 툭, 건드렸다. 멍하니 자신을 응시하는 진우의 시선에 지수가 눈을 깜빡이며 순진하게 물었다.“……대표님?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아, 그게…….”진우는 순간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평소의 냉철하고 서늘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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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The MOON

지수의 이혼 도장이 마르기도 전, 친오빠 지현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K라는 거대한 장막 뒤에서 동생의 복수를 조용히 지원해 온 그는, 지수가 이혼 소송의 종지부를 찍는 동안 A국에서 오닉스의 밀린 비즈니스를 처리하며 완벽한 반격의 무대를 준비해 둔 상태였다.“지수야, 정말 고생 많았어.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지현은 지수를 차에 태우고 성수동 연무장길의 한복판으로 향했다. 붉은 벽돌의 옛 공장들과 세련된 팝업스토어들이 거칠고도 감각적으로 공존하는 거리. 지현이 차를 멈춘 곳은 한때 강도진이 소유했던 옛 쇼핑몰 자리였다. 도진이 새로운 쇼핑몰인 ‘미라주’로 이사를 가면서 한동안 방치되어 있던 그 공간이, 이제 지수의 거대한 요새가 되려 하고 있었다."여긴..." 지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현을 바라봤다.“너의 이혼 선물이야. 그리고 이곳이 오닉스의 A국 지사이자, 너만의 왕국이 될 곳이야.”지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태블릿을 켜서 설계도 한 장을 띄웠다. 화면을 확인한 지수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지수가 중학교 시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장난처럼 그렸던 비밀스러운 낙서 속 설계도였다.그 시절 외로웠던 지수가 홀로 도화지에 꾹꾹 눌러 그렸던 꿈을, 단짝 슬비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슬비가 지현에게 전달해 오빠와 함께 완벽한 하이테크 건축물로 실체화해 낸 청사진. 그리고 도면의 맨 위에는 지수가 오래전 붙였던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The Moon. 처음부터 이곳의 이름은 ‘더 문’이었다.“오빠…… 슬비가 이걸 기억하고 있었구나.”“그럼. 네 꿈을 우리가 왜 잊어. 네가 가장 너답게 빛날 수 있는 성을 만들겠다고 약속했잖아.”지현은 미소를 지으며 설계도에 숨겨진 구조를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건물은 거대한 기와 루버가 유리 벽을 감싸 안은 메인 타워인 ‘플래닛(Planet: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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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Z의 저작권

“하하하! 거봐, 한수진. 내가 뭐라 그랬어? 그 미련한 년이랑 이혼 도장 찍자마자 내 인생 사방으로 풀리는 거 안 보여?”청담동 ‘미라주’ 빌딩의 사장실. 강도진은 전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수트 매무새를 만지며 호탕하게 웃어 제꼈다. 생각보다 많은 지출이 있었던 새로운 태양은 사교계에서 소위 대박을 치며 들어온 막대한 수익이 그의 어깨를 잔뜩 세워주고 있었다. 수진 역시 만삭의 배를 부드러운 실크 드레스 위로 쓰다듬으며 도도하게 미소 지었다.“당연하죠, 도진 씨. 그 여자는 당신 앞길을 막는 먹구름이었을 뿐이에요. 이제 진짜 태양이 떴잖아요.”도진은 기고만장해진 기세로 그 길로 본가로 향했다. 당당하게 이혼 사실을 공표하고, 수진이 품은 아들의 존재를 무기로 아버지에게 약속했던 100억 원의 지원금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그 돈은 최근 겪은 스캔들로 인한 자금의 공백을 메울 완벽한 기회였다.하지만 본가 거실에서 마주한 아버지는 냉혹했다. 도진의 당당한 요구를 들은 아버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비웃듯 읊조렸다.“100억? 도진이 너 착각이 심하구나.”“네? 아버지, 분명 수진이가 아들을 가지면…….”“그 100억은, 한수진이가 그 아이를 확실하게 낳아두고 이 집안을 ‘떠났을 때’ 지급되는 돈이다.”순간 도진의 안색이 굳어졌다. 수진을 며느리가 아닌, 그저 완벽한 핏줄을 낳아줄 대리모로만 취급하는 아버지의 서늘한 시선. 가문의 실세인 김미자 여사 역시 차가운 눈으로 도진을 바라보더니, 슬며시 비자금 30억 원이 담긴 통장을 도진의 앞으로 밀어냈다.“이걸로 우선 수진이 입이나 막아두거라. 내 쓸데없는 잡음 생기는 꼴은 못 보니까.”겉으로는 화려해 보이는 집안의 추악한 속내와 수진과의 사이에 터질 시한폭탄 같은 갈등. 도진은 억지로 침을 삼키며 통장을 챙겼다. 탐욕이 1차로 꺾인 불쾌한 균열이었으나, 도진은 미라주 사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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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인재 영입

지수는 RV에서 넘겨받은 진우 팀 5인의 계약서를 조심스럽게 손으로 쓸어내렸다.강도진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후, 혼자 서기 위한 준비를 충분히 해왔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 바탕은 대기업 CB의 사모님이라는 타이틀로 사교계에서 쌓은 인맥 덕분이었다.하지만 손끝에 닿은 이 5인의 계약서는 달랐다.오롯이 홀로서기를 감행한 이후, 제 힘으로 얻어낸 온전한 지수의 사람들이었다.게다가 ‘새로운 태양’ 런칭쇼에서 안젤라이트 이어링을 성공적으로 선보인 이후, 그녀에게 디자인을 의뢰하는 목소리가 눈에 띄게 늘고 있었다. 바야흐로 자신만의 공방을 설립할 최적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지수는 휴대폰을 들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홀로서기의 첫 작품이었던 ‘이별’을 세공해 주고, 자신에게 보석 세공의 살아있는 지식을 아낌없이 전수해 준 은인. 김인식 세공 장인이었다.“선생님, 최근에 다른 의뢰는 일절 안 받으신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설마 제 의뢰도 안 받으실 건 아니죠?”지수의 짐짓 귀여운 투정에 수화기 건너편에서 껄껄하는 호전적인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내 다른 손님들 의뢰는 칼같이 쳐내도, 우리 막둥이 의뢰를 어떻게 무시하겠냐. 언제든 오거라.”자신을 언제나 ‘가족’의 울타리 안에 넣어주는 김인식 장인의 한마디에 얼어붙었던 마음에 따스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 다정함이 마중물이 되었을까. 지수는 홀린 듯 K국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가슴이 떨려왔다.— 우리 딸! 잘 지냈…… 아니다, 지수야. 괜찮아?“응, 엄마. 나 정말 괜찮아. 오빠가 와서 이혼 선물도 아주 잔뜩 안겨주고 갔어.”지수의 씩씩한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당연한 거야! 내가 그 핏줄만 번지르르한 놈 때문에 내 딸 속앓이했을 거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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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우연한 만남

지수의 가벼운 발걸음은 지현이 묵고 있는 호텔로 향하고 있었다. 지현이 처음 A국에 도착했을 때 지수는 리버파크에서 함께 지내자고 권했었다. 하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성인 남녀가 한집에 있으면 스캔들 나기 딱 좋다며 지현이 한사코 거절했던 탓에, 결국 두 사람은 각자의 거처를 쓰게 되었다.오전에 통화했던 엄마의 격앙된 반응으로 봐서는, 분명 입 가벼운 오빠가 진작에 다 이른 게 분명했다.‘지 집안 일 아니라고 낼름 고자질을 해?’ 이 헐랭이 고자질쟁이에게 오늘 저녁은 눈물 쏙 빠지게 비싼 걸로 얻어먹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동안에도, 지수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지현은 호텔에 도착하기 무섭게 자신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동생 지수의 모습에 감회가 새로웠다. 이렇게 조잘거리는 것을 좋아하고 애교가 많았던 동생이, 공항에서는 자신의 품에 안긴 채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가. 그녀의 눈물 한 방울도 아까울 지경이었다.다행이라면 강도진과의 이혼이 마무리되기 무섭게 사랑스러운 동생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점이었다.“그래, 미안해. 부모님이 워낙 걱정하며 물어보시니까 어쩔 수 없었어. 너도 알잖아, 우리 어머니 촉이 얼마나 무서운지…….”“그렇긴 하지. 엄마한테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았잖아. 오빠 그거 기억해? 우리 어릴 적에…….”지현은 조잘거리는 지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신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손을 잡고 살짝 흔들며 걷는 동생의 모습이 마냥 예뻤다.두 사람은 지수가 좋아하는 K국 전통 한식 다이닝, <가온>에서 저녁을 먹기로 하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지수가 제 타이칸의 문을 열려고 할 때, 지현이 슬쩍 그녀의 손목을 잡아 챘다.지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호주머니에서 묵직한 새 차 키를 꺼내 들었다.“이 차도 좋지만, 이제 독립할 네 명성도 생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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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도진의 분노

도진은 비즈니스를 위한 미팅 중에도, 지현과 지수가 들어간 룸에서 도무지 신경을 뗄 수가 없었다. 초조하게 얼음물만 들이켜던 그때, 닫혀 있던 그 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진은 반사적으로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 방을 나섰다.예상대로 지수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복도로 나선 참이었다. 도진은 급하게 지수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거칠게 팔을 잡아채 근처의 비어 있는 룸으로 밀어 넣었다.“아……!”지수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팔목을 무자비하게 악력으로 가라앉히는 통증이 느껴진 후에야, 도진이 자신을 빈 방으로 끌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인지했다.방금 전까지 지현과 나누며 행복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시커먼 불쾌함으로 뒤덮였다.“이게 무슨 짓이야!”지수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질투와 추악한 소유욕으로 눈이 붉게 물든 도진은 지수의 팔을 잡은 손에 더욱 억척스럽게 힘을 주었다.“아파! 아프다고! 강도진, 너 미쳤어? 뭐 하는 짓이냐고!”지수의 가시 돋친 고함이 좁은 방 안을 울렸다. 그제야 도진은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수년의 결혼 생활 동안, 지수가 자신에게 이토록 날카롭게 소리를 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우아하고 고요했던 지수의 안면에 보기 좋게 금이 간 것을 본 순간, 도진의 가슴속에서 기괴한 만족감이 피어올랐다.자신이 그녀의 완벽한 가면을 벗겼다는 거북한 우월감. 오직 자신만이 이 날것의 모습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뒤틀린 독점욕에 도진은 스르륵 손을 풀었다.“너랑 같이 온 그 남자 누구야. 저 자식 때문에 그렇게 순순히 이혼 도장을 찍어준 거였어? 아니지, 넌 내가 이혼하자고 하기 전부터 먼저 이혼 서류를 들이밀었지. 그래…… 전부 저 남자 때문이었구나?”도진의 궤변을 듣던 지수의 안색에서 불쾌함마저 싹 가셨다. 그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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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디자인 사용계약 1

지수는 강도진과의 불쾌한 만남이 지현이 선물해 준 차량에 타는 순간, 마치 라쿤의 솜사탕처럼 순식간에 녹아 사라지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조수석에 앉은 지현은 미약하게 밝아지는 지수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제야 안도의 숨을 묵묵히 삼켰다.지수는 지현을 호텔에 내려주고 홀로 자신의 거처인 리버파크로 돌아왔다.돌아온 리버파크는 깊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 지수는 외투를 벗어 던지지도 못한 채 곧장 서재로 향했다. 금고의 다이얼을 돌리는 그녀의 손길은 평소보다 조금 더 더디고 신중했다. 이윽고 묵직한 철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벨벳 케이스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오래전, 강도진이라는 사람에게 눈이 멀어 그 사랑이 영원할 거라는 소망을 담아 설계했던 바로 그 컬렉션이었다. 사랑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위기에 처했던 CB를 살리기 위해, 그리고 제 눈앞의 남자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 가장 찬란했던 진심을 쏟아부었던 흔적.지수는 케이스를 열어 조명을 켰다. 그 안에서 <영원한 사랑>이 차가운 빛을 발하며 고개를 내밀었다.중앙에 박힌 3캐럿의 하트 컷 핑크 다이아몬드는, 마치 누군가의 뜨거웠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은 듯 서늘한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두 개의 유선형 라인은 3년 전에는 분명 서로를 품에 안은 부드러운 포옹이었다. 하지만 사랑이 퇴색해 버린 지금 자세히 들여다본 그것은, 하트를 짓누르듯 꽉 조여 매는 금속의 굴레에 불과했다.지수는 핀셋으로 목걸이를 집어 올려 빛에 비추어 보았다. 로즈 골드 베이스 위로 파베 세팅된 레인보우 문스톤들이 움직임에 따라 미세하게 요동쳤다. 조명을 받을 때마다 문스톤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묘한 푸른빛과 무지갯빛 잔상은, 한때 축복의 광채였으나 이제는 바래버린 사랑이 아픔을 견디지 못해 뱉어내는 옅은 비명처럼 보였다.그것은 찬란하게 빛나는 동시에, 더없이 위태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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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디자인 사용계약 2

준비는 끝났다. 7년의 미련을 완벽하게 장사 지낸 자리에 피어난 진짜 '사업가 이지수'의 칼날이, 이제 강도진의 심장을 향해 겨누어질 차례였다.CB그룹 대표이사실 비서실의 내선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비서실입니다.”태준이 수화기를 들자 1층 안내 데스크 직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1층에 사모님께서……,그 순간, 직원의 말을 정정하는 서늘하고 단정한 음성이 수화기 본체를 뚫고 태준의 귀에까지 선명하게 흘러들었다. 안내원 곁에서 조용히, 하지만 힘 있게 쐐기를 박는 지수의 목소리였다.“저는 이제 사모님이 아닙니다. 이지수 씨라고 알려주세요.”과거의 인연에 완벽하게 선을 그어버리는 단호한 선언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지수의 차가운 육성을 실시간으로 들은 태준의 눈이 순간 당황으로 커졌다. 한때 누구보다 따뜻했던 그녀의 완벽한 변화에 태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혼이라는 현실이 이토록 잔인하게 선을 그어버렸다는 사실에 가슴 한구석이 씁쓸해지기까지 했다.태준은 멍해진 정신을 간신히 수습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사장실 문을 급하게 열고 들어와 도진에게 알렸다.“사장님, 지금 1층에 이지수 씨께서 오셨다고 합니다!”태준의 다급한 보고에 도진의 심장이 크게 덜컥였다. 도진은 다급하게 외투 매무새를 다듬으며 지시했다.“내 방으로 안내해. 그리고…… 지수가 좋아하던 블루베리 스무디도 당장 준비하라고 일러.”비즈니스 회의를 위해 찾아온 지수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겠다는 의미로 제 집무실을 열라는 지시였다.태준이 서둘러 안내를 마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집무실 문을 열며 지수가 걸어 들어왔다.도진은 이혼 후 그녀가 매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어 더 이상 놀랄 게 없다고 생각했었건만, 오늘은 차원이 달랐다. 자신의 품에서 완벽하게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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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축하파티

자신의 디자인이 ‘Z’라는 이명이 아닌, 오롯이 '이지수'라는 제 이름 석 자로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강도진에게 주었던 모든 것을 회수하겠다는 계획이 마침내 실행되고 있다는 현실감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하루였다.지수는 이 행복한 순간을 홀로 만끽하는 것이 아닌, 오랜만에 자신과 함께해 준 소중한 사람들과 보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친오빠인 지현이 함께해 주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미 한 달 가깝게 국내에 머물며 지수의 뒤를 받쳐주던 지현은 오늘 아침 서둘러 A국으로 돌아가 버린 후였다.지수는 휴대폰을 들어 가장 먼저 혜진과 진경에게 연락을 취했다. 두 사람은 쇼를 위해 해외로 출국하기 전 아주 까다로운 관리 기간을 거치는 중이었지만, 지수의 파티가 백번 천번 중요하다며 흔쾌히 참석하겠다는 답을 보내왔다.뒤이어 진우의 디자인 팀원들에게도 연락을 돌렸다. 하지만 다른 팀원들은 선약이 있어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내왔고, 어쩐 일인지 팀장인 진우에게서만큼은 한 통의 연락조차 오지 않았다.지수는 가슴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미미한 서운함을 애써 추슬러내며 작은 홈파티 준비를 시작했다. 이윽고 약속 시간이 되자, 리버파크의 펜트하우스는 두 톱모델의 화사한 활기로 채워졌다.“대박……! 그럼 그 강도진이라는 인간, 결국 군말 없이 도장 찍고 간 거예요? 요율 5% 인상에 연 2회 정산 조건으로?”화려한 이목구비의 혜진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계약서를 톡톡 치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소파에 길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진경 역시 와인잔을 흔들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안 찍고 배기겠어? 당장 다음 달부터 주얼리 라인 전체가 날아가게 생겼는데. 주기 싫어서 눈 뒤집히기 직전인 얼굴로 손을 떨면서 찍고 가더라.”지수가 나른하게 찻잔을 들며 대답하자, 진경이 청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꼴좋다. ‘영원한 사랑’ 매출의 5%면 그 자식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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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적반하장

지수가 리버파크에서 승리의 샴페인을 터뜨리며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던 그 시각, 강도진은 본가의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고 성북동 저택으로 향했다. 가라앉은 가문의 공기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무겁고 서늘했다.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어둠 속에 앉아 있던 부친 강수한 회장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쨍그랑―!“이 한심한 놈아!”도진이 미처 고개를 숙이기도 전에, 강 회장이 마시던 묵직한 찻잔이 도진의 구두 앞코를 때리며 요란하게 박살 났다. 뜨거운 찻물과 사방으로 튄 도자기 파편이 도진의 바지깃을 적셨지만, 도진은 감히 움직이지도 못한 채 굳어버렸다.“아버님, 갑자기 무슨…….”“네놈이 눈이 멀어 내쫓은 그 이지수가, 오닉스 가문의 유일한 직계 딸이라는 걸 왜 이제야 알게 만들어!”벽력을 지르는 강 회장의 음성에 도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옆에 서 있던 모친 김미자 역시 속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쥐어짜며 도진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수진의 뱃속에 든 핏줄 하나 때문에, 지수가 가진 ‘오닉스’라는 거대한 배경을 제 손으로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린 아들의 둔함에 실망감이 극에 달한 얼굴이었다.부모의 서슬 퍼런 추궁을 전신으로 받으며, 도진은 그제야 이지수의 뒤에 도대체 무엇이 숨어 있었는지 정확하게 직시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거대한 폭풍을 만난 듯 어지럽게 뒤엉켰다.천재 디자이너 ‘Z’, K국 물류의 핵심을 쥐고 있는 ‘오닉스’, 그리고 오닉스의 자회사이자 CB 주얼리 라인의 원석 공급을 책임지던 글로벌 원석사 ‘아스테리아’까지. 그동안 자신이 CB를 이끌며 당연하게 누려왔던 거대한 인프라와 특권들이, 사실은 강도진 본인의 능력이 아닌 이지수가 뒤에서 베풀어준 호의였다는 잔인한 현실이 뼈아프게 맞춰졌다.동시에, 도진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번뜩였다.최근 오닉스를 통해 들어오던 물류가 각국의 세관 통과에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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