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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미열주의: Chapter 31 - Chapter 40

55 Chapters

31화. 지워진 곳, 지워지지 않은 마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손끝이 차가웠다.지하 2층.회색 콘크리트 벽.멀리서 물 떨어지는 소리.그 안에 태준의 차가 그대로 서 있었다.뒤돌아보지 말아야 했다.이미 한 번 봤고,이미 한 번 말했다.나도.소리도 안 나는 말을 해놓고왜 이렇게 들킨 사람처럼 서 있는지 모르겠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나는 안으로 들어갔다.문이 닫히기 직전,검은 차 앞유리에 비친 태준의 얼굴이 아주 잠깐 보였다.그는 아직도 나를 보고 있었다.움직이지 않고.다가오지도 않고.그냥.그 자리에 있었다.띵.문이 닫혔다.나는 그제야 벽에 등을 기대었다.다리에 힘이 풀렸다.웃기게도,울고 싶은 건 아니었다.근데 어딘가가 비어 있었다.오래 닫아둔 방을 열었는데,그 안에 먼지만 있는 게 아니라아직 사람 냄새가 남아 있는 걸 본 기분이었다.나는 거울처럼 비치는 엘리베이터 문을 봤다.입술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방금 전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거기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나도.그게 무슨 뜻인지나도 아직 몰랐다.나도 아팠다는 건지.나도 못 잊었다는 건지.나도 아직 거기에 서 있었다는 건지.아니면,나도 이제 더는아무렇지 않은 척 못 하겠다는 건지.층수가 올라갔다.B2에서 B1로.B1에서 1층으로.숫자가 하나씩 바뀌는데도나는 이상하게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사람 같았다.1층 문이 열렸다.로비는 밝았다.퇴근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나갔다.그게 이상하게 낯설었다.누군가는 웃고 있었고,누군가는 전화를 받고 있었고,누군가는 편의점 봉투를 들고 있었다.세상은 너무 멀쩡했다.나만 방금3년 전으로 다시 끌려갔다 온 사람 같았다.나는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비는 거의 그쳐 있었다.공기만 젖어 있었다.차가운 바람이 셔츠 안쪽으로 들어왔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나는 반사적으로 화면을 봤다.[ 정우진 ]* 혹시 아직 회사 근처이시면,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늘 비가 다시 올 수도 있다고 해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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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감춘 마음, 드러난 이름

문고리는 차가웠다.아주 차가웠다.그리고 그제야 알았다.내가 오늘 문을 잠근 건태준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다시 나가고 싶어지는 나를막기 위해서였다.나는 한참 동안 현관 앞에 서 있었다.도어락 불빛이 작게 깜박였다.잠겼다는 표시.분명 잠긴 건 문인데,이상하게 내가 안쪽에 갇힌 것 같았다.휴대폰은 조용했다.태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보내지 않았다.예전 집 앞.없어졌더라.근데 나는 아직 거기 있더라.그 문장들이 아직도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화면은 꺼졌는데,나는 계속 그 문장을 보고 있는 사람 같았다.거긴 이제 없다고 보낸 건 나였다.그런데 정말 없어진 게 뭔지는나도 잘 모르겠다.건물인지.그날인지.아니면우리가 끝났다고 믿었던 마음인지.나는 결국 현관에서 물러났다.거실로 들어와 식탁 앞에 섰다.싱크대 옆에는 아직도 빈 컵커피가 있었다.버리려고 했던 것.못 버린 것.나는 그것을 내려다보다가작게 웃었다.웃기지도 않은데 웃음이 났다.정말 별것도 아닌 플라스틱 컵 하나가사람을 이렇게 초라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버리면 끝날 것 같은데.버리지 못하면 아직 남은 것 같고.그래서 더 못 버리겠고.나는 컵을 집어 들었다.가벼웠다.안에 남은 커피 향이아주 희미하게 올라왔다.달고,쓰고,조금 질리는 냄새.나는 결국 컵을 씻었다.차가운 물이 컵 안쪽을 타고 돌았다.커피 자국이 금방 사라졌다.너무 쉽게.그게 이상하게 마음에 안 들었다.어떤 건 이렇게 쉽게 지워지는데,어떤 건 3년이 지나도손톱 밑에 낀 것처럼 빠지지 않는다.나는 물기를 털고컵을 쓰레기통에 넣었다.이번엔 넣었다.툭.플라스틱이 가볍게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그런데 이상하게마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나는 한참 동안 쓰레기통을 내려다봤다.그리고 결국,식탁 위에 남아 있던 영수증을 집어 들었다.[ 마시고 자. ]그건 버리지 못했다.나는 그 종이를 한 번 접었다.두 번 접었다.아주 작게.그리고 거실 서랍 안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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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낯선 이름, 남겨진 시간

서린.없어진 집보다,닫힌 문보다,오늘 밤엔 그 이름이 더 오래 남을 것 같았다.나는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꺼내는 순간내가 그 이름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들킬 것 같았다.웃기지.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도 아니면서,질투할 자격 같은 건 더 없으면서.그래도 사람 마음은늘 자격부터 따지고 움직이지 않았다.먼저 아팠다.그다음에야내가 왜 아픈지 생각했다.우진이 택시를 잡는 동안태준은 한 발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가까이 오지도 않았고,멀어지지도 않았다.그 애매한 거리가 더 신경 쓰였다.서린이라는 이름이 뜬 뒤로그는 이상하게 조용해졌다.아까까지는 공간이니 동선이니그 말들 사이에 나를 끼워 넣던 사람이었는데,지금은 꼭입안에 뭔가를 물고 있는 사람 같았다.뱉지도 못하고,삼키지도 못하는 표정.나는 그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그런데 자꾸 시선이 갔다.그게 제일 싫었다.우진이 말했다.“택시 3분 뒤에 옵니다.”“감사합니다.”내 목소리는 얇았다.우진은 나를 한 번 봤다.무언가를 묻고 싶어 하는 눈이었다.하지만 묻지 않았다.그 대신 아주 낮게 말했다.“괜찮으십니까.”나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괜찮냐는 말을 들으면사람은 꼭 괜찮지 않은 이유부터 떠올리게 된다.서린.태준의 휴대폰.꺼진 화면.받지 않은 전화.그 짧은 순간에 내 안에서 얼마나 많은 게 무너졌는지나는 설명할 수 없었다.“괜찮아요.”거짓말이었다.근데 너무 익숙한 거짓말이라입에 걸리지도 않았다.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가 믿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믿지 않으면서도더 묻지 않는다는 것도.그런 사람 앞에서는오히려 내가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태준은 아직도 말이 없었다.나는 그 침묵을 모른 척했다.곧 택시가 왔다.우진이 먼저 문을 열었다.나는 타기 전,아주 잠깐 태준 쪽을 봤다.정말 잠깐.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아니.정확히는내가 묻지 못한 질문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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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끝나지 않은, 말하지 못한 이름

“태준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그 말이 이상하게 천천히 들렸다.태준이.그 짧은 호칭 하나가내 귀 안쪽을 긁고 지나갔다.강태준도 아니고,강 디렉터도 아니고,대표님도 아니고.태준이.나는 그 이름이그렇게 쉽게 입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게 싫었다.더 싫은 건그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는 거였다.그녀는 아주 자연스러웠다.나만 아니었다.나만 이 회의실 문 앞에서잠깐 숨을 잃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팀장님이 웃으며 말했다.“아, 두 분 인사하셨죠? 이번 프로젝트 관련해서 외부 자문으로 잠깐 들어오셨어요. 윤서린 실장님.”실장님.나는 그제야그녀가 들고 있던 파일을 봤다.깔끔하게 정리된 제안서.얇은 손가락.군더더기 없는 베이지색 코트.마치 원래 이 자리에 있어야 했던 사람처럼조용하고 단정했다.나는 뒤늦게 손을 내밀었다.“한서윤입니다.”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멀쩡해서조금 놀랐다.사람은 이런 순간에도사회생활을 한다.속으로는 바닥까지 내려앉으면서도겉으로는 고개를 숙이고,악수를 하고,이름을 말한다.서린은 내 손을 잡았다.차가운 손이었다.“마케팅 쪽 맡고 계신다고 들었어요.”“…네.”“자료 봤어요. 방향 좋던데요.”칭찬이었다.그런데 나는 고맙다는 말이 늦게 나왔다.“감사합니다.”그녀가 웃었다.그 웃음이 예뻤다.너무 예뻐서 더 싫었다.못되게 굴 구석이 없었다.사람이 차라리 뻔뻔하거나,거칠거나,불편한 티를 내면 편했을 텐데.서린은 그렇지 않았다.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그러면서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적당한 거리에서 웃고 있었다.그 거리감이 이상하게 익숙했다.강태준이 가끔 쓰는 거리였다.가까이 다가오지 않으면서사람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거리.나는 손을 빼며 물었다.“제 얘기를… 들으셨어요?”묻고 나서 후회했다.너무 티 났다.하지만 이미 늦었다.서린은 잠깐 나를 보았다.아주 짧은 순간이었다.그 짧은 눈빛 안에무언가 스쳐 지나갔다.알고 있다는 눈빛.내가 무엇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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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밀어낸 거리, 기다리는 사람

기다릴게.그 한 줄은생각보다 오래 남았다.짧은 말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하루 종일 내 안에서 자리를 바꿔 앉았다.회의 자료 위에 있다가,커피잔 안에 있다가,퇴근길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있다가,결국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는 순간까지따라 들어왔다.기다릴게.강태준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그 사람은 늘기다리는 쪽보다기다리게 만드는 쪽에 가까웠다.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면서도대답을 늦게 했고,내가 밀어내면밀어낸 손끝까지 쫓아와 붙잡았고,내가 도망치면도망칠 길목에 먼저 서 있었다.그런 사람이처음으로 기다리겠다고 했다.그래서 더 못 믿겠다.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특히 강태준은자기가 아픈 쪽으로는 쉽게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나는 현관 불을 켜지 않은 채한참 서 있었다.집 안은 조용했다.이제 이 어둠도 낯설지 않았다.처음엔 불을 켜지 않는 게내 기분을 들키기 싫어서였는데,요즘은 그냥어두운 쪽이 더 솔직한 것 같았다.밝은 곳에서는괜찮은 척을 해야 한다.어두운 곳에서는조금 망가져도 아무도 모른다.나는 가방을 내려놓고소파에 앉았다.휴대폰은 꺼내지 않았다.가방 안쪽에서계속 신경 쓰이게 무게를 만들고 있었지만모른 척했다.읽지 않아도 아는 문장이 있었다.기다릴게.그 말은 이상하게다정한데 불편했다.내가 정말 기다리게 해도 되는 사람인지,그가 정말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인지,아직 모르겠어서.나는 한참 뒤에야 가방을 열었다.휴대폰 화면엔 새 메시지가 없었다.조금 안도했고,조금 서운했다.정말 우습다.기다리라고 해놓고정말 기다리면 또 서운하다.나는 휴대폰을 뒤집어놓았다.그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몸이 먼저 굳었다.한 번.짧게.나는 숨을 멈춘 채 현관 쪽을 봤다.또 울리지는 않았다.강태준일까.그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그러면 화를 내야 하나.문을 열지 말아야 하나.아니면 또 얼굴을 보고 흔들리게 될까.나는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걸어갔다.인터폰 화면을 켰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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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젖어든 밤, 넘지 못한 선

아침에 눈을 떴을 때,제일 먼저 생각난 건 우산이었다.현관 옆에 펼쳐둔 검은 우산.밤새 마르긴 했을까.나는 침대에 누운 채한참 천장을 보고 있었다.어제의 비 냄새가 아직 방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아니,그건 비 냄새가 아니라강태준이 남기고 간 것들일지도 몰랐다.먹고 자.우산 말려.잘 자.말들은 전부 짧았고,투박했고,어딘가 명령처럼 생겼다.그런데 그 짧은 말들이이상하게 방 안 곳곳에 붙어 있었다.식탁 위.현관 앞.휴대폰 화면.내 손끝.나는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현관으로 가자우산은 거의 말라 있었다.검은 천 위에작은 물방울 몇 개만 남아 있었다.나는 손끝으로 그 물방울을 건드렸다.차가웠다.어제 그의 손도 그랬다.빗속으로 우산을 내밀던 손.젖는 것보다 나아.지는 거 아니야.그 말이 자꾸 생각났다.말이 예쁜 사람은 아니었다.절대 아니었다.그런데 가끔은예쁘게 말하지 않아서 더 아팠다.가공하지 않은 마음이그냥 그대로 던져진 것 같아서.나는 우산을 접었다.현관 한쪽에 세워두고한참 바라봤다.돌려줘야 했다.언젠가는.그런데 이상하게오늘 당장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돌려주면어제의 그 작은 온도까지 같이 없어질 것 같았다.나는 그 생각이 싫어서일부러 씻으러 들어갔다.⸻출근길은 맑았다.어제 그렇게 비가 왔는데아침 하늘은 얄밉게도 깨끗했다.젖은 도로 위로 햇빛이 번졌다.사람들은 늘 그렇듯 바빴고,나는 그 안에서 조금 늦은 사람처럼 걸었다.회사에 도착하자마자팀장님이 나를 불렀다.“한서윤 씨, 오늘 오후에 외부 미팅 하나 추가됐어요.”나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어디 쪽이요?”“어제 그 공간 쪽. 강 디렉터 팀이랑 같이 나가야 해요.”손이 멈췄다.강 디렉터 팀.그 말은 언제나강태준이라고 들렸다.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장소는요?”“현장 답사요. 성수 쪽. 오후 네 시.”현장 답사.회사 안 회의실도 아니고,사람들 많은 미팅룸도 아니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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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가까워진 거리, 참아낸 마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현관 쪽을 봤다.검은 우산이 거기 있었다.어제보다 조금 더 말라 있었고,어제보다 조금 더 낯설었다.밤새 내 집에 서 있던 그 우산은이상하게 사람처럼 보였다.아무 말 없이문 옆에 기대 서 있는 사람.나를 보채지도 않고,따지지도 않고,그냥 거기 있는 사람.강태준 같았다.아니,요즘의 강태준 같았다.예전의 그는 저렇게 조용히 서 있지 못했다.문 앞에 왔으면 벨을 눌렀을 거고,벨을 눌렀으면 내가 열 때까지 기다렸을 거고,내가 안 열면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문 열어.그렇게.그런데 요즘 그는점점 짧아지고 있었다.먹어.자.잘 자.알았어.안 갈게.말이 줄어든 게 아니라자기 욕심을 줄이는 중인 것 같았다.그걸 알면서도나는 아직 믿지 못했다.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특히 오래 아프게 했던 방식은쉽게 고쳐지지 않는다.그런데도내 마음 한쪽에서는 자꾸 기대를 했다.오늘도 정말 참을까.오늘도 정말 물러날까.오늘도 내가 싫다고 하면정말 멈출까.확인하고 싶지 않은데확인하고 싶었다.나는 우산을 들었다.손잡이가 차가웠다.어제 빗속에서 그의 손끝이 닿았던 자리.괜히 손바닥을 한번 문질렀다.이런 것까지 기억하는 내가 싫었다.정말 별것도 아닌 손잡이 하나에어제의 온도까지 붙들고 있는 게.나는 우산을 접어 들고 집을 나섰다.오늘은 돌려줘야 했다.계속 가지고 있으면내가 계속 기다리는 사람 같을 것 같아서.⸻회사에 도착했을 때,정우진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그는 내가 들어오는 걸 보고짧게 고개를 들었다.“좋은 아침입니다.”“좋은 아침이에요.”평범한 인사였다.그래서 더 고마웠다.어제 우리는 조금 위험한 말을 했다.힘든 날에는 아무한테나 기대면 안 된다고.선을 넘고 싶지 않다고.편해서 미안하다고.그런 말을 한 다음 날에도정우진은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자기 자리에서 자료를 넘기고 있었다.그게 그 사람의 방식이었다.흔들린 말을다시 평범한 하루 안에 넣어두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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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흔들린 시선, 남겨진 온도

다음 날 아침,우산이 없어진 현관은 생각보다 허전했다.정확히는비어 있었다.분명 어제까지만 해도거기 검은 우산 하나가 기대 서 있었을 뿐인데,그게 사라졌다고현관이 이렇게 넓어 보일 일인가 싶었다.나는 신발을 신다가괜히 그 자리를 한 번 더 봤다.아무것도 없었다.그게 맞았다.돌려줬으니까.내가 돌려줬고,그는 받아갔다.그런데 이상하게돌려준 건 우산인데내 쪽에 뭔가가 남았다.물건은 사라졌고,온도만 남았다.제일 골치 아픈 방식이었다.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복도는 조용했고,아침 공기는 조금 차가웠다.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 밥.나는 화면을 보고잠깐 눈을 감았다.이 사람은 이제 정말하루를 밥으로 시작할 생각인가.웃음이 나올 뻔했다.그게 싫어서입술을 꾹 눌렀다.[아침부터?]보내자마자 읽음 표시가 떴다.[강태준]* 아침이니까.맞는 말이었다.너무 맞는 말이라 더 어이없었다.나는 답장했다.[먹을게.]곧바로 답이 왔다.[강태준]* 말고.나는 눈썹을 찌푸렸다.[뭐가 말고.][강태준]* 먹고 나서 말해.나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조금 웃고 있었다.싫었다.이렇게 쉽게 웃는 내가.나는 괜히 무표정한 얼굴을 만들었다.[귀찮아.][강태준]* 그래도.짧은 말.그래도.그 말이 너무 강태준 같아서더 반박하기 어려웠다.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가 내려왔다.문이 열렸고,나는 안으로 들어갔다.거울 벽에 내 모습이 비쳤다.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려고 했는데아무렇지 않아 보이지 않았다.나는 어제부터 계속너무 쉽게 흔들리고 있었다.잘했어.가끔이어도 돼.오늘은 안 갈게.그런 말들이내 안에 너무 오래 남아 있었다.이 정도 말에 흔들리면 안 되는데.아니,이 정도 말이라고 하기엔우리는 너무 오래 그런 말을 못 했다.그래서 더 문제였다.다시 시작하는 건 아니었다.그런데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었다.그 애매한 곳에서나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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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닿지 못한 밤, 다시 열린 문

아침부터 몸이 무거웠다.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니었다.반 캔도 다 못 마셨고,잠도 아주 못 잔 건 아니었다.그런데 눈을 뜨자마자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피곤했다.어젯밤의 메시지 때문이었다.도망 안 간 거.나한테.그 문장이이상하게 잠결까지 따라왔다.나는 침대 위에 앉아한참 휴대폰을 보았다.대화창은 어젯밤 그대로였다.[강태준]* 잘 자.[나]* 너도.짧은 끝.그런데 그 위에 있는 말들이자꾸 눈에 걸렸다.그냥 오늘 좋았어.그 정도면 됐어.도망 안 간 거.나한테.나는 화면을 껐다.계속 보면 안 될 것 같았다.사람이 어떤 문장에 너무 오래 머물면,그 문장이 사실보다 더 커진다.그러면 곤란했다.나는 아직 태준에게그렇게 큰 자리를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아니.이미 내어주고 있는지도 몰랐다.그래서 더 곤란했다.씻으러 들어가면서현관 쪽을 한 번 봤다.우산이 있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이제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그런데 이상하게빈자리가 어제보다 덜 허전했다.우산은 없어졌고,그의 발걸음도 없었고,문 앞에 놓인 봉투도 없었는데,내 안에서는 뭔가가 계속 남아 있었다.우산이 있을 때보다 더.정말 이상한 일이다.사람은 가끔사라진 뒤에 더 깊게 남는다.나는 그 생각이 싫어서세수를 오래 했다.찬물이 얼굴에 닿았다.그래도 열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출근길에 태준에게서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밥.그 한 글자가 올 줄 알았다.아침이니까.먹고 나서 말해.그런 식으로 또 올 줄 알았다.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나는 괜히 휴대폰을 확인했다.잠금 화면은 조용했다.당연히 괜찮아야 했다.어제 그렇게 많이 대화했으니까,아침까지 이어지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그런데 나는 이상하게작은 빈틈을 느꼈다.기대하면 안 되는 걸 기대한 사람처럼.나는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피곤해 보였다.그리고 조금 짜증난 얼굴이었다.누구에게 짜증이 난 건지 모르겠다.연락하지 않은 태준에게?기다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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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닿은 목소리, 닫히지 않은 문

아침에 눈을 떴을 때,제일 먼저 떠오른 건 어젯밤 보낸 마지막 문장이었다.잘 자, 태준아.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이불 안에서 한숨부터 쉬었다.미쳤나 봐.정말 미쳤나 봐.그냥 잘 자, 라고 보내면 됐는데.어제처럼 너도, 라고 보내면 충분했는데.굳이 이름을 붙였다.태준아.그 세 글자가밤새 방 안 어딘가에 걸려 있었던 것 같았다.나는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천장을 보고 있었다.휴대폰은 베개 옆에 뒤집혀 있었다.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보고 싶었다.사람이 제일 싫어지는 순간은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너무 잘 알 때다.나는 결국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잠금 화면엔 아무것도 없었다.메시지도 없고,전화도 없고,알림도 없었다.그게 이상하게 다행이었다.그리고 아주 조금 서운했다.정말 사람 마음은 왜 이렇게 못됐을까.나는 휴대폰을 켰다.어젯밤 대화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나]* 잘 자, 태준아.[강태준]* 나 오늘 못 잘 것 같아.그리고 끝.나는 그 마지막 문장을 오래 보았다.못 잘 것 같아.장난처럼 보낼 수도 있는 말인데태준이 보내면 꼭 다르게 읽혔다.그는 정말 못 잤을 것 같았다.아니.못 자길 바랐던 건지도 몰랐다.나 때문에.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나는 얼굴을 감쌌다.정말 최악이다.나는 그가 힘들지 않길 바라면서도,내가 조금은 그의 밤을 망쳤으면 했다.정확히 그만큼.내가 밤새 흔들린 만큼.비슷하게.그런 마음을 인정하는 건생각보다 추했다.그런데 부정하기엔이미 너무 늦었다.나는 대화창을 닫았다.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씻고,옷을 고르고,머리를 말리고,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만들어야 했다.사람은 이상하다.밤에는 무너질 것처럼 흔들려도아침이 되면 다시 화장을 하고 출근한다.그게 어른이라는 건지,그냥 못난 버릇인지 모르겠다.현관 앞에서 구두를 신다가나는 문득 멈췄다.어제 태준이 한 말이 떠올랐다.문.나는 도어락을 확인했다.잠겨 있었다.그걸 보는데괜히 웃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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