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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촛불

Penulis: moominkiller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7-13 17:54:29

눈을 뜨자 초 하나가 타고 있었다.

무두장이 폐가의 작은 방이었다. 머리맡에 코피에 쓰는 마른 약초가 헝겊에 싸여 놓여 있었고, 그 곁에 언니의 글씨로 쪽지 한 장. 아비는 잔다. 책은 내가 가졌다. 오늘 밤은 아무도 너를 부르지 않는다. 늙은이는 강가에서 제 발로 갈라섰다는 말은 노새에게 나중에 들었다. 대회는 끝났고 판은 깨졌으니 오늘은 죄인도 없네, 하고는 젖은 관복 그대로 어둠 속을 걸어갔다고.

몸을 일으키자 세상이 반 박자 늦게 따라왔다. 강을 달래 쓴 값이었다. 그 값을 셈하다가, 운설은 아직 치르지 않은 다른 셈 하나를 떠올렸다. 왼 소매에 배어들던 피. 뗏목 위에서 저 혼자 걸어 둔 약조.

그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젖은 옷은 갈아입었으나 왼팔은 그대로였다. 남 앞에 상처를 내놓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상처를 봐 줄 한 사람을 기다리는 자세로.

"소매를 걷으세요." 운설이 말했다. "들어와서요."

방으로 들어온 그가 순순히 소매를 걷었다. 걷다가, 상처가 소매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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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145화 — 이름을 돌려주는 법

    만군 앞에 대월이 선 것은 사흘 뒤였다.얼음 둑은 그 사흘 동안 노인의 손으로 다 허물어졌다. 봄물은 큰 강이 되어 얌전히 남으로 흘렀고, 하류의 마을들은 젖은 발등만으로 그 며칠을 넘겼다. 물막이 부역을 하던 만군의 병졸들은 밤마다 강가에 홀로 앉은 노인을 구경했다. 세상을 지우려던 자가 세상을 도로 꿰매는 것을.무대는 여울 초입의 그 언덕이었다. 종이의 상이 다시 차려지고, 이번에는 그 곁에 사람이 섰다."명을 내린 것은 나다."대월의 목소리는 만군의 끝줄까지 갔다."침략설을 지은 것도, 열두 가문에 갈대 종이를 띄운 것도, 물길과 봉화를 판 것도 — 나다. 명부에서 긁어낸 이름의 임자가 나고, 수결의 획이 내 획이다. 형을 벤 것도, 형의 나라를 지운 것도, 십팔 년 뒤 너희 만 명을 물로 지우려던 것도 — 나다."자백은 길지 않았다. 죄가 커서 말이 짧았다.만군은 조용히 들었다. 사흘 전만 해도 이 언덕을 베러 온 만 개의 창이, 이제 한 노인의 자백을 만 개의 귀로 받고 있었다. 서기들의 붓이 바빴다. 이 자백이 남으로 내려가면 열두 줄의 시대가 끝난다. 영웅담이 도살 장부가 되고, 도살 장부가 재판 기록이 되는 데 — 열여덟 해와 물 한 골짜기가 든 셈이었다.간수문이 그 곁에서 법의 절차를 밟았다. 실각한 당주에게는 판결할 권한이 없었다. 한데 이 언덕에는 맹의 법이 미치지 않았고, 삭월의 법은 임자가 있었다.혈비가 앞으로 나섰다."삭월의 법에 제일 무거운 벌은 이름을 지우는 것이다."붉은 달의 주인이 — 삭월의 마지막 왕녀가 — 만군과 유민들 앞에서 말했다."한데 그 벌은 십팔 년 전에 이미 틀렸다. 이름을 지웠더니 지워진 자가 세상을 지우려 했지. 그러니 나는 반대로 한다." 언니는 품에서 찬 달의 패를 꺼내 들었다. "이름을 돌려준다. 죄와 함께. 지워진 채 죄만 남는 것이 아니라 — 이름 밑에 죄가 적히도록. 사람들이 두고두고 그 이름을 부르며 그 죄를 기억하도록."언니가 노인을 향해 물었다."이름을 대라. 형이 부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144화 — 낯 없는 등

    산을 내려가는 길에서, 어머니는 혈비의 등에 업혔다. 언니가 아무에게도 그 등을 내주지 않았다. 열여덟 해 전 저를 업고 눈을 건넌 등이 있었듯, 이번에는 저의 등이 그 빚을 갚을 차례라는 듯이.붉은 달의 주인이 어머니를 업고 얼음 계단을 하나씩 밟아 내려가는 것을, 골짜기 아래의 모두가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만군의 병졸들까지도. 물을 세운 여자와, 강을 처음 흘린 여자와, 그 둘을 낳은 여인이 어떤 하루를 치렀는지 — 말은 벌써 진중에 다 돌아 있었다.야영의 밤, 어머니는 화톳불 곁에서 얕게 잠들었다. 잠든 낯이 골짜기에서보다 편안해 보이는 것이 위로인지 불안인지, 딸들은 판단을 미뤘다. 맥은 실낱인 채로 버텼다. 낡은 것은 수가 없다지만, 낡은 것이 버티는 데는 까닭이 있는 법이었다. 펴 놓은 달무리 수가 그 곁에 있었다.운설은 어머니 곁에서 침으로 밤을 났다. 실낱의 맥을 붙드는 것은 힘이 아니라 정성이었다. 반 시진마다 혈을 옮겨 짚고, 어머니의 강에 실개천을 대지 않는 선에서 — 이으면 같이 마른다던 그 금을 지키는 선에서 — 물가의 온기만 곁에 두었다. 선우현이 그 곁에서 화롯불을 지켰다. 두 사람은 말없이 각자의 불을 지켰다.새벽녘, 혈을 옮겨 짚는 그녀의 손이 곱아 더디어지자 그가 말없이 그 손을 가져다 제 목덜미에 대었다. 사람의 몸에서 제일 더운 자리였다. 손이 녹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보지 않았다. 보면 길어질 참이라서.혈비는 잠들지 않았다. 언니는 화톳불 건너의 간수문을 오래 보다가, 이윽고 물었다."영감. 하나 물어도 되나.""물어라.""열여덟 해 전 — 그 아침에." 언니의 목소리가 낮았다. "벽장에서 나온 열두 살을, 눈 속에서 이틀을 업고 걸은 등이 있다. 낯을 안 보여 준 등이. 업힌 것은 기억나는데 낯이 없어. 평생 그 등을 찾다가 — 요즘 자꾸, 걸음 하나가 눈에 밟힌다."늙은 당주는 식은 차를 오래 들여다보았다."지팡이 없이 걷는, 꼿꼿한, 늙은 걸음." 혈비가 말을 이었다. "영감. 그 등이 — 영감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143화 — 닻의 값

    어머니를 얼음 위에 눕히고, 운설은 의녀가 되었다.울음은 나중이었다. 우는 법은 배웠으나 지금은 그 법의 차례가 아니었다. 감정의 문을 하나씩 닫으며, 그녀는 손부터 움직였다. 곁의 혈비가 제 겉옷을 벗어 어머니의 몸 밑에 깔았다. 얼음의 냉기라도 한 겹 막으려는, 딸이 할 수 있는 제일 작은 일부터.바람은 선우현이 막았다. 그는 어머니의 머리맡 쪽에 등을 두고 서서 제 몸으로 바람벽이 되었다.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다만 서 있는 자리가 정확해서, 의녀의 손등에 닿는 바람이 반으로 줄었다.진맥. 눈꺼풀. 숨의 결. 손은 배운 대로 움직이는데, 배운 것들이 하나씩 고개를 저었다. 맥은 실낱이었다. 물소리를 듣는 귀로 들으니 더 참혹했다. 어머니의 강은 — 바닥이 보였다. 열여덟 해 동안 한 사람의 폭주를 누르고, 방금 반 시진 동안 며칠 치 봄물을 달랜 강이, 마른 여울처럼 잦아들고 있었다.아래에서는 물이 여전히 크게 흘렀다. 숨구멍 여남은 개로 나뉜 봄물이 밤새 흐를 소리. 세상은 살았다. 세상을 살린 값이 지금 얼음 위에 누워 있었다."물을 나눠 드리겠습니다."운설이 제 손목을 걷었다. 실개천을 흘리는 법의 역방향 — 제 강을 어머니의 강에 잇는 것. 해 본 적 없는 수였지만 지금 셈할 계제가 아니었다."안 된다."어머니의 손이 딸의 손목을 잡았다. 실낱같은 맥의 임자답지 않게, 단단한 손이었다."물은 — 그렇게 잇는 게 아니다. 이으면 네 강까지 같이 마른다. 어미가 열여덟 해 그 셈을 안 해 봤겠느냐.""그럼 무슨 수로—""수는 없다." 어머니가 웃었다. 코끝의 붉은 것을 닦지도 않고. "낡는 것에는 수가 없어. 그저 값이 있을 뿐이지. 어미는 값을 다 치렀다. 열여덟 해 치를 — 방금 아주 좋은 자리에 다."좋은 자리. 만 명의 숨과, 하류의 마을들과, 두 딸이 보는 앞. 값을 치를 자리로 그보다 나은 데가 없다는 말을, 어머니는 그렇게 했다."놓아주는 것도 물의 일이라 했지."어머니의 눈이 두 딸을 차례로 짚었다."한데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142화 — 둑이 무너질 때

    임자가 흔들리면 얼음이 흔들린다. 골짜기의 모두가 그 법을 한꺼번에 배웠다.심법으로 세운 둑은 심법의 임자와 한 몸 — 그 셈이 지금 골짜기 전체의 목숨줄 위에서 실증되고 있었다. 대월의 가슴에서 난 금이 둑으로 옮겨 갔다. 스무 길 얼음 벽의 한가운데를, 검은 금 하나가 번개 모양으로 타고 내려갔다."어른! 숨을 고르십시오!"운설이 소리쳤다. 노인은 제 가슴을 움켜쥔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열여덟 해 만에 울음을 그치려는 안의 물과, 그치게 두지 않으려는 임자가 한 몸 안에서 싸웠다. 그 싸움의 진동이 고스란히 둑을 탔다."막아야 — " 노인의 숨이 조각났다. "물이 — 한 번에 —"둑의 금에서 첫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화살 같은 물줄기가 골짜기 아래로 꽂히고, 금은 두 갈래 세 갈래로 새끼를 쳤다. 며칠 치 봄물이 제 감옥의 벽이 약해진 것을 알아챈 것이다. 갇힌 물은 영리하고 집요했다. 금이란 금을 다 찾아 몸을 밀어 넣었다."어머니!""알고 있다."어머니는 이미 움직인 뒤였다. 흰머리의 여인이 둑의 금 위에 손을 얹었다. 열여덟 해 치 닻의 손. 물소리 듣는 귀로 궁에서 둘째가던 손이 — 낡은 손이 — 얼음의 비명을 듣기 시작했다."설야야. 어미가 얼음을 듣는다. 너는 물을 들어라. 도련님은—" 어머니의 눈이 무너진 노인에게 갔다. "도련님은 당신 안의 것을 들으세요. 열여덟 해 만에 처음으로 — 도망치지 말고."아래에서는 아래의 판이 돌았다. 사백과 우르와 기수들이 하류 쪽 벼랑길로 사람들을 물렸고, 모용 가주의 이백이 물목마다 흩어져 목청으로 물길을 알렸다. 간수문과 한겸은 벼랑 위에서 그 모든 것을 종이에 받아 적었다. 훗날 법정이 열리면 — 열게 하면 — 이 골짜기의 반 시진이 통째로 증거가 될 것이었다. 젊은 감찰의 붓이 떨리면서도 멎지 않았다.세 사람의 물이 각자의 자리에 들었다.운설은 갇힌 봄물에게 실개천을 흘렸다. 겨루지 않았다. 네가 크다. 안다. 한데 한 번에 나가면 너는 세상을 지우고 — 지운 것을 물은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141화 — 네 번째 침

    "올라가겠습니다."운설이 말했다. 등 뒤의 숨들이 일제히 멎는 것이 들렸다."단 — 곁자리의 값은 제가 정합니다.""값을 네가 정한다?""어른은 딸을 원하신다 했지요." 그녀는 얼음 둑의 발치로 걸어가며 말했다. "한데 어른이 원하는 것은 딸이 아니라 — 여덟 살의 겨울입니다. 그 겨울에서 못 나온 건 따님이 아니라 어른이시고요. 그러니 곁자리에 앉기 전에, 의녀로서 먼저 하나 여쭙겠습니다."그녀는 둑을 올려다보았다."침 세 번을 맞으셨지요. 열여덟 해 동안, 제 침을. 네 번째를 — 지금 놓아 드리러 올라갑니다. 여덟에 멎은 자리에요. 그 침이 듣지 않으면, 곁자리든 저울이든 어른 뜻대로 하십시오. 한데 듣거든—""듣거든?""어른이 제 값을 치르십시오. 숨구멍은 어른 손으로 뚫고 — 어머니를 놓아주시고 — 그리고 살아서, 지워진 이름을 도로 받으십시오. 법 앞에서요."골짜기가 조용해졌다. 사람을 산 채로 흠 없이 원해 온 자가, 산 채로 흠 없이 저를 받겠다는 자를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둑의 발치로 걸어가는 그녀를, 그가 소매 한 번 잡는 것으로 배웅했다. 잡은 손은 말 대신 제 장갑을 벗겨 그녀의 손에 끼웠다. 얼음을 짚고 오를 손이 시리지 않도록 — 지금 그가 보탤 수 있는 전부였다.얼음 둑을 오르는 길은 대월이 냈다. 얼음이 계단으로 접히며 그녀의 발밑에 하나씩 놓였다. 제 발로 아가리에 드는 자를 위한, 정중한 아가리였다.오르며 그녀는 딱 한 번 아래를 보았다. 반 보 뒤에 서겠다던 사람이 둑의 발치까지 와 서 있었다. 올라오지는 않았다. 올라오지 않는 것이 그가 치르는 값이었다. 얼음 계단 하나 사이의 거리에서, 심장 뛰는 자리가 그녀의 등을 받치고 있었다.둑 위는 바람의 세상이었다.며칠 치 봄물이 등 뒤에서 검푸르게 차 있었다. 물의 낯이 이상하게 고요해서 그 고요가 더 무서웠다. 어머니가 세 걸음 밖에 서 있었다. 야윈 낯이 딸을 보며 아주 조금 웃었다. 오지 말라는 웃음도, 잘 왔다는 웃음도 아닌 — 네 고름을 존중한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140화 — 둑 위의 담판

    보여 줄 것이 있다는 말에, 답한 것은 혈비였다."보여 줄 것은 이쪽에도 있다."언니가 앞으로 나서며 품에서 그것을 꺼내 들었다. 찬 달의 패. 우물 밑에서 열여덟 해를 기다린 왕의 패가, 얼음 둑 아래에서 형의 아우를 올려다보았다."형님의 유해는 대전에 모셨다. 등 뒤의 칼자국까지 — 다 보았다."둑 위의 노인은 오래 말이 없었다. 얼음이 낮게 우는 소리만 골짜기를 채웠다.일행은 둑 아래 백 걸음에 벌여 서 있었다. 사백의 활은 시위를 얹은 채 내려져 있었고, 선우현은 운설의 반 보 뒤에, 간수문과 운백천은 나란히 — 십팔 년 전 눈밭의 두 사람이 나란히 — 서 있었다. 화살이 닿을 거리였고, 화살로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 거리였다. 저 노인이 무너지면 둑이 무너진다. 심법으로 세운 벽은 심법의 임자와 한 몸이었다."형님은," 이윽고 대월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까지 등을 안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내게 등을 보인 것은 — 믿어서가 아니다. 돌아섰던 것이지. 아우의 청을 마지막까지 듣고, 안 된다 하고, 돌아선 것이다.""무슨 청.""심법을 돌려 달라 했다." 노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여덟 해를 얼음 속에서 벼렸다. 그릇이 이제 되었으니 — 그 아이를 다시 데려올 수 있으니 — 돌려 달라 했지. 형님은 안 된다 했다. 죽은 것은 못 살린다. 그 금이 너를 살렸고, 그 금이 삭월을 지킨다."죽은 것은 못 살린다. 그 금이 형의 마지막 말이 된 것이다."그래서 등에 칼을 꽂았나." 혈비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가 반, 다른 것이 반이었다. "그 말이 들려서 — 그 말이 맞아서?""맞는 말이 사람을 제일 깊이 벤다."노인은 답이 되지 않는 답을 놓고, 손을 들었다. 얼음 둑이 응답하듯 길게 울었다."자, 셈을 하자. 너희는 숨구멍을 뚫으러 왔겠지. 물을 나눠 흘려서 세상을 살리러. 좋은 수다. 한데 그 수에는 내가 서서 안 되지. 그러니 — 흥정이다."노인의 곁에서, 흰머리의 여인이 한 걸음 나섰다.어머니는 딸들을 내려다보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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