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자, 비로소 내가 사랑을 알았다의 모든 챕터: 챕터 131 - 챕터 140

289 챕터

제131화

이담이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진혁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이담은 결국 기가 찬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렸다.“예전에 나보고 거리를 두라고 한 사람은 너 아니었어? 남들이 오해하는 거 싫다며? 왜, 네가 한 말도 이제 와서는 다 잊었어?”진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분명 자신이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이담도 딱히 신경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이담의 손목을 쥐고 있던 진혁의 손에서 살짝 힘이 풀렸다.“기억력 한 번 좋네.”“응, 나 기억력 좋아. 넌 잊었어도 난 안 잊은 일들이 많거든.”이담이 진혁의 손을 완전히 뿌리치며 뼈 있는 말을 던졌다.그동안 수없이 진혁의 마음을 떠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늘 침묵뿐이었다.어차피 진혁에게는 그 기억이 악몽일 테니, 잊었다면 그걸로 된 일이었다.이담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우린 그냥 예전처럼 서로 신경 끄고 사는 게 맞아.” “오늘 곤란한 상황에서 도와준 건 고맙지만, 어차피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어. 내가 너한테 빚진 건 없어.”이담은 진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마당에 홀로 남겨진 진혁의 눈동자에 씁쓸한 기색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심씨 부부가 병원에서 막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마주치는 이웃들마다 어딘가 기이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뒤에서 쑥덕거렸다.이윤정은 이런 분위기가 너무도 익숙했다.동네에 작은 소문이라도 하나 돌면 늘 이런 식이었다.“아이고, 두 분 이제 오시나 봐요? 참, 댁의 따님이 돈 많은 집안 유부남의 내연녀가 되었다던데, 그거 진짜예요?”평소에도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던 길가에서 노점을 하는 상인이 다짜고짜 돌직구를 날려왔다.그 말을 들은 심씨 부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심민철이 버럭 화를 냈다.“무슨 헛소리야! 어떤 놈이 그딴 헛소문을 내고 다녀?”“아휴, 전 몰라요. 저도 남한테 들은 건데, 이미 이 동네엔 소문이 쫙 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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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화

심민철은 가뜩이나 화가 나 있던 참이었다. 메시지를 보자마자 헛소문을 낸 자를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며 주소를 확인했다.그런데 그 주소가 그린힐인 걸 확인한 순간,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이윤정이 남편의 휴대폰을 넘겨받아 화면을 보았다.“그린힐이라면, 거긴...”심민철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대체 어떤 놈인지 내가 직접 가서 봐야겠어!”이윤정은 남편의 불같은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혹여나 사고라도 칠까 걱정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랐다.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그린힐로 향했다. 단지 앞에 도착하자마자 메시지가 또 들어왔다.장소는 단지 밖 상가 건물에 있는 카페의 2층이었다.심씨 부부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갔다.야외 테라스에는 젊은 여자와 어린아이 한 명이 앉아 있었다.테라스에 있는 손님은 그 두 사람뿐이었다.여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이윤정은 단번에 그녀의 정체를 눈치챘다.심민철이 다가가서 다짜고짜 따져 물었다.“문자 보낸 게 당신이오?”“네, 제가 보냈어요.”초연이 여유롭게 커피를 저으며 당당하게 인정했다.“심민철 씨, 따님이 제 얘기를 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제 이름은 문초연입니다.”문초연...심민철은 순간 멈칫했다.초연이 말을 이었다.“참, 아드님은 지금 좀 어떠신가요?”심민철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당신 짓이었어?”이윤정은 남편을 끌어당기며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썼다. 이내 그녀의 시선이 초연을 향했다.“문초연 씨, 하빈이가 그쪽을 납치했던 건 우리가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입니다.” “그 아이도 지금 충분한 죗값을 치르고 있어요. 대체 우리한테 더 바라는 게 뭡니까?”“제가 바라는 거요?”코웃음을 치며 자세를 고쳐 앉은 초연이 고개를 치켜들고 부부를 똑바로 응시했다.“당연히 댁들의 그 파렴치한 딸내미가 내연녀 짓을 하고 다니는 걸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거죠.”“진혁 씨랑 나 사이에 아이까지 있는데 뻔뻔하게 끼어들었잖아요.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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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화

준희가 2층에서 떨어지자, 길을 걷던 행인들과 카페 안의 손님들은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아, 아이... 아이가 떨어졌어요!”사람들이 구급차를 부르고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려 다가갔을 때, 초연이 미친 사람처럼 카페 밖으로 뛰쳐나왔다.“준희야!”초연은 인파를 헤치고 들어가 준희를 와락 끌어안고 울부짖었다.“엄마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심민철과 이윤정이 뒤따라 1층으로 뛰어내려오자, 초연은 핏발 선 눈으로 두 사람을 가리켰다.“저 사람들이에요! 저 사람들이 내 아들을 밀었어요!”“아니, 세상에 어떤 인간이 어린애한테 저런 몹쓸 짓을 해!”“저건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지!”주변 사람들의 분노에 찬 비난이 쏟아지자, 심민철은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무슨 헛소리야! 지가 밀어 놓고 누굴 원망해!”이윤정 역시 필사적으로 해명했다.“맞아요, 이 여자가 직접 밀었어요.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요.”하지만 이미 비극은 벌어졌고 아이는 추락했다.당시 2층에는 다른 목격자도 없었기에, 사람들은 당장 누구 말이 사실인지 알 길이 없었다.초연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준희를 꽉 끌어안고 오열했다.“내 배 아파서 낳은 내 자식이에요! 내가 내 새끼를 왜 해쳐요!” “당신네 딸 때문에 나를 진혁 씨 곁에서 쫓아내려는 거 다 아는데, 내가 떠나면 될 거 아니에요! 우리 불쌍한 아들은 아무 죄도 없잖아요!”“우리 준희, 제발 무사해야 해! 구급차는 불렀나요? 구급차 좀 빨리 불러줘요!”초연의 절규와 처절한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세상 천지에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엄마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순식간에 군중의 비난은 심씨 부부를 향했다.급기야 누군가 마시다 남은 커피를 두 사람을 향해 냅다 던지기까지 했다.이윤정이 심민철을 막아서는 바람에 그녀의 옷은 온통 커피 얼룩으로 엉망이 되었다.처참해진 아내의 모습과 귓가를 때리는 사람들의 악독한 욕설에, 심민철이 뭐라고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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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화

이담은 비보를 접하자마자 곧장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잿빛이 된 얼굴로 안치실 옆을 지키고 있는 이윤정의 모습이 보였다. 의사들이 아무리 설득해도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심 선생님, 보호자 분이 직접 설득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그곳에 있던 의사들은 동정 어린 시선으로 이담을 바라보았다.의사들이 자리를 뜬 후, 이담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갔다.그 안에 누워 있는 중년 남성. 애증이 교차할 만큼 너무나도 익숙한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이담도 하마터면 무너져 내릴 뻔했다.이담이 시신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병원에는 병사나 사고사 환자, 응급 처치 끝에 결국 목숨을 잃는 환자들이 매일같이 넘쳐났다.하지만 자신의 가족이 죽은 모습을 눈앞에서 마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고통이었다.이담의 가슴이 떨려왔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만, 굵은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어머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거짓말이죠? 저 이혼 못 하게 하려고, 아버지가 저 포기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이러시는 거죠, 그렇죠?”“말 좀 해 봐요, 제발 대답 좀 해 보라고요!”오열하는 이담의 모습에 이윤정도 그제야 깊은 슬픔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눈물범벅이 된 딸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메마른 입술을 천천히 달싹거렸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진짜란다.”이담은 울음을 멈춘 채 한동안 그 자리에 화석처럼 굳어 있었다.얼마 후, 모든 감정을 억누른 이담이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말없이 침묵하는 이윤정의 어깨를 이담이 꽉 움켜쥐었다.“어머니! 빨리 말해 보세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요!”“문, 문초연 짓이야.”이윤정은 참담한 얼굴로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았다.이담은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그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도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이내 이담이 돌아서서 나가려고 하자, 이윤정이 다급히 딸을 붙잡았다.“이담아,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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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화

심민철의 장례 절차를 대략 수습한 뒤, 이윤정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이담은 병원 1층에서 경훈과 마주쳤다.경훈은 차에서 내려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그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집안일은 얘기 들었어.”이담은 잠시 멍할 뿐, 아무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경훈이 이윤정을 향해 가볍게 목례하며 조심스럽게 위로를 건넸다.“어머님, 상심이 크시겠습니다.”이윤정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멍했고 눈은 초점이 없었다. 마치 텅 빈 껍데기만 남은 듯했다.“선배.”이담이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어머니부터 집으로 모셔다드려야 할 것 같아요.”“네 몸 상태도 걱정이 돼. 내 차로 데려다줄게.”이담은 그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경훈이 차를 몰아 두 사람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옆집 이웃이 그 모습을 보고는 심씨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경훈을 이담의 남편으로 착각해 이윤정에게 말했다.“아이고, 윤정아. 사위가 왔네?”‘사위’라는 단어에 이윤정을 돕던 경훈의 손길이 흠칫하며 멈췄다.하지만 지금의 이윤정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웃의 물음에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이담 역시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가 쉬게 할 생각뿐이라, 그 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모녀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웃은 입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표정들이 왜 저래? 꼭 사람이라도 죽은 것 같네.”이담이 이윤정을 부축해 집 안으로 들어갔고, 경훈도 옆에서 일손을 거들었다.침실로 돌아온 이윤정이 그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혼자 조용히 있고 싶구나.”이담은 걱정이 되었지만, 이번 변고가 너무 갑작스러웠던 탓에 지금의 이윤정에게는 정말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어머니, 제가 밖에 있을 테니까 필요하시면 부르세요.”이담은 침실에서 물러나왔다.거실에 서 있던 경훈이 이담을 보며 물었다.“어머님은 좀 어떠셔?”이담이 고개를 저었다.“괜찮으실 거예요.”“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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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화

체면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이숙자는 본색을 드러내며 으름장을 놓았다.“건방진 것! 어디 어른한테 대들어! 그래,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야? 내 뱃속으로 낳은 자식인데 내 마음대로 하는 게 뭐가 어때서!”“오늘 내 아들 몫으로 남은 건 너희가 내놓든 말든 전부 내 거야!”이담은 망설임 없이 이숙자의 뺨을 후려쳤다.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멍하니 굳어버렸다.“네가 미쳤구나!”심민규가 기가 막힌 듯 이담을 노려보았다.“그래, 미쳤다.”과도를 꺼내 든 이담이 비웃으며 사람들을 향해 칼을 겨눴다.“누구든 건드려 봐. 다 찔러 버릴 테니까!”심민규의 안색이 미세하게 변했다.“이담아, 말로 하자. 왜 칼을 들고 그래?”“저런 새파랗게 어린 계집애가 뭘 어쩌겠다고?”강수연이 콧방귀를 뀌며 믿지 않는 듯 비아냥거렸다.“어디 한번 해 봐. 나를 찌를 배짱은 있고?”“제 직업을 잊으셨나 보네요.”이담이 손에 든 칼을 능숙하게 돌리며 싸늘하게 웃었다.“저는 의사예요. 급소는 피하면서도 뼈저린 고통을 느끼게 할 자신이 있거든요. 살아 있으면서도 죽는 것보다 더한 지옥을 맛보게 해드릴까요?”“게다가 여긴 CCTV도 없잖아요. 댁들 말만으로는 증거가 되지도 않을 텐데요. 어디, 큰어머니부터 시작해 볼까요?”이담은 칼을 치켜들고 강수연을 향해 달려들 듯 행동을 취했다.혼비백산해서 뒤로 물러서면서, 강수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잿빛이 되었다.“미쳤어, 쟤 완전히 미쳤어!”“도망쳐! 일단 여길 피하자!”심민규는 정말 사람이라도 죽을까 겁이 났는지 더는 머무르지 못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뒤를 돌아보며 모녀를 애처롭게 바라보던 심하경도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밖으로 나갔다.드디어 영안실 안이 조용해졌다.“이담아.”뒤에서 이윤정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이담을 불렀다.“다 엄마 때문이야. 엄마가 너를 다 망쳤어.”이담은 칼을 내려놓고 이윤정에게 다가갔다.“그런 말씀 마세요. 저를 길러주신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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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화

외부인이 있자 이윤정은 눈물을 닦아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경훈아, 왔어?”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다들 경황이 없으실 것 같아서요.”이윤정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그냥 바로 매장하면 돼. 거창한 의식 같은 건 필요 없어.”하늘에 있는 심민철도 방금 전의 그 꼴사나운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을 터였다.이윤정은 심민철의 유골을 모시고 묘지로 향했다. 그곳에는 딱 네 사람뿐이었다.이윤정과 이담, 경훈, 그리고 경훈의 운전기사가 전부였다.장례는 그렇게 간소하게 끝났다....하씨 가문 본가.진혁은 멍하니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흘 내내 이담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전화 한 통, 문자 한 통 없었다.“하진혁!”이만옥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서재로 들이닥쳤다.“너 미쳤니? 어떻게 그 애를 하씨 가문에 들일 생각을 해!”진혁은 휴대폰을 덮고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그냥 어린아이일 뿐이에요.”“네 자식도 아닌데, 네가 왜 난리야?”이만옥은 분통이 터져 미칠 지경이었다.“뭐야, 네 자식은 낳기 싫으면서 남이 낳은 자식은 그렇게 거두고 싶은 거야?”진혁은 콧잔등을 주무르며 눈을 감았다. 잘생긴 얼굴에는 약간의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잠시 본가에 머물게 하려는 것뿐이에요.”“난 반대야!”진혁이 헛웃음을 쳤다.“어머니가 직접 돌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진혁아, 네가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걔를 하씨 가문에 남겨두면 밖에서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니? 이담이는 또 뭐라고 생각하겠어!”이만옥은 진혁의 머릿속을 열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버지랑 같은 뇌를 공유하는 건지, 생각하는 방식이 똑같았다.진혁은 한 손으로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어머니는 이담이를 싫어하시잖아요.”“이담이 싫은 거랑은 별개야! 난 똑똑히 선을 긋는 사람이야. 걔는 아직 내 며느리라고! 내가 며느리 편은 안 들고 상간녀 편을 들까 봐?”상간녀라는 단어가 거슬렸는지 진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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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화

이담의 눈에 서린 증오를 마주한 진혁의 가슴은 젖은 솜뭉치로 꽉 막은 것처럼 답답했다.몇 분간 팽팽한 대치가 이어진 뒤, 이담의 손목을 쥐던 힘이 스르르 풀렸다.“미안해. 구급차가 늦어질 줄 몰랐어.”늘 자존심 강하고 오만했던 진혁이 고개를 숙이고 사과까지 했다.하지만 모든 게 너무 늦었다.이담은 핏발 선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목구멍 끝까지 울분이 차올랐다. 이담은 헛웃음을 터뜨렸다.“흉통, 뇌졸중 환자가 우선순위라는 거, 당신이 모를 리 없잖아?”“2층, 고작 2미터 높이에서 떨어진 아이가 구급차 몇 분 못 기다려서 심근경색 환자랑 자리를 다퉈야 했어?” “그 몇 분이 우리 아빠한테는 골든 타임이었어! 너희들이 그 황금 같은 시간을 고스란히 앗아간 거야!”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온몸이 떨렸다.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로 어지럽고 아득해져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진혁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황급히 이담을 품에 안았다.“심이담!”“꺼져...”이담은 그의 손길을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진혁을 밀쳐내는 순간, 의식이 점차 흐릿해지면서 바닥으로 쓰러졌다.귓가에 남은 마지막 소리는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였다.7월 말, 새벽 5시. 창밖이 벌써 밝아오고 있었다.이담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 머리맡에 매달린 수액병이었다.익숙한 방의 인테리어와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를 맡고서야, 이곳이 하씨 가문의 민간병원임을 알아차렸다.“깼어?”남자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담이 고개를 돌리자, 진혁이 창가 옆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잡지를 읽고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는 정장 재킷이 걸려 있었다. 밤을 새운 듯 그의 눈가에는 피로가 가득했다.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곁을 지키는 모습에 감동이라도 했을지 몰랐다.하지만 지금 부질없을 뿐이었다.이담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진혁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읽던 잡지를 소파에 던져두고 다가와서 그녀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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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화

변호사는 이혼 합의서를 특급 우편으로 하성그룹에 보냈다. 수신인은 하진혁이었다.특급 우편인 데다 기밀문서이고 수신인이 하진혁인 걸 확인한 프런트 직원이 곧바로 안나에게 서류를 전달했다.문서를 받아 든 안나는 보낸 곳이 남구 로펌이라는 걸 보고 살짝 의아했다.하지만 이런 특급 기밀문서는 대개 본인만 열람할 수 있는 민감한 내용일 테니 이내 호기심을 거두었다.안나는 문서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갔다.“대표님, 남구 로펌에서 문서가 왔습니다.”진혁은 계약서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말에 고개를 들고 손을 뻗어 안나가 건네는 문서를 받았다.봉투를 뜯으려던 찰나,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을 힐끗 보니 병원의 전화였다.전화를 받은 뒤 상대가 뭐라고 말했는지 진혁은 겨우 목소리를 짜내듯 대답했다.“알았어.”통화를 끊은 진혁은 문서를 옆의 의자에 내려놓았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싼 채 관자놀이를 천천히 문질렀다.“사람 시켜서 진경훈 좀 감시해.”안나는 그를 바라보며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이담은 퇴원 수속을 마치고 이윤정과 함께 1층으로 내려왔다. 경훈이 이미 차에 기댄 채 기다리고 있었다.오늘은 하얀 티셔츠 위에 데님 셔츠를 걸쳤고, 핏이 반듯한 검은색 바지 밑단은 마틴부츠 안에 넣었다. 워낙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동안인 데다가, 이렇게 차려입으니 대학생이라 해도 믿을 만했다.이담은 하마터면 경훈을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선배, 여긴 어쩐 일이에요?”“경훈이는 엄마가 불렀어.”이윤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저번에 네 아빠 장례 때 도움을 받은 것도 있고 해서, 내가 집에서 밥 한 끼 대접하기로 했거든.”경훈은 눈썹을 살짝 까딱하면서 두 사람을 위해 차 문을 열어주었다.차는 한적한 길을 달렸다.조수석의 이윤정은 쉬지 않고 경훈에게 사적인 질문을 던졌다. 결혼은 했는지, 여자친구는 있는지, 마음에 둔 사람은 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경훈이 진땀을 흘릴 즈음, 이담이 나서서 상황을 마무리했다.“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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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화

이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경훈도 자연스레 진혁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쳤다.남자들 사이에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아보는 묘한 감각이 있다. 하지만 그 감각이 늘 좋은 의미인 것만은 아니었다.“하 대표님은 병원에서 여자친구 곁을 지키고 계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경훈이 담담하게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물었다.“진 대표님은 저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십니까?”진혁이 경훈 앞에 멈춰 서며 태연하게 내뱉었다.“절반 정도는 안다고 생각합니다.”경훈이 한 발 다가서며 말했다.“적어도 하 대표님께서 아시는 것보다는 많을 겁니다.”“의학 수면 임상 실험. 진 대표님이 진행하는 프로젝트죠.”“그런데요?”경훈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미세하게 굳어졌다.“그냥 궁금해서요.”진혁은 그를 스쳐 지나가며 무표정하게 말했다.“진 대표님의 그 지극 정성에 순수한 호의가 아닌 이용이 얼마나 섞여 있을지 궁금할 뿐입니다.”경훈의 눈동자 속에 미처 알아차리기 힘든 날카로운 기세가 스쳤다.진혁이 이담 앞에 멈춰 섰다.“왜 벌써 퇴원했어?”“당신하고 상관 있어?”이담이 경훈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진혁이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뿌리치려는 순간 강제로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으면서 말했다.“진 대표님, 우리 관계 보이시죠?”이담이 격렬하게 몸부림쳤다.“하진혁!”진혁이 화를 억누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내가 네 남편인데, 왜 다른 남자 편을 들어?”‘남편.’이담이 문득 멈칫했다.다른 사람 앞에서도 자신들의 관계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정말 우습네.’“근데 아무리 봐도 하 대표님이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 같은데요?”경훈의 얼굴엔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시선이 이담을 스치고 지나가며 가볍게 웃었다.“스스로 원해서 나한테 시집왔어요.”진혁이 움켜쥐었던 손을 살짝 풀더니 그녀의 턱을 치켜 올렸다. 엄지로 눈꼬리의 점을 스치듯 문지르며 애정 어린 듯 매만졌다.“이게 강요예요?”그의 손을 쳐낸 이담이 웃음기 없는 굳은 표정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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