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밴스 경의 제안은 아름답지만 위험합니다. 도시를 돔으로 덮는 것은 자연과 싸우겠다는 뜻이죠. 저는 자연에 순응하되, 그 자연을 역이용하는 도시를 제안합니다."
나는 빈 화면에 유려한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바람의 탑, 말카프(Malqaf)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겠습니다. 도시 곳곳에 거대한 나선형 타워를 세우고, 상공의 차가운 바람을 지면으로 끌어내려 도시 전체에 천연 에어컨 효과를 줄 것입니다. 전기가 없어도 도시의 기온은 항상 주변보다 15도 낮게 유지될 겁니다."
"그게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보나?"
줄리안 밴스가 비웃듯 물었다.
"이론이 아니라 역사입니다. 수천 년 전 이 땅의 선조들이 이미 해왔던 방식이죠. 저는 거기에 현대적인 유
나는 시스템 창을 띄웠다.『시스템: 「공간 물류 최적화(Lv.2)」 기능과 「하이퍼 싱크(Hyper-Sync)」 모드를 결합합니다.』『대상: 서울 시청 시장실 - 뉴욕 강진호 센터 50층.』『상태: 물리적 거리 11,000km, 지연 속도 0.01ms 이하로 고정.』'대성그룹이 내 국내 기반을 흔들려 한다면, 아예 국경이라는 개념 자체를 무너뜨려 주지.'***오후 7시, 강진호 센터 50층 메인 홀.뉴욕 시의회 의장과 주요 언론사 기자들, 그리고 이서현 상무를 포함한 대성그룹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서현은 승리자의 미소를 띠며 샴페인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강 대표님, 오늘 시연회가 고별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도로 점용권 문제는 내일 시의회에서 최종 결판이 날 텐데, 우리 대성이 이미 승기를 잡았거든요.""이 상무님, 성격이 급하시네요. 결과는 늘 도면을 다 펼쳐봐야 아는 법인데."나는 여유롭게 단상 위로 올라갔다. 조명이 어두워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중앙 무대로 집중되었다."여러분, 오늘 저는 새로운 건축의 시대를 선포하려 합니다. 지금까지 건축은 고정된 장소에 건물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제안하는 건축은 '장소를 공유하는' 건축입니다."손가락을 퉁기자 무대 중앙에 거대한 빛의 기둥이 솟아올랐다.치지직-!강렬한 빛이 잦아들자, 그곳에는 놀랍게도 서울 시장실의 풍경이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일주일 뒤, 대성건설 뉴욕 지사 상무실.이서현은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현장 중계 화면을 보고 있었다."아직도 멈춰 있네. 강진호, 이제 슬슬 한계겠지? 자재는커녕 인부들 밥차도 못 들어가게 막아놨으니 말이야."그녀의 옆에 선 비서가 의아한 표정으로 보고했다."그런데 상무님, 좀 이상합니다. 지상에서는 공사가 멈춘 것 같은데, 하이라인 부지 내부에서 발생하는 소음 수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밤마다 진동도 감지되고요.""진동? 지하 터 파기라도 하는 거 아냐? 어차피 자재가 없으면 건물은 못 올려. 무시해."그때, 거대한 진동과 함께 창밖의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강진호 센터의 부지 위로, 거대한 유리 구조물들이 순식간에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크레인도, 트럭도 보이지 않았는데 마치 땅속에서 건물이 자라나는 듯한 기괴한 광경이었다."뭐, 뭐야? 저게 어떻게 올라가는 거야!"이서현이 창문에 달라붙어 소리쳤다.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내 건물 외벽에 부착된 수천 개의 미러 패널들이었다. 그 패널들은 일제히 각도를 틀어 대성건설이 새로 짓고 있던 건물의 그림자를 반사해버렸다.빛의 역습이었다.대성 건물이 가리려 했던 햇빛은 미러 패널에 부딪혀 오히려 내 건물의 조도를 높였고, 반사된 강렬한 빛은 대성건설 현장의 크레인 기사들의 시야를 가려버렸다."눈부셔! 앞이 안 보여!"대성 현장의 인부들이 비
그는 나의 설계를 방해하기 위해 뉴욕의 또 다른 거대한 필지를 점령했다. 우리가 지으려는 하이 가든의 볕을 가리고, 공사 물길을 막아버리겠다는 계산이었다."동수, 지현 누나. 당장 긴급 회의 준비해."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허드슨강을 바라보았다. 강물은 고요했지만 그 밑에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다."이병철 회장이 조망권을 가리겠다면, 우리는 조망권 자체를 창조해야지. 건물 내부에서 한강과 허드슨강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미러 시티(Mirror City) 공법을 도입한다.""미러 시티요? 그건 아직 실험 단계잖아요!"이지현 실장이 놀라서 물었다."실험은 끝났어. 내 머릿속에서 이미 완공됐거든."나는 펜을 들어 하이라인의 지도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시계추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용산과 뉴욕, 그리고 사막의 신도시를 잇는 거대한 건축 제국의 정점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이병철 회장이 쌓아 올린 대성그룹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진정한 세계의 설계자로 거듭나기 위한 마지막 승부처가 다가오고 있었다."준비해. 내일은 대성건설 뉴욕 지사로 직접 쳐들어간다. 전쟁을 선포하러 말이야."내 목소리가 차가운 사무실 공기를 갈랐다. 동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그의 허리춤에 찬 무전기에서는 긴박한 상황실의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인의 침공뉴욕 맨해튼의 마천루
"자네 같은 디벨로퍼들이 하는 소리는 질리도록 들었어. 공학, 효율, 경제성... 그런 단어들이 뉴욕의 기억을 하나씩 지워가고 있지. 이 낡은 철길이 왜 아름다운지 아나? 이건 더 이상 쓸모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걸세.""쓸모없음의 미학이라... 하지만 그 미학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의 이웃들이 좁고 어두운 골목에서 고통받고 있다면, 그건 미학이 아니라 이기심 아닐까요?"내 도발적인 질문에 다이애나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자네, 말조심하게. 나는 이 땅의 영혼을 지키고 있는 거야.""영혼을 지키는 방법은 박제가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 수직의 하이라인을 지을 생각입니다.공중권을 이용해 건물을 올리되, 지상의 공원을 건물 내부로 끌어올려 하늘 끝까지 이어지는 숲을 만들 겁니다. 시민들이 지상에서 느꼈던 기억을 100층 높이에서도 느낄 수 있게 말이죠."나는 태블릿을 꺼내 미리 준비한 조감도를 보여주었다. 단순히 유리를 바른 건물이 아니었다. 건물의 외벽을 따라 철길의 질감을 살린 테라스가 나선형으로 올라가고, 그 위로 하이라인의 야생화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모습이었다.다이애나는 조감도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흔들림이 포착되었다."이건... 불가능해. 구조적으로 이 하중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어.""저희 실장이 계산을 마쳤습니다. 아부다비에서 썼던 나선형 구조와 용산의 탄소 섬유 보강 기술을 결합하면 가능합니다. 회장님, 저는 이곳에 건물을 짓고 싶은 게 아닙니다. 뉴욕의 기억을 확장하고 싶은 겁니다."다이애나는 한
"조작인지 아닌지는 FBI 전문가들이 판단하겠죠. 그리고 요원 여러분, NYSE 전산망을 공격한 진짜 IP는 지금 실버먼 회장의 자택 서재로 찍히고 있을 겁니다. 제가 아까 역추적해서 경로를 고정해뒀거든요."현장은 순식간에 역전됐다. 기자들의 카메라가 일제히 실버먼을 향했다. FBI 요원들은 당황한 실버먼의 팔에 수갑을 채웠다."데이비드 실버먼 회장, 당신을 사이버 테러 및 테러 사주 혐의로 체포합니다.""이건 모함이야! 강진호! 네가 감히 나를!"실버먼은 비참하게 끌려 나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넥타이를 고쳐 맸다.***사건이 일단락된 밤, 나는 다시 4층 현장으로 내려갔다. 지현 누나와 인부들이 밤을 새우며 기둥 보강 공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진호, 이제 안전해. 탄소 섬유 보강으로 이전보다 강도가 두 배는 높아졌어."지현 누나가 땀을 닦으며 웃었다."고생했어, 누나. 역시 누나가 없었으면 이 건물은 진짜 무너졌을 거야."나는 보강된 기둥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거칠고 단단한 촉감. 이것이 바로 건축의 본질이다. 아무리 화려한 시스템과 금융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해도, 결국 우리를 지켜주는 건 정직하게 세워진 이 콘크리트와 철근이다.동수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대표님, 레이첼은 당국에 신병을 인도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말이 걸립니다.""뭐
4층 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공사를 위해 쌓아두었던 자재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자욱한 먼지 사이로 인부들의 비명이 들렸다. 나는 연기 속을 뚫고 남측 메인 기둥 앞으로 다가갔다."이럴 수가..."지현 누나가 이미 현장에 도착해 기둥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진호, 이거 봐. 폭약이 아니야. 초고압 워터젯 절단기를 썼어. 소리도 없이 기둥의 핵심 철근만 끊어놨어. 이건... 이건 우리 설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놈의 짓이야."나는 기둥의 절단면을 손으로 훑었다. 매끄럽게 잘린 단면은 공학적인 정교함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서현이 보낸 전문가겠지. 아니면 데이비드 실버먼이 고용한 자객이거나."그때, 내 귀가 미세한 진동을 포착했다. 「공간 압박」 스킬로 민감해진 내 감각이 천장 위 공조 덕트 안의 미세한 금속음을 읽어낸 것이다."동수, 12시 방향 천장!"내 외침과 동시에 동수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던졌다.챙-!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천장 덕트 덮개가 떨어져 나갔고, 그 안에서 검은 그림자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타이트한 전술복을 입고 얼굴을 가린 여자. 레이첼이었다. 그녀는 한 손에 소음기가 장착된 권총을 들고 있었다."반응 속도가 제법이네. 동양의 건축가는 다들 이런가?"레이첼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녀는 주저 없이 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피슉-!
나는 국물을 들이키며 눈을 번뜩였다.당장 큰돈을 만질 방법이 필요했다.주식? 비트코인?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아직 대중화되기도 전이고, 주식으로 큰돈을 불리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나는 지금 당장 현금이, 그것도 억 단위의 현금이 필요했다. 그래야 곧 발표될 강남 개발 계획에 숟가락이라도 얹을 수 있었다.내 전공을 살리면서 단기간에 목돈을 챙길 방법.기억을 더듬었다. 2013년 겨울. 대한민국 건축 업계와 부동산 시장에 돌았던 흉흉한 소문들. 그리고 내가 실무에서 들었던 수많은 비사(秘史)들.뇌리에
그가 명함을 내밀었다.전생에서는 내가 굽신거리며 받았던 그 명함. 이번에는 내가 그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그림만 잘 그리는 환쟁이는 우리 회사에 필요 없지만, 돈을 벌 줄 아는 건축가는 환영이지. 우리 회사 공채, 지원했나?”그의 질문에 나는 피식 웃었다.지원? 이미 서류는 냈다. 하지만 면접장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태영건설에 입사해서 노예처럼 구르는 건 사양이다.나는 그의 명함을 받아 들고는, 뚫어져라 그를 응시했다.[대상: 최무진 (태영건설 기획팀장)][성향: 야망, 기회주의, 소시오패스 성향 다분
나는 손을 뻗어, 내가 한 달 동안 밤새워 만든 모형의 지붕을 잡았다.우지끈-!“야! 강진호! 너 뭐 해?!”옆에 서 있던 동기가 비명을 질렀다. 스튜디오 안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최무진의 시선도, 김 교수의 당황한 눈빛도 느껴졌다.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형을 짓이겨버렸다.바사삭, 툭.정성스럽게 붙인 창문이 떨어져 나가고, 기둥이 꺾였다.“미쳤어? 지금 뭐 하는 짓이야!”달려온 조교가 내 팔을 잡으려 했지만, 나는 가볍게 뿌리쳤다.“쓰레기를 치우는 중입니다.”내 목소리는 차분했다. 스튜디오가 찬물을 끼얹은 듯
* 무너진 탑, 그리고 다시 쌓아 올리는 기초쿠르르릉-!세상이 뒤집히는 소리였다.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내 인생의 역작이라 불렸던 ‘센트럴 팰리스’의 B동이 먼지 구름 속으로 주저앉았다. 콘크리트가 비명을 지르고, 철근이 엿가락처럼 휘어지는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강진호 소장님!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현장 관리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내 팔을 붙잡았다. 잿빛 먼지를 뒤집어쓴 내 눈앞에는 아비규환의 현장이 펼쳐져 있었다. 3년. 내 영혼을 갈아 넣어 설계한 건물이, 완공을 코앞에 두고 무너져 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