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르하가 엘프의 말로 무어라 중얼거리고는 말했다.
“제1시대 마지막 전쟁이야.”
“그렇게 부르나보군, 제1시대라고.”
오르하의 말에 조세르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망자들 중 유독 많은 이들이 다홍빛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에녹을 비롯한 일행이 조세르를 힐끔 쳐다보았다.
강의 한 가운데 돌과 나무로 만든 다리가 있었다. 마차 세 대가 나란히 지나가도 좋을 만큼 넓은 다리였다. 조세르를 필두로 다리를 건너는데, 구슬픈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어?”
네리나가 귀를 기울였다.
“왜 그래, 아가씨?”
“무, 무슨 일 있어요?”
긴과 톰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톰은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지 어느새 에녹의 곁에 바짝 붙은 채였다.
“쯧.”
에녹은 혀만 한 번 찰 뿐, 톰을 내치지는 않았다.
계속되는 노랫소리에 네리나가 힐끔 뒤돌아보다, 물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노래하는 시신과 눈이 마주쳤다.
다홍빛 눈동자를 한 시신이 씨익 웃었다. 흰 옷에 파란 목걸이를 한 시신이었다.
네리나가 풍덩, 강에 빠져들었다.
네리나가 정신을 차린 건 강에 빠져든 직후였다.
‘내가 왜 뛰어들었지?’
그렇게 생각하며 허우적대자 주변의 시신들이 자꾸만 손에 걸렸다. 무서움을 느낀 네리나가 공기방울을 토해냈다.
‘!!’
그런데 자신의 손에 걸린 시신들이 금빛 빛무리로 변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뿌옇던 강물조차 맑게 정화되는 것 같았다.
네리나는 금세 에녹의 손에 이끌려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희게 질린 조세르가 강물과 네리나를 번갈아 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쳇, 재수없게. 대장이 없어질 뻔 했잖아?”
“걱정했다는 말을 재수없게 하는 재주가 있군, 인간.”
“뭐? 인간? 이 엘프놈아.”
긴과 오르하가 투닥거리자 에녹이 그들을 쏘아보았다.
“지금 네리나가 쓰러진 것 안보이나?”
오직 네리나의 안전에 대해서만 입을 여는 에녹이었다. 네리나가 콜록거리며 강물을 뱉어냈다.
“오늘은 여기서 쉬어야겠군.”
조세르가 말하자 톰이 냉큼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았다.
“이, 이렇게 무서운 곳 한가운데서 쉰다니요? 그건 쉬어도 쉬는 게 아닌….”
“해가 졌어. 태양신의 가호가 더는 우리를 지켜줄 수 없어.”
“끄응….”
톰이 하는 수 없이 조세르의 말에 수긍했다.
오르하와 에녹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큰 담요로 네리나를 감싸기 바빴다.
“자, 네리나양. 꽁꽁 싸맸으니 젖은 옷은 벗어버려요. 안그러면 연약한 인간은 감기에 걸린답니다.”
“맞아. 벗어.”
네리나가 에녹을 사납게 째려보다 한숨을 쉬었다. 에녹은 왠지 억울해보였다.
“에녹, 고해줘서 구마워요.”
“구해줘서 고맙다고? 알겠어. 일단 정신은 덜 돌아온 것 같군.”
네리나가 또 한 번 한숨을 크게 쉬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충격이 큰 것 같았다.
“그보다 아까 말이야, 아가씨 손에 닿은 시신은 빛먼지로 변해 사라졌어. 그건 어떻게 된거지?”
긴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자 조세르가 네리나의 다홍빛 머리카락을 빤히 쳐다보았다.
“리르카는 네리나양을 오래된 것들의 약속이라고 불렀어요. 그것과 연관이 있나요?”
“저도 몰라요, 오르하. 나도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에요. 으앙!!”
네리나가 울음을 터트렸다. 벤자민을 구하러 가는 길이 이렇게까지 험난할 줄은 몰랐다. 새어머니가, 그러니까 드완 부인이 준 돈은 한 푼도 써보지 못하고 숲에서 죽게 될 것만 같았다.
조세르가 황급히 달려와 네리나를 껴안았다.
“왜 애를 울리고 그래. 다 죽여버리고 싶게.”
“….”
긴과 오르하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구슬픈 망자들의 노랫소리를 뚫고 네리나의 힘찬 울음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쉬이, 괜찮아. 놀랐지, 자기?”
“훌쩍…. 저 알몸인데요.”
“담요 두르고 있잖아. 내가 못보면 알몸이 아니지.”
“참나.”
“울음 그친거야? 조금 더 울래? 내가 더 껴안고 싶어서 그래.”
“조, 조세르씨는 못하는 말이 없네요.”
“널 기다린 세월이 얼마인데. 빙빙 돌려가며 낭비할 시간은 없어.”
네리나의 뺨이 또다시 붉게 물들었다. 조세르는 볼을 깨물어 과즙을 맛보고 싶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만.”
에녹이 입을 열었다.
“뭘 그만하라는거지, 에녹?”
“그렇게 껴안고 있는 것.”
“왜? 네리나도 가만히 있는데, 네가 왜?”
조세르의 말에 에녹이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네리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곧 뒤를 돌아 경계 태세를 갖추는 척했다.
“여기서 쉬는건 좋지 않을 것 같아요. 노랫소리 때문에 미치겠어요.”
“노랫소리라니요, 네리나양?”
네리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교복을 입고 머리를 빗는 등 부산스러웠다. 베이지색 교복은 네리나의 몸에 딱 맞게 준비된 것 같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들어오세요!”“와, 네리나양. 정말 잘어울려요.”“볼만한데, 아가씨?”톰과 긴, 그리고 에녹이었다. 에녹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헤헤 정말요? 저 학교 가는 거 처음이에요.”네리나가 방실방실 웃으며 부끄러워하자 모두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나도 처음이야, 아가씨. 우리 대장 덕분에 별 경험을 다해보는군.”“저도요, 네리나양.”“나도.”네리나가 일행을 둘러보며 웃음지었다. 네리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것을 알아챈 긴이 먼저 입을 열었다.“오르하랑 조세르는 이른 아침부터 수업이 있어서 먼저 갔어. 너무 서운해하지 마.”“서운하다뇨! 그냥 안보이니까 궁금해서….”“그래그래, 우리는 수업을 가자고.”수업은 1층에서 이루어졌다. 말이 1층이지, 허공에 둥둥 떠 있어서 높이를 가늠할 수는 없었다.네리나와 일행들이 교실로 들어서자 왁자지껄했던 교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네리나도 교실 안을 살폈다.‘엘프랑 오크에 고블린, 인어에다가… 인간은 안보이네.’&nb
“어떻게 가면 되지?”조세르의 반말에도 소년은 기분나쁜 내색 없이 대답했다.“이 코끼리를 타고 가시죠. 이 녀석은 특이하게도 사람을 가리지 않는답니다.”코끼리라 불린 생물은 크고 넓은 귀를 펄럭거리며 날고 있었다. 소년이 싱긋 웃으며 자리를 내주었다. 일행은 바위처럼 단단한 코끼리의 등에 올라탔다.코끼리의 귀가 크게 한번 펄럭이더니 위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들의 눈에 거대한 탑의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다.“땅에서는 안보였는데??”네리나가 크게 소리쳤다. 소년이 싱긋 웃고는 네리나를 돌아보며 말했다.“말씀드렸듯, 저희 아카데미는 특정한 조건을 충족해야 보고, 듣고, 들어올 수 있답니다.”코끼리는 탑의 최상층까지 훨훨 날았다. 그곳에 난 거대한 구멍을 통해 일행을 내려주고는 그대로 떠나버렸다. 일행이 어리둥절하게 서 있자, 의자가 있는 자리에서 무언가 불룩 솟아났다.“여기는 교장실이라네.”그들을 맞이한 것은 눈 부분이 뚫려있는 거대한 고깔이었다.“팔라가 신입생을 데려왔군 그래.”일행들은 순간 얼어붙었다.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나선 건 조세르였다.“맞아. 입학을 원해서 왔지. 그래서, 절차가 어떻게 되지?”고깔이 한참 조세르를 바라보다 껄껄대며 웃고는
네리나는 비로소 자신이 신비한 모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꺠달았다. 벌벌 떨고만 있을 떄가 아니었다. 벤자민을 향해 가는 모든 여정 동안 자신 역시 점점 넓어지고 깊어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긴과 톰은 재각기 흩어져서 귀신의 앞으로 가 주문을 외우기 바빴다. 오르하가 조세르에게 물었다.“이렇게 성불이 쉬운데, 왜 이 귀신들은 그 오랜 시간을 맴돌고 있었던 걸까요?”“굳이 여기까지 와서 이들을 성불시킬 필요가 없었겠지. 거대 평야는 그 어느 종족도 굳이 오지 않으니 말이야.”오르하는 아쉬운 마음에 쩝 하는 소리를 내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의 선조인데, 그 많은 시간동안 괴로워만 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긴과 톰이 지친 표정으로 일행에게 돌아왔다. 그들 주변에 있던 안야 귀신들은 모두 성불한 상태였다. 저 멀리서 안야 귀신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오늘은 이쯤 하고, 여기서 야영을 하는 게 어때요? 저 멀리 있는 안야귀신이 여기까지 올 것 같지는 않고.”“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면 되겠군.”“오르하, 나는 뺴줘. 나는 이미 몇 십마리나 퇴치하고 왔단 말이야.”“마리? 퇴치? 긴 너는 말을 조심하는 게 좋겠어.”긴과 오르하가 투닥거렸다. 톰은 나름 뿌듯해보였다.“톰, 기분이 좋아 보여요.”“물의 신을 믿는 신자로서, 한 생명이 물의 신의 품으로 귀의할 수 있게 도왔으니까요.”“아하.”
일행은 오크의 왕국에서 동쪽으로 움직였다. 긴은 서쪽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간다는 사실이 못내 못마땅해 보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고 보니, 이 거대 평야에는 전설이 있어요.”“뭔데요, 오르하?”네리나가 귀를 쫑긋 세우며 물었다. 아까의 눈물은 에녹의 다그침에 아예 휘발된 것 같았다.“안야 귀신이 거대 평야를 거닐고 있다는 군요. 성불도 하지 못하구요.”“안야 귀신? 무슨 이름이 그래요?”“안야, 안야, 계속 그렇게 중얼거려서 안야 귀신이라고 하죠.”“와아. 좀 무서웠다.”네리나가 팔뚝에 돋은 소름을 문지르며 웃었다. 웃는 네리나의 모습에 오르하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오르하가 아는 전설이면 엄청 오래된 거겠네요. 조세르도 알아요?”“아버님께 듣기만 했어.”“거 봐, 엄청 오래됐네.”네리나가 킥킥대며 웃을 때였다. 오르하가 자신의 기분을 신경써주려 일부러 이야기를 꺼낸 것이 분명했다.평야로 점점 더 들어갈 때였다. 노을이 지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안…야. 안야.”“히익, 뭐야 진짜 있었잖아!”“딸꾹, 딸꾹, 딸꾹.”네리나와 톰이 기겁을 하며 각각 조세르와 에녹의 뒤로 가 숨었다.형체가 일정하지
네리나가 소리쳤다. 익숙한 갑옷과 문양이었다.“아버지가 군사를 보낸 거예요. 대체 왜? 오크를 잡으려고?”네리나의 단말마에 인간 병사들의 시선이 모였다. 병사들 사이로 기사단장이 걸어나오며 말했다.“일행은 모두 죽인다. 살아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해라.”오크들은 뻘쭘하게 서 있었다. 왕에게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는 녀석들도 보였다. 그 틈을 타 기사단장이 재차 말했다.“일행을 넘긴다면 오크와의 충돌은 없을 것이라고 인간의 이름으로 맹세하겠다!”오크들이 저마다 끽끽댔다. 네리나는 이들이 고민 중에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한 번 해보자고, 아가씨.”“그래요 네리나양. 끝까지 물러서지 말아요.”“물론.”일행들이 네리나를 격려했다. 조세르는 네리나의 어깨를 한 번 꽉 쥐었다가 놓았다.일행이 저마다 전투태세를 마칠 때였다. 오크 왕이 큰 소리로 말했다.“우리는 우리의 친구를 버리고 가지 않는다.”“우워워!”“친구의 적은 우리의 적, 인간들이여 얌전히 돌아가지 않으면 꼬챙이로 만들어 버리겠다.”“우워어!!”오크 왕의 말에 오크들이 저마다 흥분하며 도끼와 창을 들어올리며 소리를 쳤다. 기사단장은 난감해 보이는 눈치였다. 그들이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이다.
“우리 일족이 영생을 산다고 알려져 있는 건 다들 알겠지.”“음, 그런데 그것도 무조건적으로 영생을 사는 건 아닌 것 같더만? 지금 형씨네 일족은 형씨밖에 없는 것 아닌가?”긴의 말에 조세르가 씁쓸한 웃음을 내뱉었다.“맞아. 적어도 지금은 그렇지. 우리가 영생을 살기 위해서는 도우미일족의 도움이 꼭 필요해.”네리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조세르의 말을 경청했다. 조세르는 더욱 망설이는 눈치였다.“하지만 그 도움은 사후부터이기에, 사람들은 죽음과 가까운 도우미 일족을 경배하면서도 가까이하지 않아.”“그러면 내가 도우미일족이라는 건 어떻게 알아본 거예요?”“다홍빛 머리카락에 밀빛 피부.”조세르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져다 빙빙 꼬았다. 네리나는 조세르의 말이 잘 와닿지 않았다. 그가 핵심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마 내가 죽고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도우미 일족의 의무 또한 잊혀진 것 같더군. 살아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걸 보면 말이야.”조세르는 이 말을 끝으로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네리나는 자신이 조세르의 영생을 도왔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것이 그에게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식사를 마친 일행은 오크새끼들이 있는 방으로 이동했다. 새끼는 새끼여서 그런지 잘 뜯어보면 나름 귀여운 면이 있었다.“우쭈쭈, 우쭈쭈.”긴이 새끼 오크들의
고대 왕국의 터보다 더 서쪽에 있는 곳, 금지된 숲을 지나지 못하는 인간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곳에 두번째 엘프들의 왕국이 있었다.“가는 길에 시장이 있어요. 거기서 필요한 물건을 좀 보충할 수 있을 거예요.”“엘프들의 시장은 어떤 모습인가요 오르하?”“주로 하프엘프들이 물건을 파는 편이죠.”“하프엘프가 있어요? 인간이랑 교류는 거의 없지 않아요?”
네리나가 문득 톰의 환영을 떠올리고는 물었다.“톰이라는 이름은 마음에 들어요?”“하하. 그 이름이 흔하다는 건 나도 이제 알아요. 하지만 내가 나에게 준 첫번째 이름이라서 그런지 애틋하네요….”“아….”“환영에서 본거죠?”네리나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의 속 깊은 마음을 들여다보았다는 것이 미안하게 느껴졌다.“그러면 내가 진짜 멋진 두번째 이름을 줄게요.”“정말? 네리나씨가요?”문득 은빛 머리에 자색 눈동자를 한 톰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의 얼굴 한 구석에는 애수가 묻어 있어, 괜히 그녀의 모성애를 자극하
오르하가 귀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의 말에 네리나가 입을 떡 벌렸다.“안들려요?”“적어도 내 귀에는 아무것도 안들리는….”톰마저 한 마디를 보탰다. 네리나가 희게 질리자 조세르가 입을 열었다.“나의 백성들이 묻혀있는 무덤이다. 우리는 영생을 산다고 알려져 있지. 이들은 끝까지 버텼고, 영생을 누리는 것을 포기했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거야.”“그러면, 그러면 왜 내 손이 닿자마자 빛으로 변해서 없어진 거예요?”“그것까지는 잘 모르겠군. 확실한 건 네 손길이 그들에게는 안식이라는 거야 네리나.”
에녹의 환영 속에는 네리나 자신이 울고 있었다. 에녹이 네리나의 환영에게 다가가려 하면 할수록 점점 멀어졌다. 에녹이 손을 툭 떨구고는 고개를 숙였다.“에녹!”에녹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느새 그의 눈 앞에 네리나가 서 있었다.“에녹, 정신차려봐요!”에녹이 환하게 웃었다. 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눈꼬리 쪽을 훑고는 만족했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