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먼지가 풀풀 날리는 공사장 한구석.
지안은 제 몸집만 한 시멘트 포대를 짊어지고 비틀거렸다. 땀으로 범벅이 된 머리카락이 눈을 찔렀지만, 목장갑을 낀 손은 쉼 없이 움직였다. 낡은 작업복 위로 허연 시멘트 가루가 엉겨 붙어 엉망이었다. 현장소장의 고함이 날아들었다."어이, 새댁! 똑바로 안 날라? 그렇게 빌빌거릴 거면 당장 꺼져!"
"죄송합니다. 금방 옮기겠습니다."지안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하며 이를 악물었다.
사채업자에게 쫓겨 당장 방을 비워줘야 할 처지였다. 식당 일도,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모두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쫓겨났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뒤를 밟으며 밥줄을 끊어놓는 것 같았다. 그래서 찾은 곳이 신분 확인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일용직 공사판이었다.그때, 거친 엔진음을 내며 새카만 최고급 세단 한 대가 공사장 입구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흙먼지가 날리는 공사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광경에 인부들의 시선이 쏠렸다. 운전석에서 내린 비서가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차 안에서 내린 남자는 완벽하게 재단된 슈트 차림의 태경이었다. 태경의 시선은 곧바로 흙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지안에게 꽂혔다.지안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역광을 받으며 서 있는 태경의 서늘한 얼굴을 마주한 순간, 지안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시멘트 포대를 쥔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당신이 여긴 어떻게."
지안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태경은 구두 끝에 묻는 흙먼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안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짙은 시선이 지안의 흙투성이 얼굴과 낡은 작업복을 차갑게 훑어 내렸다."꼴이 볼만하군. 여기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지안이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경은 지안의 서늘한 적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송지안 씨. 당신 앞으로 남은 사채 빚이 원금만 5억입니다. 이런 막노동으로 평생을 굴러도 이자조차 못 갚습니다."
"그래서? 네놈이 짠 판에서 내가 죽어 나가길 바라는 거라면 헛꿈 꾸지 마. 난 안 죽어." "아니. 난 당신이 살길 원합니다."태경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그는 품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지안의 발밑에 던졌다. 봉투 안에서 흘러나온 것은 지안의 채무 인수 계약서였다."당신의 모든 빚, 내가 탕감해주겠습니다. 아버지가 남긴 병원비 체납액도 모두 내가 처리하지요."
"……뭘 원하는데." "내 곁에 두려 합니다."태경의 눈동자가 지안을 옭아매듯 집요하게 얽혀 들었다.
"내 정부(情婦)가 되십시오. 그럼 이 지옥에서 건져주겠습니다."
정부.
그 모욕적인 단어가 허공에 떨어지는 순간, 지안의 숨이 멎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분노로 붉게 타올랐다. 태경은 지안이 결국 현실에 굴복하고 제 손을 잡을 것이라 확신했다. 자신이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으니, 동아줄을 내리는 것 또한 자신이어야 했다. 그녀가 자신의 통제 아래서만 숨 쉬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가 원하는 완벽한 정복이었다.하지만 지안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것은 처절한 비웃음이었다.
"하, 하하……."
지안은 바지 주머니를 뒤져 구겨진 지폐 몇 장을 꺼냈다.
오늘 새벽부터 뼈 빠지게 일하고 가불받은 피 같은 돈이었다. 그녀는 그 지폐들을 태경의 얼굴을 향해 사정없이 집어 던졌다."이거나 먹고 꺼져. 네놈의 그 더러운 돈 따위, 내 몸을 팔아서라도 안 받아."
꼬깃꼬깃한 지폐들이 태경의 슈트 위로 흩어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태경의 턱관절이 굳어졌다. 지안의 서늘하고도 꼿꼿한 눈빛이 똑바로 그를 찔렀다."네가 내 모든 걸 뺏어갔어도, 내 마지막 자존심까지 살 수는 없어. 차태경, 넌 그냥 내 인생을 망친 더러운 사기꾼일 뿐이야."
"……."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띄지 마. 구역질 나니까."지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흙먼지 날리는 공사장 안으로 사라졌다.
태경은 바닥에 떨어진 꼬깃꼬깃한 지폐를 내려다보았다. 심장 한가운데가 날카로운 유리에 긁힌 것처럼 날 선 통증이 일었다. 이 불쾌하고 낯선 감각. 그는 구두 굽으로 지폐를 짓밟으며 애써 분노로 그 통증을 덮어버렸다.'자존심? 그래, 그 자존심이 언제까지 버텨주는지 보지.'
태경의 두 눈이 서늘한 살기로 번뜩였다.
그녀가 완전히 부서져 제 발밑에 무릎 꿇고 살려달라 빌 때까지, 그녀를 둘러싼 모든 숨통을 끊어버리겠다. 태경은 차가운 결의를 다지며 세단으로 돌아섰다.---
그날 오후부터 태경의 압박은 더욱 교묘하고 노골적으로 변했다.
공사장 소장에게는 즉각적인 인력 감축 압박이 들어갔고, 지안은 그날 오후로 일자리를 잃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시원 주인이 찾아와 당장 방을 비우라고 통보했다. 건물이 경매에 넘어갔고, 새로운 주인이 세입자들을 모두 쫓아낸다는 명분이었다.며칠 뒤, 늦은 밤.
갈 곳을 잃은 지안은 낡은 캐리어 하나만 끌고 한강 둔치에 앉아 있었다. 찬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그녀는 추위조차 느끼지 못했다. 끝없는 절망. 어디를 가도 차태경의 그림자가 목을 조르고 있었다.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도 이틀을 넘기지 못했고, 잠잘 곳조차 허락되지 않았다.지안은 멍하니 검은 강물을 응시했다.
빛을 잃은 눈동자는 점차 삶에 대한 의지를 놓아가고 있었다. 수면 위로 아른거리는 불빛들이 마치 자신을 심연으로 부르는 것 같았다. 극심한 불면증과 우울증이 그녀의 이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이대로 강물에 뛰어들면, 이 모든 지옥이 끝날 것만 같았다.같은 시각.
펜트하우스의 커다란 모니터 앞. 태경은 한강 둔치에 홀로 앉아 있는 지안의 모습을 CCTV 화면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이 파놓은 완벽한 덫에 갇혀 완전히 고립된 사냥감. 그는 승리감을 만끽하려 했지만, 화면 속 지안의 텅 빈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 여자는 지금 살기 위해 버티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녀의 눈빛에는 분노도, 원망도, 생존에 대한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다.'설마.'
태경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이 원한 것은 그녀가 자신에게 굴복하여 매달리는 것이었지, 죽어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저 강물 속으로 사라진다면, 자신의 완벽한 통제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불안감이 미친 듯이 태경의 이성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화면을 향해 중얼거렸다."송지안, 넌 내 허락 없이는 죽지도 못해."
태경은 곧바로 재킷을 챙겨 들고 펜트하우스를 나섰다.
서늘한 아침 안개가 형장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한양 도성 밖, 서소문 형장.거친 모래바닥 위로 무릎이 꿇린 서연은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피와 오물로 엉망이 된 소복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모진 고문으로 열 손가락의 손톱이 모두 빠지고, 살갗은 불에 지져져 감각조차 희미했다.하지만 서연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빨리 끝났으면.’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바람이었다.형조 옥사에 끌려온 뒤 줄곧 바라왔던 것처럼, 어서 이 끔찍한 숨통이 끊어지기만을 바랐다.“죄인 서연은 들으라!”단상 위에 앉은 판관이 근엄한 목소리로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너는 옛 역모 사건의 잔당으로 몰린 죄인으로서, 국법에 따라 참수형에 처한다!”구경꾼들의 야유와 침 뱉는 소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망나니가 비릿한 막걸리를 입에 머금고 번쩍이는 대도의 칼날 위로 뿜어냈다.푸우우-!허연 막걸리 거품이 칼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자, 간다!”망나니가 기괴한 춤을 추며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서연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목덜미로 쏟아져 내리려는 찰나였다.“멈춰라!!!”형장을 뒤흔드는 거대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동시에,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구경꾼들을 거칠게 밀치며 형장 한가운데로 난입했다.히이잉-!거대한 흑마가 앞발을 치켜들며 모래바람을 일으켰다.말등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사내의 모습에, 형장의 모든 사람의 숨이 멎었다.짙은 붉은색의 곤룡포.어깨와 가슴에 수놓아진 거대한 금빛 용 문양.
옥방 안, 횃불의 희미한 빛이 쓰러진 여인의 얼굴을 비추었다.산발이 된 머리카락, 피와 흙먼지로 엉망이 된 창백한 뺨.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초점을 잃고 허공을 응시하는 텅 빈 눈동자.쿵.이헌의 심장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무섭게 곤두박질쳤다.숨이 턱 막히고, 전신의 피가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송지안.’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고문으로 찢긴 저 처참한 몰골은, 며칠 전 펜트하우스 베란다에서 자신을 서늘하게 내려다보며 투신하던 지안의 마지막 모습과 완벽하게 겹쳐졌다.같은 얼굴. 같은 눈빛. 그리고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그 지독한 절망까지.“문 열어.”이헌의 목소리가 짐승의 으르렁거림처럼 낮게 깔렸다.형조판서가 기겁하며 막아섰다.“자, 자가! 아니 되옵니다! 저 계집은 내일 참수형을 받을 대역 죄인이옵니다! 대군의 옥체에 부정한 기운이……!”“당장 열어라!!”이헌의 핏발 선 사자후가 옥사를 찢을 듯 울려 퍼졌다.그 압도적인 살기에 옥졸이 사시나무 떨듯 떨며 황급히 열쇠 꾸러미를 꺼내 자물쇠를 풀었다.끼이익.무거운 옥문이 열리자마자 이헌은 미친 듯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그는 짚더미 위에 쓰러진 서연의 곁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값비싼 곤룡포가 더러운 흙바닥에 끌리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지안아…… 지안아…….”이헌의 커다란 두 손이 허공에서 벌벌 떨렸다.감히 그녀의 피투성이가 된 몸에 손을 대지 못하고, 그는 서연의 얼굴 주위를 허우적거
옥체에 아직 열이…….”“전부 다 나가라고 했다.”태경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법정에서 상대를 짓누르던 특유의 서늘한 기백.그 압도적인 살기에 눌린 자들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황급히 뒷걸음질을 치며 방을 빠져나갔다.방 안에는 다시 완벽한 정적이 내려앉았다.태경은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강하게 짚었다.그 순간, 머리가 깨질 듯한 극심한 두통과 함께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뇌리에 강제로 꽂혀 들어왔다.‘진안대군 이헌.’가상 조선의 실세. 현 국왕의 이복동생.병권을 틀어쥐고 조정의 생사여탈권을 쥔 무소불위의 권력자.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숙청으로 정적들을 베어 넘긴 폭군 중의 폭군.현대의 변호사 차태경의 논리적인 두뇌가, 이헌의 기억을 스펀지처럼 빠르게 흡수하며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죽지 않았다.아니, 차태경의 육신은 바닥에 부딪혀 죽었을지 몰라도 영혼은 이 낯선 시대, 낯선 권력자의 몸에 완벽하게 안착했다.태경은 침상에서 내려와 맨발로 방 안을 걸었다.바닥의 서늘한 기운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며 이 모든 것이 생생한 현실임을 증명했다.방 한쪽에 놓인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거울 속에는 흉터가 희미하게 남은 턱선, 날카롭고 서늘한 눈매를 가진 낯선 사내가 서 있었다.하지만 그 눈동자 속에는 분명 차태경의 지독한 절망과 독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어째서…….’태경의 주먹이 서서히 쥐어졌다.자신은 지옥으로 떨어져 마땅한 죄인이었다.그녀를 파멸시키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악마.그런데 왜 형벌 대신 이토록 거대한 권력의 정점에
빛이 들지 않는 펜트하우스의 넓은 거실.사방에 나뒹구는 고급 양주병들이 발끝에 채이며 탁한 소리를 냈다.태경은 카펫 위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있었다.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칼은 헝클어진 지 오래였고, 날카롭던 턱선에는 수염이 까칠하게 자라 있었다.대한민국 최고의 승소율을 자랑하며 법정을 호령하던 에이스 변호사 차태경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의 핏발 선 시선은 오직 두 손에 쥐여진 낡은 종이 한 장에 고정되어 있었다.끝부분이 검붉게 말라붙은 유서.지안의 피가 묻은 종이였다.‘다음 생이 있다면 절대 너 같은 악마와 얽히지 않기를.’‘네가 평생, 내 피를 뒤집어쓰고 지옥에 살기를.’종이를 쥔 태경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잘게 떨렸다.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부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다.그녀의 짙은 피비린내가 여전히 코끝을 맴도는 것 같았다.“지안아…….”갈라진 목소리가 텅 빈 거실의 허공을 맴돌았다.대답은 없었다.태경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어둠 속 저편에서, 낡은 하얀 셔츠를 입은 지안이 자신을 등지고 서 있는 환각이 보였다.태경은 홀린 듯이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떨리는 손을 뻗었다. 닿을 것만 같았다.“지안아,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하지만 허공을 가른 손끝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흩어질 뿐이었다.환각이 사라진 자리엔 끝없는 적막만이 남았다.그녀가 없는 세상.어떤 완벽한 승소 판결문도, 천문학적인 액수의 수임료도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그저 심장
끼이익!타이어가 주차장 바닥을 날카롭게 긁으며 거칠게 멈춰 섰다.태경은 차 문을 발로 차듯 열어젖히고 승강기를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다.“문 열어! 당장 열어!”펜트하우스 전용 승강기 버튼을 부서져라 내리쳤다.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층수가 올라가는 붉은색 숫자가 마치 시한폭탄의 타이머처럼 태경의 시야를 찔러댔다.띵동.문이 열리자마자 태경은 거실로 뛰쳐 들어갔다.넓은 거실 한가운데, 건장한 경호원 두 명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테라스 쪽을 향해 굳어 있었다.“대표님! 그게, 저희가 다가가려 했지만 사모님께서……!”태경은 경호원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테라스를 향해 내달렸다.활짝 열린 통유리창 너머로 매서운 고층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그리고 그 끄트머리.아무런 안전장치도 없는 아찔한 난간 위에, 지안이 서 있었다.“송지안.”태경의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그녀가 입고 있는 낡은 흰 셔츠 자락이 바람에 거칠게 나부끼고 있었다.한 발자국만 뒤로 디디면 까마득한 허공이었다.태경의 핏발 선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거기서 뭐 하는 거야. 당장 내려와.”“…….”“내려오라고 했어! 송지안!”태경이 한 걸음 다가가려 하자, 지안의 발끝이 허공을 향해 반 뼘 뒤로 물러났다.“움직이지 마.”바람에 흩날리는 옅은 목소리였지만, 태경의 발걸음을 바닥에 못 박기에는 충분했다.지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태경을 내려다
분노도 원망도 모두 하얗게 타버려 차가운 재만 남은 상태.오직 이 지옥을 스스로 끝낼 수 있다는 서늘한 안도감만이 그녀를 지배했다.사각, 사각.만년필 촉이 종이 위를 긁고 지나가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지안의 입술 사이로 조용한 읊조림이 새어 나왔다.“다음 생이 있다면…….”차태경이 이 종이를 보게 될 순간을 상상했다.오만하고 완벽한 그의 세상에 자신이 남길 유일한 오점.“절대 너 같은 악마와 얽히지 않기를.”만년필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가 찢어질 듯 날카로운 필체가 이어졌다.“네가 평생, 내 피를 뒤집어쓰고 지옥에 살기를.”탁.만년필의 촉이 종이 끝을 강하게 찌르며 마침표를 찍었다.지안은 만년필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마지막 저주가 담긴 유서였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펜트하우스의 거대한 통유리창 쪽을 응시했다.바깥으로 연결된 넓은 베란다.지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유리문을 밀어 열었다.훅 끼쳐오는 차가운 고층의 바람이 그녀의 낡은 흰 셔츠를 매섭게 흔들었다.난간 너머로는 까마득한 서울의 빌딩 숲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지안은 난간을 짚고 한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공포는 없었다.차태경의 곁에서 숨을 쉬는 것이, 저 허공으로 몸을 던지는 것보다 백 배는 더 끔찍한 지옥이었으니까.---같은 시각.서울중앙지방법원 대법정.“원고 측이 제시한 증거는 법적 효력을 상실했습니다. 피고 법인은 이미 적법한 절차를 거쳐…….”태경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변론을 이어가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