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안채가 종일 분주했다.고용인들이 쉴 새 없이 집 안팎을 오가며 쓸고 닦았다.매일 하는 일인데도 오늘따라 유난한 이유는 차 회장이 퇴원해 호명 가로 돌아오는 날이기 때문이었다.“베개 그거 말고 새로 들인 거 있잖아요. 그거 가져오세요.”안서희가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곳은 침실이었다.차 회장이 퇴원하기 며칠 전부터 침대 시트와 베개를 새로 구비했다.매장에 직접 가서 골랐을 정도로 신경을 썼다.“거기서는 괜찮아 보이더니 집에 오니까 색이 칙칙하네. 조명 탓인가.”고용인이 새로 깔아 둔 시트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안서희는 침실 조명을 올려다보며 못마땅한 기색이었다.“안 되겠다. 이거 다시 벗기세요.”“예? 다시 말씀이세요?”고용인이 되묻자 안서희가 대답 대신 손을 휘저으며 재촉했다.“하얀색인 줄 알았더니 누렇잖아. 차라리 진한 색으로 하는 게 낫겠어. 그레이 있죠? 그걸로 가져와요.”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 시트를 벗겨낸 고용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안서희는 시간을 확인하며 서두르라고 재촉했다.안서희는 차 회장이 하루빨리 돌아오길 기다렸다.차 회장이 없는 사이 호명 가에 주인 행세를 하는 도언을 참아주는 데에도 한계가 왔기 때문이었다.“네까짓 게 감히.”말끝마다 어머니를 붙이며 이죽대는 도언의 꼴을 더는 참아줄 수 없었다.감출 생각도 없이 내리깔고 보는 그 눈에 담긴 경멸도 마찬가지였다.그건 도언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변하지 않았다.이미 다 자란 것 같았던 어린 도언은 처음부터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보았다.아버지의 새 여자, 제 엄마의 자리를 차지한 불청객.도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그런 도언에게 어머니, 라고 불릴 때마다 소름 끼치도
그 바람에 헛기침이 새어 나왔다.물잔을 건네는 도언에게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대답했다.“혼자 먹어요.”어쩌다 시간이 맞는 고용인들과 먹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혼자였다.그래서 언젠가부터는 따로 차려놓지 말라고 부탁했다.간단하게 챙겨 먹는 게 마음이 편했다.“나랑 같네요.”“……?”“나도 혼자 먹거든.”이재가 잠시 마주친 눈을 내리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점심엔 뭘 먹어요?”“그냥…… 대충, 되는대로 먹어요.”성의 없는 대답처럼 했지만 사실이었다.샐러드나 요거트 같은 걸 먹을 때도 있었고 라면이 먹고 싶을 때는 라면을 먹었다.고용인들의 식사와 시간이 겹치면 그들이 먹는 걸 먹었다.그러고 보니 점심 메뉴를 딱히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대충이라…….”도언은 이재의 대답이 못마땅한 듯 이마를 문지르며 이재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그래서 오늘은 뭘 먹을 건데요?”이재는 그 질문이 의아해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이제 아침을 먹고 있을 뿐이었다.점심으로 뭘 먹을 건지 대답하라는 도언이 질문이 이상했다.그래도 기어이 이재의 대답을 듣겠다는 듯 보는 그의 시선에 못 이겨 이재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아직 모르겠어요.”“그럼 정해지면 알려줘요.”“그걸 왜…….”도통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이 계속 이어지는 통에 이재가 참지 못하고 되묻고 말았다.“궁금해서. 한이재가 오늘은 뭘 먹는지 알고 싶으니까 알려 달라고.”무슨 꼬투리를 잡으려고 그러는가 싶었던 이재는 뜻밖의 말에 감출 새도 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이재는 못 들은 척 젓가락을 들어
이재는 저를 온몸으로 안은 그의 품에 안긴 채 어루만지는 그 손길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어쩌면 지난밤 어느 한 순간쯤은 울고 있었던 것도, 그가 누구라는 것도 잊었을지도 모르겠다.그의 다정이 그렇게 만들었다.지난밤은 그저 자신을 안은 이 남자에 기대 버렸던 밤이었다.“같이 아침 먹어요.”도언이 이재의 뺨에 댄 입술을 귓가로 움직여 속삭였다.“아뇨, 그냥 갈게요.”이재가 그제야 흠칫 놀라 뒤로 옆으로 물러섰다.이재에게서 떨어진 도언이 숙였던 상체를 들었다.“왜, 또 누가 볼까 봐?”이재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도언이 물었다.이재는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이른 시간이었지만 분명 별채 주방엔 김 여사가 와 있을 것이다.만약 도언과 함께 내려가서 그녀를 마주친다면?이재는 고개를 저었다.안 그래도 이미 호명 가 고용인들에게 소문이 났을 텐데 김 여사에게 확인까지 시켜주고 싶지는 않았다.“아무도 안 보면, 같이 먹어 줄래요?”“……?”“갑시다.”도언이 이재에게 손을 내밀었다.이재가 그 손을 잡지 못하고 빤히 바라보자 도언은 손을 들어 이재의 어깨를 안았다.“아뇨, 저는 괜찮아요.”이재가 몸을 뒤로 빼며 버티자 도언이 풀썩 웃으며 이재를 내려다보았다.“나 배고파요. 누구 때문에 어제저녁도 못 먹었는데 아침까지 거르게 할 생각이에요?”이재는 어제 일을 꺼내는 도언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그리고 조금 억울했다.“그러게 누가…….”“뭐.”장난스레 눈썹을 추켜세우는 도언을 이재가 노려보자 그가 쿡 웃음을 터트렸다.이재는 어쩐지 이 친밀한 분위기가 당황스러웠다.
평소보다 이른 아침이었다.욕실에서 나온 도언은 침대를 보았다.이재는 움직임 없이 그대로였다.혹시나 지난번처럼 또 몰래 가버릴까 봐 저도 모르게 조바심이 났던 게 우스웠다.이재가 아직 잠들어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옷걸이에 걸린 셔츠를 벗겨냈다.말끔하게 다려진 셔츠에 팔을 넣으며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았다.분명 잠을 못 자 피곤함이 어려 있는데도 광이 서린 눈이 어이없도록 형형했다.“대체 어디까지 미칠 셈이지.”지난밤 뒤뜰에 숨어들었던 이재를 안았을 때 도언은 그날을 떠올렸다.이재를 처음 보았던 그날도 그녀는 그렇게 뒤뜰에서 울고 있었다.이재를 울게 만든 건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분노가 일었다면 그녀는 믿지 않고 비웃을지도 모르겠다.결국, 울고 있는 그녀를 안아 버렸으니 발정 난 개새끼 취급을 해도 할 말은 없었다.하지만, 그 눈물을 빨아먹고도 흐느끼는 그녀에게 애가 타버려 주체할 수 없었다. 그걸 욕정이라고만 한다면 억울했다.안고 싶은 것과 안아주고 싶은 건 엄연히 다르니까.어제 분명, 도언은 이재를 안아주고 싶었다.도언은 셔츠 단추를 미처 채우지도 않고 걸려 있던 넥타이를 낚아채 다시 침실로 향했다.그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잠깐의 시간이 다시 조급해지고 말았다.“어…….”침대 밖에 이재가 서 있었다.불쑥 들어온 도언을 보고 놀란 이재가 머뭇대며 시선을 피했다.“잘 잤어요?”“네.”이재는 말끔하게 셔츠를 입은 도언 앞에서 막 잠에서 깬 제 모습이 부끄러워 눈가를 문지르며 얼굴을 가렸다.남자와 밤을 보낸 후 아침에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이재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이재가 거부하듯 그의 목을 안는 대신 어깨만 살짝 잡자 도언이 그녀의 입술을 문 채 쿡쿡 웃었다.그래 봤자인 걸 알 텐데.그런 허튼 몸짓은 도리어 도언을 더 달군다는 걸 이재는 아직 몰랐다.달게 핥아 내리는 그의 입맞춤을 거부하지도 못하면서 그를 안는 건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게 얼마나 이율배반적인지 미처 깨닫지도 못했다.우는 얼굴을 기어이 들어 보이고, 눈물을 닦아 내더니 입을 맞추는 도언은 지독할 정도로 집요했다.그런데 이재는 그의 입맞춤에 눈물이 멈추었다.깊게 얽혀오는 그의 키스에 어느새 눈앞이 뿌예지도록 숨이 차올랐다.그를 안지 않으려 애를 쓰며 겨우 잡았던 그의 재킷이 자꾸만 손끝에서 미끄러지며 휘청였다.그럴 때마다 바짝 안아 드는 도언 때문에 발끝이 들렸다.“안아.”도언이 가만히 입술을 누르며 그가 중얼거렸다.그의 낮은 소리가 진동처럼 그녀의 입술을 간질였다.“날 안으라고, 한이재.”그래도 머뭇거리던 이재는 바로 그의 목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불현듯 밀고 들어온 그가 깊은 입맞춤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그에게 안겨 발끝으로 선 채 버티기엔 도언의 키스는 깊고 사나웠다.눈물을 핥듯이 간질이던 조금 전의 그 키스를 완전히 잊도록 파고드는 그에게 이재는 속절없이 떠밀렸다.그를 밀어내는 건 처음부터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안기지 않으려 발버둥 쳐봤자 여전히 그의 품일 뿐이었다.결국 할 수 있는 건 무너지지 않으려 그를 끌어안는 것뿐이라는 걸 깨닫고 만다.“흐으윽…….”도언의 거친 입맞춤에 턱이 들리고 흐느낌이 새어 나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그를 안았지만 떠밀 듯이 몰아치는 힘에 이재는 자꾸만 뒤로 밀려났다.희미하게 비추던 정원의 불빛이
그나마 도언은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을 등지고 있었다.그리고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탓에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다만 그의 손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만이 느껴질 뿐이었다.“울지 않게 해줄까?”“……?”이재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을 생각이었다.아니, 그럴 필요 없다고 하고 싶었다.눈물 따위 당신과 상관없으니 제발 내버려두고 가달라고 할 생각이었다.그러나 이재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기도 전에 먼저 도언이 입술을 맞대었다.이재의 입술에 그의 마른 입술이 닿아 곧 젖어 들었다.꾹 눌러 입을 맞춘 도언이 그녀의 입술 위에 부드럽게 문지르자 이재의 눈이 감겼다.잔뜩 고여 있던 눈물이 툭 떨어지며 맞닿은 도언의 얼굴에 떨어졌다.“흐윽.”울음기에 흐느끼며 이재가 숨을 들이켜자 그 작은 틈새로 도언이 밀고 들어왔다.천천히 느리게 들어와 이재를 열었다.그녀의 연한 살을 부드럽게 쓸고 말캉한 입술을 물어 입에 머금었다.입맞춤은 깊게 파고들었다가도 장난처럼 간질였다.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그의 입맞춤은 울지 말라고 위로하는 그런 키스였다.“이제 안 우네.”입술을 뗀 그가 속삭였다.이재는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닿을 듯 얼굴을 맞댄 그를 보았다.그의 말이 맞았다.참으려 해도 차오르던 눈물도 더는 나지 않았다.입술을 깨물어도 새어 나오던 흐느낌도 멈추었다.다만 그의 키스에 밭아진 숨만 터져 나올 뿐이었다.도언이 입술을 들어 눈가에 대자 이재는 눈을 감았다.눈물에 젖은 속눈썹을 핥듯이 스치는 그 느낌에 이재는 몸을 떨며 그의 팔을 잡았다.“한이재.”
대한민국에서 알 만한 사람은 모두가 다 아는 건설 그룹 호명,호명의 가족이 거주하는 그들만의 성채 호명가에 도착한 이재는 뒷자석에 앉은 도경을 돌아봤다."술 다 깬 거지?""집에 가기 싫은데."엉뚱한 대답을 하는 도경은 차에서 내릴 생각도 없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집에 안 가면, 어딜 가려고?"그제야 도경이 이재를 바라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누나, 우리 어디 가서 딱 한 잔만 더 마실래?""야! 차도경!"이재가 인상을 팍 쓰자 움찔 놀란 도경이 싫으면 말고, 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올려다보는 도경을 모른 체하며 이재는 손을 내밀었다.“차 키."도경의 시선이 느리게 이재의 손으로 내려왔다. 대답 없이 멍하니 바라보는 도경에게 이재가 재촉했다. "차 키 내놓으라고.""......차 키?"도경이 마치 처음 듣는 말처럼 중얼대며 물끄러미 이재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이재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삼키며 다시 말했다."차 키, 어디 있어?" “아아...... 차 키.”뭐가 재밌는지 킥킥대던 도경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주차 해준다고, 가져갔지. 누구더라? 그 형이......
“하아.”택시에서 내린 이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여름의 끝자락, 후텁지근한 공기가 달라붙어 금세 이마에 끈적한 땀이 배었다.“뭔 술을 언제부터 처마셨길래.”이재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고작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그동안 새벽 시간에 무수히 불려 다녔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은 또 처음이었다.늦은 시간이 아니니 오늘 밤은 그래도 잠을 설치지 않아도 되었다.차라리 잘 된 건가 싶다가도 대기조처럼 불려다니는 제 처지에 화가 치밀었다. “어쩌겠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지.”그러다 이내 이렇게 체
여자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별채 2층 계단을 오르며 후회했다."다음에, 다음에 해요......"자신이 한 말이 메아리가 되어 끝도 없이 귓가를 울렸다.‘다음이라는 말은 왜 했을까.’그건 무언가 기약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그를 피하고자 했던 의미 없는 말이었다.하지만 이제 와 설명한들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여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늘 그렇듯 후회는 이미 늦어버렸을 때 하는 것이니까.탁-.여자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순식간에 닥쳐온 어둠에 두려움이 밀려왔다.제 손을 잡은 남자의 희미한 온기마저 빠져나갈까 두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