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플로렌스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Chapter 81 - Chapter 90

107 Chapters

81화. 진짜 이름

시선은 여전히 붉은 불꽃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녀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라리엘을 똑바로 보았다. 라리엘은 갑자기 진지해진 분위기에 궁금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이윽고 트리샤가 마른입술을 열어, 며칠 전부터 자꾸만 자신을 괴롭히던 이야기를 꺼냈다.“나는… 제이드 크로이츠의 딸이에요.”정적이 내려앉았다. 라리엘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큰 충격을 받은 얼굴로 트리샤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라리엘이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어 대답했다.“제이드에게 딸이 있다는 얘기는 못들었어요.”트리샤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차갑게 대꾸했다.“당연히 그랬겠죠. 꽁꽁 숨겨뒀으니까.”라리엘은 트리샤의 이목구비를 다시금 꼼꼼하게 뜯어보았다.비로소 그녀의 깊은 눈매와 날카로운 턱선 너머로, 과거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제이드 흔적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의문 조각들이 하나씩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그렇다면 루이즈 씨, 당신이 여기에 있는건… 아르덴, 아니 공작님이 제이드의 행방을 찾는 것과 관련이 있나요?”예상치 못한 질문에 트리샤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그걸 알고 있었어요?”라리엘은 복잡한 심경으로 고개를 슬며시 저었다. 아르덴이 숨기려 했던 그 비밀의 자락을 우연히 쥐게 되었던 순간의 떨림이 되살아났다.“아르덴이 말해준 게 아니에요. 나도 우연히 알게 된 것뿐이죠. 아르덴은 내가 이 사실을 눈치채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를거에요.”라리엘은 숨을 고른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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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별장의 밤(1)

해 질 무렵, 의사가 아르덴의 치료를 위해 다시 별장을 찾았다.묵직하고 낡은 가죽 가방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의사는 능숙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르덴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풀어내기 시작했다.서걱거리는 가위 소리와 함께 겹겹이 쌓인 하얀 천이 걷히자, 어제보다 가라앉은 상처가 모습을 드러냈다.의사는 핀셋으로 상처 부위를 꼼꼼히 살피며 소독솜으로 진물을 닦아냈다.아르덴은 턱근육을 잔뜩 비틀며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려는 짧은 신음을 이 악물고 삼켰다.그 곁을 지키던 라리엘의 손에도 하얗게 힘이 들어갔다. 치료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고역이었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고 옆에 서서 꿋꿋이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치료를 마친 의사가 도구들을 정리하며 라리엘을 향해 돌아섰다.“상처 자체는 다행히 잘 아물고 있습니다만, 체온이 평소보다 조금 높군요. 아마 상처로 인한 미열인 듯 보입니다. 오늘 밤에는 열이 갑자기 오르지 않도록 잘 지켜보시고, 수건을 적셔 열을 식혀주셔야 합니다.”라리엘은 의사의 지시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내용을 경청했다.아르덴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 앉은 채 그녀와 의사의 대화를 듣고있었다.“완전히 회복하는데는 얼마나 걸리나요?”​“겉 상처가 붙고 살이 차오르는 건 앞으로 열흘 정도면 충분합니다. 다만, 겉이 붙었다고 해서 속까지 나은 것은 아니니 그 이후에도 절대 무리하지 않으셔야 합니다.”의사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특히 힘을 주거나 상처 부위가 다시 벌어질 수 있는 행동은 피하셔야 합니다. 완전히 회복해서 문제 없이 일상 생활을 하시려면 최소 3주 정도는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라리엘은 그 말을 마음속에 몇 번이나 되뇌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열흘, 그리고 삼 주.’ 숫자를 머릿속에 또렷이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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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별장의 밤(2)

라리엘은 침대 머리맡에서 그의 고집스러운 얼굴을 내려다보며,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무언가를 참아내듯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의사 선생님이 미열이 있다고 했잖아. 이런 상처는 밤새 열이 오르는 게 제일 무서운 거야. 내가 옆에서 직접 지켜봐야 마음이 놓여.”반박을 손톱만큼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하고도 올곧은 어조였다.그 강단 있는 눈빛에 아르덴은 더는 그녀를 밀어낼 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실제로 아르덴은 아까 전부터 으슬으슬한 오한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결국 그는 라리엘의 손길에 밀려 침대에 몸을 뉘었다. 라리엘이 익숙한 듯 그의 이마에 찬물로 적신 수건을 올리고 천천히 닦아주었다.물기가 스칠 때마다 아르덴은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라리엘은 이불을 그의 목 끝까지 끌어올려 단단히 여민 뒤에야 비로소 한숨을 내쉬고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그렇게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타닥타닥 조용히 타오르는 장작 소리가 마치 기분 좋은 자장가처럼 사방에 낮게 깔렸다.아르덴은 깊고 어두운 수면 속으로 천천히 빠져들었다.​한밤중, 식은땀이 등에 축축하게 배어드는 감각과 함께 아르덴은 문득 눈을 떴다. 숨이 가빠 잠시 그대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어스름한 불빛 속에서 좁은 의자에 몸을 웅크린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라리엘의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창틈으로 스며든 희미한 백색 달빛이 서늘하게 식어가는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 여린 빛줄기는 의자에 기대어 앉은 라리엘의 가느다란 목덜미와 제멋대로 흐트러진 머리칼 위로 위태롭게 넘실거렸다.고개가 앞으로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흔들리는 모습,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운 그 실루엣이 아르덴의 시선을 집요하게 붙잡았다.가슴 한구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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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미친여자라고 생각해

그는 그날 밤의 공기, 차가운 물에 수건을 적시던 자신의 손길, 그리고 앓아누운 그녀를 보며 속이 타들어 가던 그 장면을 너무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응.”가슴속에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꾹꾹 눌러 담은 그가 지금 이 순간 내뱉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혹시라도 목소리가 떨려 그날 밤의 진실이 새어 나갈까 봐, 그는 턱에 힘을 주었다. 라리엘은 그의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련한 그리움이 서린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눈을 번쩍 떠버리면, 날 간호해 주던 그 고마운 사람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끝내 그게 누구인지 확인하진 못했어. 눈을 감고 모른 척했지. 그런데도… 그 어두운 방안에 누군가가 내 곁을 묵묵히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위로가 되었어. 음… 사방이 얼음벽 같아서 마음이 너무 추웠는데, 그 온기 덕분에 조금은 따뜻해지는 기분이랄까.”잠시 말을 멈추고 낮게 숨을 고른 라리엘이 다시 고개를 돌려 아르덴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그녀의 속눈썹 끝에 맺힌 희미한 눈물의 잔상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그러니까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지금 이렇게 네 옆에 있어 주는 게, 네가 느낄 고통과 외로움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말이야.”​그 절절하고 다정한 고백에 아르덴은 무언가 명치 끝에서부터 뜨겁고 묵직한 것이 울컥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이대로 있으면 그녀의 다정함에 무너져 내릴 것 같아, 그는 애써 차갑고 딱딱한 표정으로 얼굴을 굳혔다. 비틀린 죄책감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너… 내가 누구인지 완전히 잊어버린 거야? 기억 못 하는 거냐고. 난ㅡ”​“알아.”​라리엘은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의 눈동자는 티 없이 맑은 호수처럼 흔들림 없이 그를 정면으로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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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고뇌와 기다림

차가운 뺨을 스친 손가락 끝에 닿는 라리엘의 온기에, 아르덴의 매서운 눈매가 아주 잠깐, 알아채기 힘들 만큼 애틋하게 휘어졌다.​“너나 조심히 가. 수도로 가는 길도 얼어붙어서 미끄러울 테니까. 베르너한테는 귀환이 늦어져서 미안하다고 전해주고.”라리엘은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럴게.”대답을 마친 라리엘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돌려 조용한 별장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그녀가 덧붙였다.​“그런데… 루이즈 씨는 어디 갔어? 떠나기 전에 인사라도 제대로 하고 싶은데 통 안 보이네.”​진짜 이름은 ‘트리샤’라고 했던가. 어제 낮, 벽난로 앞에서 나눈 비밀스러운 대화 이후로는 그녀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라리엘의 물음에 아르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루이즈는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 아침부터 외출했어. 참고로 말해두는데, 내가 부려 먹은게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나간거니까 나한테 뭐라고 하지마.”​마치 누군가 물어볼 것을 미리 예상하고 변명을 준비해 둔 사람처럼, 평소답지 않게 빠른 말투였다. 라리엘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알았어.”그녀는 아쉬운 듯 별장 건물을 한 번 더 올려다보았다.트리샤와 자신을 둘러싼 복잡한 과거의 사슬이 무엇이든 간에, 어제 대화의 끝에 가슴 깊이 남은 것은 미묘한 연대감이었다.끝내 작별 인사를 전하지 못한 씁쓸함을 묻어둔 채, 라리엘은 결국 마차 발판에 발을 올렸다.​아르덴은 그녀가 마차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마차 옆을 삼엄하게 지키고 서 있는 호위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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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덜미가 잡히다

​트리샤는 이 숨 막히는 분위기를 돌려야겠다고 판단한 듯, 서둘러 준비해 온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그건 그렇고, 드디어 탈레스 쪽에서 답변을 보내왔어요. 이틀 뒤 저녁, 지난번에 접선했던 그 여관에서 만나자고 하네요.”서류에 무언가를 적어나가던 그의 손이 잠시 멈췄다.“이틀 뒤라… 생각보다는 빠르군.”​잠시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계산하던 그가, 곧 짧고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함정이든 기회든 피할 생각은 없었다.“좋아.”트리샤가 그의 옷자락 아래 숨겨진 왼팔을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괜찮겠어요? 그런 몸으로?”아르덴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다들 내 팔 한쪽이 어디 떨어져 나가기라도 한 줄 아나 본데,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야.”그의 태연함에 트리샤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비스듬히 노려보았다.​“예에, 어련하시겠어요. 천하의 공작 각하이신데.”잔뜩 비꼬는 말투였다. 그녀는 책상 모서리에 슬쩍 몸을 기대며 팔짱을 단단히 꼈다.“탈레스를 다시 만나서 어떻게 할지는 생각해 봤어요?”“글쎄…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 정황상 이번 만남이 그와 온전하게 대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보를 최대한 끌어내야 해.”아르덴이 다시 펜을 들어 서류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필체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며 물었다.“여관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좀 살펴봤어?”트리샤는 뻐근해진 목을 문지르며 짧고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새벽 내내 은밀하게 움직이느라 피로가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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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역공

그 이름이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입 밖으로 흘러나온 순간, 방 안의 기류가 미묘하게 어긋났다.트리샤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지만, 본능적으로 두 손을 테이블 아래로 숨겨 맞잡았다. 그리고 오히려 보란 듯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비웃음을 지었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기세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것이었다.“하, 용케도 알아냈군. 발이 생각보다 넓네, 탈레스? 하지만 덕분에 귀찮은 통성명은 생략할 수 있으니 이야기가 훨씬 쉽겠어.”탈레스는 자신이 우위를 점했다는 우월감과, 동시에 지나치게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대한 경계심이 묘하게 뒤섞인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낮게 속삭였다.“이야기라… 당신이 로드릭 남작의 눈을 속여가며 제이드 크로이츠를 간절하게 찾는 것 말인가? 왜, 아버지와 극적인 눈물의 상봉이라도 꿈꾸나 보지?”그는 트리샤가 로드릭 남작을 이용해 아버지인 제이드를 찾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트리샤는 한심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며 낭랑한 목소리로 받아쳤다.“틀렸어. 이건 당신 모가지에 대한 이야기야.”탈레스가 치켜뜬 눈썹 아래로 당혹감을 내비쳤다. 원래라면 정체를 빌미로 그녀를 한껏 협박한 뒤 기를 죽인 채 돌려보낼 참이었다.그러나 예상을 뒤엎는 그녀의 서늘한 기세에 주도권이 묘하게 뒤바뀌었다. 트리샤는 더 지체하지 않고 이야기를 꺼냈다.“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얘기하지. 며칠 전에 남작이 제이드의 이름을 언급했을 때, 당신이 이 방에서 그에게 건넨 멍청한 대답 기억나?”탈레스의 머릿속에 며칠 전, 바로 이 방에서 제이드의 이름을 은근슬쩍 흘리던 남작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자신이 무어라 답했던가.“제이드 크로이츠는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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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씁쓸한 철수

트리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눈의 독기를 싹 뺀 채, 아주 은밀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하긴, 그런 교묘한 곳이라면 제아무리 정보력이 뛰어난 공작이라도 쉽게 찾을 수는 없을 거야. 장소를 아주 기가 막히게 택하긴 했군. 설마… 그 탁월한 장소 선정이 당신 아이디어였어?”상대의 허영심을 교묘하게 자극하는 칭찬 아닌 칭찬이었다.그 달콤한 말에 탈레스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감과 특유의 의기양양한 미소가 슬며시 피어올랐다.그는 턱을 치켜들며 걸걸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그럼, 당연히 내 아이디어였지! 그가 어디 있는지는 오직 신만이 찾을 수 있을걸. 지금 녀석이 처한 꼬락서니와 상태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지.”마지막 말이 트리샤의 마음에 쿡 박혔다. 트리샤는 혹여라도 흔들리는 내색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유지했다.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참지 못하고 도대체 제이드의 상태가 어떠한지 묻기 위해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탈레스가 어깨를 으쓱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그나저나 당신도 참 보통 독종이 아니군. 그래도 피 섞인 친아버지이지 않나.”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트리샤는 순식간에 눈빛을 바꾸었다. 그녀는 짧게 코웃음을 치고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 평생에 그 인간 얼굴을 몇 번이나 보고 자란 줄 알아? 손에 꼽을 지경이야. 난 그 자를 한 번도 아버지라 생각한 적 없어. 그나마 그의 딸이라는 이유로 공작에게 깊숙이 접근해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그거 하나만큼은 유용하게 써먹었으니 고마워하고 있어.”똑, 똑.그때, 문을 두드리는 무겁고 규칙적인 소리가 울렸다. 탈레스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떨렸다. 문이 열리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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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결심

한밤중의 고요를 뚫고, 두 마리의 말이 공작저의 무거운 철문을 조용히 통과했다.육중한 철문이 여닫히며 내는 나지막한 마찰음조차 사방을 메운 적막 속에서는 유독 도드라지게 들렸다.론체스터에서 수도까지, 말의 등 뒤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쉼 없이 달려온 여정의 끝이었다.뼛속까지 시려 오는 마른바람을 맞으며 간신히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트리샤는 인사도 없이 그림자처럼 고개를 숙이고는 곧장 제 처소인 별채로 사라졌다.​아르덴은 피로가 눅진하게 배어든 몸을 이끌고 본채로 들어섰다. 문이 열리자 훈훈한 온기와 함께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집사 베르너가 부산스러운 소란 없이 그를 맞이했다.​“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공작님.”베르너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하고 절제되어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아르덴의 부자연스러운 어깨 거동과 겉옷 틈새로 살짝 비치는 안색을 세심히 살피고 있었다.염려 어린 기색이 역력했으나, 아르덴은 그 시선을 굳이 마주하지 않은 채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부인은?”“조금 전 취침에 드셨습니다. 별다른 전갈이 없으셔서 내일 아침에나 도착하실 줄 알고 계실 겁니다.”아르덴은 짧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긴장이 풀린 탓일까, 말없이 돌아서는 순간 어깨의 상처에서부터 시작된 둔탁한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발걸음이 잠시 흐트러졌다.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그는 홀린 듯 어두운 복도를 지나 라리엘의 침실 문 앞에 섰다.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 아르덴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는 듯했다.지금 들어가도 되는 걸까. 괜히 잠을 방해하는 건 아닐까.아니, 그보다도—혹시라도 그녀의 순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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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돌아온 일상

​라리엘이 눈을 감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아르덴은 조용히 방을 나섰다.문을 닫는 순간, 방 안의 따스한 온기와 완전히 분리된 듯 그의 가슴 속으로 서늘한 허전함이 밀려들었다.그는 뼛속까지 파고든 여정의 피로와 가슴의 답답함을 씻어내기 위해 곧장 욕실로 갔다. 뜨거운 물이 상처 주위를 자극하며 묵직한 통증을 불러왔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고통 덕분에 흐려지던 정신은 오히려 투명하게 맑아졌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털어내며 거울 앞에 섰다.​‘이젠 모든 걸 말해야겠지.’더 이상 미룰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제이드 크로이츠, 그리고 플로렌스 가문의 몰락 뒤에 숨겨진 잔인한 진실. 그 거대한 비밀의 무게가 어깨에 새겨진 상처보다 더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겨울 아침의 투명한 햇살이 길게 드리운 식당 안은 정갈한 은제 식기 부딪히는 소리로 평화롭게 채워졌다.옅은 하늘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라리엘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식당에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며칠간 비어 있던 맞은편 자리였다.그곳에는 단정한 셔츠 차림의 아르덴이 신문을 넓게 펼쳐 든 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었다.매일 보던 익숙한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라리엘은 순간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이상하게도, 그가 저 자리에 무사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간밤의 불안이 씻겨 내려가고 가슴 한구석이 따뜻하게 꽉 차오르는 것 같았다.라리엘이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는 작은 소리에, 아르덴이 신문 너머로 슬며시 시선을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창가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정면으로 받은 그녀의 얼굴이 유난히 투명하고 맑아 보였다.아르덴은 자신도 모르게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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