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30 챕터

제1화

이혼 후 5년, 최아림이 박이헌을 다시 만난 곳은 오래된 사찰인 청연사였다.맞선 상대가 일부러 잡은 약속 장소였다. 영험하기로 알아주는 이 사찰에서 기도드리면 악연은 끊어 주고 좋은 연은 이어 준다는 말이 있었다.상대는 법당마다 빠짐없이 들어가 손에 든 향 세 대를 이마 위로 받쳐 들고는 경건하게 절을 올렸다.아림은 그저 한옆에 조용히 서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무 움직임도 없이.아림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한 뒤, 대학병원에서 인턴 1년과 정신건강의학과 레지던트 4년을 거쳐 전문의가 된 사람이었다.오랜 임상 경험은 아림의 뼛속까지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을 새겨 넣었다. 어린 시절 겪은 일들까지 겹치며, 그녀는 신도, 인과응보도 믿지 않는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었다.삶이 너무 고단해서일까? 사람들은 저 가느다란 향 연기에 이루지 못한 바람을 실어 보내는 것인지도 몰랐다.하지만 무릎보다 먼저 바닥에 닿는 것은 늘 눈물이었다.“최아림 씨도 한번 올리시죠. 저희 어머니 말씀이, 둘이 같이 빌어야 효험이 있답니다.”상대가 향 한 대를 내밀었다. 대충 넘어갈 눈치가 아니었다.2초쯤 머뭇대다, 아림은 향을 받아 들었다.좌복 위에 무릎을 꿇고 불상을 올려다보는데, 가슴께가 까닭 없이 뻐근하게 아려 왔다. 향을 향로에 꽂으려던 참, 불전 앞 푸른 연기가 한 번 흔들리더니... 아이를 안은 박이헌이 최지희와 나란히 걸어오는 게 보였다.지희 역시 손에 향을 들고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이헌의 비어 있는 팔을 붙잡으려 했지만, 품에 안긴 아이가 몸을 뒤척였다. 이헌은 습관처럼 아이를 받쳐 주었고, 팔짱을 낄 기회를 놓친 지희는 하는 수 없이 아이 머리를 토닥이며, 얌전히 있으라고 곱게 눈을 흘겼다.세 사람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가족의 모습이었다. 그 사이에는 커다란 온기가 배어 나왔다.아림은 드물게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맞선 상대가 일어나라고 부르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이헌은 아림과 부부로 지내던 시절과는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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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이헌이 떠난 뒤, 아림은 차에 올라탔다. 팔이 가늘게 떨리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아림은 차 안에서 바로 잔잔한 음악을 틀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 눈을 감았다. 흔들리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아림이 겪었던 심리적 문제가 몸으로 나타난 신체화 증상이었다.아림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헌과 지희를 다시 마주한 순간, 오래도록 외면당하고 버려졌던 시간이 한꺼번에 아림의 의식 속으로 밀려들었다.아림은 어려서부터 소광섭 부부의 손에서 자랐다.소광섭 부부는 장사로 갑자기 대단한 부를 거머쥐었지만, 사고방식만큼은 케케묵은 남아 선호 사상이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어른들 눈 밖에 난 아림은 어릴 때부터 사람을 몇이나 부릴 수 있는 집에서 자라면서도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다.집안 사람들은 모두 아림을 군식구로, 돈만 축내는 쓸데없는 딸처럼 취급했다.아림이 5살이 되던 해, 남동생 소우진이 태어났다. 소씨 집안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고, 우진은 넘치도록 사랑받았다. 아림을 향한 냉대와 구박은 더 심해졌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린 우진이 한결같이 아림을 잘 따랐다는 사실이었다.식구들이 누나를 괴롭히고 깎아내릴 때면, 우진은 늘 허리에 손을 얹고 앞을 가로막고 서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우리 누나는 밥 축내는 애 아니야! 세상에서 제일 좋은 누난데, 나중엔 다들 감히 우리 누나 쳐다보지도 못할걸!”고되고 메마른 세월 속에서 남동생은 아림의 삶에 남은 유일한 빛이었다. 열 여덟 살이 되던 해, 집안 사업이 흔들리자 양부모는 모질게도 아림을 다락방에 가두고 학교까지 자퇴 처리해 수능 원서 접수조차 하지 못하게 막았다.대신 빚을 갚는 조건으로 느물거리는 중년의 졸부에게 시집보내려 했고, 아림이 아무리 빌어도 꿈쩍하지 않았다.수능 당일, 절망 끝에 아림은 삶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 그때 흙먼지를 뒤집어쓴 우진이 헐레벌떡 찾아왔다. 우진은 아림의 손을 잡고 그 집에서 도망쳤다.아림은 바라던 대로 시험을 치렀고, 단번에 수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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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아림은 살짝 멈칫했다가 옅게 웃었다.“선배, 부업으로 점집도 하세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수리에 가벼운 손바닥이 내려앉았다.엄준은 아림을 흘겨보며 안경을 밀어 올렸다.“네 상태가 이상한 거, 스스로 못 느껴? 난 네 주치의야. 나한텐 못 숨기지.”잠깐의 침묵 끝에 아림이 고개를 끄덕였다.“네.”엄준은 백요한 교수의 첫 번째 제자였다. ‘키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젊은 나이에 명성을 얻었고, 서른에 불과한 나이에 백요한 교수와 함께 수많은 굵직한 성과를 냈다. 엄준이 주로 맡는 내담자는 최상위 재벌가 사람들과 해외 왕실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아림이 뮤엔병원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뒤, 엄준은 현장을 더 보고 싶다는 명목으로 신분을 숨긴 채 아림이 개원한 병원에 입사했다.그는 아림 곁에서 함께 일했고, 때로는 선배 의사로서 아림에게 상담과 치료적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엄준은 아림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녀를 인정했고, 방향을 잡아 주었으며, 무너진 아림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엄준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아림도 없었을 것이다.엄준은 아림을 오래 바라보다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자기 자신부터 잘 지켜. 필요하면 나한테 사양하지 말고 이야기하고.”엄준은 곧 눈매를 살짝 올리며 조금 가벼운 목소리로 덧붙였다.“우리 동문 친구들이 다 너를 유난히 예뻐하잖아. 내 눈앞에서 네가 상처받으면, 다른 선배들이 해외에서 다 날아와 나를 잡아먹으려 들걸.”그 말에 아림은 웃었다. 가슴 밑바닥에 따뜻한 기운이 차올랐다.“저도 다 생각이 있어요. 선배도 일찍 쉬세요. 저는 먼저 들어갈게요.”엄준은 웃으며 아림이 멀어지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아림은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내일 재진차 방문하는 내담자의 치료 계획부터 마무리해 두고, 씻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이날 밤 아림은 깊게 잠들지 못했다.기묘한 꿈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기억들이 뒤엉켜 흘러가더니, 마지막에는 구청 민원실에서 이헌을 처음 만났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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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아림은 걸음을 멈추고 헛웃음을 흘렸다.“우리 부모님께서 박 대표에게 충분히 설명했을 것 같은데요?”로아의 친부모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로아는 아직 갓난아이였고, 곧 보육원으로 보내질 처지였다. 아림은 혼자 남겨진 아이를 차마 외면하지 못해 입양하기로 결심했다.이헌은 아림을 몇 초 바라보다가 담배를 눌러 껐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아림 곁까지 걸어왔다.“그때 우리는 임신 준비 중이었어. 임신했을 가능성이 있었고, 로아 나이도 딱 맞아떨어져. 의심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이헌의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살피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여전히 윗자리에 선 사람의 태도였다.“확인할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만, 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어.”아림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속에서 치미는 짜증을 눌러 앉힌 채 이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아니야.”“로아의 출생에 대해선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아. 당신이 어떻게 확인하든 내가 막을 수도 없겠지. 다만 반대로 생각해 봐. 우리 부모님이 최지희를 얼마나 아끼는지 당신도 알잖아.”“로아가 정말 당신 아이였다면, 두 분이 나와 로아를 어디 깊숙한 곳에 숨겼을 거야. 우리를 밖으로 내보내 당신과 최지희의 결혼에 흠집을 내게 둘 리 없잖아.”아림은 팔짱을 끼고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스쳤다.“게다가 당신은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지? 내가 바람난 전남편의 아이라도 낳았을까?”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이헌은 서늘한 눈빛으로 아림을 깊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팽팽한 침묵 사이로 아래층에서 지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밥이 다 됐어. 얼른 내려와.”아림은 이헌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마당에서 지희가 유빈을 안은 채 옥상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곱게 다듬은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가득했다.아림은 무심히 시선을 거두고 돌아섰다.막 방으로 들어서려던 때, 뒤에서 이헌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로아가 네 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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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뒤에는 한눈에 봐도 값비싼 한정판 마이바흐 한 대가 서 있었다.기사가 먼저 내려 차를 살폈다. 아림도 먹먹해진 가슴을 문지르며 문을 열고 내렸다. 상대는 정중했다. 상태를 확인한 뒤, 아림이 먼저 차선을 바꾸며 끼어든 부분이 있으니 사진을 찍어 두고 보험사와 경찰이 과실을 확인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아림은 시간을 확인했다. 미간이 깊게 좁혀졌지만, 어쩔 수 없이 길가에서 기다렸다.무심코 마이바흐 뒷좌석을 스치듯 보았을 때, 한 남자의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묘하게 낯이 익었다.아림은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비서에게 메신저로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고 업무를 배정했다.집중하고 있던 때, 맑고 좋은 우디 향기가 코끝에 닿았다. 이어 뼈마디가 반듯한 손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금박이 박힌 명함이 들려 있었다.“최아림 씨, 오랜만이에요.”아림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곁에 서 있던 기사가 언제 바뀌었는지, 그 자리에는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남자는 짙은 붉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셔츠 깃은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위로 살짝 올라간 눈꼬리에는 장난스럽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높은 콧대와 예쁜 입술 선은 지적이면서도 귀한 느낌을 줬다. 영리하고 사람을 홀리는 여우 같은 남자였다.아림은 명함을 훑었다. 잠시 뒤에 이 사람에 관한 기억이 떠올랐다.권창현. 금령시 재벌가 권씨 집안의 외아들이자, 현재 HG그룹 CEO. 몇 년 전 아림이 아버지 최태성을 대신하여 참석한 경매장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권창현은 마음에 드는 물건을 보면 값을 따지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였다. 잊고 싶어도 잊기 어려운 인물이었다.다만 권씨 집안과 박씨 집안은 오랜 경쟁 관계였다. 권창현과 박이헌도 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최씨 집안은 박씨 집안과 가까웠으니, 자연히 권씨 집안과는 거리를 두었다.이런 방식으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아림은 생각을 정리하고 명함을 받아 들며 예의 바르게 웃었다.“권 대표님, 정말 죄송하게 됐네요.”“제가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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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아림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엄준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탕비실로 향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마시기 좋은 온도의 케모마일 차 한 잔이 아림의 책상 위에 놓였다.“안색이 안 좋은데,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는 게 어때? 남은 케이스 진료는 내가 할게.”“괜찮아요.” 아림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책상 위에 있던 파일을 펼쳤다. “2시 30분에 한 분 더 있어요. 이분까지만 보고 오늘은 마무리할게요.”엄준은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최근 학술지에 실린 새로운 치료법 이야기를 꺼냈고, 이어 옥상에 올라갔던 내담자의 후속 치료 계획으로 화제를 돌렸다.엄준과의 드문드문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아림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그 변화를 알아챈 엄준이 그제야 목소리를 낮춰 일렀다.“제니, 뭐든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마.”찻잔의 김은 이미 거의 흩어져 있었다. 아림은 눈을 내리깔고 잔 언저리만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조용한 시간이 몇 초 더 이어졌다. 엄준이 무언가 더 말하려는데, 핸드폰이 짧게 떨렸다.그는 화면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전화 좀 받고 올게. 곧 올 두 시 반 내담자와의 상담 준비도 해야 할 테니, 방해하지 않을게.”말을 마친 엄준은 돌아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아림은 텅 빈 진료실에 잠시 혼자 앉아, 남은 식은 차를 말없이 비우고 파일을 펼쳐 기록을 읽기 시작했다.그때 비서 하세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내담자분 오셨어요.”“응, 들어오시게 해요.”아림은 마음을 다잡았다. 표정은 어느새 평소의 분명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와 있었다....오후 4시, 오전 내내 바빴던 아림은 정확히 권씨 집안 본가 앞에 도착했다.오래 집을 관리해온 집사 김대철이 반갑게 아림을 맞았다. 목소리에는 웃음이 묻어 있었다.“원장님, 드디어 오셨군요. 회장님이 한참 기다리셨습니다. 계속 원장님 얘기만 하셨어요.”HG그룹 회장 권하균은 아림의 VIP 내담자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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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말을 잇는 권하균의 태도가 자못 정중해졌다.권하균은 목을 가다듬고 점잖게 말했다.“최 원장, 내가 소개하지. 이쪽은 변변치 못한 내 손자, 권창현이네. 창현아, 이분은...”“최아림 씨죠. 할아버지 주치의가 최아림 씨일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창현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먼저 말을 받았다.창현은 할아버지가 새로 바꾼 주치의가 전문성이 뛰어나고 책임감도 강하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은 적이 있었다. 언제 한번 직접 인사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아림일 줄은 몰랐다.‘우리, 인연이 보통이 아닌데.’아림은 미소로 답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난감했다.“됐어, 됐어. 다들 거기 서서 뭐 하나? 창현아, 최 원장 안쪽으로 모셔라!” 권하균의 눈에는 웃음이 가득했다.‘이 낌새를 보아하니, 둘 사이에 뭔가 이어질 만한 끈이 있는 모양이군.’ 옅은 미소를 띤 아림을 사이에 두고, 권하균과 창현은 스스럼없이 담소를 이어 갔다.이람의 착각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늘 눈 덮인 산봉우리처럼 차갑고 고고하던 이헌의 얼굴에, 순간 어색한 기색이 스친 것 같았다.“회장님, 괜찮습니다. 저는...” 아림이 사양하려 했다.“할아버지가 청하시는데 그냥 계세요. 마침 식사 때도 됐고요. 지금까지 할아버지 치료해 주신 것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하시고, 식사하고 가시죠.”창현까지 살뜰히 붙들었다.창현은 이헌과 아림 사이의 분위기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이헌은 사업 협력 이야기를 하러 온 사람이었고, 이야기가 끝나면 떠날 터였다. 아주 난처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말이 여기까지 나왔으니 아림은 더 거절하기 어려웠다. 권하균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그럼 실례하겠습니다.”그 말을 듣자 권하균은 아주 기뻐했다. 곧 김대철에게 식사를 준비하라고 일렀다.이헌과 창현은 서재로 가서 사업 협력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림은 딱히 할 일이 없어 권하균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권하균은 별로 낯을 가리지 않았다. 창현의 어린 시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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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림의 바람대로 롤스로이스는 가장 가까운 사거리의 갓길에 멈춰 섰다.아림이 차 문을 열자 밤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가늘게 떨리던 팔이 조금씩 진정되었고, 막혔던 숨도 트였다.그리고 발이 땅에 닿았을 때, 뒤에서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다.“아림아.”아림은 잠깐 멈췄다.“데려다줘서 고마워.”차 문 닫히는 소리는 아주 가벼웠다.검은 롤스로이스는 아림의 뒤에 오랫동안 서 있다가 떠났다. 하지만, 아림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사흘 뒤.아림은 병원에서 권하균의 최근 상태 평가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었다.핸드폰이 두 번 짧게 울렸다.어머니 민혜정이 보낸 메신저였다.[아림아, 토요일에 로아 데리고 집에 와서 밥 먹자. 네 생일 축하해 주려고.]뒤에는 케이크 이모티콘도 붙어 있었다.아림은 그 문장을 잠시 바라보았다.‘갑자기 내 생일을 챙겨 준다니...’‘내 친부모가 먼저 생일을 챙겨 준 게 언제였더라?’‘아, 맞다. 내가 최씨 집안에 막 돌아온 그해였지.’다만 지희가 몇 번 울먹이기만 해도, 집안의 시선은 기다렸다는 듯 그 ‘가엾은 동생’에게로 향했다.6년이 지난 오늘, 어머니가 먼저 메시지를 보내 아림의 생일을 챙기겠다고 했다.아림의 마음속에서 오래 팽팽히 당겨져 있던 줄이 아주 조금 느슨해졌다.아림은 한 글자로 답했다.[네.]...토요일 저녁, 아림은 연한 색 원피스를 입었다.머리카락을 진주 핀 하나로 느슨하게 틀어 올리자, 희고 가는 목선이 드러났다.화장은 옅었고, 수수하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해 보였다.로아는 핑크빛 공주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반짝이는 작은 왕관을 썼다. 얌전하게 아림의 손을 잡았다.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서자, 안쪽의 웃음소리와 장난스러운 말소리가 한꺼번에 귀로 밀려왔다.지희는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소파에 기대어 민혜정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정교한 2단짜리 슈거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핑크와 흰색이 섞인 케이크에는 설탕으로 만들어진 장미가 가득 장식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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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엄마, 저 속이 좀 안 좋아요. 낮에 병원에서 먹은 게 잘못됐나 봐요.” 접시를 들고 돌아온 아림이 담담히 말했다.“오늘 생일인데 함께 축하하지 못할 것 같아요. 로아 데리고 먼저 돌아갈게요.”“언니, 혹시 기분 상했어요?”“엄마한테 화내지 말아요. 이헌 오빠가... 오빠가, 제가 그동안 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고, 다 같이 밥 한 끼 하자고 한 건데, 하필 날짜가 언니 생일이랑 겹친 것뿐이에요.”지희가 다정하게 붙드는 척, 손끝엔 티 나지 않게 힘을 실었다.“아니야.” 아림은 입꼬리를 조금 올리고 다시 팔을 빼냈다. 로아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박이헌이라... 그럼 놀랄 것도 없지.’‘최지희는 그 사람이 애타게 못 잊던 첫사랑이니까.’...아림은 로아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뒤, 먼저 아이를 따뜻한 물로 씻겼다. 그러고는 곧장 주방으로 들어갔다.이 시간까지 두 사람은 밥을 먹지 못했다. 로아는 틀림없이 배가 고플 것이다.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아림은 손을 닦고 나가 문을 여니, 유니폼 차림의 배달 기사였다.아림이 상자를 열어 보니, 안에는 우윳빛 무스케이크 하나와 큼직한 흰 리시안셔스 꽃다발이 들어 있었다.꽃다발 사이에는 새하얀 카드 한 장이 꽂혀 있었다.보낸 사람의 이름은 없었다. 다만 인쇄체로 짧은 문장 하나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생일 축하해]아림이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엄준이었다.아림의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스승인 백요한 교수 외에는 선배 엄준 정도였다.“와, 엄마. 너무 예뻐!”로아가 촉촉한 눈망울을 깜빡였다. 눈빛 가득 기대가 어려 있었다.아림은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이 조금은 나아졌다.“가서 손 씻고 와. 함께 케이크 먹자.”로아가 통통 뛰며 손을 씻으러 가자, 아림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상대가 받았다.[제니?]수화기 너머 엄준의 목소리 뒤로, 어수선한 소음이 희미하게 섞여 들렸다.“선배, 꽃이랑 케이크 잘 받았어요. 마음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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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송금을 마친 뒤, 아림은 핸드폰 화면을 테이블에 엎어 두고, 주방으로 가 무스케이크를 한 조각 잘랐다.블루베리는 달았다.케이크를 먹고 뒷정리까지 마친 뒤, 아림은 로아를 재우고 씻은 다음 침실로 들어왔다. 그제야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송금 메시지 아래는 조용했다. 아무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아림은 다시 송금 내역을 눌러 보았다.상세 화면에는 아직 상대가 돈을 받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받기 전’이었다.아림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이헌과 더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핸드폰을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고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불을 끄고, 잠들었다....같은 시각.이헌은 서재에서 인수합병 관련 서류를 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 핸드폰 화면이 한 번 밝아졌다.이헌은 곁눈으로 핸드폰 화면에 뜬 알림을 보았다.아림이 20만 원을 보냈다는 알림이었다.그리고 그 아래 적힌 송금 메모는 단 네 글자였다.케이크값.이헌은 그 몇 글자를 오래 바라보았다.표정은 여전히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늘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빛 깊은 곳에 무언가가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신형 인공지능 로봇이 쟁반을 받쳐 들고 들어와, 갓 데운 우유를 책상 모서리에 내려놓았다. “주인님, 취침 준비하실 시간입니다.”차가운 기계음이 이헌의 생각을 끌어냈다. 핸드폰 화면에 멈춰 있던 길고 단정한 손가락은 끝내 화면을 누르지 않았다. 이헌은 잠금 버튼만 눌렀다.다만 그 밤, 서재의 불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아림이 송금한 내역 역시 끝까지 ‘받기 전’이라는 상태로 남아 있었다....사흘 뒤 오후, 금령 컨벤션센터.‘제7회 세계정신건강의학 국제포럼’ 개막식이 막 끝난 참이었다.행사장 곳곳에는 각국에서 온 정신건강의학계 인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티타임 공간은 어느새 사람들로 붐볐다.아림은 검은색 치마 정장 차림으로 갈아입고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틀어 올린 상태였다. S국에서 온 이도민 교수가 공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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