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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Author: 도수정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15 00:42:16

루시아는 벨루아 특유의 웅장한 저택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제국에서도 손꼽힐만한 명작을 갖춘 저택의 미술관이나 도서관을 무척 좋아했다. 하루 종일 식사를 않고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기도 했다. 최근, 자꾸 새벽에 깨어나 잠이 부족했던 건지 루시아는 도서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한쪽 턱을 괴고, 눈을 감은 채 새소리와 창 밖으로 웅웅대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누군가 제 어깨 위에 겉옷을 얹어주는 게 느껴졌다. 셀레나인가. 무어라 말도 건넨 것같았는데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대답하지 못했다. 무척이나 반가워하고 다정한 음성이라는 것만 기억했다.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건 마지막으로 저를 아주 못마땅해 했던 자안이었다.

"루시아."

그가 드물게 제 이름을 불렀다.

"손님이 왔소. 저녁 정찬을 함께 해야해."

또 코르셋을 입어야겠군. 저절로 싫다고 생각해서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루시아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데미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를 두고 나가버렸다. 루시아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어깨를 둘러싼 털망토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국의 양식은 아니었다. 금장이 박힌 것으로 보아 무척 신분이 높은 자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걸 보고도 데미안은.

거기까지 미치려 드는 생각을 도중에 끊어 냈다. 루시아는 적어도 스스로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지지는 말자고 자주 되뇌었다. 양뺨을 힘껏 두드린 그녀가 다시 복도를 걸었다. 위태로운 듯 정확한 걸음으로.

저택의 대부분 사람들이 루시아의 편이 아니었으나 아르테미스 백작저에서 함께 나고 자란 유모의 딸이자 유일한 친구, 셀레나는 변치 않는 루시아의 편이었다. 가을 호밀을 닮은 갈색 머리. 에메랄드를 닮은 초록눈. 이따금, 루시아는 셀레나가 남자였다면 단연코 데미안이 아닌 그녀와 사랑에 빠졌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또 이상한 생각하고 있죠, 부인"

셀레나가 머리를 만져주며 물었다. 루시아는 역시 그녀를 못속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푸시시 새어나가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셀레나 앞에서라면 그래도 된다. 오늘 중, 아니 어쩌면 며칠 만에 처음으로 지은 미소라는 걸 셀레나의 친구는 모를 것이다. 탐스러운 검은 머리, 남색에 가까운 검은 눈동자는 밤하늘을 연상케 했다. 새하얀 피부. 누가봐도 아름다웠으나 그녀의 친구는 사실 코르셋도, 긴 머리도 싫어했다. 귀족적이지 않고 소탈했다. 그래서 평민인 자신과도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이따금 셀레나는 루시아에게 혼자서라도 도망치라고 권했었다. 벨루아와의 결합도 반대했었다. 루시아는 모두에게 잘된 일이라고 했다. '그' 선대 백작조차 밉다고 표현한 적이 없는 착한 딸이었다. 평생 가족을 벗어나는 선택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셀레나가 아는 한은 그랬다. 언제나 루시아의 삶에는 가족이 중심이었고, 어머니 레이루나를 향한 죄책감이 뼛속 깊이 아로새겨졌다.

벨루아와의 결혼식 전날, 셀레나가 여태 모아온 비상금을 건넸다. 로브와 함께. 야심한 밤이었다.

"마차를 준비했어. 이대로 떠나자."

루시아는 다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게 내 운명인가봐, 셀레나."

"그런 게 어딨어. 이럴 순 없어. 루시."

비명처럼 제 이름을 부르는 친구를 품에 안았다.

"오, 루시 이제라도 못하겠다고 해."

"나 그런 거 못해, 알잖아."

셀레나는 루시아보다 똑똑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여자아이는 사내보다 남편될 이보다 뛰어나서는 안되어서 어떤 교육도 - 신부수업을 제하고-받지 못했다. 다만 오라비인 제레미의 숙제를 대신하면서 갈증을 풀 뿐이었다. 셀레나는 자주 생각했다. 이제라도 루시아의 삶을 살라고 말한다면, 친구는 쓸쓸한 미소만을 지을 것같았다. 체념어린 미소를 보고싶지 않았다. 그러니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찬에 오기로 한 손님은 더없이 늦게 왔다. 코르셋을 입고 목 아래까지 단추를 채운 남색 드레스를 입었다. 루시아를 보고 데미안은 상복같다고 생각했다. 죽은 아이의 일을 아직도 떠올리게 했다. 벌써 한 계절이 지난 일이었다. 불쾌함이 저 밑을 들끓었다. 저 여자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 빌어먹을 드레스는 버릴 수 없었나."

코르셋 때문에 현기증을 느끼고 있던 루시아가 겨우 그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데미안은 루시아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다.

"하우젠 대공 드십니다."

하우젠 대공이라면, 이국 나스의 자산가였다. 북부 영지, 넓은 대륙같은 영토를 관장'했던' 이였다. 그 안에 묻힌 자원을 생산해내어 막대한 부를 손에 넣은, 그래서 그의 별명은 '겨울의 왕'이었다.

루시아는 그의 명성만을 들어봤지 실제로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의 나라는 공화정이어서 대륙 최초로 신분제가 폐지되었고, 여성이 나라의 가신이 될 수 있었으며 투표로 국민들이 직접 총리를 뽑았다. 민주주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 혁명군을 대대적으로 지원한 전 국왕의 동생, 에이든 하우젠이었다. 대공이라는 과거의 이름은 국민들의 애칭같은 것이었고, 신분제가 아직 남아있는 제국에서나 편의를 위해 그렇게 불렀다. 귀족들에게 서열이란 목숨같았으므로. 흐릿해지던 의식 속에 익숙한 듯 낯선 음성이 들렸다.

"괜찮습니까, 공작 부인?"

아, 아까 도서관에서의 그.

고개를 들려고 했을 때 몸이 기우뚱했다. 루시아는 쓰러지지 않으려 얼른 의자에 앉으려고 했지만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루시아!"

데미안의 긴박한 목소리와 하인들의 움직임. 그 속에서 어쩐지 자신을 안타깝게 쳐다보는 대공의 눈빛이 보였다. 통증이 번져가는 와중에도 그 눈빛만은 선명하게 남았다. 바다같이, 깊고 푸른 눈이었다.

***

"왜 깨어나지 않는 것이냐!"

그가 소리쳤다. 루시아는 데미안의 저런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골이 울렸다. 그녀가 손짓으로 셀레나를 찾았다. 셀레나가 울먹이며 제 손에 물을 쥐어주었다.

"루시아!"

제발 소리치지 말아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벨루아의 주치의가 먼저 그를 말렸다.

"공작 부인께서는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각하."

주치의를 보는 건 아이가 죽은 뒤 처음이었다. 더이상의 출산은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레 그 말을 그녀에게 건네던 나이든 의사. 루시아는 그에게 내심 고마웠다. 데미안에게 직접 말하겠다고 하고 그에게 조금만 미루어달라고 한 것을 그대로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데미안. 정찬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건 물음이라기보다 손님에게로 돌아가라는 축객령이었다. 데미안이 황당한 낯을 했다. 이제껏 기다려주었더니 나가라니

"하우젠 대공이라면, 황제폐하께서 귀빈의 신분으로 공작저로 보내신 것이겠지요. 대우에 모자람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어서 그에게로 가보세요."

데미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치 무생물 보듯이 루시아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인들이 어찌할바 모르는 표정을 지었고, 셀레나만이 루시아의 식은땀을 닦아주며 꼴좋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셀레나. 들키면 어쩌려고."

그 표정이 우스워 루시아가 킥킥댔다. 편한 사람과 있을 때만 나오는 모습이었다.

"아무렴, 너한테 코르셋을 입힌 인간인데."

어릴 적부터 손님을 맞으라는 이유로 꾸미려고 코르셋을 입다가 종종 루시아가 졸도하는 모습을 봐왔기에 셀레나는 되도록이면 코르셋이 없는 나스의 드레스 유행이 취향이라는 핑계를 댔다. 어떻게든 루시아에게 코르셋을 입히지 않았다. 그랬는데 고작 공작의 한마디로 몇 년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와중에 빌어먹을 드레스라니. 정말 마음에 안드는 인간이었다.

셀레나가 이를 가는 사이 루시아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마 곧 제가 임신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데미안의 귀에 들어가면, 원치 않아도 이 혼약은 파기될 것이었다. 그러면 저는 어디로 가게 될까. 제레미가 그녀를 백작저에 가만히 둘 것같지는 않았다. 수녀원?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아니면 늙은 귀족의 재취자리나 정부 자리를 염두에 두고 있을지도 몰랐다.

"루시!"

또 우울한 티를 낸 모양이었다. 셀레나의 얼굴이 슬퍼진 걸 보니.

"괜찮아. 셀리."

일부러 친구의 애칭을 부른 루시아가 그녀의 손을 다독였다. 이 따뜻함을 되도록 오래 느끼고 싶었다.

***

에이든은 데미안보다야 공작부인이 보고싶었다. 애초에 제국을 방문한 이유도 그때문이었으므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자마자 그녀를 보고 말을 걸었던 것인데, 아까 저녁 정찬에서의 모습을 보니 낮에 있었던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 싶었다. 애초에 저를 기억해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공작 부인은 좀 어떻습니까?"

데미안이 입을 닦고 나서 형식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며칠 안정을 취하면 된다고 합니다."

에이든은 벨루아 공작에게 사감은 없었다. 다만 루시아의 옆자리를 차지했다는 이유로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어설픈 사랑놀이때문에 손대기도 귀한 그녀가 내내 사교계에서 입방아에 오르내려야 했다는 것도.

"이제는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데미안이 날카롭게 벼려진 칼처럼 예리한 눈으로 에이든을 바라봤다.

"황궁을 놔두고 굳이 벨루아 저를 선택하신 이유를."

에이든은 개인적 이유와 하우젠 대공으로서의 대외적 이유 두 가지중 후자만 말하기로 했다. 애초에 전자를 공작에게 밝힐 생각은 없었다.

"공작가의 도서관과 미술관이 아름답다고 황후폐하께 추천 받아서요."

마리아 델레포트. 그 여자의 이름을 대면 데미안 벨루아는 입을 다문다. 외국인인 그조차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습니까."

데미안이 허탈한 듯 더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끝내는 한마디를 물었다.

"그 이외의 말은 없었습니까?"

"예."

대공은 굳이 두 사람의 오작교가 되어줄 생각은 없었다. 다만 데미안에게 괴로운 밤을 선사할 용의는 확실했다. 그의 계획대로 데미안은 그날 밤을 꼬박 술로 지새웠다.

***

에이든은 그리운 시절을 회상했다. 나스에서 목숨을 위협받아 제국으로 잠시 몸을 은신했을 당시 만난 어린 소녀에 대해. 밤같이 요요히 빛나던 아이의 총명한 눈동자와 다정한 미소, 따뜻한 체온.

"디디!"

아이는 자주 굶었다. 귀족가 영애의 마르고 작은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곤 해도 7살이었지만 4살처럼 보일 정도로 작았다. 에이든이 형이 보낸 암살자들에게 부상을 입고 국경 근처 아르테미스 백작저의 영지까지 겨우 도망쳤을 때, 결국 이대로 죽는 걸까 생각했을 때

저를 도운 것은 조막만한 일곱살짜리의 손이었다. 제 유모와 셀레나를 불러다 치료를 도왔다. 그렇게 비밀스러운 만남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자신을 성도 없이 '루시'라고 소개했다. 처음에는 짧은 머리카락과 바지 차림새 탓에 남자 아이인줄 알았다가 이름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제국의 귀족들은 남자아이에게 여자 아이 이름을 짓나? 하지만 퍽 잘어울렸다. 아이는 무척이나 예쁘장해서 여자아이로 착각할 뻔했으므로.

"너는?"

그는 평소처럼 에이든이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고 얼굴을 붉힌 채 아명을 내놓았다.

"디디"

"디디!"

돌아가신 어머니 이후로 아무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을, 루시는 아주 기쁘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불렀다. 그 애는 안그래도 절식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제 먹을 것을 나누어 주려는 착한 소녀였다.

"더 안먹어?"

루시가 쓸쓸하게 미소지었다.

"엄마가 먹으면 안된대."

디디는 루시의 몫으로 남은 쿠키를 툭 베어물었다가 루시의 입에다 물려주었다.

"디디! 이러면 어떡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운이 없던 루시의 뺨에 홍조가 돌았다.

"먹어. 먹어도 안죽어. 너는 안빼도 돼."

다들 못났다고만 하는데 디디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그렇게 말해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가 막 살찌고 그러면. 그래서 아무에게도 청혼을 못받으면. 엄마가 슬퍼하실 거야."

루시의 세계는 가족이 전부였다. 좁은 새장안에서 아이는 만족하는 걸까. 제 눈동자를 닮았다던 나스의 바다를 보여주면 너는 어떻게 웃을까. 루시의 디디는 종종 무해한 낯을 하고서 아무도 모르게 그녀를 데리고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루시는 그저 그의 속도 모르고 해맑게 웃기만 했다. 디디는 연갈색 고수머리를 벅벅 긁다가 말했다.

"네가 살쪄도, 못생겨져도, 나이들어도 나는 네 친구일거야. 계속 곁에 있고 싶을 거야."

있을 거야가 아닌 있고 싶을 거야. 이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었다. 어째선지 귓가가 타오를 듯 뜨거웠지만 루시를 위해서라면, 괜찮았다.

루시가 크게 감동받아 눈물을 글썽였다.

"정말이야? 디디?"

"응. 정말."

이리저리 피가 묻은 제 옷을 대신해 평민의 옷으로 위장을 도와준 루시. 매일 제 간식을, 식사를 몰래 가지고 나와 뒷뜰에서 그를 기다리는 루시. 해질녘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마법같은 시간에 더없이 예쁜 루시의 색깔들. 에이든은 어머니가 세상을 등지고 외톨이에 목숨을 위협받던 황궁 생활을 벗어나 처음으로 느낀 안온한 시간이었다.

모든 것을 잊고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나스의 황자가 아닌, 에이든 디트리히 하우젠이 아닌. 평민 소년, 루시의 영원한 친구 디디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하루살이가 목숨을 연장하듯 그녀와의 시간을 이어나갔다.

"디디. 그치만 디디는 너무 예쁜 걸."

루시가 그의 연갈색 머리카락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비비적대다가 배시시 웃었다. 그 탓에 안그래도 두근거렸던 가슴이 에이든의 귓가에 쿵쾅거렸다.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디디는 가을의 호밀밭같은 머리카락이랑, 바다같은 눈을 가지고 있어서 너무 예뻐."

성마른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이대로,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 해도 좋았다. 디디는 그대로 루시를 끌어안고 말았다. 불가항력이었다. 그가 어떻게 저항해볼 새도 없이 젖어들었다. 루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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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시아.”구할 방법은 없다. 현재 최신 의학으로도 민간 요법으로도 그토록 학문이 발전한 나스에서도 방법은 찾지 못했다. 루시아는 이미 여러 번 관련된 전문가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지만 실패였다.“구할 수 없었어. 셀리.”루시아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셀레나는 그런 루시아를 볼 때면 그녀가 여름에 떠난 아기의 죽음을 생각하는지, 혹은 곧 다가올 이복 언니의 죽음을 생각하는지 헷갈렸다.어둠에 침잠하는 루시아의 모습은 여전히 에이든에게는 보이지 못한 것이라고도 그녀가 언급한 일이 있었다.“잘 대해주자. 나도 그러려고 해.”셀레나가 먼저 그녀에게 제안했다. 루시아는 그게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많은 추억을 만들자고. 최대한, 즐거운 이야기를 하자고. 그렇게 행복한 일을 같이 해주자고.“루시아, 일어났구나.”그러나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다음날 브리짓은 멀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앞에는 에이든이 앉아있었다.“디디? 언니?”루시아는 양옆을 살피다가 일단 자연스럽게 에이든의 곁에 앉았다.아무리 그래도 부부니까 그게 맞는 듯 했다. 그런데 브리짓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왜 그의 곁에 가니? 나는 얼마 전에 남편을 보냈는데...서운하구나. 루시아.”직접적인 언사에 사용인들이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토록 솔직한 나스 사람들에게도 브리짓의 말투는 굉장히 적극적으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루시아가 슬그머니 에이든을 올려다보니 그의 미간에 못마땅한 주름이 잡혀 있었다.“루시아는 제 부인입니다. 아서 남작부인.”“브리짓이라고 불러요, 하우젠 대공 전하.”브리짓은 아마 아서 남작부인이라는 호칭이 싫을 거고, 에이든은 그냥 브리짓이 싫은 모양이었다. 나름 사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는데도 별로 통한 것같진 않았다.“루시아, 언니가 슬프구나.”루시아는 제 손을 급하게 잡는 에이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양해를 구하듯 미안한 미소를 짓고 슬그머니 손을 뺐다. 충격에 빠진 에이든

  • 남편교환   75화. 1년이라고 했어

    셀레나가 저녁 식사를 가지고 갔을 때에도 브리짓은 고통에 겨워 쓰러져 있었다. 그녀를 수행하려고 따라온 이들 중 아무도 브리짓의 곁을 지키지 않았다. 오직 홀로 남은 브리짓의 방은 지독한 수면초 냄새로 가득차 숨을 쉴 수가 없었다.“아서 남작 부인!”셀레나가 식사를 내려놓고 브리짓에게 다가갔다. 화장을 지운 브리짓의 얼굴 곳곳에 아직 다 낫지 않은 멍자국과 창백한 낯빛이 보였다.“브리짓!”놀란 셀레나가 복도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녀는 루시아에게 가려했다. 그때 작은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이리와.”셀레나는 설마 했다. 브리짓이었다. 의식을 거의 잃기 직전이었는데도 그녀가 손을 뻗으며 자신을 찾았다. 셀레나는 루시아에게 듣기는 했지만 이정도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어떻게, 어떻게.”그렇게 아름다운 소녀였던 브리짓을 기억한다. 이렇게 메말라가며 피부가 짓무르고 그런 얼굴도 몸도 아니었다.“동정하지마. 셀레나......너도 내가 안쓰럽다고 할 게 아니라면, 입다물어.”밭은 숨을 몰아쉬며 셀레나에게 브리짓이 말했다. 그녀는 다만 힘겹게 일어나 그녀가 갖다준 식사를 억지로 다 먹었다. 결국 토악질을 한다고 해도 적어도 여기서, 하우젠 령에서 죽어 괜히 자신의 갈까마귀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죄라면 충분히 지었다.셀레나는 차마 어떤 말도 못하고, 브리짓의 곁에 앉아 손수건을 물에 적셔와 그녀의 뺨 곳곳을 닦아주었다. 아무도 브리짓의 곁을 지키지 않는 게 어쩌면 병때문이었나보다.브리짓이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었다.“하우젠 대공, 루시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셀레나는 브리짓의 고집이 안타까웠다. 어릴 때부터 내내 그렇게 자존심을 부려가며 악다구니를 써서 살다가 결국 꺾인 사교계의 꽃이었다. 이제는 죽음을 목전에 둔 병자가 되었다.“하지만, 남작 부인.”“하, 그 호칭 집어치워. 너도 나 이름으로 불러와놓고 이제와서 지위 찾아 뭐해.”루시아에게 제 험담을 늘어놓을 때면 ‘브리짓이, 브리짓때문에!’ 라며 자주 울분

  • 남편교환   74화 나 같아서

    브리짓이 멈칫했다. 몸이 우뚝 멈춰섰다. 자신이 들은 말이 사실인가 의심했다. 스스로를 악녀라고 몇 번이나 정체성을 삼아 부질없이 집착해오며 견뎌오던 자부심에 금이 갔다. 그럼에도 루시아가 해주는 말이, 그 상냥함에 서러움이 눈 녹 듯 녹았다.“우린 고작 열 살, 열 여섯 살이었어. 언니.”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브리짓이 울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적어도 루시아가 알기로 브리짓이 그렇게 우는 건 처음 보았다.우는 이유는 너무도 모순적으로, 분노가 올라와서. 파들거리는 어깨. 집씻는 입술, 미처 다 감추지 못한 살의를 품은 눈동자.조용히 친부를 향해 갈무리하지 못한 살기를 세우던 갓 귀부인이 된 브리짓 아서를 기억했다.그때 고작 그녀 나이가 열일곱인가, 열여덟이었다. 루시아가 벨루아에 시집왔을 때랑 비슷한 나이.그녀는 저보다 스무살 많은 남자랑 결혼식을 올렸다.루시아는 브리짓에게 연민을 느꼈다. 동정이었을까.“......”브리짓은 그 말을 듣고 얼어붙었다가 조각상처럼 굳어있다가 눈물 한 줄기만을 흘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가버렸다.그녀가 원한 대답이었을지 루시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그녀가 줄 수 있는 대답의 전부였다.마지막으로 그녀에게 건네지 못한남은 한마디를 조용히 중얼거렸다. 공감했다. 그녀와 자신의 처지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았다.“나 같아서.......”***브리짓은 저녁 만찬에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방으로 셀레나를 불렀다. 직접 지명해서 부른 거라서 차마 그녀가 안 가기도 뭐했다. 셀레나가 생각만 해도 싫다는 기색을 내비쳤지만 그럼에도 가기는 갔다.루시아는 브리짓이 먹을 수 있을 만큼 묽은 수프와 부드러운 빵을 주방장에게 부탁해 셀레나에게 건넸따다.“내 얘기는 하지마. 아마 오늘 조금 심술을 부릴 수도 있어. 셀리. 조심해.”원하지 않는 답변이었을 것이다. 연민이나 동정심에 대한 답변을 들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는 걸 루시아가 모르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가 원하는 진짜 대답은 차마

  • 남편교환   54화 그렇게까지 할 가치

    데미안 벨루아는 지하 감옥에 가둬져 있는 동안 생각했다. 어떻게 그토록 빨리 에이든 하우젠이 자신을 찾아냈을지. 어디서 정보가 새어나갔을지. 분명 저는 나름대로 비밀스럽게 움직인다고 했었다. 애초에 제국 내에서도 주인에 대한 충성도가 높기로 유명한 벨루아 기사단에게 정보를 캐내는 게 쉽지 않았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대체 어디서?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털망토를 쓴 그러니까 마치 제국에 처음 왔을 때처럼 망토를 뒤집어 쓴 남자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루시아 하우젠의 현재 남편, 에이든 하우젠이었다.“겨울의 왕께서 직접 납실 줄은

  • 남편교환   53화 우리 아이가 있어

    작은 소리로 불러도 그는 순식간에 알아 챘다. 제 목소리만 들린다면 동굴 속에서도 위치를 알아 자신을 찾아올 것같은 남자.에이든 하우젠은 그런 사람이었다.“일어났어요?”루시아 배시시 웃자 에이든이 우뚝 멈춰서며 지금 이게 자신의 환상인지 아니면 진짜로 보고 있는 현실인지 분간했다. 제법 그 모습이 우스워 루시아는 또 말갛게 웃었다.같은 상대와 다시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평생에 꼽을 수 있다면 에이든은 아마 오늘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루시아.”그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몸집이 큰 그가 매달리듯 그녀의 상체를 거의 덮듯이

  • 남편교환   51화 네가 찾던 디디

    싸움은 길지 않았다. 애초에 데미안이 오랫동안 무언가를 먹지도 잠을 자지도 못한 채 움직여 체력의 한계가 빨리 오기도 했고, 에이든이 루시아의 상태와 다른 이들을 보기 위해 길게 끌지 않아서기도 했다.칼을 몇 번 맞대지도 않고 순식간에 에이든은 데미안의 목에 칼을 댔다. 뒤따라온 기사들이 데미안을 양쪽에서 추포하고, 루시아에게로 그가 달려왔다.다른 이들이 셀레나와 윌을 구조해서 실어가는 동안 에이든이 루시아를 살피러 왔다. 마차가 부서지면서 뺨에 긁힌 자국이 생겼다. 가느다랗게 길어진 자국이 슬퍼 에이든의 눈가에 슬픔이 담겼다

  • 남편교환   48화 당신 아내라는 말을 듣지 않을까?

    루시아는 제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전혀 모른 채로 하우젠 령을 시찰하러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에드윈의 묘를 보고 나서 에이든도 루시도 둘 다 다녀와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마차에서 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조심스럽게 잡은 손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그렇게 다음날이 되어서 본격적인‘친절한 방문자’의 시찰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루시아는 최대한 남루하게는 아니더라도 적당히 단정하되 매번 바르던 화장이나 몸에 뿌리던 향수를 뿌리지 않고, 보석 장신구를 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바지를 입고 싶었지만, 아직은 나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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