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왕을 업어친 궁녀가 있다. 그것도 승은을 앞두고. 타고난 반사신경 때문에 몸이 먼저 움직이는 궁녀 연화는 우연한 사건으로 강녕전에 들어가게 된다. 가까워질수록 자꾸만 업어치기를 당하는 왕 이헌과, 그런 줄도 모르고 태평한 연화. 웃음으로 시작된 인연은 궁중의 권력 다툼과 서로를 향한 진심 속에서 조금씩 사랑으로 변해 간다.
View More"그 밥을 다 먹니?"
연화는 대답 대신 마지막 밥 한 숟갈을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꿀꺽.
빈 그릇이 됐다.
옆에 앉아 있던 궁녀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넌 아까도 한 그릇 먹었잖아.""응."
"배 안 불러?"
"아직."
연화는 자연스럽게 맞은편 궁녀 상으로 손을 뻗었다. "고기 남기지?""야!"
궁녀가 황급히 젓가락으로 막았다. "그건 내 거야!""안 먹잖아."
"먹을 거거든!"
"방금 한숨 쉬었잖아."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연화는 아쉬운 듯 손을 거뒀다.궁녀들이 혀를 찼다.
"기집애가 사내처럼 먹기는.""많이 먹어야 오래 살지."
"그래서 넌 왜 그렇게 오래 살고 싶은데?"
연화는 잠시 생각했다. "출궁해서 떡집 해야지.""또 떡집이래."
"떡집 좋잖아."
"네 머릿속엔 떡밖에 없냐?"
"곶감도 있어."
궁녀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지만, 연화는 진지했다.궁에 들어온 지 삼 년.
그동안 깨달은 건 두 가지였다.
첫째.
세상에 공짜는 없다.
둘째.
궁에는 공짜 밥이 있다.
게다가 엄청 맛있다.
연화는 이게 너무 좋았다.
--- "야." 옆 궁녀 하나가 슬그머니 물었다. "근데 너 진짜 관심 없어?""뭐."
"승은."
연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싫어.""왜?"
"귀찮아."
"이년아."
궁녀들이 동시에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전하께 승은 드는 게 귀찮다고?""응."
"너 미쳤어?"
연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좋아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그럼?"
"전하잖아!"
연화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잠시 고민했다.그러곤 진심으로 물었다.
"전하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데?""..."
"..."
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궁녀들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연화를 쳐다봤다.
"너 진짜 몰라?""응."
"궁에 들어온 지 삼 년인데?"
"멀리서만 봤어."
"세상에."
연화는 억울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느라 바빴다. 밥 먹고.일하고.
간식 먹고.
또 일하고.
곶감 나오면 줄 서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끝나는데, 왕 얼굴 볼 틈이 어디 있나.연화는 시선을 떡에 고정한 채 말했다.
"난 존재감 없이 지낼 거야." 궁녀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존재감이 없다고?
아침마다 장작 두 묶음씩 들고 다니고, 궁녀 셋이 드는 물동이를 혼자 옮기고.
남의 반찬 뺏어 먹다가 쫓겨다니는 애가?
--- 문이 벌컥 열렸다.상궁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뭐 하고 있느냐!" 궁녀들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연화도 따라 일어나다가 마지막 남은 떡 하나를 얼른 입에 넣었다.
상궁의 시선이 연화에게 잠시 머물렀다 이내 못 본 척 넘어갔다.
아마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창고 정리를 도울 사람이 필요하다." 궁녀들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창고.
그 말은 곧 무거운 짐이라는 뜻이었다.
"수라간 뒤편 창고 말씀이십니까?""그래."
상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쌀자루와 장작이 밀려 있다. 오늘 안으로 옮겨야 한다." 순간 궁녀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모였다.연화.
"오늘 곶감 나오는 날인데..." 연화가 작게 중얼거리자 상궁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라 하였느냐.""아무것도 아닙니다."
"창고 일 끝내고 먹어라."
"..."
끝났다.곶감은 끝났다.
창고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분명 남는 게 없을 것이다.
연화는 인생의 시련을 마주한 사람처럼 고개를 떨궜다.
--- 상궁에게 한바탕 혼난 뒤, 연화는 수라간 뒤편 창고로 향한다.곶감은 결국 못 먹었다.
생각할수록 분했다.
"하..." 한숨을 쉬며 어깨에 짐을 올렸다.쌀자루였다.
궁녀 둘이 들어도 버거운 무게지만, 연화는 익숙하게 번쩍 들었다.
창고와 수라간을 잇는 길은 한산했다.
궁녀들도 잘 안 다니고, 상궁들은 더더욱 안 다닌다.
그냥 일꾼들만 쓰는 길이었다.
연화는 쌀자루를 멘 채 걷다가 문득 멈췄다.
앞에 누가 서 있었다.
높은 나무 아래, 그것도 혼자.
'누구지.' 복색은 좋았다.꽤 높으신 분 같은데... 얼굴은 처음 본다.
"비켜주실래요?" 연화가 말했다.상대는 눈을 깜빡였다.
"뭐라고?""길이 좁아서요."
연화는 쌀자루를 살짝 들썩였다. "이거 무거워요." 남자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지금 자신에게 길을 비키라는 건가.
"네가 돌아가면 되지 않느냐.""싫은데요."
"..."
"멀어요."
잠시 침묵.남자는 결국 옆으로 물러났다.
연화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그러곤 지나가려 했다.
그때 쌀자루 끝이 문설주에 걸렸다.중심이 틀어졌다.
연화는 괜찮았지만 문제는 남자였다.
퍽- 거대한 자루가 기울며 그대로 남자 쪽으로 떨어졌다. "전하!" 어디선가 비명이 들렸다.그제야 연화는 눈을 깜빡였다.
전하? 그 순간 반사적으로 몸이 먼저 움직였다.탁.
남자의 팔을 잡고 확 끌어당긴다.
원래라면 자루가 떨어질 자리.
대신 왕이 연화 쪽으로 확 끌려왔다.
너무 세게...
"...""..."
연화의 품 안에 왕이 들어와 있었다.그리고 조금 멀리서,
내관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전하..." 연화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처음으로 깨달았다.
'전하였네.'아침부터 공주의 심기는 썩 좋지 않았다. "이상하단 말이지." 시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공주는 턱을 괸 채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예?""요즘 이상해." 상궁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왕을 두고 이상하다 말하는 사람이 궁 안에 몇이나 되겠는가.공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약도 주고.""궁녀 하나를 못 빌려준다고 하고. 분명 이상해." 그러다 문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확인해 봐야겠어." --- 연화는 마당을 쓸고 있었다.공주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연화.""예, 공주마마.""너 힘 세지?" 연화는 빗자루를 든 채 잠시 고민했다. "...센 것 같사옵니다." 이제 부정해도 의미 없을 거 같았다.공주가 피식 웃었다. "화분도 들고, 활도 쏘고.""...""웬만한 장정도 이겨먹겠던 걸?" 연화는 괜히 머쓱해졌다. "...송구하옵니다.""왜 맨날 송구해." 공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팔씨름도 잘하겠네." 순간 연화의 표정이 굳었다. "...팔씨름이옵니까?""응.""..."'갑자기?'"소첩은 그런 것은..." 잠시 말을 고르던 연화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해 본 적이 없사옵니다." 속으로는 작게 중얼거렸다. '...있긴 한데.' 공주는 그런 속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오늘 처음 해 보면 되겠다." 연화는 괜히 불안해졌다. --- 정자에는 다과상이 차려져 있었다.헌은 서책을 펼친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공주가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오라버니.""...""심심해요.""그러냐.""네."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공주가 활짝 웃었다. "팔씨름해요." 헌의 손이 서책 위에서 멈췄다. "...싫다.""왜요?""귀찮다." 공주는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못 하시는 거네요." 헌은 서책을 다시 넘겼다. "아니다.""그럼 하세요.""...""
다음 날 아침.강녕전에도 평소와 같은 아침이 찾아왔다.궁녀들은 분주히 움직였고, 상궁은 하나씩 일을 나누어 주었다."연화.""예, 상궁마마.""오늘도 강녕전으로 차를 올리거라.""...예."연화는 찻상을 받아 들었다.강녕전.요즘 들어 자주 오가는 곳이었다.'오늘은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안은 고요했다.헌은 웬일로 서책 없이 사색에 잠긴 표정이었다.연화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찻잔을 놓고 따뜻한 차를 따랐다.은은한 찻내음이 방 안을 채웠다."...전하."차를 모두 올린 연화가 허리를 숙였다."물러가 보겠사옵니다."그 순간이었다.열어 둔 창으로 바람 한 줄기가 스며들었다.흩날린 머리카락이 연화의 볼을 스치며 눈가를 덮었다.연화는 양손으로 빈 찻상을 받쳐 들고 있었다.잠시 손을 뗄 수가 없었다.그 짧은 순간.헌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손끝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귀 뒤로 넘겼다.손이 부드러운 머리칼을 타고 귀를 살짝 스쳤다.연화는 움찔했다. 심장이 조금 동요하는 듯 했다....방 안이 조용해졌다.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금세 이해하기 어려웠다.헌 역시 손을 거두며 아주 잠깐 움직임을 멈췄다.'...''내가 무얼 한 것이지.'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연화였다.황급히 한 걸음 뒤로 물러난 그녀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송구하옵니다."'송구? 뭐가 송구하냐 넌.'홀로 자책하는 연화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뭔가 어색했다.괜히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이미 조금 식어 있었다.그제야 그의 시선이 연화의 손등으로 향했다.어제 생긴 긁힌 자국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손."연화가 고개를 들었다."...예?""다친 곳이다."연화는 그제야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아.""괜찮사옵니다.""아프지 않습니다."헌은 말없이 옆에 놓여 있던 작은 약합 하나를 집어 연화 앞으로
칼이었다.사내의 손이 허리춤에서 칼자루를 움켜쥐는 순간.연화의 눈빛이 달라졌다. '안 돼.' 생각은 그뿐이었다.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움직였다.사람들 틈을 가르며 뛰어든 연화가 사내의 팔목을 낚아챘다.사내가 놀란 얼굴로 돌아섰다. "이년이!" 욕설과 함께 팔을 뿌리치려는 순간.연화는 그대로 허리를 숙여 그의 몸을 걸었다.쾅!사내의 몸이 허공을 크게 한 바퀴 돌더니 그대로 돌바닥에 떨어졌다.손에서 놓친 칼이 데구르르 굴러 사람들 발치에 멈췄다.장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사람들은 숨도 쉬지 못한 채 연화와 쓰러진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연화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헉."'또 몸이 먼저 나갔네.' 사내를 내려다보던 연화가 작게 중얼거렸다. "...송구하옵니다." 이미 정신을 잃은 사내는 대답이 없었다.무관은 재빨리 칼을 주워 들었다.칼날은 이미 반쯤 뽑혀 있었다.조금만 늦었더라면 큰일이 날 뻔했다.관리들이 달려와 사내를 결박해 끌고 갔다.장터는 조금씩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연화는 조심스레 헌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거듭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헌이 연화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송구하다는 것이냐." 연화는 머뭇거리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소란을 피웠사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무관은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왕의 목숨을 구해 놓고.정작 본인은 장터를 뒤집어 놓은 것만 걱정하고 있었다.헌은 짧게 말했다. "...됐다." 그 한마디에 연화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다행이다. 혼나는 줄 알았네.' 세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시장 끝자락으로 접어들 무렵.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더니 작은 애벌레 하나가 툭 떨어졌다.공교롭게도 헌의 어깨 위였다.헌의 걸음이 딱 멈췄다. "..." 말은 없었다.그런데 어느새 연화의 뒤로 반 걸음 물러나 있었다.연화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봤다. "...나리?" 헌은 아무 말 없이 자기 어깨
궁문을 벗어나자마자 연화의 걸음이 저도 모르게 느려졌다.높은 담장 안에서만 살아온 연화에게 궁 밖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노점마다 사람들이 북적였고, 상인들은 저마다 목청을 높였다. 갓 지은 떡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러왔고, 아이들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골목을 뛰어다녔다.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두리번거렸다. '세상에....''사람이 이렇게 많구나.'"앞을 보며 걷거라." 무관의 말에 연화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예." 얼른 걸음을 옮겼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이번에는 엿장수가 커다란 가위를 '딱!' 하고 부딪치는 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조금 더 걸어가자 작은 대야 안에서 병아리들이 삐약거리며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연화의 입가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귀엽다.'"연화.""...예.""앞.""...송구하옵니다." 무관은 결국 낮게 웃음을 흘렸다. "궁 밖이 처음인 티를 온몸으로 내는구나." 연화는 괜히 민망해져 걸음을 재촉했다.헌은 앞서 걸으며 그런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잠시 후 세 사람은 과자를 파는 노점 앞을 지나쳤다. 갓 튀긴 산자에서 달콤한 꿀 냄새가 퍼졌다.연화의 발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시선도 함께 멈췄다.하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헌이 그 모습을 보고 걸음을 늦췄다. "주인장." 상인이 얼른 허리를 굽혔다. "무엇을 드릴까요?""산자 하나 주게." 상인은 종이에 곱게 싼 산자를 건넸다.헌은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연화에게 내밀었다. "...나리?""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더군." 연화는 들킨 아이처럼 눈만 깜빡였다.그렇게 티를 낸 줄은 몰랐다. "...성은이... 아. 감사합니다 나리." 조심스레 산자를 받아 한입 베어 물자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연화의 얼굴이 금세 풀어졌다.무관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참 단순하기도 하지." 연화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맛있는 것은 맛있는 것이었다.그러다 문득 손에 든 산자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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