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사흘 밤낮을 불태우듯 끓어오르던 서연의 고열이 마침내 가라앉았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던 눈꺼풀이 서서히 들리자,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서늘할 정도로 텅 빈 안채의 공기였다.서연은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머리는 여전히 깨질 듯이 아팠지만, 살갗을 태우던 불덩이 같은 열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그녀가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굳게 닫힌 창호지 너머로 평소와는 다른 부산스러운 소음이 들려왔다.흙을 파헤치는 소리, 거대한 돌이 부딪치는 둔탁한 마찰음, 그리고 수십 명의 발소리가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더 깊이 파라! 그깟 돌덩이 하나 옮기는 데 시간이 이리 지체되어서야 쓰겠느냐!”
마당을 울리는 이헌의 거친 사자후였다.
서연은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창틈으로 조심스럽게 시선을 밀어 넣었다.우리 삼사의 엘리트 관료들이 수십 년에 걸쳐 정교하게 숫자를 맞추고 조작해 놓은 이중장부야. 산학(算學)에 평생을 바친 호조의 노련한 아전들조차 그 암호를 풀지 못해.”대사간의 눈동자에 짙은 오만함이 서렸다.“글줄이나 읽는다고 셈을 할 줄 아는 것은 아니지. 그저 십 년 전 사건을 들추어 우리를 위협하려는 얄팍한 허세일 뿐이야. 수만 권의 복잡한 숫자에 파묻혀, 며칠 보지도 못하고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질 것이네. 두 발 뻗고 잠이나 주무시게.”그들은 이헌이 그 거대한 숫자의 바다 속에서 길을 잃고 헛발질만 할 것이라 굳게 믿으며 서로를 마주 보고 낄낄거렸다.그들은 알지 못했다.자신들이 상대하고 있는 그 사내가, 한낱 무식한 조선의 대군이 아니라는 사실을.밤이 깊어 적막이 내려앉은 대군저의 집무실, 취선당(聚仙堂).넓은 방 안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이 산맥처럼 쌓여 있는 수만 권의 장부들로 가득 차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퀴퀴한 묵은 종이 냄새가 촛불의 연기와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자가…….”흑위대장이 방 한구석에 서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헌을 바라보았다.“이 수많은 장부를 어찌 홀로 다 보시려 하옵니까. 지금이라도 셈에 밝은 중인들이나 궐 밖의 산학자들을 은밀히 불러들이는 것이…….”“필요 없다.”이헌은 겉옷을 벗어 던진 채, 얇은 소창의 차림으로 서안 앞에 앉아 있었다.“회계의 장부를 남에게 맡기는 것은 내 목줄을 남의 손에 쥐여주는 것과 같다. 이 방에 있는 장부의 숫자 하나, 먹물 한 방울의 흐름까지 모조리 내 눈과 뇌로 직접 뜯어먹을 것이다.”“하오나, 삼사의
며칠 뒤.이헌이 준비하던 반역은 뜻밖에도, 왕이 내린 합법적 전권의 형태로 먼저 문을 열었다.조정의 파벌 싸움과 재정 혼란으로 국정이 마비되자, 대신들은 왕실의 군사와 행정을 장악한 진안대군에게 비상 국정 전권을 맡기라는 상소를 연달아 올렸다.왕 이도는 무너지는 국정의 책임을 떠넘기고, 동시에 이헌을 궁궐의 제도 안에 묶어두겠다는 계산으로 끝내 왕명을 내렸다.진안대군 이헌을 공식 섭정으로 삼아 국정을 대리하게 한다는 교지였다.이헌은 당장 칼을 뽑는 대신, 왕이 스스로 쥐여준 합법적 권한부터 이용하기로 했다.조정의 언로(言路)를 장악하고 율법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자들.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아우르는 삼사(三司)의 수뇌부들이 편전에 도열해 있었다.그들은 정확히 십 년 전, 백성을 구휼하려던 서연의 아버지를 가혹하게 물어뜯어 멸문지화로 몰아넣었던 사냥개들이자, 서연의 인생을 지옥으로 처박은 첫 번째 원수 집단이었다.용상 아래, 섭정(攝政)의 자리에 앉은 이헌은 옥좌를 대신하여 그들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그의 짙은 눈동자에는 일말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은, 지독하게 서늘한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십 년 전 평안도 관아에서 벌어졌던 조세 횡령 사건.”이헌의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편전의 적막을 갈랐다.“당시 서상서가 국고를 빼돌렸다는 명목으로 가산이 적몰되고 멸문을 당했지. 내 그 사건의 근거가 되었던 당시 호조(戶曹)와 평안도의 조세 출납 장부를 다시 열람하고자 한다. 당장 내어오라.”그 말에 삼사의 관리들 사이로 미세한 동요가 일었다.하지만 이내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이 앞으로 나서며 꼿꼿하게 고개를 쳐들었다.“대군 자가. 아니, 섭정 대감.”대사간의 목소리에는
그는늘 안채의 문이 보이기 무섭게 바닥으로 기어들어 와 무릎을 꿇고 애원을 쏟아내던 사내였다.하지만 지금 정원에 선 이헌은 무릎을 굽히지도, 어깨를 구부리지도 않았다.오히려 하늘을 뚫을 듯이 꼿꼿하게 선 채, 뒷짐을 지고 안채를 응시하고 있었다.서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위로 끌어올렸다.창틈 너머로 마주친 이헌의 두 눈동자.그 서늘하고도 압도적인 안광을 본 순간, 서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온몸의 솜털이 비명처럼 곤두섰다.‘저 눈빛은…….’애정을 갈구하는 찌질한 맹견의 눈빛이 아니었다.상처받아 오열하던 비참한 사내의 눈빛도 아니었다.그것은 오직, 사람의 사정 따위는 돌아보지 않은 채 법과 권력으로 목표를 짓밟아버리는 그 완전무결한 괴물의 눈빛.피도 눈물도 없이, 오직 자신이 설정한 거대한 목표를 향해 세상을 도륙 낼 준비를 마친 가장 잔혹한 정복자의 안광이었다.서연의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거친 호흡이 터져 나왔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저 미치광이가, 드디어 율법이라는 알량한 목줄마저 스스로 끊어버리고 가장 끔찍한 선을 넘으려 한다는 것을.‘반역.’그 두 글자가 뇌리를 강타하자, 서연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간신히 창틀을 부여잡고 버틴 그녀의 두 손등 위로 시퍼런 핏줄이 터질 듯 솟아올랐다.자신을 면천시키겠다는 그 미친 집착이 기어이 왕조차 적으로 돌리게 만든 것이다.저 남자는 이제 법을 교묘하게 피하는 방어전이 아니라, 법을 만드는 근원을 모조리 파괴하려는 거대한 피바람을 준비하고 있었다.조선 팔도의 모든 강물이 핏빛으로 물들고, 수만 명의 목이 창끝에 매달릴 끔찍한 반정(反正)의
대군저의 집무실, 취선당(聚仙堂)의 밤은 무겁고도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최고급 밀랍 초가 타들어 가는 희미한 불빛 아래, 이헌은 넓은 서안(書案) 위에 흩어진 수십 장의 서류들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며칠 밤낮을 꼬박 새우며 벼려낸, ‘노비 면천 특별법(奴婢 免賤 特別法)’의 초안과 조정 대신들을 옭아맬 협박 명단들이었다.“…….”이헌의 온전한 왼손이 붉은 붓을 쥔 채 허공에 멈춰 있었다.그의 짙은 눈동자는 완벽하게 짜인 법안의 조항들을 훑어 내렸지만, 그 안에는 승리를 확신하는 오만함 대신 뼈저린 한계에 부딪힌 자의 차가운 냉소가 서려 있었다.이 법안을 강행한다면, 훈구파 대신들의 숨통을 끊어놓고 유림의 반발을 짓밟을 수는 있다.자신이 쥔 율법의 칼날과 압도적인 정보력이라면, 그 어떤 반대 여론도 합법적인 피바람으로 잠재울 수 있었다.하지만, 그 모든 치밀한 계산의 끝에는 결코 법리로 뚫을 수 없는 거대하고 절대적인 벽이 존재했다.‘전하(殿下).’이헌의 핏기 없는 입술 사이로 조용한 파열음이 샜다.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은 그 자체로 최고의 권력이자 신앙이었다.하지만 이 비틀린 조선 땅에서, 율법은 결국 왕좌에 앉은 단 한 사람의 입술에서 발원하는 부속물에 불과했다.자신이 아무리 교묘하게 경국대전을 뜯어고치고 특별법을 제정한다 한들.용상에 앉은 국왕 이도가 옥새를 찍기를 거부하거나, 어느 날 갑자기 어명을 내려 그 법을 폐기해 버린다면?만약 자신이 과로로 쓰러지거나, 정적들의 암살에 목숨을 잃어 서연의 곁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내가 만들어준 신분과 자유는, 결국 왕의 변심 한 번에 언제든 다시 휴지 조각이 될 수
저남자가 던져주는 먹이를 먹고, 저 남자가 조성한 인공의 공기를 마시며, 저 남자가 세운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숨을 쉬어야 하는 애완조(愛玩鳥).그 처절하고 비참한 자각이 서연의 심장을 날카로운 유리 조각으로 난도질했다.서연의 뻗었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그녀의 텅 빈 눈동자에 고여 있던 마지막 한 줌의 생기마저 완벽하게 바스라져 내렸다.“……서연 아가씨.”그때, 등 뒤에서 조심스럽고 애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검은 철릭을 입은 이헌이 어느새 정원 입구에 서 있었다.그는 흑위대 무사들을 향해 손짓하여 멀리 물러서게 한 뒤, 서연을 향해 아주 조심스러운 걸음을 옮겼다.그의 얼굴은 사흘간의 불면과 간호로 인해 여전히 반쪽이 되어 있었지만, 서연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만큼은 별빛을 머금은 듯 벅차오르는 환희로 반짝이고 있었다.이헌은 서연의 세 발자국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그의 시선은 서연의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와, 창백하지만 열이 내린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몸은…… 좀 어떠하시옵니까. 바람이 차오나, 볕이 따스하여 억지로 모시라 명하였사옵니다.”이헌의 목소리는 부서질 듯 다정했다.“꽃이 아름답지요. 아가씨께서 예전 가문에 계실 적, 후원의 동백을 즐겨 보셨다 들어 제가 남도에서 제일가는 나무들만 캐어왔사옵니다.”그는 마치 주인의 칭찬을 기다리는 짐승처럼, 가파른 숨을 내쉬며 서연의 눈치를 살폈다.자신이 국법을 어겨가며 만들어낸 이 화려한 성역.이곳에서라면 그녀가 과거의 아픔을 잊고, 아주 잠깐이라도 미소를 지어주지 않을까 하는 맹목적이고 처절한
사흘 밤낮을 불태우듯 끓어오르던 서연의 고열이 마침내 가라앉았다.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던 눈꺼풀이 서서히 들리자,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서늘할 정도로 텅 빈 안채의 공기였다.서연은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머리는 여전히 깨질 듯이 아팠지만, 살갗을 태우던 불덩이 같은 열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그녀가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굳게 닫힌 창호지 너머로 평소와는 다른 부산스러운 소음이 들려왔다.흙을 파헤치는 소리, 거대한 돌이 부딪치는 둔탁한 마찰음, 그리고 수십 명의 발소리가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더 깊이 파라! 그깟 돌덩이 하나 옮기는 데 시간이 이리 지체되어서야 쓰겠느냐!”마당을 울리는 이헌의 거친 사자후였다.서연은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창틈으로 조심스럽게 시선을 밀어 넣었다.대군저의 안채 앞마당이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기존에 있던 평범한 마당의 흙은 모조리 파헤쳐졌고, 그 위로 도성 밖에서 통째로 뿌리째 뽑아온 진귀한 기화요초(奇花瑤草)들이 억지로 심어지고 있었다.한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붉은 꽃망울을 터뜨린 동백나무 수십 그루가 병풍처럼 둘러쳐졌고, 마당 한가운데로는 인공 수로를 끌어와 작은 연못까지 만들어지고 있었다.“자, 자가! 공조(工曹)의 허가도 없이 사가의 담장을 임의로 허물고, 국유지인 밖의 수로를 강제로 끌어오는 것은 명백한 국법 위반이옵니다!”마당 한구석에서 흑위대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엎드려 부르짖고 있었다.“어제까지만 해도 유림들을 율법의 잣대로 도륙 내신 분께서 어찌 스스로 법을 어기시려 하옵니까! 대명률의 어느 판례를 뒤져도, 개인의 정원을 조성하기 위해 국가의 수로를 무단으로 변경하는 것을 합법이라 포장할 수는 없사옵니다!&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