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도진의 가슴 아래에 미세한 긴장이 일었다.세자가 밤에 움직인다는 것은 대개 ‘확인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일어난 밤이었다.그리고 그 확인이 향할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저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가.”“그저… ‘도진을 데려오라’ 하셨사옵니다.”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무게가 있었다.도진은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알겠다. 앞장서라.”세자 침전.현은 등불 하나만 켜두고 앉아 있었다.등불은 작았지만, 그 주변만은 기묘하게 밝게 빛났다.그 빛은 어디까지가 그림자이고 어디까지가 사람의 얼굴인지 애매하게 만드는 빛이었다.도진이 문 앞에 다다르자 근위가 작은 기척을 내며 문을 열었다.“들라.”현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지만, 그 평온이 너무 단단해 오히려 위협처럼 느껴졌다.도진이 걸음을 옮기자 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그 시선은 화도 아니었고, 불신만도 아니었다.그저 무언가를 계산하려는 듯,혹은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도진아...”현이 부드럽게 불렀다.부드러움은 오히려 더 위험했다.“오늘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와 함께 확인해 보고자 불렀다.”도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마마의 처소 근처에서 이상한 기척이 있었다 들었습니다.그것을 조사하고 돌아오던 중 저하께서 부르셨기에”“그렇지.”현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기척이 있었다더군. 누군가 빈의 처소 주변을 살폈다지.”“예, 저하.”“그러나…”현의 시선이 도진의 얼굴을 아주 미세하게 스쳤다.“…그곳에서 그대를 보았다 하는 이도 있었다.”도진은 숨을 멈추었다.하지만 곧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예, 저하.”흔들림 없었다.“저는 빈마마의 안전을 위해 근처 순찰을 돌고 있었사옵니다.”“순찰이라.”현은 낮게 중얼거렸다.그 말은 의심인지, 확인인지 알 수 없었다.“도진아...”현이 다시 불렀다.이번에는 목소리가 아주 조금 식어 있었다.“왜 하필… 그때, 그 자리에 있었느냐?”도진은 눈을 들지 않았다.거짓을 말할 수 없
낙마한 날,그는 초췌한 모습으로 빈의 처소 앞을 지키듯 서 있었다.오늘은 누군가가 빈의 처소로 접근했다.그때도 도진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는 궁 안에서 빠르게 엮여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빈과… 도진.”현이 쓰게 중얼거렸다.목소리에서 피할 수 없는 불안이 번졌다.이 불안은 어떤 이유에서 온 것인지 그 스스로도 모르는 듯했다.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그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궁의 왕세자가 품어서는 안 되는 종류의 감정이라는 것.더 놀라운 것은 그 감정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현은 천천히 입술을 깨물었다.“지켜보라 했으니 지켜보겠지만…”그의 눈동자에 서늘한 그림자가 느리게 내려앉았다.“지켜보다가… 아무 일도 아니길 바라는 날이 점점 줄어드는구나.”내관은 그 말에 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밤은 더 깊어갔다.이수는 이제 잠을 청하려 방 안 깊은 곳으로 들고 있었지만 걸음마다 마음속 잔향이 따라붙었다.멀어지겠다는 그의 말.되돌아서지 않겠다는 자신의 말.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고, 어느 쪽도 옳지 않았다.그저 두 사람 모두 칼날 위에 서 있다는 사실만이 분명할 뿐이었다.침상 곁으로 다가가는 순간, 촛불 하나가 갑자기 작게 튀었다.이수는 걸음을 멈췄다.이상한 기척이 스쳤기 때문이었다.기척은 아주 작았다.사람이라면 낼 수 없는,그러나 생명이 있는 무언가가 스치는 듯한 소리.상궁이 급히 다가왔다.“마마, 무슨 일”“조용히 하라.”이수는 낮게 속삭였다.그녀의 눈이 문 쪽을 향했다.상궁도 따라서 시선을 돌렸다.문 아래, 미세하게 그림자가 흔들렸다.바람 때문은 아니었다.누군가가 문 앞에서 아주 조용히 기척을 죽이고 있다는 뜻이었다.상궁의 손이 떨렸다.“…또…입니까.”이수는 숨을 골랐다.오늘 밤, 두 번째였다.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었다.그 누군가는 이수의 처소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고 있었다.이수는 천천히 등을 곧게 세웠다.“문을 열지 마라
밤바람이 길게 스며들었다.궁은 고요했으나, 그 고요가 마치 숨을 삼키는 듯했다.하루 사이에 일어난 여러 겹의 파문이 아직도 가라앉지 못한 채 어딘가 떠다니는 느낌이었다.도진이 처소를 떠나고 문이 닫힌 뒤, 방 안은 한층 더 조용해졌다.촛불의 불꽃조차 조금 낮게 흔들렸다.이수는 자리를 오래 떠나지 못했다.그의 뒷모습이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가슴 아래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허전함이 천천히 번지는 듯했다.상궁이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마마… 경께서는, 아마도… 마마를 염려하여 그런 말씀을 하신 듯하옵니다.”이수는 그 말에 눈을 내리뜬 채 조용히 찻잔을 만졌다.차는 이미 식어 있었고, 잔 표면에는 미세한 김조차 남지 않았다.“알고 있다.”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그가 왜 멀어지려 하는지…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그러나 부드러움 아래에는 날카로운 슬픔이 움직이고 있었다.“허나…”이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마음이 함께 있는 사람이 먼저 물러나는 것을 보는 일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구나.”상궁은 말을 잇지 못했다.위로도, 조언도 할 수 없는 종류의 슬픔이었다.말을 더했다가는 이수의 마음속에 억눌린 감정들이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묵직함이 있었다.“경에 대한 소문이 더 번지겠지.”이수가 조용히 말했다.“오늘 있었던 한 번의 소동만으로도 궁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곳이다.”상궁은 눈을 내리깔았다.“마마의 처소에 누군가 접근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은 온갖 모양의 추측을 만들어낼 것이옵니다.애초에, 궁은 허심탄회한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 곳이니…”“그래.”이수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니 그가 물러나겠다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니겠지.”하지만 그 미소는 촛불 아래 금세 흐려졌다.그 시각, 궁 바깥 정전 복도. 돌아가는 길에 도진은 한동안 걸음을 쉽게 떼지 못했다.방금 전 이수가 한 말들이 머릿속에서 한 줄씩 천천히 되뇌어졌다.'정말로 멀어지는 것이 지키는
그들은 원래 그의 곁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었다.빈은 그의 반려로서, 도진은 그의 검으로서.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두 존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엇나가기 시작했다.언젠가부터, 나보다 더 서로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그는 그 생각에서 도망치려다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들었다.“저하.”문 밖에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대비마마께서 잠시 뵙고 싶어 하시옵니다.”현의 눈매가 아주 얇게 변했다.“…이 밤에.”“예, 저하. 궁 안에 말들이 오르내려 대비마마께서 염려가 크시옵니다.”현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알겠다. 준비하라.”그는 겉옷을 걸치며 창밖을 한번 바라보았다.달은 구름 뒤로 가려졌고, 궁의 지붕들만 윤곽만 남아 어둑했다.'대비가 움직인다는 것은… 이제 이 일에 ‘궁 전체의 눈’이 달라붙겠다는 뜻이겠지.'현은 조용히 걸음을 내디뎠다.그의 발걸음은 무겁지 않았다.다만, 이번에 나아가는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누가 쓰러지게 만들지 아직 본인조차 모를 뿐이었다.등불이 줄지어 걸려 있었고, 불빛 아래를 지나가는 현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단정했다.“저하.”대비의 상궁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대비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대비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고, 눈매에는 피곤이 어려 있었지만 그 눈동자는 여전히 날카롭고 맑았다.“저하.”대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밤이 깊었는데, 발걸음을 재촉하게 하였구나.”“아니옵니다, 대비마마.”현이 조심스럽게 예를 올렸다.“궁이 어수선하니 마마께서 염려하시는 것이 당연하옵니다.”대비는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그래, 궁이 조용할 날이 없구나.”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오늘… 네 빈의 처소 앞에서 소란스러운 말이 오갔다 들었다.”현의 손끝이 아주 약하게 움찔했다.“아룁니다. 근위에게 보고를 받았사옵니다.”“네 생각은 어떠하냐.”대비의 질문은 간단했다.하지만 그 안에는 이미 몇 겹의 의미가 깔려 있었다.빈의
북소리가 멎은 뒤에도, 궁은 한동안 숨을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이수의 처소에는 다시 등불이 켜져 있었으나불빛은 낮게 깎인 듯 조심스러웠다.상궁이 방 안을 한 바퀴 돌아 문단속을 확인한 뒤, 조용히 이수 쪽으로 다가왔다.“마마… 이 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몸은 더 상하신 곳 없으시옵니까.”이수는 작은 웃음을 흉내 냈다.“몸이야 온전하다. 오늘 다친 것은… 마음이겠지.”그 말에는 스스로를 향한 자조가 얇게 깔려 있었다.상궁은 감히 그 말을 이어받지 못하고,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아까, 도진 경께서 물러나신 뒤 복도 쪽에 근위들의 기척이 잠시 더 머물렀사옵니다.”“저하의 사람들인가.”“그리 보였사옵니다. 빈의 처소를 세는 듯한 발걸음이었사옵니다.들락날락이 아니라… ‘여기를 기억한다’는 식으로.”이수는 눈을 감았다 떴다.그 한 번의 동작에 많은 생각이 오갔다.“궁이… 이제 그대를 지켜보겠구나.”그녀가 말한 ‘그대’가 도진인지, 자신인지 상궁은 알 수 없었다.“마마.”상궁이 낮게 물었다.“마마께서는… 이제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어찌한다 해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있던가.”이수는 손가락으로 이불 자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오늘 밤, 도진 경은 멀어지겠다고 했다. 나는 따르겠다 했고...”상궁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정녕… 그리 하실 생각이십니까, 마마.”“그래야 한다.”이수는 단호하게 말했다.하지만 그 단호함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방패에 불과하다는 걸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이 궁에서 사람이 가까워지는 순간…언제나 누군가는 무너져 내렸다.”말끝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나의 가문은… 언제든지 빌미 하나로 무너질 수 있다. 그 가능성을 눈앞에서 보며 살아왔다.”상궁은 입술을 깨물었다.위로할 말이 없었다.“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아니라, 내가 감당해야 할 자리를 지키는 것뿐이다.”그녀는 곧게 앉은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그 자세가, 이
잠시 후, 도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마마, 오늘 이후로는 이곳 출입을 되도록 삼가하겠사옵니다.”이수의 표정이 아주 미묘하게 변했다.“…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예.”그는 숨을 삼켰다.“제가 머무는 자리에 소문이 따라 붙습니다. 제가 지키려 하는 자에게 칼이 먼저 겨누어집니다.”그 말은 그의 오래된 경험에서 나온 결론 같았다.이수는 그를 바라보았다.“그래서… 나를 지키기 위해 멀어지겠다는 것입니까.”“예, 마마.”그 대답은 너무도 선명했다.그러나 이수의 가슴 어딘가에서는 무언가가 느리게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도진..”그녀가 먼저 그의 호칭을 불렀다.언제부턴가 그 호칭은 그들 사이의 모든 감정 위에 놓여간신히 선을 유지하게 하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정말로… 멀어지는 것이 지키는 길이라 믿으십니까.”그 질문에는 망설임이 섞여 있었다.그 망설임은 도진의 가슴을 정면으로 찔렀다.그는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그러나 진실을 말하는 것이 늘 옳은 길도 아니었다.“믿고 싶지 않습니다, 마마.”그가 낮게 말했다.“허나… 지금 이 궁은 제 마음보다, 마마의 안위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곳이옵니다.”“그럼 나의 안위와, 경의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것입니까.”그 질문은 너무도 조용했지만,이 밤 그 어떤 칼보다 더 날카로웠다.도진의 답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그렇지 않사옵니다.”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마마의 안위와 제 마음은… 언젠가부터 같은 곳을 향하고 있사옵니다. 그래서, 더 위험해졌사옵니다.”그 말은 그의 내면을 거의 다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이수의 목 안으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숨이 걸렸다.언젠가부터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그 고백은 직접적인 사랑의 언어보다 훨씬 더 무겁고 잔인했다.“그러니,”도진이 말을 이었다.“저하의 마음이 더 굽기도 전에, 궁의 칼끝이 더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그는 깊이 허리를 숙였다.“제가 먼저 멀어져야 하옵니다.”이수의 손이 옷자락 안쪽에서 천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위로인지,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도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사람들의 시선도, 사인회장도, 현실도 그에게는 모두 멀어졌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그리고, 정말로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하듯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입맞춤을 했다.그 순간 도진의 다리가 풀렸다.머리가 가벼워졌다.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세상이 기울었다.그는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이수의 손이
비는 오후 내내 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도심의 커다란 유리 건물들은 회색 안개 속에서 윤곽이 무뎌져 있었고,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산을 들고 바삐 움직였지만,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냄새는 오히려 공기를 맑게 정돈하고 있었다.도진은 백화점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늘 그렇듯, 아무 계획 없이 들른 곳이었다.욕망도, 필요도 없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는 곳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했고, 어떤 자극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비가 어깨를 적셔도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몇 백 년 동안 수없이 맞아온 비였다.어떤 비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도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들으니 사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세자가 혼례를 치르는 문제는 나라 전체의 일이며 궁 전체가 흔들리는 날이었다.“좌상댁의 영애라 하더군.”이현이 덧붙였다.“예, 저하.”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이상의 말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전각의 문 밖에서작은 물방울 하나가 지붕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촛불이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듯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동시에 도진의 머릿속 어딘가가이유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