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밤이 깊어갈수록 궁은 더더욱 얇은 숨을 내쉬었다.마치 거대한 짐승이 잠에서 깨어날 준비를 하는 듯,기척 하나, 그림자 하나가 유난히 선명하게 울렸다.그날도 그러했다.이수는 등을 곧게 펴고 앉아 있었다.촛불 아래 놓인 찻잔은 식어가고 있었고, 방 안은 온전히 고요했으나그 고요가 더 큰 폭풍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상궁이 기척을 줄이며 다가왔다.“마마… 오늘은 말이 유난히 오르내렸사옵니다.몸도 마음도 성가셨을 터이오니, 잠시 눕혀 드릴까요.”그 말에는 단순한 배려가 아니라,궁의 공기를 오래 들여다본 사람이 느끼는 묘한 경계가 배어 있었다.이수는 고개를 아주 느리게 저었다.“괜찮다. 오늘은… 잠이 쉽게 들 것 같지 않구나.”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눈동자 속에는 누군가를 계속 떠올리며 무너지는 조용한 물결이 있었다.그 시각, 도진은 군영 근처의 마른 흙길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낙마로 다친 다리는 아직 묵직한 통증을 남기고 있었으나그보다 더 무겁게 그를 짓누른 것은 세자가 남긴 단 하나의 문장이었다.“빈을 향한 움직임이 있다.”그 문장은 단순한 정보도, 조언도 아니었다. 경고였다.그리고 그 경고가 향하는 대상은 하나였다.이수.도진은 숨을 내쉬었다.숨은 바람에 흘러가며 아주 작은 떨림을 남겼다.그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나는 그녀를 얼마나 지킬 수 있는가.'지켜야 한다는 마음과 지키려 할수록 더 위험해지는 현실이서로의 목을 조르는 듯 얽히고 있었다.그는 자신조차 답을 내릴 수 없었다.궁에서는 더 빠르게 말들이 번졌다.“저하께서 빈마마 처소 근처를 다녀가셨다지?”“경께서도 그 부근에서… 자주 눈에 띄었다더라.”“그렇다면 둘 사이의 일이”“입 닫아라. 죽고 싶지 않으면.”그러나 그런 꾸지람조차 이야기꾼들의 마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오히려 ‘조심해야 한다’는 말은 궁에서는 곧 ‘이미 일어난 것이다’라는 뜻이 되곤 했다.그리고 그 모든 소문은 자연스레 단 한 사람에게로
밤이 깊어질수록, 궁은 오히려 더 많은 기척으로 가득 찬다.낮에는 말하지 못한 생각들이 어둠 속에서 비로소 형체를 갖기 때문이다.촉 하나가 깜박일 때마다 누군가의 의심과 계산이 동시에 숨을 토한다.그런 밤이 다시 찾아왔다.이수는 잠시도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 채 창가에 걸터앉아 있었다.바람이 종종 창호지를 건드렸고, 그 작은 파문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은 덜컥 흔들렸다.'왜 오늘은… 모든 것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듯한가.'뒤에서 상궁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마마, 오늘은… 온종일 말들이 가볍지 않았사옵니다.심신이 편치 않으실까 염려되어… 잠시 누이시는 것이 어떠하옵니까.”“알고 있다.”이수는 짧게 답했다.그리고 그 답만으로도 상궁은 마마가 얼마나 깊이 긴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도진 경과 관련된 말들이”“그 말은… 하지 말거라.”이수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끊었다.표정은 잠잠했으나, 손끝은 아주 약하게 떨렸다.“그 사람과 나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 나는 안다.”상궁은 그 말의 속내를 이해했다.궁은 똑같은 이야기를 두 번 들으면 이미 사실처럼 움직이기 시작하는 곳이다.그리고 사실이 아니어도, ‘누구에게 이롭냐’가 중요할 때가 더 많았다.“마마… 저하의 마음이 어떠신지, 혹 아시는 바가”“모른다.”이수가 답했다.그러나 모르는 건 아니었다.모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세자, 현은 요즘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지고 있었다.그 변화는 미세하지만 결국 어떤 결론을 향해가고 있음은 분명했다.'그 결론이 무엇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그는 이수의 남편이었다.그러나 남편이라는 이름은 너무 쉽게 의심으로 바뀌어 언제든 칼날이 될 수 있었다.한편, 도진은 궁의 외진 회랑을 따라 걷고 있었다.어둠이 그의 옷깃에 스며들었고, 그 어둠 속에서 신중하게 발걸음을 옮겼다.그의 마음에는 방금 세자가 말한 문장이 계속 남아 있었다.“빈을 향한 움직임이 있다.”'누가? 왜? 어떤 방향으
'도진은… 어디에 있을까.'그 질문은 소문보다 더 위험했다.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도진은 군영 근처 언덕에서 말에게 풀을 뜯기게 하며 서 있었다.곧 어두워질 하늘이 붉은 빛을 천천히 거두어가고 있었다.“경.”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도진은 천천히 돌아봤다.무관 하나가 다가와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오늘… 궁 안이 어수선하옵니다.”“들었다.”도진의 대답에는 공기의 온도가 섞여 있었다.서늘하고, 단단하고, 언제든 칼날이 될 수 있는 온도였다.무관은 잠시 주저했다가, 마침내 속내를 드러냈다.“경, 궁에서도 말이 나도는 것 같습니다.”“무슨 말이.”“…빈마마 처소와…경을 함께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있사옵니다.”그 순간 바람이 지나갔다.도진의 옷자락이 흔들렸다.그러나 그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그런 말이 어디에서 나왔다.”“아무도 모릅니다.”무관이 고개를 더욱 숙였다.“누군가는 보았다 하고, 누군가는 들었다 하고…아마도, 경께서 다치신 그날 저하께서도 그 근처로 가셨다 하여…”도진의 눈빛이 아주 가늘어졌다.“…저하께서?”“예, 경. 그 말 때문인지 사람들은 더 쉽게 이야기를 만들고 있사옵니다.”바람은 연회를 좋아하지 않는다.그러나 소문은 늘 연회를 벌인다.하나의 말이 사람들의 입을 옮겨 다니면 그 말 주변으로 그럴싸한 장식이 붙는다.그리고 그것이 모양을 가지는 순간,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도진은 말고삐를 쥔 손을 살짝 힘주어 쥐었다.“저하께서… 어디로 가셨다는 말이 퍼졌느냐.”무관은 답하기를 망설였다.“말 그대로라 하옵니다. 빈마마 처소 담장 근처를… 잠시 거닐었다 하오나실은 본 사람이 있는지도 명확지 않사옵니다.”도진은 한 번 눈을 감았다.어젯밤, 세자의 시선이 자신을 꿰뚫듯 바라보던 순간이 떠올랐다.'저하께서… 이미 무엇을 결론내리신 것이 아닐까.'궁에서 ‘결론’은 곧 ‘의심’이었다.의심은 곧 ‘처벌’이었다.처벌은 곧 ‘죽음’이었다.도진은 눈을 천천히 뜨며 말했다.“빈마마의 처소
“무엇을 말하고 싶으냐.”“사람들의 눈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면…사실은 금세 그 모습이 달라질 수 있사옵니다.”이수는 고개를 들었다.눈동자는 여전히 조용했지만, 그 안에 스치는 빛은 흔들리지 않았다.“빈은… 어느 누구와도 밤을 함께 한 적이 없사옵니다.”그 말은 명백한 부정이었다.대비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빈.”한참 뒤, 대비가 입을 열었다.“세자저하의 마음은 너뿐 아니라, 이 나라의 것이다. 저하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곧 이 나라의 기강이 된다.”손가락이 찻잔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돌았다.“빈이 지켜야 할 것은 자신의 억울함만이 아니다.저하의 얼굴과 나라의 체면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그 말은 곧, 빈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경고였다.이수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분부… 명심하겠사옵니다.”“그래. 앞으로는 빈의 처소 앞에 드나드는 그림자들이 더 이상 말을 낳지 않도록 하거라.”그 말에 선명하게 어젯밤 담장 너머의 그림자가 떠올랐다.'누가… 그 앞에 서 있었던 것인가.'이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침묵이 곧 순종인 양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대비전에서 물러나며, 이수는 바닥만 보며 걸었다.상궁이 옆에서 나지막이 물었다.“마마…”“괜찮다.”이수는 짧게 잘랐다.“지금은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얼굴을 해야 할 때다.”그 말 뒤에, 그녀는 아주 조용히 한 마디를 더했다.“소문이… 이제 모양을 갖추었구나.”그 시각, 군영으로 돌아가던 도진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아침부터 들려오는 말들이 하나의 방향을 향해 모이고 있었다.세자, 세자빈, 그리고 자신.셋의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는 동안, 누군가의 얼굴은 점점 더 선명한 혐의로 물들어 갈 것이다.'그 얼굴이… 어디를 향할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도진은 하늘 한 번을 올려다보았다. 햇빛은 맑았다.그러나 눈을 감고 나면 그 빛 너머로 어제 세자의 눈빛이 겹쳐 보였다.'저하께서
도진의 목소리가 낮게 잘렸다.무관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죄송하옵니다, 경.”“더 말하면, 그 말이 진짜가 될 수도 있다.”도진의 말은 날카로웠지만, 그 안에는 두려움에 가까운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무관은 입술을 깨물며 물러났다.남겨진 자리에서, 도진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이미… 이렇게 되었구나.'그는 처음부터 이 길의 위험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만큼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이 모양을 갖출 줄은 몰랐다.소문은 언제나 처음에는 모양이 없다.그러다 어느 날, 누가 한 번 더 선을 그어주면 갑자기 얼굴을 갖게 된다.그리고 그 얼굴은, 대개 한 사람을 향해 있다.'그 얼굴이… 마마를 향하고 있다.'점심을 조금 지난 시각,이수의 처소에 상궁이 다급한 얼굴로 돌아왔다.“마마. 대비전에서 빈마마를 뵙고 싶어 하신다 하옵니다.”이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며, 바닥에 놓인 치맛자락을 정리했다.“지금 당장인가.”“예, 마마. 전갈이 많지 않아, 오히려 더 무서운 때이옵니다.”이수는 작은 숨을 내쉬었다.“옷매무새는 괜찮느냐.”“아주 단정하시옵니다.”“그렇다면… 갈 준비는 이미 된 것이겠지.”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수는 창을 한 번 돌아보았다.햇빛은 이미 높이 떠 있었다.그러나 방 안 공기는 전혀 따뜻하지 않았다.대비전이라.대비에게 불려가는 길은 반갑기도, 안온하기도 어려운 길이었다.궁에서 누구든 대비의 눈 밖에 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발걸음을 떼며, 이수는 상궁에게 조용히 물었다.“궁 안의 소문이… 대비마마의 귀에까지 들어갔느냐.”상궁은 대답 없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그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대비전 앞 마당의 공기는 다른 곳보다 한층 무거웠다.바람이 지나가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듯한 곳.세월과 권력이 한데 엉켜 딱딱하게 굳은 공기의 자리였다.이수는 규정된 자리까지 걸어가 정해진 예를 갖췄다.“빈, 뵙고 싶었다.”대비의 목소리는 의외로 부드러웠다.이수는 머리를 조아린 채 답했다.“분부하
“경은 이미 충분히 책임을 자각하고 있으니, 더 문책할 것까지는 없사옵니다.다만 군영의 기강을 다시 한번 다잡게 하시옵소서.”말만 들으면 벗을 감싸는 평범한 말 같았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현의 목 안쪽에는,눈에 보이지 않는 쓴 맛이 올라오고 있었다.낙마… 실수.그는 그 단어들이 마음 한구석에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그리고 동시에, 낙마 소식을 들었을 때 얼굴빛이 식어버렸다는 어떤 소문도 기억 속 어딘가를 건드렸다.'누가… 그 얼굴을 보고 있었던 것이냐.'조회가 끝나고 대신들이 물러난 뒤에도, 현은 한동안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수렴청정의 형식은 이미 옅어졌으나, 대비의 영향력은 아직도 깊었다.왕이 일어나자, 대비의 사람으로 보이는 이들이 멀찍이 방 밖을 스쳐 지나갔다.그리고 그 시선이, 한순간 세자에게 머물렀다가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사라졌다.현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이 궁은 지금, 누굴 보고 있는 것인가.'궁녀들에게 소문은 먼저 ‘형체 없이’ 퍼졌다.멀리서 보았다는 사람, 들은 것 같다는 사람,누군가에게서 들었다는 사람.“… 어제 밤에 말이야, 빈마마 처소 담장 쪽에 누가 서 있었다더라.”“아니, 누가 서 있었는지는 아무도 못 봤다잖아. 다만 사내의 옷자락이 보였다나.”그리고 그 말 사이사이에 새로운 조각들이 덧붙었다.“낙마하셨다는 경께서…그 근처를 자주 지나다니셨다지 않아.”“요사이 저하께서도 빈마마 처소 쪽으로 발길을 여러 번 옮기셨다더라.”도진의 이름과, 세자의 이름과, 세자빈의 처소가하나의 문장 안에 자연스럽게 묶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누군가는 호기심에서,누군가는 악의 없는 장난처럼,누군가는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그러나 이유가 어떻든, 그 말들이 향하는 곳은 늘 같은 곳이었다.빈의 처소.이수는 오전 내내 내전에서의 예를 지키느라 몇 번이고 사람들을 만났다.왕비, 후궁들, 나이가 있는 빈궁들.“빈은 요사이 잘 지내고 있느냐.”“안색이 예전보다 더 희어졌구나.”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
이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침묵이 짧게 흘렀다.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많은 말들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하루… 마마께서 많이 지치셨을 듯하여 저하께서도 염려가 깊으셨사옵니다.”그 말은 조심스럽고 공손했다.그러나 그 속에는 세자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이수는 시선을 창호로 옮기며 말했다.“…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숨을 감추고 있는 곳이더이다.”도진은 그 말에 정답처럼 대답하지 않았다.오히려 아주 짧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
그 말은 단순한 배려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품으려는 의지가,그리고 동시에 도진을 묘하게 견제하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전각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새소리, 바람 소리, 궁인들의 바쁜 발걸음.이수는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거기 호위무사.”도진은 고개를 돌렸다.“예, 마마.”“저하와 내가… 잘 어울리오?”이 질문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도진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이수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