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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실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27 18:33:16

약조된 "조용한 차"는 성수 큰 잔치가 끝나고 사흘 뒤에 왔다. 그 사흘 동안 사가의 담 너머 향은 두 번 탔고, 두 번 다 초저녁이었다.

두 번째 태후전은 발이 내려져 있었다.

시립한 상궁도 둘뿐. 찻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발 그림자가 두 사람의 낯에 가는 줄무늬를 드리웠다. 줄무늬는 태후의 낯에서는 주름과 나란했고, 그녀의 낯에서는 낯설게 얹혔다. 차는 태후가 손수 따랐다. 칠순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찻잔은 백자가 아니라 오래 쓴 갈색 다완이었다. 잔 안쪽에 찻물 든 세월이 나이테처럼 앉아 있었다. 차향은 어리고, 잔은 늙어 있었다.

"북강 서고가 크다더구나."

첫 마디가 그것이었다. 온보요는 찻잔을 두 손으로 받쳤다.

"장서가 많사옵니다."

"장서 말고." 태후는 제 잔에 차를 마저 따랐다. "장부 말이다. 병적이며, 군량이며, 성곽의 것이며— 서고 안쪽 깊은 방에 있다지. 부부 금슬이 그리 좋다니, 열쇠가 어디 걸렸는지쯤은 알겠구나."

"신첩은 살림 장부만 만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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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75화. 면회(面會)

    저울을 배우지 못한 아이. 그 말을 온보요는 사가로 돌아오는 가마 안에서 내내 뒤집어 보았다. 앞으로 읽으면 경고였고, 뒤로 읽으면— 오라비가 누이에게 하는 부탁 같기도 했다.이튿날, 금부에서 기별이 왔다. 면회를 윤허한다는 것이었다.태후전의 성의였다. 성의는 빚이고, 빚에는 값이 붙는다. 알면서도 그녀는 채비를 서둘렀다. 가마가 금부 골목에 들어서자 길가의 소리가 낮아졌다. 금부 담장은 이끼도 마른 잿빛이었고, 문 앞의 아전들은 왕비의 문첩을 받고도 반 각을 세워 두었다. 세워 두는 것까지가 이 집의 격식이었다. 문첩을 돌려주는 아전의 손에, 노잣돈 한 꿰미가 얹혔다 사라졌다. 어머니가 들려 보낸 옷 보퉁이와, 사가 부엌에서 새로 찐 수수떡 한 합을 챙겼다. 세 켜짜리였다. 떡집 것이 아니라 부엌 것이니, 신호가 아니라 그냥 떡이었다. 그냥 떡인 것이, 오라비에게는 나을 것이었다.금부의 면회방은 창이 하나였다.창으로 든 볕이 바닥에 좁고 긴 금을 그었고, 그 금 이쪽과 저쪽에 남매가 앉았다. 방에서는 묵은 종이와 곰팡이 냄새가 났다. 오라비는 수염이 자라 있었다. 자란 수염 아래로, 웃는 입매만 예전 그대로였다. 오라비는 야위어 있었다. 야윈 낯으로 웃는 것부터 했다."우리 보요가 왕비마마가 되어 오셨네.""오라버니.""절은 안 한다. 옥살이 몸이 구겨져서, 절을 하면 도로 못 편다."우스개가 예전 그대로라, 눈이 먼저 뜨거워졌다. 온보요는 옷 보퉁이를 금 너머로 밀었다. 옥리가 보퉁이를 풀어 헤집고, 도로 밀어 주었다. 수수떡 합도 같은 길을 다녀왔다. 오라비는 떡 한 점을 그 자리에서 베어 물었다."집 맛이다. 안에서는 소금이 귀하거든." 오라비는 두 점째를 집었다. "귀한 것 치고— 눈물나게 흔한 것이 또 소금이지.""사가 부엌 것입니다.""네가 시킨 맛이면 집 맛이지." 오라비는 떡을 마저 삼키고, 목소리를 반 눈금 낮췄다. "아버지는 강녕하시다. 난 치시는 솜씨가 늘었어. 하도 쳐서— 화선지가 동이 났다더라.""그래서— 그 삭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74화. 회랑(回廊)

    "입에는 답니다만— 목에 걸리는 봄이옵니다."답을 받은 회랑에는 두 사람과 기둥 스물넷뿐이었다. 봄볕이 기와 그늘을 반듯하게 잘라, 바닥에 명암의 계단을 놓고 있었다.허도위는 북강에서보다 관복이 한 급 올라 있었다. 감찰의 일을 잘 마친 자의 옷. 옷은 새것인데 낯은 조금 야위어, 매끄러움 밑으로 뼈의 선이 드러났다. 새 비단이 걸음마다 빳빳한 소리를 냈다. 소리 나는 옷을 입은 사내와, 소리를 죽인 신을 신은 여인이 마주 섰다.온보요는 격식대로 반 걸음 비켜섰다. 비켜서며, 소매 안의 손끝으로 옷섶의 백옥 패 자리를 한 번 짚었다. 소리 죽인 표가, 거기 있었다."감찰— 아니, 이제 무어라 불러 드려야 할지.""부르시던 대로 부르시지요. 관명이 바뀌어도 하는 일은 같습니다.""재는 일 말씀이십니까."허도위의 입가가 아주 얕게 움직였다. 회랑의 볕이 기둥 사이로 칸칸이 떨어져, 두 사람은 볕 한 칸을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북강 일은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마마 내외분 덕이 컸지요. 돌까지 정중히 돌려받았으니.""물목이 고왔다 하셨지요.""고왔지요. 한데— 요즘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허도위는 소매 안에 손을 넣은 채, 볕 칸 너머에서 말했다. "북강 어느 폐광에서, 겨우내 화덕이 탔다는 소문. 쇠 두들기는 소리가 밤마다 났다는 소문 말입니다.""산에는 본래 소리가 많지요.""많지요. 한데 그 산의 숯장수가— 봄 들며 갑자기 남쪽으로 이사를 갔답니다. 숯 두 섬 값을 갑절로 받았다고, 자랑을 하며." 숯장수의 새 집이 어느 고을인지까지는, 말하지 않았다.온보요는 낯을 바꾸지 않았다. 바꾸지 않는 값으로, 속의 저울이 바삐 움직였다. 이 사내는 철장산을 알고 있다. 어디까지— 인두까지인가, 인두의 낙관까지인가."감찰께서는 소문이 많으십니다.""소문을 먹고 사는 자리라." 허도위가 이번에는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이 회랑 천장에 낮게 닿았다 내려왔다. 허도위는 볕 칸을 하나 건너, 반 걸음 가까워졌다. 목소리가 회랑 바닥으로 낮게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73화. 실

    약조된 "조용한 차"는 성수 큰 잔치가 끝나고 사흘 뒤에 왔다. 그 사흘 동안 사가의 담 너머 향은 두 번 탔고, 두 번 다 초저녁이었다.두 번째 태후전은 발이 내려져 있었다.시립한 상궁도 둘뿐. 찻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발 그림자가 두 사람의 낯에 가는 줄무늬를 드리웠다. 줄무늬는 태후의 낯에서는 주름과 나란했고, 그녀의 낯에서는 낯설게 얹혔다. 차는 태후가 손수 따랐다. 칠순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찻잔은 백자가 아니라 오래 쓴 갈색 다완이었다. 잔 안쪽에 찻물 든 세월이 나이테처럼 앉아 있었다. 차향은 어리고, 잔은 늙어 있었다."북강 서고가 크다더구나."첫 마디가 그것이었다. 온보요는 찻잔을 두 손으로 받쳤다."장서가 많사옵니다.""장서 말고." 태후는 제 잔에 차를 마저 따랐다. "장부 말이다. 병적이며, 군량이며, 성곽의 것이며— 서고 안쪽 깊은 방에 있다지. 부부 금슬이 그리 좋다니, 열쇠가 어디 걸렸는지쯤은 알겠구나.""신첩은 살림 장부만 만지옵니다.""그래. 살림." 태후는 웃었다. "살림 잘하는 여인이 이 나라에 제일 귀한 법이지. 살림이란 게 별것이더냐. 제집 것 아껴 쓰고— 남의 집 것 잘 보아 두는 게지."발 너머로 상궁 하나가 소리 없이 차 주전자를 갈아 놓고 물러났다. 새 주전자에서 김이 곧게 올랐다. 김이 발 그림자 사이로 흩어졌다.발 너머 마당에서 새 한 마리가 울고 그쳤다. 그친 자리의 고요가 길었다."서고 안쪽 방의 물목. 그것 하나면 된다." 목소리는 여전히 찻물처럼 순했다. "병적이 몇 권인지, 성곽도가 몇 축인지— 세어만 오너라. 가져올 것도 없어. 그 쉬운 셈 하나에, 네 오라비가 금부에서 나와 조카 걸음마를 본다. 네 아비 난 옆에 사람이 앉고.""마마.""급할 것 없다." 태후는 유밀과 접시를 그녀 쪽으로 반 뼘 밀었다. "성수 끝나고 북강 돌아가서, 가을쯤— 단풍 문안이나 한 장 보내려무나. 물목은 그 봉투가 알아서 하겠지." 식어 가는 다완을, 태후는 다시 채우지 않았다. 빈 다완 바닥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72화. 성수(聖壽)

    매화 물표가 눌린 두루마리는 그날로 태후전에 걷혀 갔다. 사흘 뒤— 그 두루마리의 임자가 그녀를 불렀다.태후전의 문턱은 유난히 높았다.문턱을 넘는 순간 향이 바뀌었다. 대기전의 향이 꽃이라면, 이 안의 향은 나무였다. 오래된 나무. 백단의 밑동 같은, 무겁고 조용한 냄새. 그 냄새 속에 태후가 앉아 있었다. 전각 안의 물건은 적었다. 병풍 하나, 문갑 하나, 상 하나. 향로는 보이지 않는데 향은 있었다. 적은 물건이 전부 오래된 것들이라, 방이 물건이 아니라 세월로 차 있었다.칠순의 낯은 곱게 늙어 있었다. 주름은 웃는 자리에만 앉았고, 눈은 젊은 사람처럼 맑았다. 금실로 봉황을 놓은 자줏빛 대수삼이 몸에 실린 것이 아니라 몸을 받치고 있는 듯했다. 온보요는 배운 대로 절했다. 이마가 바닥에 닿는 시간까지, 배운 대로."가까이 오너라."목소리는 물처럼 순했다. 다가가 고개를 들자, 맑은 눈이 그녀의 낯을 오래 건너다녔다. 이마에서 눈으로, 눈에서 입매로. 값을 매기는 눈이 아니었다. 이미 매겨 둔 값을, 물건과 맞춰 보는 눈이었다."온가의 여식이.""예, 마마.""북강 물이 사람을 바꾸었구나. 삼 년 전 간택전에서 본 낯이 아니야.""거친 물을 마셔, 낯이 상했나 보옵니다.""상한 것이 아니라." 태후는 웃었다. 웃음이 주름의 제자리에 정확히 앉았다. "여물었지."다과가 올랐다. 연꽃 문양 유밀과였다. 노을빛으로 반질한 결, 겹겹이 눌러 새긴 잎맥. 북강의 찻상에서 본 것과 같은 다방의 솜씨였다. 접시는 태후가 손수 밀었다. 금가락지 낀 손이 접시를 정확히 반 뼘 밀고, 멎었다. 온보요는 하나를 집어, 맛있게 먹었다. 겉이 바스라지는 소리까지 얌전하게. 바스라지는 소리 틈으로 엉뚱한 목소리 하나가 다녀갔다. 단 것을 먹었으면 값을 치러야지— 입술 끝을 느리게 쓸던 엄지. 태후전 한복판에서 떠올릴 것이 못 되어, 그녀는 찻물로 그것을 눌러 삼켰다. 태후는 그 먹는 양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태후의 찻잔은 상 위에서 움직이지 않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71화. 서문(序文)

    담 너머의 향은 사흘 밤을 내리 탔다. 나흘째 아침, 궁에서 문안 채비의 기별이 왔다.문안 대기전은 여인들의 조정이었다.성수 참례로 입경한 왕비와 명부(命婦)들이 차례를 기다리는 전각. 발 디딜 자리마다 서열이 있고, 앉는 방석의 수가 품계를 말했다. 전각 안은 여인들의 향이 겹겹이라, 숨을 쉴 때마다 다른 집 향이 코를 스쳤다. 사향, 매화향, 용연향. 향으로도 서열이 갈렸다. 온보요의 자리는 서쪽 둘째 줄— 이성왕비의 자리로는 낮고, 죄인의 여식 자리로는 높았다. 자리 하나로 두 가지를 동시에 이르는 배치였다."북강은 춥지요." 곁자리의 군왕비가 부채 너머로 말을 건넸다. "고생이 많으시겠어.""물이 좋아, 지내기 좋습니다.""물이 좋다니, 다행이네." 부채가 접혔다 펴졌다. "사람은 어떻고.""물을 닮았습니다."부채 너머의 눈들이 잠깐 바빠졌다가, 다른 화제로 흘러갔다. 동쪽 첫 줄에서는 누구의 머리꽂이가 진주 몇 알인지가 화제였고, 서쪽 끝줄에서는 부채 뒤의 눈들만 바빴다. 차는 식지 않게 계속 갈렸다. 갈리는 찻잔 수만큼, 말도 갈렸다. 전각 안에는 그런 물음이 방석 수만큼 있었다. 온보요는 반은 웃고 반은 흘리며, 어느 방석이 어느 담장과 이어져 있는지를 지도 삼아 접었다.차가 두 순배 돌았을 때, 상궁 하나가 문갑을 받쳐 들고 왔다."태후마마의 분부시옵니다. 성수 축하연의 서문을 명부들께서 한 문장씩 이어 적는 것이 연례라— 삭왕비마마께서도 한 문장 얹어 주시지요."문갑 위에는 반쯤 채워진 두루마리와 붓이 놓여 있었다. 앞서 적은 명부들의 문장이 갖은 서체로 이어져 있었다. 아름다운 연례였다. 연례라기에는, 두루마리를 받쳐 든 상궁의 눈이 그녀의 손끝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글씨가 좋으십니다. 규방의 붓이 아깝습니다.북강의 저녁 문안상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전각을 건너 되살아났다. 온보요는 붓을 받았다. 먹을 묻히고, 숨을 하나 고르고— 어깨의 힘을 뺐다.먹을 묻히는 짧은 사이, 다른 벼루 하나가 스쳐 갔다. 사각사각, 등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70화. 남문(南門)

    태후전이 남쪽에 풀었다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사이, 배는 마지막 물굽이를 돌았다. 하구에서 내려 관도로 갈아탄 지 한나절— 경성은 냄새부터 달랐다. 성이 보이기도 전에 냄새가 먼저 왔다. 향과 기름과 사람의 냄새. 북강의 바람이 마른 흙과 숯 냄새라면, 경성의 바람은 무엇이든 태우고 지지고 바르는 냄새였다. 삼 년 만이었다. 삼 년 전에는 이 냄새를 냄새인 줄도 몰랐다.관도의 흙먼지 속에서 행렬은 느려졌다. 성문으로 몰리는 수레와 나귀와 지게꾼들. 성수를 앞둔 경성으로 팔도의 물산이 밀려들고 있었다. 비단 짐 위에 닭장이 얹히고, 닭장 위에 아이가 얹혀 졸았다. 이윽고 성벽이 보였다. 북강의 성벽보다 높고, 희었다.남문 밖 물상들의 나루에서 행렬이 쉬었다.떡집은 나루 안쪽에 있었다. 김 오르는 시루가 문밖까지 나와 있고, 수수떡이 채반에 줄지어 식고 있었다. 온보요는 가마 발 틈으로 그것을 보았다. 채반의 떡은— 세 켜였다. 붉은 수수 켜 사이로 콩고물이 두 줄, 선명했다. 시루에서 김이 오를 때마다 단내가 관도까지 밀려왔다. 떡집 늙은 주인은 채반을 뒤집으며 행렬 쪽은 보지도 않았다. 보지 않는 것이, 스무 해짜리 눈이었다.세 켜면 대문이 열린다.앵무를 시켜 떡 한 채반을 샀다. 저녁에 시비들과 나눠 먹였다. 쫀득하고 구수한 떡이 목을 넘어가는 동안, 스무 해짜리 신호 하나가 그녀의 소매 안에 들어와 앉았다. 경성 남문 밖에, 열리는 대문이 있다.입성은 이튿날 정오였다.성문의 수문군이 왕비 행렬의 문첩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오래 볼 것 없는 문첩이었다. 오래 보는 것으로 무언가를 전하는 눈이었다. 행렬이 문루 그늘을 지나는 사이, 온보요는 가마 안에서 허리의 백옥 패를 옷섶 안으로 넣었다. 은방울 소리가 옷감에 눌려 죽었다. 경성 한복판에서 울리기에는, 너무 북강의 소리였다.거처는 궁 동쪽의 사가로 정해져 있었다.담이 높고 마당이 좁은 집이었다. 성수 참례 왕비들의 임시 거처라 했다. 마당에는 오래된 석류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석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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