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도진의 목소리가 회랑 한쪽에 닿아왔을 때,이수는 아직도 세자의 마지막 말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리고 있었다.그 울림은 금방 사라지지 않았고,마치 얇은 장막처럼 마음을 덮어 숨을 쉽게 내쉬지도, 들이쉬지도 못하게 했다.“…괜찮으시옵니까.”그 한 줄의 물음은 마치 누군가 문틈 사이로 손을 내밀어조심스레 그녀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이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도진은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너무 가까이도, 그렇다고 멀리도 아닌,자신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끝없이 계산한 끝에 도달한 듯한 위치.햇빛이 아직 그의 얼굴을 완전히 비추지 않았고,미묘한 그림자가 눈가에 걸려 표정의 진의를 더 알 수 없게 만들었다.이수는 숨을 고르듯,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경이… 어찌 여기를 찾았소.”그 말투는 자신을 낮추지 않았고, 상대만을 높이지도 않았다.궁 규범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절묘한 중심에 선 말이었다.도진은 고개를 조금 숙였다.“빈마마께서… 혼자 두기엔 오늘의 바람이 심상치 않아 보였사옵니다.”그 말은 ‘걱정된다’는 뜻이었고, 곁에 있고 싶다는 속마음이었으며, ‘하지만 감히 다가설 순 없다’는 절제이기도 했다.이수는 눈을 내리깔았다.“…경까지 그리 말하면 소첩이 더 흔들릴 일만 남지 않소.”자신을 낮추지 않는 어투 속에 오늘 하루 내내 간직해야 했던 무게가 살짝 새어 나왔다.그녀는 이어 말했다.“이 궁에서 빈의 자리란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곳이오.경이 그런 마음을 보이면… 그 또한 소문이 되어 경을 해치게 될 것이오.”도진의 시선이 순간 미묘하게 흔들렸다.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세자의 눈빛이 자신을 향할 때의 얇은 금을.“…소문의 칼은 이미 저를 향하고 있사옵니다.”도진이 조용히 대답했다.“빈마마께서 ‘경’이라 부를 때마다, 저 또한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사실만 더 분명해질 뿐이옵니다.”그 말은 경계선 위에 놓인 감정이었다.한 걸음만 더 나가면 마음이 드러날 것이고,한 걸음만 물러서면
궁의 아침이 조금씩 활기를 되찾으며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이수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천천히 낮추고 있었다.대비전에서 내려온 무거운 말들,회랑에서 마주한 도진의 눈빛,그리고 마지막에 스쳐 지나간 세자의 침묵까지그 모든 것이 마음의 바닥을 얇게 갈라놓은 듯했다.그녀는 복도 끝에 놓인 난간에 손을 가볍게 올렸다.햇빛이 부서진 곳이었지만, 손끝은 조금도 따뜻함을 느끼지 못했다.''저하께서는… 무엇을 생각하고 계신 것이옵니까.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이 입술 사이에서 소리 없이 흩어졌다.그 순간, 뒤쪽 회랑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궁녀 두어 명이 서로 가까이 붙어 작게 숨죽이며 지나가고 있었다.이수는 그들의 눈이 잠시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그 시선에는 경계와 탐색이 묻어 있었다.마치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를 살피기라도 하듯.궁녀들이 발걸음을 재촉해 사라지자 남겨진 공간은 한층 더 적막해졌다.이수는 한참 만에 몸을 돌렸다.오늘은 대비전뿐 아니라 각 전각에서 정해진 일정이 빽빽했다.그 일정이 그녀를 쉬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지켜보는 눈을 더 많이 늘린다는 뜻이라는 것을 이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멀리서 내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빈마마! 빈마마를 뵙고자 하는 이가 있사옵니다.”누구냐 묻기도 전에 그 목소리가 이어졌다.“세자저하시옵니다.”이수의 손끝이 차갑게 굳었다.잠시 숨이 멈춘 듯했다.세자는 회랑의 가장 끝, 햇빛이 닿지 않는 그늘쪽에 서 있었다.빛이 닿지 않는 자리였지만 그의 존재는 그림자를 밀어내는 듯 선명했다.그는 이수를 보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그 거리는 길지 않았다.그러나 그 몇 걸음 사이에 이수의 심장은 두 번, 세 번 더 뛰었다.“빈.”세자의 목소리는 단정했다.그러나 단정함 안에 숨겨진 무언가가 굳은 선처럼 느껴졌다.이수는 조심스레 예를 갖추었다.“저하를 뵙사옵니다.”세자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아주 미세하게 낮추었다
도진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궁에서는 어떤 위험은 말로 입 밖에 내는 순간 현실이 된다.그는 만약이라는 가정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궁의 바람이 거칠어졌사옵니다.”한참 끝에, 그는 그렇게 답했다.“빈마마께 향하는 시선이 너무 많사옵니다. 그 시선이… 언제든 칼이 될 수 있사옵니다.”세자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그 시선이 빈에게 칼이 된다면.”그는 조용히 물었다.“그 칼을 막을 사람은 누구이어야 하느냐.”그 질문은 답을 알고 하는 물음이었다.도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그러나 대답만은 명확했다.“신이옵니다.”그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신은 저하의 검이옵고, 저하의 곁에서 빈마마 또한 지켜야 할 책임이 있사옵니다.”세자는 잠시 침묵했다.그 침묵 안에서 많은 것들이 들렸다.오랜 세월 함께해 온 기억들,도진의 검끝이 지켜왔던 수많은 순간, 그리고, 이제 막 생겨난,그러나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은 감정의 금. 그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그래.”짧게 인정하는 듯한 어조였다.“너는 나의 검이다.”그 말은 오래도록 변치 않았던 사실이었다.그러나 이어진 말은 오늘에서야 처음 꺼내지는 내용이었다.“허나, 검이 주인을 향해 흔들려서는 아니 되지.”그 순간, 공기 속 온도가 한 번 가라앉았다.도진은 눈을 들지 않았으나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둔한 사람은 아니었다.세자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게 가라앉았다.“너는 빈을 지켜야 한다 했다.”짧은 숨이 이어졌다.“그 지킴이…어디서 어디까지인지는 너 또한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그 말은 직접적으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그러나 그 안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었다.한 발자국 더 다가서지 말 것.보호와 감정의 사이에 선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세자의 시선이 도진에게 오래 머물렀다.“내가 너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목 안에는 알 수 없는 쓰라림이 걸려 있었다.“다만, 궁이라는 곳이 너의 마음까지 믿어주지는
이미 보고도 다시 묻는 질문이었다.내관은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도진 나으리가 곁에 있지 않았사옵니까.”세자의 시선이 짧게 흔들렸다.잠깐 눈앞이 허옇게 번지듯 흐려졌다.그는 바로 시선을 거두며 창가로 다가갔다.창틀 너머로 해가 이미 어느 정도 떠올라 있었다.그러나 빛이 환한 만큼, 그 안에서 숨고 싶은 마음도 짙어졌다.“저하는…”내관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도전 나으리를 조금 전에도 찾으려 하시지 않았사옵니까.”세자는 대답 대신 입술만 굳게 다물었다.그를 찾으려 했었다. 정말로 그랬다.회랑에서 본 장면을 분명하게 확인하고 싶었다.그 눈빛은 무엇이었는지,그 표정은 무엇을 가리는 것이었는지.하지만 입술 사이로 나가려던 명령은끝내 음으로 완성되지 못한 채 목 안에서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세자는 자신의 그 머뭇거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그는 대신, 조용히 다른 말을 꺼냈다.“…전하께 올릴 보고가 있다 하지 않았느냐.”“예, 저하. 잠시 후 정해진 시각에… 상참 전하러 가셔야 하옵니다.”세자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알았다. 준비하겠다. 나머지는…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지.”나중. 그 말은 곧, ‘지금은 감정을 정리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도진은 수련장에 다시 나와 있었다.아침 햇빛이 비스듬히 수련장 바닥으로 떨어지며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그 그림자 위에 그가 서 있었다.검을 쥔 손은 겉보기에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으나손목 안쪽 깊은 곳에서 아주 희미한 떨림이 느껴졌다.그는 다시 한 번 자세를 취했다.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발을 굳게 내딛었다.“하압”검이 허공을 베었다.공기가 칼끝에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그러나 그는 그 소리가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았다.오늘 베어야 할 것은 눈앞의 허공이 아니라,가슴 안에서 자꾸 자라나는 모호한 감정이었기 때문이다.머릿속에는 회랑에서 마주친 이수의 얼굴이 여러 번 겹쳐 떠올랐다.대비전에서 나올 때, 세자와 마주했을 때,
도진과 이수는 본능처럼 동시에 몸을 돌려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그러나 세자는 그 둘을 바라보는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조용히 움직이는 눈빛 속에는 말로 담지 못한 감정이 서늘한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침묵은 길지 않았으나 세 사람의 가슴에는 아주 길게 흘러갔다.세자는 이수에게도, 도진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곁을 지나쳤다.그러나, 그 지나침 속에는 수많은 말이 담겨 있었다.그리고, 그 무언의 아침이 끝나자궁에서 눈 밝은 자들은 또 다른 바람을 맡기 시작했다.세자가 곁을 스쳐 지나간 뒤,회랑에는 잠시 아무도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이수는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세자의 옷자락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감히 눈을 들지 못했다.옆에 선 도진 또한, 언제나와 같은 자세로 예를 취하고 있었지만그의 어깨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이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멀어져 가는 세자의 뒷모습에는 단 한 마디의 말도 남지 않았다.그러나 말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빈마마.”먼저 몸을 가다듬은 쪽은 도진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이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수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방금 전까지도 대비전에서 들었던 말들이 아직 귀 안에서 잔향처럼 맴돌고 있었다.궁의 바람이 거칠어진다.눈들이 너를 보고 있다.누구의 마음에도 그늘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그 말들이, 방금 눈앞을 지나간 세자의 침묵과 함께 묵직하게 겹쳐졌다.“많이… 곤란하셨사옵니까.”도진의 목소리는 낮았다.감정을 내세우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그 낮음 속에 고여 있었다.이수는 잠시 대답을 찾지 못하다가,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경께서 보시기에는… 어떠하였사옵니까.”마치, 자신이 어떤 얼굴로 서 있었는지 그의 눈을 빌려 확인하고 싶다는 듯한 물음이었다.도진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눈앞의 그녀는 이미 마음을 추스른 얼굴이었지만,조금 전 세자의 기척이 스쳐 지나갈 때 미세하게 굳어버린 그 표정
대비전의 문이 열리자 그 안의 공기는 더 서늘하고 단단했다.향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으나 향이 주는 편안함은 없고오히려 긴장감을 조종하는 듯한 기운이 감돌았다.대비가 앉아 있었다.그 눈은 늘 한결같아 보였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더 깊은 바닥이 드러난 듯했다.이수는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소첩, 대비마마를 뵈오니 삼가 평안을 기원하나이다.”대비의 시선이 느리게 이수에게 닿았다.그 한순간이 유달리 길었다.“…어제 회랑에서 있었던 일, 빈 또한 알고 있겠지.”이수의 심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녀는 대답을 준비하려 했으나 대비가 이어 말했다.“소문은 빠르다. 그날 회랑의 바람이 어떤 이들에겐 지나가는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나… 내명부는 다르다.빈의 표정 하나, 저하의 걸음 하나가 하루 만에 전각 전체를 흔든다.”이수는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으려 노력했다.“…소첩의 경솔함으로 궁이 시끄러워졌다면, 머리 숙여 사죄드리옵니다.”대비는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않았다.“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면 그 흔들림은 누구보다 먼저 눈 밝은 자들의 관심에 오르기 마련이다.빈의 뜻이 어떠했든, 저하의 마음이 어떠했든 궁은 이미 조용치 않다.”그 말은 이수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살짝 스쳤다.대비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빈. 너는 누구의 마음에도 그늘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말의 의미가 너무 명확했다.심지어, 그 말이 가리키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수는 모를 수 없었다.세자. 그리고, 도진.숨이 가라앉지 않았다.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옷자락이 스치는 기분이 들었다.대비는 마지막으로 짧게 덧붙였다.“오늘도 너를 살피려는 눈들이 많을 것이다. 그 눈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빈이 먼저 알아라.”그 말은 충고였으나, 동시에 무겁게 내린 경고이기도 했다.이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명심하겠사옵니다, 마마.”그 말을 내뱉는 순간 가슴 어딘가가 한 번 더 세게 조여 왔다.전각을 나오며 햇빛이 비로소 궁 담장 위에 걸리기 시작했다.이수는 한 걸음을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도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들으니 사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세자가 혼례를 치르는 문제는 나라 전체의 일이며 궁 전체가 흔들리는 날이었다.“좌상댁의 영애라 하더군.”이현이 덧붙였다.“예, 저하.”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이상의 말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전각의 문 밖에서작은 물방울 하나가 지붕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촛불이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듯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동시에 도진의 머릿속 어딘가가이유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