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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그늘진 회랑의 숨결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07 09:14:54

밤은 아직 완전히 내려오지 않았지만, 궁은 이미 밤처럼 고요했다.

변고의 소식이 궁궐 깊숙이 전해진 뒤로 모든 사람의 발걸음이 조심스레 줄어들었고,

속삭임마저 가늘게 떨리며 공기 속으로 숨어들었다.

동궁전에서 나왔을 때 이수의 마음은 온통 복잡한 물결로 가득 차 있었다.

저하의 말들이 아직도 가슴 안에서 온기를 잃지 못하고 있었다.

“그대가 내게서 멀어지는 것이 더 두렵습니다.”

그 한 줄은 지켜야 할 규범보다도,

감춰야 할 감정보다도 더 깊게 박혀 이수를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말이 잔잔한 고백처럼 들릴지라도 궁의 현실은 그 고백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세자의 마음 한 조각이 그녀에게 더 깊어질수록

그 감정은 언젠가 불길처럼 번져 누군가의 목숨을 삼킬 수 있었다.

그것이 누구인지, 이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늘… 무언가가 달라졌다.'

그 변화가 시작점이라면 아마도 자신일 것이다.

저녁 종각이 멀리서 울릴 무렵,

동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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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기억   51. 숨겨진 칼끝이 향하는 자리는

    대비전을 나와 아직 충분히 밝지 않은 새벽빛 아래 서 있는 이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대비의 말은 부드러움으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칼날만큼 차갑고 날카로웠다.도진 경…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어딘가가 조심스레 아려왔다.대비는 말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라”거나 “감정을 거두라”는 그런 직접적인 말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대신“궁은 네가 생각한 것보다 좁다.”“그늘은 싹을 보이면 꺾는다.”“저하 외의 그늘은 단 한 줌도 허락되지 않는다.”그 말들은 정확한 명령보다도 더 무서운 심문이었다.그리고 그 심문은 이수를 향해 말 없이 속삭이고 있었다.'너를 지켜보고 있다. 네가 어디를 바라보는지누구에게 마음을 주려 하는지 모두 보고 있다.'이수의 손끝이 저도 모르게 서늘하게 떨렸다.회랑을 조금 더 걷자 도진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는 이수를 기다리며 방금 전까지도 대비전의 문을 주시하고 있었던 듯했다.걱정, 경계, 그리고 말하지 않은 충심이 그의 눈에 얹혀 있었다.“빈마마.”그는 곧바로 예를 갖추었으나 마음만큼은 숙이지 못한 듯했다.“마마의 얼굴빛이 좋지 않사옵니다.대비마마께서 혹… 마마께 어려운 말씀을 하신 것이옵니까?”이수는 그가 아니라 자신을 향해 이 말을 삼키고 싶었다.'경의 걱정이 더 아프옵니다…'그러나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경이 알 바 아니라 하였는데도 왜 자꾸 묻는 것이냐.”그 말은 차갑지 않았지만 분명한 선이었다.도진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한 마디도 뱉지 못했다.그 침묵 속에서 이수는 도진이 무엇을 견디는지 진짜로 알 것 같았다.그러나 그녀는 그 선을 허물어주지 않았다.그 선은 그들 둘 모두에게 필요한 울타리였기 때문이다.이수는 도진을 지나쳐 회랑 끝으로 발걸음을 돌렸다.그녀가 떠나기 전 도진이 아주 낮게 말했다.“…빈마마. 부디 몸을 사리시옵소서.”그 한마디가 마치 밤새 묵혀둔 마음의 조각처럼 깊게 가라앉았다.이수는 뒤돌아보지 않

  • 천년의 기억   50. 더 깊이 파고든 균열

    새벽의 예는 끝났지만 하늘은 아직 완전히 밝아오지 않았다.어둠과 빛이 서늘하게 맞닿은 그 사이에서 궁은 마치 누군가의 숨결을 도려내듯고요하고 긴장된 공기를 품고 있었다.이수는 상궁의 안내를 받아 대비전으로 향하고 있었다.회랑의 기둥마다 매달린 등불은 바람 한 점 없어도 흔들리는 듯 보였다.그것은 등불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이 떨리고 있는 듯한 착각이었다."대비마마께서 이렇게 아침을 밝히기도 전 세자빈을 부르시는 일은 거의 없사옵니다."이수는 그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오늘… 마마께서는 저를 시험하시려는 것이옵니다."내명부는 예를 통해 움직인다.말 한 줄, 숨결 한 번에도 의도와 감정이 드러나는 곳이었다.그리고 대비는 그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이다.그녀는 걸음을 멈추며 마음을 가다듬었다.단 한 번의 숨조차 흐트러지면 대비의 시선은 그 틈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대비전의 문이 조용히 미끄러지며 열렸다.향초의 은은한 연기와 붉은 비단에 새겨진 봉황 문양이이조시대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었다.대비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고그 눈빛은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그것처럼 조용히 빛났다.“빈, 들라.”이수는 예를 갖추어 자리로 다가갔다.“대비마마께 인사올리옵니다. 새벽부터 몸소 부르시어 송구할 따름이옵니다.”대비는 손끝을 살짝 흔들었다.“송구할 것 없다. 내가 너를 부른 것은 책망하려 함이 아니니라.”그러나 그 말이 책망보다 더 무겁다는 것을 이수는 알고 있었다.대비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저하가 없는 지금, 궁은 너희 젊은 내명부가 붙들어야 할 시기다. 허나… 빈의 마음에 요사이 근심이 보이는 듯하구나.”이수의 숨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내 마음을… 대비마마께서 보고 계셨던 것이옵니까.'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마마의 염려가 과찬이옵니다. 저는 다만… 저하의 부재가 길어질까 근심하였을 뿐이옵니다.”대비의 눈은 이수를 깊게 꿰뚫어보았다.“저하를 걱정하는 마음이

  • 천년의 기억   49. 새벽 안개 속에 갇힌 길

    이수는 그것까지 정확히 읽었다.하례가 진행되는 동안 이수는 단 하나도 실수를 허용하지 않았다.몸의 각도, 고개를 드는 시선, 손끝의 위치까지 모두 궁중 예법에 맞아야 했다.그러나 예법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녀를 향한 수많은 시선이었다.도진은 그 모습을 대비전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내명부의 시선이 어떤 감정들을 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경계, 의심, 탐색, 질투그 모든 것을 빈마마에게 가하는 순간 위험이 자라난다는 것도.하지만 오늘, 그 시선은 평소보다 더 거칠었다.저하가 없으니 이들은 빈마마를 흔들려고 하는구나.그는 이수를 바라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기품을 잃지도, 태도를 망치지도 않았다.그러나 그는 알았다.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차갑고 외로운 곳에서 버티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그때, 대비의 눈짓 하나가 하례의 흐름을 바꾸었다.대비는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빈. 저하는 부재하나, 궁중의 안정을 위해 너의 뜻을 듣고자 한다.오늘 하례를 마친 뒤 동궁전의 일부 규례를 빈이 직접 정리해 보겠느냐?”이수의 가슴이 아주 조용히 움츠러들었다.이건 기회가 아닌, 시험이었다.규례 하나만 잘못 다루어도 궁 전체의 비판이 그녀에게 쏠린다.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다.“대비마마의 뜻이라면 감히 거절할 수 없사옵니다.”이수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다만… 저하의 빈으로서 누구도 다치지 않도록 주의 깊게 살피겠사옵니다.”그 대답은 대비전 안을 순간 조용하게 만들었다.부드러운 말이었으나 그 안에는 단단한 중심이 있었다.그 중심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이 될 수도 있었다.하례가 끝나자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갔다.이수는 깊은 호흡을 하며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걸음을 유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녀가 회랑에 들어섰을 때 도진이 조용히 다가왔다.“빈마마.”그의 목소리는 새벽의 공기보다 더 부드러웠다.“오늘… 누가 보아도 흠잡을 데 없는 예였사옵니다.”이수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경이 그렇게 보았다 하니

  • 천년의 기억   48. 새벽의 예가 드러내는 마음의 그림자

    새벽과 밤이 정확히 갈리지 않은 시각,바람은 얼굴을 스치는 것만으로도 궁의 기류가 달라졌음을 말하고 있었다.이수는 궁녀들의 손을 빌려 의례 복식을 갖추고 있었고,방 안에는 비단이 스치는 소리와 숨을 삼키는 기척만이 조용히 흘렀다.내명부의 여인으로 살아온 세월이 길지 않았지만세자빈이라는 이름 아래에 걸린 자리는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무게를 품고 있었다.오늘 새벽의 하례는 저하가 부재한 상태에서 진행된다.그 말은 곧 이 자리에 선 이수의 한 동작,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는 호기심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시험이 되며, 누군가에게는 경계가 된다.그 무게를 알고 있는 이수는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궁녀가 조심스레 다가와 말했다.“마마, 곧 대비전에서 하례를 시작하라 명이 들었사옵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눈빛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알았다. 나갈 채비를 마무리하라.”궁녀들이 일제히 움직였고 그 사이로 새벽의 찬 기운이 서늘하게 스며들었다.이수는 거울 너머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밤새 잠들지 못한 흔적은 얇게 드리워진 눈꺼풀의 그림자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마음은 여전히 저하의 마지막 말들로 뒤척이고 있었다.'빈. 그대가 나를 멀리 두는 것이 더 두렵소.'그 말이 왜 이렇게 아프게 가슴에 꽂혔는지 이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그러나 또렷한 건 하나였다.그 감정이… 지켜야 할 경계를 흔들 수 있다는 것.그녀는 마음속 복잡함을 한 겹 누르고 천천히 일어섰다.동궁전 주변에는 이미 많은 대신들과 내명부 여인들이 모여 있었다.세자의 부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이 되어 그들의 시선과 자세에 묘한 긴장감을 더하고 있었다.이수는 회랑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눈앞의 풍경을 하나씩 받아들였다.대신들은 예를 차렸으나 그 안에서 미세하게 드러나는 의심과 탐색의 눈빛은 여과 없이 그녀에게 닿았다.저하가 부재한 오늘, 누군가 반드시 빈의 자태를 살필 것이다.그들의 숨결 하나하나가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 천년의 기억   67. 그늘진 뜨락의 달빛

    세자가 남문을 빠져나간 지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궁은 더 조용해지는 대신 어딘가 미세하게 결이 달라진 숨결을 품기 시작했다.말발굽이 사라진 자리 위로 묘한 적막이 내려앉았고,그 적막은 곧 전각과 회랑을 서서히 훑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긴장하게 만들었다.저하가 궁을 비웠다.그 사실 하나만으로 궁은 스스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명목상 모든 권한은 대비전에 모이고,대비가 손짓 하나 하면 내명부와 대신들이 들썩인다.그리고 이수는 그 흐름 안에서 자신에게 향하는 미세한 시선의 무게를 더 분명하게 느끼기 시작했다.밤이 깊어도 궁녀들은 잠들지 못한 채 등불 아래에서 속삭였다.“세자빈마마께서… 저하를 배웅하셨다지요?”“예…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많다 하옵니다.”“마마의 마음이 어떠하실지…짐작조차 어렵사옵니다.”그 속삭임은 조심스러웠지만소문이라는 형태로 이미 궁의 벽 사이를 스며들기 시작했다.이수는 자신의 처소에서 차가 식어가는 것도 잊은 채 밤을 버티고 있었다.온전히 혼자가 된 이 시간, 그녀의 마음은 낮보다 더 깊은 흔들림을 드러냈다.'저하의 말이… 계속 가슴 속을 떠나지 않사옵니다. 그대를 멀리 두는 것이 더 두렵소.'그 말은 거절도, 고백도 아닌 어떤 묘한 감정의 결을 가졌고그만큼 이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세자의 감정이 점차 선을 넘는다는 것을 이수는 알고 있었다.그러나제가 단 한 걸음이라도 물러서면 누군가는 다시 다치게 되겠지요.그 불안한 예감이 그녀의 심장을 죄듯 움켜쥐었다.도진은 남문에서의 마지막 정비를 마친 뒤 조용히 궁 안으로 돌아왔다.그는 말에서 내리며 손아귀를 천천히 폈다 쥐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전투를 앞둔 사람조차 이렇게 심장이 어지럽게 뛰지는 않는다.그의 마음을 흔든 것은 전투가 아니라 남겨둔 사람 때문이었다.'빈마마의 얼굴… 오늘따라 유독 어둡고 고단해 보였습니다.'그가 보호해야 한다고 믿는 존재가 누군가의 시선과 권력의 바람 속에서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칼을 든 적을 마주할

  • 천년의 기억   66. 떠나는 자와 남겨진 마음의 온도

    밤을 완전히 삼키지 않은 어둠이 궁궐의 처마 끝에서 느리게 흔들리고 있었다.변고의 소식이 조정으로 퍼져 나간 뒤, 궁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였고,모든 발걸음이 소리를 삼킨 채 급박하게 전각을 오갔다.이수는 동궁전에서 한참 떨어진 회랑 끝에서 멈춰 선 채 밤공기를 마셨다.그 공기엔 습기보다도 오늘 하루 누적된 감정의 무게가 더 많이 서려 있었다.'저하께서… 이 밤에 궁을 떠나신다.'이수는 그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세자가 궁을 비우는 일은 드물었다.더구나 변고의 상황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밤길을 서둘러 떠나는 일은 그만큼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뜻이었다.그러나 이수의 마음을 더 깊이 잡아당긴 것은 떠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다.'그 말들… 그 눈빛…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그대가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더 두렵소.”그 말은 이수의 가슴 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그 말이 품고 있는 감정,그 말이 앞으로 불러올 결과,그 말이 가져올 위험모든 것이 겹쳐져긴 밤의 한가운데에서이수는 고요히 흔들리고 있었다.동궁전 앞에서는 출궁을 준비하는 병사들의 움직임이부딪히는 갑옷 소리마저 숨기려는 듯조용하고 질서 있게 이어지고 있었다.도진은 그 중심에 있었다.그의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정확했고손끝 하나 흔들리지 않았지만,이수와 마주한 뒤 생긴 마음속의 파문은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듯했다.병사 둘이 다가와 보고했다.“경, 남문 쪽 준비 완료되었사옵니다!”“말 또한 모두 배치 되었으니 저하께서 명 내리시면 곧 출궁 가능하옵니다!”“좋다.”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러나 짧은 대답과는 달리 그의 시선은 잠시 머물렀다.남문 너머의 어둠을 바라보는 동안,그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빈마마께서는…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실까.'그는 고개를 흔들어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무관의 마음은 임무 앞에서 한 치의 흔들림도 있어서는 안 된다.그런데 오늘

  • 천년의 기억   9. 금지된 이름의 파문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

  • 천년의 기억   8. 어둠이 새긴 흔적

    이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침묵이 짧게 흘렀다.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많은 말들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하루… 마마께서 많이 지치셨을 듯하여 저하께서도 염려가 깊으셨사옵니다.”그 말은 조심스럽고 공손했다.그러나 그 속에는 세자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이수는 시선을 창호로 옮기며 말했다.“…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숨을 감추고 있는 곳이더이다.”도진은 그 말에 정답처럼 대답하지 않았다.오히려 아주 짧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

  • 천년의 기억   7. 밤이 삼킨 경계

    그 말은 단순한 배려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품으려는 의지가,그리고 동시에 도진을 묘하게 견제하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전각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새소리, 바람 소리, 궁인들의 바쁜 발걸음.이수는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거기 호위무사.”도진은 고개를 돌렸다.“예, 마마.”“저하와 내가… 잘 어울리오?”이 질문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도진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이수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 천년의 기억   6. 시선의 감옥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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