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놓자, 비로소 내가 사랑을 알았다: Chapter 121 - Chapter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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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화

진혁은 팔꿈치를 원탁에 괴고 기댄 채 이담을 유심히 훑어보았다.오랜만에 마주한 진혁은 여전했다.검은색 정장 차림에 깔끔하게 빗어 넘긴 짧은 머리에서는 윤기가 흘렀다.이담이 알던 진혁은 차갑고 무심해서 뭐든 귀찮다는 듯 심드렁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빛에는 희미한 열기가 어려 있었다.이담은 잔을 꽉 쥐고 평온한 척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진혁도 시선을 거두고 인사하러 온 사람과 잔을 부딪쳤다.두 사람은 예전처럼 공식 석상에서 서로 모르는 척 연기했다.손님들 사이를 빠져나온 은호가 곧장 이담에게로 왔다.“여기 계셨네요.”“이야기 다 나누셨어요?”은호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경훈을 바라보았다.경훈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권 대표님, 이름은 익히 들었습니다.”“진호군 회장님 손자분이십니까?”은호는 악수를 나누고 이내 손을 놓았다.“권 대표님께서 저희 할아버지를 아십니까?”“집안 어른들끼리 아는 사이지, 제가 직접 아는 건 아닙니다.”두 사람의 대화는 격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주고받는 말 사이로 묘한 기류가 흘렀다.이담은 막 돌아서다가 다가오던 남자와 부딪쳤다. 그녀의 립스틱이 남자의 옷깃에 스치면서 자국을 남겼다.코끝에 닿는 낯익은 은은한 세제 향기.이담은 온몸이 굳어 버렸다.고개를 숙인 진혁은 옷깃의 립스틱 자국을 확인했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이담을 꿰뚫듯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아가씨 립스틱이 제 옷에 묻었는데요.”입을 열기 전까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이담은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졌지만 곧바로 미소를 되찾았다.“죄송해요. 제가 미처 못 봤네요.”말을 마치며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들었다.“제가 닦아 드릴까요?”진혁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휴지를 받으려 하지도 않았다.“저 여자 대체 누구야? 진 대표님이랑 권 대표님 옆에 있는 것도 모자라, 하 대표님이 먼저 말을 걸다니.”“너도 저렇게 생겼으면 가능하겠지.”“사람 팔자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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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진혁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담이 내뱉은 ‘안 친하잖아요’라는 말에도,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술만 한 모금 들이켰다.연회에 모인 사람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저마다 추측했지만, 결국 확신하지는 못했다.이담이 자리를 뜨려던 순간, 술잔을 내려놓은 경훈이 사람들 사이로 걸어 나왔다.“이담아, 너무 덤벙대는 거 아니야? 그래도 괜찮아. 하 대표님만 괜찮으시다면, 내가 이 옷값 대신 물어줄게.”이담이 놀란 눈빛으로 경훈을 바라보았다.진혁이 옷깃을 닦으며 담담하게 웃었다.“진 대표님, 그게 정말 심이담 씨를 위한 걸까요?”“하 대표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경훈의 태도 역시 여유로웠다.“이담이는 저와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입니다. 제가 챙기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습니까?”진혁은 손에 든 잔을 천천히 기울였다.“제가 싫다면요?”경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하 대표님,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시는 걸 보니, 혹시 이담이한테 관심이라도 있으신 겁니까?”이담은 말없이 진혁을 바라보았다.진혁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진심인지 비웃음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웃음이었다.“지금 농담하시는 겁니까?”순간 이담의 표정이 굳어졌다가 곧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시선을 돌렸다.“아, 아니셨군요.”경훈이 일부러 깨달은 척 말했다.“그러고 보니, 하 대표님 스캔들 상대가 경성병원의 과장님이라고 들었습니다. 두 분 좋은 소식은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요?”“하 대표님 여자친구 있다는 소문이 진짜였어?”“예전에 헤어졌던 첫사랑이 돌아왔다던데, 그분 이야기 아니야?”“하 대표님도 의외로 한 사람만 바라보는 스타일인가 보네.”순식간에 화제는 진혁과 초연 이야기로 옮겨갔다.그가 첫사랑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잊지 못했는지, 사람들의 말은 끊임없이 이어졌다.듣고 싶지 않았지만, 그 모든 이야기가 이담의 귀로 선명하게 흘러들어왔다.진혁은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이담에게 머물렀던 시선을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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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이담의 동공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본능적으로 밀어내려고 했지만, 진혁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한 손으로 문을 짚고 그녀의 퇴로를 막았다.진혁의 입술은 체온보다 훨씬 뜨거웠다.이전에 진혁이 이렇게까지 이성을 잃었던 적은 단 한 번뿐이었다.약에 취해 정신을 놓았던 그날 밤.혹시 이번에도...다급해진 이담은 손을 휘둘러 진혁의 뺨을 때리려고 했다. 하지만 정확히 맞히지 못하고 귓가만 스치고 말았다.이담은 고개를 돌린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정신 차려. 난 문초연이 아니야.”순간 진혁의 턱 근육이 미세하게 움찔했다.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대신 손등으로 자신의 입가를 문질렀다.그제야 이담은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이담은 억지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너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갑자기 이러니까 당황스럽다고.”진혁은 여전히 침묵했다.한참이 지나서야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겨서 느슨하게 풀고는 입을 열었다.“열 시 전까지 들어와.”그 말만 남긴 채 진혁은 이담을 지나쳐 먼저 휴게실을 나갔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이담은 힘이 풀린 듯 문 뒤에 기대섰다.다리가 후들거렸다.방금 전 진혁의 모습은 평소와 달라서 더 무서웠다.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조금 전 그의 행동을 하나하나 떠올려 봤지만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없었다.‘설마 질투하는 걸까?’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이담은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이담은 휴지로 번진 립스틱을 지운 뒤 거울 앞에서 다시 화장을 고쳤다.잠시 후 휴게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그런데 복도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그대로 멈춰 섰다.경훈이었다.경훈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네가 왜 하 대표랑 휴게실에서 같이 나오지?”“그냥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경훈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봤다.“정말?”이담은 괜히 난처해졌다. 꼭 불륜 현장을 들킨 사람처럼 찔리는 기분이었다.경훈은 더 캐묻지 않았다.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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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이담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래 안 끓여서 맛이 없을 수도 있어.”“그게 아니라.”진혁이 깔끔하게 잘라 말했다.“끓이고 싶지 않은 거겠지.”이담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진혁을 바라보았다. 6년을 함께했지만, 이렇게 가라앉고 무기력한 진혁의 모습은 처음이었다.적어도 이담 앞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진혁이 오늘 밤 대체 얼마나 마셨는지는 몰랐지만, 의식이 혼미할 정도로 취한 건 절대 아니었다.진혁의 정신은 아주 또렷했다.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또렷했다.이담이 두 손을 꽉 쥐고,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그래, 해장국 끓여줄게. 대신 하빈이 일에 더 이상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해.”진혁이 이담을 바라보았다.“그거 하나면 돼?”“반드시 지킨다고 약속해.”이담이 핸드폰을 꺼내 녹음을 시작하는 걸 보고, 진혁은 팔꿈치를 탁자에 기댄 채 희미하게 웃었다.“그래.”이담은 주방으로 향했다.해장국은 이전에도 너무 많이 끓여봐서,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재료가 어디 있는지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진혁은 주방 안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그때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문초연에게서 메시지가 온 것이다. 진혁은 힐끗 보기만 했을 뿐 답장도 하지 않은 채 핸드폰 화면을 껐다.해장국을 끓여 테이블에 올려둔 이담이 앞치마를 벗으며 말했다.“오늘 밤엔 손님방에서 잘게. 안방은 네가 써.”“잠깐.”이담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진혁을 바라보았다.진혁이 이담을 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내일 본가에 가야 하니까, 일찍 쉬어.”이담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알았어.”진혁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담도 그냥 방으로 돌아갔다....다음 날, 이담은 진혁과 아침을 먹고 본가로 향했다.임순자가 마당에서 두 사람을 맞이했고, 이담은 진혁의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거실에는 마동순뿐만 아니라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도 계셨다.“할머니, 아버님, 어머님.”이담은 평소처럼 어른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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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마동순의 눈에 짙은 아쉬움이 스쳤다.하지만 인연은 억지로 이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빚으로 삼아 가까스로 이어 온 6년의 시간도, 억지로 맺은 관계는 결국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는 버텨내지 못했다.이담과 마동순이 복도 끝으로 멀어지자, 벽 뒤에 숨어 있던 지연이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지연은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이혼?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그렇게 오빠만 바라보며 매달리던 심이담이 진짜 이혼을 하겠다고?’‘어쩐지 요즘은 아무리 비꼬고 건드려도 시큰둥하기만 하더라니.’지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안 되겠어, 직접 확인해볼 거야.’곧장 거실로 돌아간 지연은 고용인에게 진혁의 행방을 묻고 서둘러 골프장으로 향했다.진혁은 이미 골프복으로 갈아입은 채 필드에 나와 있었다.그는 바람의 방향과 그린의 경사, 페어웨이 주변의 장애물까지 차분히 계산한 뒤 클럽을 휘둘렀다.공은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홀컵 가까이에 떨어졌다.두 번째 샷.공이 그대로 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옆에 서 있던 고용인이 재빨리 생수병을 건넸다.진혁은 물을 받아 뚜껑을 돌렸다.“오빠!”지연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진혁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생수병을 다시 고용인에게 넘겼다.“왜.”“심이담이 오빠랑 이혼하겠다고 했다며?”순간 주변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고용인은 흠칫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들었어도 못 들은 척해야 하는 이야기였다.진혁은 시선조차 들지 않은 채 말했다.“또 무슨 헛소리야.”“내가 직접 들었어!”지연은 물러서지 않고 그의 앞을 막아섰다.“심이담이 할머니랑 얘기하는 거 다 들었다고.”“오빠, 걔가 어떻게 오빠한테 이혼하겠다는 말을 해? 차라리 오빠가 먼저 버려야지! 걔가 뭔데! 오빠한테 그렇게 매달리던 년이...”“하지연.”그제야 공을 보고 있던 진혁의 시선이 지연에게로 향했다. 원래도 서늘한 눈빛이었지만, 지금은 그 안에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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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초연아, 너... 화난 거 아니지?]하지연은 뒤늦게 자신이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걸 깨달았다.혹시라도 초연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을 했을까 싶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미안해. 너무 분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초연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괜찮아. 나도 진혁이랑 헤어진 지도 벌써 6년이나 됐는걸...”[6년이면 어때! 남들도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잖아! 초연아, 넌 꼭 우리 가족이 돼야 해!]“그래.”전화를 끊자 초연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초연은 천천히 몸을 돌려 방 안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남자는 느긋한 손길로 셔츠 단추를 잠그고 있었다.“심이담이 하진혁한테 이혼하자고 했다던데, 하진혁은 싫어하는 눈치래. 그러니까 당신이 말한 협력, 아직 유효한 거지?”남자는 재킷을 걸치며 피식 웃었다.“물론이지.”그러고는 문득 고개를 돌려 초연을 바라보더니 그녀의 뺨을 감쌌다.“대신 더 이상 심이담은 건드리지 마.”초연은 잠깐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나긋하게 웃었다.“알았어.”남자는 더 말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문이 닫히자, 조금 전까지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하나같이 전부 심이담뿐이네.’초연은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을 내려다보며 입가에 차가운 비웃음이 번졌다.‘심이담이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표정이 얼마나 볼만할지 기대가 되네.’하씨 가문 본가.이담은 오전 내내 마동순과 함께 선실에 머물며 경서를 필사했다.예전부터 마동순은 늘 같은 말을 했다.경서를 베껴 쓰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집중력이 길러져서, 간절한 바람에도 힘이 실린다고.잡념을 내려놓고 글자 하나하나에 몰입하다 보면 외부의 소음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고, 마음이 비워진 경지에 가까워진다는 것이었다.물론 이담은 마동순처럼 불경에 깊은 조예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신앙심이 그다지 깊은 것도 아니지만, 하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거부감이 적을 뿐이었다.이담은 선실 문을 조용히 닫고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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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이윤정은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그때 강준이 의료진과 함께 다급히 달려왔다.“사모님!”의료진은 곧바로 김미영에게 다가가서 이윤정과 떨어뜨렸다.“우리 아가 어딨어!”김미영은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여기 있습니다, 여기!”강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품에서 인형을 꺼냈다. 재빨리 인형을 건네자, 거짓말처럼 김미영의 울음이 멈췄다.김미영은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마치 누군가 빼앗아 갈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두 팔로 단단히 감싸 안았다.“괜찮아, 괜찮아.”“엄마 여기 있어. 엄마 여기 있단다...”강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치며 속으로 생각했다.'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놀란 기색이 역력한 이윤정을 발견한 강준은 곧바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저희 사모님이 놀라게 해 드렸군요. 괜찮으십니까?”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윤정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다행이네요.”강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의료진을 향해 말했다.“사모님 모시고 올라가세요.”의료진은 익숙한 솜씨로 김미영을 달랬다. 한참을 설득한 끝에야 김미영은 인형을 품에 안은 채 순순히 의료진을 따라갔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이윤정은 좀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물을 뜨러 나간 이윤정이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자, 심민철이 병실 밖으로 나왔다.복도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는 이윤정을 발견한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물 뜨러 간다더니 여기서 뭐 해?”하지만 이윤정은 대답이 없었다.심민철이 가까이 다가갔다.“왜 그래?”그제야 이윤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여보, 저 방금 어떤 여자를 봤어요.”심민철은 별 관심 없다는 듯 말했다.“무슨 여자? 그보다 얼른 물이나 떠 와. 아들 몸 닦아야지. 이대로 두면 냄새나겠어.”“그 여자가 이담이를 닮았어요. 혹시 이담이의 친엄마 아닐까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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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깊은 밤.따뜻한 실내 조명이 유리창에 옅은 김처럼 번지면서 거리의 차가운 불빛과 뒤섞였다.마치 필터를 씌운 듯 몽환적인 분위기였다.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이담은 직원을 불러 계산을 마쳤다.경훈이 턱 밑에 깍지 낀 손을 받친 채 말했다.“이번엔 안 속였지? 네가 진짜 계산했잖아.”이담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속 시원하네요.”두 사람은 함께 식당을 나섰다.경훈이 자연스럽게 문을 열어 주었고, 이담도 잊지 않고 감사 인사를 건넸다.경훈은 이담의 뒤에 선 채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물었다.“차 어디 세웠어?”“주차 자리가 없어서 저 앞 내리막길 교차로 쪽에 세웠어요.”“같이 가줄게.”돌아선 이담이 경훈을 바라보며 뭔가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근처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튀어나왔다.“조심해!”경훈이 재빨리 손을 뻗어 이담을 끌어당겼다. 이담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그대로 그의 품 안에 안기게 되었다.오토바이가 바로 등 뒤를 스치듯 지나가면서, 거센 바람에 옷자락이 휘날렸다.오토바이 속도가 상당했다.“괜찮아? 많이 놀랐어?”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머리 위로 경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담은 황급히 경훈의 품에서 물러났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목소리도 살짝 떨렸다.“놀랐어요. 선배가 안 잡아줬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경훈이 오토바이가 사라진 방향을 흘끗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요즘 애들은 정말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는 줄 아나 봐.”“저 거의 다 왔어요. 혼자 갈 수 있으니까 여기까지 바래다줘도 돼요.”이담이 가방끈을 고쳐 메며 말했다.경훈이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가는 건 보고 갈게. 그래야 안심이 되니까.”이담도 더 말리지 않고 주차된 차로 가서 차에 올랐다.차창 밖의 경훈을 한 번 바라본 뒤 그녀는 천천히 출발했다.경훈은 이담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러다 핸드폰에 도착한 메시지를 내려다보았다....이담이 침실 문을 열었을 때,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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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이담이 겨우 진정한 뒤 입을 열었다.“그건 단순한 확대 해석이에요. 저랑 경훈 선배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요.”[지금 당장 아니라고 해명해도, 여론은 이미 그게 사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하 대표님과 재산 분할을 받고 이혼하려면, 우선 이 문제부터 해결하셔야 할 겁니다.]“알겠어요.”전화를 끊은 이담은 실시간 검색어를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이런 열애설이 터졌으니 이만옥이 자신을 부를 게 분명했다.이혼이야 그렇다 쳐도, 사실 이담은 결과 자체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당장 부양해야 할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니 빈손으로 나와도 상관없었다.그럼에도 재산 분할과 그린힐 아파트를 받으려는 이유는, 오직 하빈과 자신을 길러 준 심씨 가족에게 보답하기 위해서였다.세수를 마친 이담은 거실로 나왔다.그런데 진혁이 아직 집에 있는 모습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멈췄다.진혁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 한 손으로는 전화를 받으며, 다른 손으로는 천천히 반찬을 집고 있었다.전화 너머에서 무슨 말이 하는지, 가끔 짧게 대답만 할 뿐이었다.“사모님, 일어나셨어요.”심계화가 과일 접시를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진혁은 고개를 들고 이담을 바라보더니 전화를 끊었다.이담이 의자를 당겨 식탁에 앉았지만, 둘 중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심계화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 뒤, 진혁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풀었다.“실시간 검색어는 내가 사람 시켜서 내렸어.”이담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진혁은 물컵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시고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이담을 바라보며 말했다.“열애설은 너도 한 번, 나도 한 번 났으니 비긴 거야. 다신 이런 일 없어야 해.”이담이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진혁은 먼저 물컵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외투를 집어 든 채 그대로 집을 나섰다.잠시 후 심계화가 주방에서 다시 나왔다.“대표님, 벌써 나가셨네요?”그러다 멍하니 앉아 있는 이담을 보고 화제를 돌렸다.“사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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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화

소연은 건물 밖으로 뛰쳐나왔지만 아직도 다리가 풀린 듯 후들거렸다.소연은 서성거리면서 이 일을 이담에게 알려야 할지 망설였다.모른 척하자니 양심이 찔렸고, 그렇다고 말했다가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위험해질 터였다.핸드폰을 들어 번호를 누르려던 순간, 등 뒤에서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다가와 핸드폰을 낚아챘다.놀라서 돌아본 소연은 초연의 얼굴을 알아보자, 순식간에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네가 들은 내용을 전부 심이담한테 전할 작정이야?”소연은 몸이 덜덜 떨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초연이 웃으며 핸드폰을 소연의 손에 도로 쥐여주었다.“심이담한테 말해도 돼. 하지만 병원에서 나랑 맞서면 어떻게 될지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이 바닥에서 계속 먹고 살고 싶으면 똑똑하게 굴어. 이런 세상에서 빽도 없으면 못 들은 척, 못 본 척하고 살아야 하는 거야.”초연이 소연에게 바짝 다가선 초연이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게다가 심이담 편을 들어봤자 네가 뭘 얻겠어? 뭘 건질 수 있을 것 같아? 순진한 척하지 마. 세상에 공짜는 없어.”소연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초연이 소연의 어깨를 툭 쳤다.“알아서 판단해. 나랑 손잡는 게 나은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 편에 설 건지.”초연은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소연은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벽에 기댄 채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머릿속이 윙윙 울렸다.비아냥거리던 말들이 귓가를 계속 맴돌았다. 얄밉기는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한편 이만옥은 아침 실시간 검색어를 확인하고 예상대로 이담을 불렀다.거실에 다른 고용인들이 물러간 뒤에야 이만옥이 이담을 나무랐다.“너랑 진혁이 요즘 대체 뭐 하는 짓이야? 하나 끝나면 또 하나 터지고. 아무리 비밀 결혼이라지만 체통을 좀 지켜야지.” “너희 사이를 아는 사람들이 우리 하씨 가문을 어떻게 볼 것 같아!”“죄송합니다, 다음엔...”이담이 말을 멈췄다. 문득 다음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라 이내 말을 고쳤다.“앞으로는 이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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