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5년 만에, 박이헌이 돌아왔다. 청연사에서 다시 마주친 그날, 이헌은 새롭게 맞이한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최아림의 맞선 장소에 나타났다. 부부로 살았던 단 1년. 미친 듯이 얽히고, 지독하게 무너졌던 기억들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 이헌은 여전히 구름 위의 달처럼 서늘하고 고고했다. 다만 아이를 안은 손목에 예전엔 없던 염주 한 줄이 걸려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림을 스쳐 지나가던 이헌은, 뒤로는 번번이 아림의 맞선 자리를 망쳐 놓았다. 아림의 뜻 따위는 묻지도 않은 채, 이헌은 다시 그녀의 삶 속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묻어 두었던 상처가 들끓기 시작했고, 아림은 또다시 이헌의 손에 붙들려 끝없는 심연으로 끌려갈 것만 같았다. 끝내 참지 못한 아림이 그에게 꺼지라고 소리친 순간, 이헌은 오히려 낮게 웃었다. 물러서기는커녕 그녀를 구석으로 몰아붙인 채, 붉게 가라앉은 눈으로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신경 쓰인다고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View More로아는 소파에서 뛰어내렸다. 상자 주위를 한 바퀴, 또 한 바퀴 돌았다. 신이 난 로아의 작은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로봇 친구야!”주방에서 과일을 씻던 아림이 기척에 나와 보니, 거실의 포장 상자와 그 곁에 심상한 얼굴로 선 이헌이 한눈에 들어왔다.미간이 좁혀지며, 걸음이 잠깐 멎었다.“지금 이게...?”“오해하지 마. 마침 회사 신제품이 나와서, 이건 로아 주는 거야. 아... 아저씨의 성의라고 해 두지.”‘아빠’라는 두 글자를, 이헌은 억지로 삼키고 ‘아저씨’로 바꿨다. 그는 가끔 자신과 아림의 결혼이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잊곤 했다.이헌의 목소리는 여전히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로아가 몹시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가슴 깊은 곳 어딘가가 먹먹해졌다.로아가 촉촉한 큰 눈을 깜빡이며 두 손으로 입을 채, 놀람과 기쁨 가득한 얼굴로 아림을 올려다보았다.“엄마, 진짜 로아한테 주는 거랬어. 뜯어봐도 돼?”아림이 대답하기도 전에 계단 쪽에서 지희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빠.”지희는 연노란색 홈웨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느슨하게 올려 묶었고, 안색은 괜찮아 보였다.그리고 시선은 얼어붙은 듯 서 있는 아림과 들뜬 로아를 스치고, 이내 고급 포장 상자에 닿았다.“이거 신제품이야?”지희는 상자에 찍힌 로고를 손끝으로 쓸며 웃었다.“오빠도 참 아이를 너무 예뻐한다니까. 우리 유빈이 새 로봇 갖고 싶다고 한마디한 것뿐인데 바로 사람 시켜 보냈네.”로아는 큰 눈을 깜빡였다. 얼굴에 피었던 웃음이 그대로 굳었다.아림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유빈은 이헌의 ‘첫사랑’이 낳은 아이였다.다만 로아가 마음 쓰였다. 딸이 속상해할까 봐, 그게 겁났다.이헌의 미간이 알아채기 힘들 만큼 좁아졌다. “유빈이는 이미 많잖아. 집에만 적어도 네다섯 대는 있고. 이건 로아 거야.”“로아한테... 준다고?”지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목소리가 높아졌고, 말투에는 억울함이 묻어났다.“유빈이 그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그걸
방금 민혜정이 아림을 부른 말에도 반가움보다는 의아함에 가까웠다.왜 이 시간에 아림이 여기 있느냐고 묻는 듯한 소리였다.창현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곧 시선을 거두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올린 채 아림을 바라보았다. 말투는 아까보다 더 가벼워졌다.“아림 씨, 아까 저랑 같이 식사하기로 했잖아요. 더 늦으면 음식 다 식어요.”그는 자연스럽게 아림의 숄더백을 받아 자기 어깨에 걸쳤다.민혜정이 몇 마디 더 캐물으려 했지만, 창현은 벌써 차 문을 열고 아림에게 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창현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씨 집안 사람들을 대하는 차갑고 거리감 있는 태도와 아림을 대하는 부드럽고 세심한 태도는 누가 보아도 알 정도로 선명하게 대비됐다.이헌의 검은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늘 감정이 없던 듯한 준수한 얼굴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긴 것 같았다.지희는 이헌 곁에 오래 있었기에 그의 성향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지금 이헌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도 금방 알 수 있었다.지희의 눈이 어두워졌다. 곧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숨이 가쁜 듯 말했다.“오빠, 나... 나 너무 힘들어... 숨이 잘 안 쉬어져...”‘최아림 그 몹쓸 것에게 이헌 오빠를 또 빼앗길 순 없어!’‘오빠도, TG그룹 안주인 자리도, 다 내 거여야 해!!’지희의 ‘숨이 안 쉬어진다’라는 말은 모두의 시선을 단번에 돌렸다.민혜정이 가장 먼저 당황했다.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연달아 물었다. 목소리에는 진한 걱정이 묻어났다.“지희야! 왜 그래? 아까 너무 빨리 걸었니?”이헌은 고개를 돌려 지희의 허리를 받쳤다. 눈빛 하나에 기사가 곧바로 차를 가지러 뛰었다.같은 시간에, 뒤쪽의 마이바흐 문은 이미 닫혔다.아림과 창현은 떠났다.이헌은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며칠 뒤.요 며칠 이헌은 자꾸 이유 없이 딴생각에 빠졌다. 서류를 볼 때도, 회의 중에도 그랬다.그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잔뜩 구겨진 미간을 짚고 있는데, 비서 기찬이
아림은 잠깐 멈췄다. 눈빛은 맑았지만 철저히 거리감을 유지했다.“걱정 고마워. 나 괜찮아.”그 말을 남기고 바로 나갔다.이헌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곧 마음을 다잡고 다시 서류를 펼쳤다.겨우 두 줄을 읽었지만, 단어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생각이 자꾸 흩어졌다.지난 이틀 동안 진료 구역에서 아림과 마주칠 때마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나 병실에서 필요한 말만 주고받을 때나,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동시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뚝딱거리는 감각도 함께 찾아왔다.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하면, 서로를 방해하지 않아도 평소보다 숨이 편했다.그런 느낌은 평생 냉정하고 절제된 규칙 속에서 살아온 이헌을 처음으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이틀 뒤 오전.간호사실에서 서명을 마친 아림은 진료실로 돌아가 흰 가운을 벗어 걸고 퇴근 준비를 했다.어제 야간 당직이었던 터라, 인수인계만 마치면 바로 퇴근할 수 있었다.건물 정문을 나서자마자, 멀리 익숙한 마이바흐가 보였다. 차 앞에는 짙은 네이비색 캐주얼 차림의 창현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흰색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오늘의 차림은 사업장에서 보이던 날카로운 분위기가 덜했다. 대신 느긋함과 여유, 또 지나치게 눈에 띄는 분위기가 있었다.아림은 피식 웃음이 샜다. 왠지 지금 창현의 모습은 꽁지깃을 활짝 편 공작새 같았다.아림이 나오자마자 창현은 바로 그녀를 알아봤다. 입가에 웃음이 번졌고, 긴 다리로 몇 걸음 만에 다가와 꽃다발을 내밀었다.“퇴근이에요?”아림이 꽃다발을 받아 향기를 맡으며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오늘 야간 당직이라는 소식을 입수해서, 퇴근길 마중 나왔죠.” 창현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빛은 그윽했다.“아림 씨 아직 식사 전일 것 같아서 식당에 자리도 잡아 놨어요. 전망 좋은 자리로... 시간 좀 내 주시죠?”“권 대표님...”아
점심때가 되자 최태성 부부가 도착했다.민혜정은 보온통을 들고 있었다. 평소의 단정한 여유는 온데간데없고, 긴장과 걱정이 얼굴 가득했다.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눈시울을 붉히고 지희의 뺨을 어루만졌다.“살이 많이 빠졌네.”최태성은 뒤따라 들어왔다. 말끔한 정장 차림에 표정은 엄했지만, 눈에 담긴 걱정은 숨기지 못했다.이어 지희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여기가 아림이 병원이니 마음 놓고 지내라. 필요한 게 있으면 아림이에게 말하고.”그 한마디로 최태성은 지희를 아림에게 맡겼다.지희는 병상에 기대어 앉아 가족들에게 둘러싸였다. 눈가를 붉힌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괜찮아요. 그동안 오빠가 잘 돌봐 줬어요.”말투에는 진한 어리광이 묻어났다.민혜정은 마음이 아파 어쩔 줄 몰랐다. 침대 옆에 앉아 지희의 손을 꼭 잡고, ‘우리 보물 같은 딸이 고생했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최태성은 곁에 서 있었다. 말수는 적었지만, 지희를 보는 눈에는 아낌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병실 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아림은 흰 가운을 입은 채 문가에 서 있었다. 발이 바닥에 붙어버리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 못했다.손에는 입원 서류가 들려 있었다. 지희의 서명을 받으려던 참이었다.하지만 병실 안에 가득한 온기를 보자, 차마 끼어들기가 어려웠다.문가에 선 아림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민혜정은 오래 끓인 전복죽을 지희에게 떠 주며 말했다.“엄마가 아침 내내 끓였어.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지희의 시선이 무심코 문가를 스쳤다. 입꼬리에 도발적인 미소가 어렸다. 곧 두 손으로 그릇을 받아 한입 먹고 감탄했다.“엄마가 끓여 준 건 역시 최고예요!”‘흥, 몹쓸 것. 내 엄마를 빼앗아 가면 뭐 해?’‘지금 네 엄마가 제일 아끼는 건 결국 나잖아?!’“맛있으면 엄마가 내일도 해줄게.”민혜정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목소리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다정했다.“왜 안 들어와?”이헌이 먼저 문가에 선 아림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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