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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1화

심성빈은 최로운의 말뜻을 충분히 이해했다.차정원이 총에 맞아 바다에 추락했고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맸지만 아무런 소식조차 없었다.사실 그들 모두 차정원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내심 짐작하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하고 싶었을 뿐이었다.최로운은 심성빈이 송하나에게 얼마나 깊은 마음을 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는 심성빈에게 묻고 싶었다. 앞으로 어떤 신분으로 그녀 곁을 지킬 거냐고.그저 고인의 부탁을 받아 단순히 송하나를 돌볼 것인지, 진정으로 그녀와 함께할 생각은 없는지 묻고 싶었다.심성빈의 눈빛이 희미하게 가라앉았다. 창밖을 향한 시선은 다정하면서도 절제되어 있었고 말투도 덤덤할 따름이었다.“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하나의 안전을 지키는 거야.”그는 확실히 송하나를 무척 사랑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참고 절제하며 감히 딴마음을 품지 않았다.남의 불행을 이용할 수는 없으니까.나중에 일은 나중에 맡기면 될 터, 심성빈은 너무 멀리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최로운은 그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다.심성빈의 태도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으니까.설령 아무런 명분도 없이 평생 결혼하지 못한 채로 지낸다 해도 그는 기꺼이 그 길을 갈 사람이었다.차설아와 최로운은 별장에서 며칠간 머물렀다.송하나와 차설아는 매일 소소한 일상을 나누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며칠 뒤, 국내에서 연락이 왔는데 차설아의 딸 이솔이가 갑자기 열이 심하게 올라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다는 소식이었다.차설아는 마음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결국 항공권을 예약하고 서둘러 돌아갈 채비를 했다.작별을 앞두고 그녀는 송하나의 손을 꼭 잡고 눈시울을 붉혔다.“하나야, 나 이제 돌아가야 해. 이솔이가 아파서 가서 돌봐줘야 할 것 같아.”송하나도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얼른 가봐. 아이가 중요하지.”차설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송하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다.헤어지기 싫은 마음에 눈물이 차올라 눈가가 시큰거렸다.그때 최로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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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2화

송하나가 잔혹하게 감금당하고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며 온갖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이강우의 성격에 결코 좌시할 리가 없다.그가 오랫동안 숨죽여 잠복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 상업적인 포위 작전을 통해 빅토르의 산업 기반을 뿌리째 흔들고 그에게 뼈아픈 대가를 치르게 할 속셈일 것이다.이렇게 되면 복수의 길에 심성빈 역시 든든한 동맹을 하나 더 확보하게 되는 셈이었다.“알았어.”심성빈이 담담하게 손을 흔들었다.“일단 나가봐. 새로운 진전이 있으면 즉시 보고하고.”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심성빈의 극진한 보살핌과 꾸준한 심리 치료 덕분에 송하나의 상태는 몰라보게 안정되었고 귀국하고 싶다는 열망은 날이 갈수록 짙어졌다.그녀는 종종 턱을 괸 채 심성빈에게 물었다.“성빈 씨, 우리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까요? 설아가 너무 보고 싶어요.”송하나의 눈동자에 맺힌 간절함을 보며 그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심성빈은 하던 일을 빠르게 정리하고 그녀와 함께 귀국길에 오를 준비를 마쳤다.마침 그 역시 이강우와 논의하고 싶은 일이 몇 가지 있었다.송하나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차설아는 기쁜 마음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강현 공항.차설아는 딸 최이솔과 남편 최로운을 대동하고 일찌감치 마중을 나왔다.드디어 그토록 기다리던 익숙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차설아는 망설임 없이 이솔이를 최로운에게 넘기고 송하나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하나야!”송하나도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설아야, 드디어 다시 만났네!”둘은 한참을 그렇게 껴안고 나서야 서로를 놓아주었다.문득 송하나는 최로운 품에 안긴 최이솔이 눈에 들어왔다.두 살배기 이솔이는 귀여운 양 갈래 머리를 묶고 우유처럼 뽀얀 피부에 머루알 같은 눈동자까지 지녀서 인형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웠다.송하나는 이솔이에 대한 기억들이 있었지만 마치 퍼즐 조각처럼 군데군데 비어서 도통 연결되지 않았다.심성빈은 그저 익사 사고 후유증으로 기억이 파편화된 것이니 꾸준히 요양하면 점차 회복될 것이라고 설명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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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3화

그 시각, 공항 반대편 출국장.이강우는 긴 해외 일정을 마치고 막 강현으로 돌아왔다.꼿꼿한 자세에 짙은 색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차분한 걸음으로 밖을 향해 걸어갔다.뒤따르던 비서가 캐리어를 밀며 흐트러짐 없이 업무를 보고했다.그러다 문득 이강우의 발걸음이 멈췄다.끊임없이 오가는 사람들 틈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송하나를 단번에 발견했다.그녀 역시 막 귀국한 모양이었다.곁에는 심성빈이 있었고 마중 나온 최로운과 차설아도 보였다.수개월 만에 마주한 그녀, 이강우의 눈가가 자신도 모르게 붉게 물들었다.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참담했던 시절은 두 번이었다.첫 번째는 송하나와 이혼한 직후, 매일 술에 절어 살다 결국 병원까지 실려 가 입원을 하고 말았다.두 번째는 차정원과 함께 그녀의 유해를 안고 외국에서 돌아오던 그때였다.송하나가 ‘세상을 떠났다’라고 믿었을 때, 그 역시 넋이 나간 채로 텅 빈 껍데기만 남은 기분이었다.나중에 그녀가 살아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감히 먼저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멀리서 본 그녀는 여전히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청초하고 다정했으며 눈매는 예전 그대로였다.세월이 흘러도 처음 본 그 순간처럼 여전히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만드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그러나 동시에 예전과는 미묘하게 달랐다.큰 병을 앓고 난 뒤의 가냘픔과 눈가에 서린 옅은 공허함이 도드라져 보였다.조금 전, 최이솔의 무심한 한마디에 고통스러워하며 초점을 잃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이 옥죄어 왔다. 촘촘한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전신을 덮쳤다.이강우는 그녀의 지난 고생이 안타까웠고, 겪었던 시련이 마음 아팠으며, 무엇보다 그녀의 연약해진 몸이 더없이 애처로웠다.송하나를 사랑하지만,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시간이 흐를수록 그 마음이 줄어들기는커녕 더 깊고 진해졌다.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송하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장본인으로서 감히 다가갈 자격이 없었다.“대표님? 대표님?”한참을 보고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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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4화

차설아와 송하나가 현관으로 들어서자 가정부가 곧바로 마중 나왔다.“사모님, 말씀하신 식자재들 전부 준비해 두었습니다.”“네, 알겠어요. 거기 두세요.”차설아가 주방으로 향하려 하자 송하나가 돕겠다며 뒤를 따랐다. 다만 차설아는 손사래 치며 얼른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하나야, 넌 여기 앉아서 쉬어. 나 혼자면 충분하니까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기대해, 음식 무조건 맛있을 거야!”차설아가 자신만만하게 윙크까지 날리자 송하나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가정부가 내온 다과와 과일을 곁에 두고 송하나는 소파 쿠션에 몸을 기댔다.거실은 고요했고 통유리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유난히 따스했다.노곤함이 몰려온 송하나는 푹신한 쿠션에 몸을 기대고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그 시각, 주방에서는 차설아가 전쟁이라도 치르듯 요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칼질 소리와 도마 소리, 프라이팬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잠시 후, 완성된 요리를 식탁에 차려내고 송하나를 부르려던 참인데 거실 쪽을 본 순간, 손에 든 접시를 떨어뜨릴 뻔했다.소파에서 깊이 잠든 송하나의 손목 위로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솜사탕처럼 하얗고 몽글몽글한 토끼가 깡충깡충 뛰어와 킁킁거리며 그녀의 손을 핥고 있었으니까.차설아는 정말이지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뭉치야!’이 토끼는 차정원이 송하나에게 선물한 거라 그녀가 세상 무엇보다 아끼던 반려동물이었다.차정원이 출국하기 전, 특별히 차설아에게 부탁하며 맡겨두었던 녀석 뭉치였다.그동안 차설아는 뭉치를 애지중지 돌봐왔다.하지만 송하나가 이 토끼를 보는 순간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고통스러워할까 봐 미리 가정부에게 단단히 일러두었었다. 뭉치를 방에 가두고 관련된 물건도 전부 치우라고 말이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틈이 생겼단 말인가.차설아는 서둘러 접시를 옆에 있던 가정부에게 떠넘기고는 낮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쏘아붙였다.“내가 잘 단속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또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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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5화

송하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숙여 그릇에 담긴 음식을 한 입 맛보았다.차설아의 요리 실력은 그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송하나는 두 눈을 반짝이며 놀란 듯 칭찬을 남발했다.“설아야, 너 요리 실력 언제 이렇게 늘었대? 완전 맛있어!”차설아는 거침없고 진솔한 그녀의 칭찬에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고 눈가에도 자신감이 차 넘쳤다.“내가 누구야? 꽤 오래 배웠어. 우리 하나 간만에 돌아왔는데 실컷 먹어.”그녀는 말하면서 쉴 새 없이 송하나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 한 상 가득 차린 음식은 전부 차설아의 시그니처 음식이었다.그 시각, 소란스러운 강현 도시 한복판에서 고요함을 찾아낼 수 있는 최상급 프라이빗 라운지에서 심성빈과 이강우가 만나기로 약속했다.심성빈은 최로운과 함께 먼저 도착해 찻잔을 들고 담담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분한 표정만으론 그의 속내를 좀처럼 가늠하기 어려웠다.최로운은 딸 최이솔을 안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꼬맹이는 아빠 품에 꼭 안겨 오물오물 과자를 먹었다. 볼이 빵빵해지고 입 주변에 과자 부스러기가 잔뜩 묻은 아기의 모습은 말랑말랑하고 귀여울 따름이었다.잠시 뒤, 웨이터가 가볍게 문을 열자 이강우가 안으로 들어섰다.그는 깔끔하게 재단된 짙은 색 양복을 입고 훤칠한 몸매를 뽐냈으며 주변에 차가운 기운을 풍겼다.최로운이 그를 보자 재빨리 아이를 안고 일어나며 웃는 얼굴로 아이스 브레이킹에 나섰다.“강우 드디어 왔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우리 이솔이가 과자 한 접시를 다 먹어버릴 판이야. 빨리 앉아!”최이솔은 여전히 과자를 반 조각 물어서 볼이 빵빵했다. 아빠의 말을 듣자마자 아이는 커다란 두 눈을 반짝이며 어눌한 발음으로 나긋하게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본래 차갑고 딱딱한 표정을 지니던 이강우는 아이의 부드럽고 순수한 모습 앞에서 미간이 풀리기 시작했다.“그래, 이솔아.”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다정하게 대답했다.말투에 평소와 다른 은근한 온기가 묻어났다.인기척 소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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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6화

최로운은 누구보다 잘 안다. 심성빈이 오늘 일부러 이강우를 부른 이유는 분명 중요한 일이 있을 터였다.자신이 아이를 데리고 여기 있으면 결국 거치적거리기만 할 것 같았다.최로운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었다.“둘이 천천히 먹어. 난 이솔이 데리고 나가서 잠깐 돌아다녀야겠어. 애가 룸에 오래 있으니까 자꾸 떼쓰네.”말을 마친 후 그는 이내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방 안이 다시 조용해지자 심성빈은 아까의 여유로운 태도를 거두고 이강우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요즘 해외에서 대대적으로 판을 짜고 있다면서? 손대는 분야마다 빅토르의 핵심 사업과 상하류 공급망이더라.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벌이는 거 하나를 위해 복수하려는 거지?”이강우는 전혀 숨기거나 부인하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맞아.”“나도 최근에 계속 빅토르의 범죄 증거를 모아 왔어. 한 번에 치명타를 날려서 완전히 무너뜨리려던 참이야.”심성빈의 눈빛이 가라앉으며 먼저 협력을 제안했다.“빅토르 그 자식은 교활하고 의심이 많아. 게다가 자기 영역에서 뿌리가 아주 깊은 인물이라 혼자 덤비기엔 손실이 너무 커. 우리 이참에 손잡는 게 어때?”이강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답했다.“좋아.”이 대답을 끝으로 두 남자의 협력이 확정됐다.심성빈은 그가 여전히 송하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그게 아니면 이토록 막대한 자금과 인맥, 에너지를 쏟아붓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신의 사업이 큰 타격을 입는 것도 감수하며 빅토르를 무너뜨리려 하지 않았을 테니까.심성빈은 그가 이번 만남을 계기로 송하나의 근황을 묻거나 심지어 만나자고 할 줄 알았다.만약 이강우가 진짜 입을 연다면 심성빈 또한 그녀를 대신해서 거절할 자격 같은 건 없다.이강우는 그녀의 전남편이니까.반면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된 명분조차 가진 적이 없었다.그러나 대화 내내 이강우는 극도로 절제하며 송하나에 관한 말은 단 한 글자도 꺼내지 않았다.최로운이 최이솔을 데리고 바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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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7화

차가 심씨 저택 입구에 부드럽게 멈춰 서자 가정부가 곧장 달려와 능숙하게 차 키를 건네받았다.“오셨어요, 도련님.”심성빈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침착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섰다.그의 어머니 고여진이 인기척을 듣고 방에서 나왔다. 아들 얼굴에 시선이 닿자마자 말투에는 걱정과 애틋함이 가득했다.“또 살이 빠졌구나. 해외에서 매일 일만 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거 아니니?”“저 잘 지내요, 어머니.”심성빈은 낮은 목소리로 짧게 답하며 어머니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심용군이 한창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손엔 자사 찻잔이 들려 있었고 표정은 차분하면서도 가장의 무게감과 위엄이 자연스레 풍겼다.아들이 들어오는 걸 보자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왔어? 이리 와서 바둑 한판 두렴.”“네, 아버지.”심성빈은 순순히 맞은편에 앉아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를 마주했다.몇 수를 둔 뒤에야 심용군이 입을 열었다.“해외 사업이 꽤 잘 풀린다던데 까다롭던 프로젝트 몇 개가 올해 무난히 착공됐더구나.”심성빈은 멈추지 않고 바둑을 두면서 태연한 표정으로 답했다.“그럭저럭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별다른 차질 없이 넘어간 정도라 내세울 만큼 대단한 건 아닙니다.”이때 고여진이 과일 접시를 들고 오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눈가에는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너희 아빠 종일 국제 뉴스만 챙겨 보셔. 네 회사에 새로운 사업을 벌이거나 프로젝트를 따냈다는 소식만 뜨면 어린애처럼 좋아하시는 거 있지. 뒤에서 항상 ‘젊은 시절의 나보다 배짱도 실력도 낫다’라고 칭찬하느라 입이 마를 지경이야.”심용군은 여전히 무게 잡힌 표정이었으나 눈구석엔 숨기지 못한 흐뭇함이 번졌다.잠깐의 스몰 토크가 오간 뒤, 고여진이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그녀는 아들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말투로 권했다.“성빈아, 해외 사업도 이제 안정됐으니 결혼도 슬슬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가 되지 않았어?”심성빈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는 건성으로 넘겼다.“요즘 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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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8화

심용군과 심성빈, 두 부자지간의 분위기가 점점 더 팽팽해지자 고여진이 급히 끼어들었다.“됐어요. 다들 그만해! 성빈이가 모처럼 돌아왔는데 온 가족이 화목하게 지내야지 보자마자 싸우는 게 어디 있어요? 맞선 얘기는 나중에 해요. 당장 급한 것도 아니니까.”심용군은 얼굴을 굳힌 채 콧방귀를 뀌더니 바둑 둘 흥미를 완전히 잃고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거실은 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심성빈의 어머니 고여진이 옆에 앉아 아들의 차갑고 냉랭한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말을 꺼내려다 삼키길 반복했고 마침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성빈아, 엄마는 다 알아. 네가 그때 고집스럽게 해외로 나간 거 말로는 사업 확장이라고 해도 실은 그 여자애 원인이 더 컸잖아. 그 애를 완전히 잊으려고 떠난 거 아니야.”심성빈의 등줄기가 미세하게 뻣뻣해졌다. 그는 시선을 내리고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다.“이제 시간도 꽤 지났으니 아무리 깊은 미련이라도 내려놓을 때가 됐어. 앞을 보고 살아가야지. 평생 과거에 얽매여 살 순 없잖니.”고여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솔직히 그때 네가 그 아이랑 맺어지지 못한 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라. 너희 아빠는 워낙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분이라 집안 체면이랑 격식, 이런 걸 목숨처럼 여기실 게 뻔해. 이혼한 여자는 절대 우리 집안 문턱도 못 넘게 할 거다.”“게다가... 그 아이는 네 소꿉친구 강우랑 결혼까지 했었어. 얽힌 게 너무 많아서 구설에 오르기 십상이야. 너희 두 사람은 안 어울리는 것 같아, 성빈아. 이 일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널 어떻게 보겠니? 우리 집안을 뭐라 평가하겠어?”고여진은 이 말들을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다가 오늘에서야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한마디 한마디가 현실적이고 가혹할 따름이었다.심성빈은 여전히 시선을 내리깔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와 송하나는 애초에 정식으로 함께한 적도 없었다. 예전 같으면 심성빈은 이런 시시콜콜한 세상의 잣대나 집안의 차별, 남들이 수군거림 따위 신경을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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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9화

고여진의 추진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행여나 아들 심성빈이 마음을 바꿀까 봐 맞선을 다음 날 오전으로 잡아버렸다.같은 날, 차설아는 송하나와 쇼핑을 하기로 약속했다.심성빈이 차를 몰아 시내 중심가에 있는 백화점까지 데려다주었다.차가 막 멈추자 최로운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고 차설아가 안에서 내렸다.심성빈은 안전벨트를 풀고 손을 뻗어 송하나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가봐. 설아랑 재밌게 놀다 와.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다 사. 일 끝나는 대로 바로 데리러 올게.”송하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차에서 내린 그녀는 차설아에게 달려가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백화점으로 들어갔다.한편 최로운은 차설아를 보내고 돌아서서 심성빈 차 옆에 기대서며 흥미진진한 눈길로 물었다.“마음 정했어? 진짜 선보러 갈 거야? 대충 핑계 둘러대고 안 갈 줄 알았는데.”심성빈의 시선은 송하나가 사라진 방향에 머물러 있었고 말투는 한없이 담담했다.“한 번은 피할 수 있어도 평생 피할 순 없어. 지금 안 가면 끝도 없이 자리를 만드실 분들이야.”최로운은 단번에 그의 깊은 속내를 꿰뚫으며 핵심을 짚었다.“너 혹시 부모님이 네 사생활을 캐다가 결국 송하나 씨 존재까지 알아낼까 봐 겁나는 거지?”심성빈은 부정하지 않았다.시선을 거두고 최로운을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오늘 일은 절대 하나한테 말하지 마.”“걱정 마.”최로운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대답했다.“나만 믿어, 친구야.”최로운과 헤어진 뒤, 심성빈은 방향을 틀어 맞선 약속 장소인 카페로 향했다.가는 도중에 고여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목소리엔 당부가 가득했다.“성빈아, 출발했어? 백지유 그 아이 내가 직접 만나봤는데 교양 있고 참해. 외모며 분위기까지 얼마나 출중한지 몰라. 이따 만나면 얘기 잘 나누고 좀 적극적으로 다가가. 내내 무뚝뚝한 얼굴만 하지 말고, 알겠지?”심성빈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무표정하게 알겠다며 대답했다.잠시 후 차가 목적지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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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0화

몇 차례 대화가 오간 뒤, 백지유는 속으로 감탄했다.심성빈은 그녀가 선을 본 이래 가장 출중한 상대였다.침착하고 절제된 태도에 말에는 깊이가 있었고 사고는 명쾌했으며 제스처마다 격조와 교양이 묻어났다.허세만 부리는 재벌 2세들과는 차원이 다른 남자였다.커피가 반쯤 비워졌을 때, 카페 문이 벌컥 열렸다.곧이어 덩치 큰 외국인 남성이 잔뜩 험악한 얼굴로 성큼성큼 들어와 그들 테이블로 향했다.그는 다짜고짜 백지유를 손가락질하며 어눌하면서도 서툰 말투로 질문을 쏘아붙였다.“내 아이를 가졌으면서 몰래 선보러 나와?”안 그래도 손님이 드문 카페였는데 그 한마디 외침으로 순식간에 정적을 깼다.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꽂혔고 호기심과 궁금증이 뒤섞인 눈빛들이 일제히 쏟아졌다.백지유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눈동자에 당혹감이 스쳤으나 금세 평정심을 가장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반박했다.“이봐요. 난 그쪽이랑 전혀 엮인 적도 없는데 여기서 소란 피우지 마세요!”“뭐? 엮인 적이 없어?”외국인 남성은 감정이 격해져 한 발 더 다가서며 백지유의 팔을 잡아끌려 했다. 태도는 오만했고 강제로 끌고 갈 기세였다.“내 아이를 가진 채로 싱글인 척 선을 봐? 너 오늘 제대로 잡혔어. 나와 당장!”그의 손이 백지유의 소매 끝에 닿으려는 바로 그 순간, 길고 단단한 팔이 불쑥 튀어나와 남자의 움직임을 가로막았다.심성빈은 침착한 얼굴에 냉기 서린 분위기로 그 남자를 흔들림 없이 막아섰다.제대로 막혀버린 외국인 남성이 악에 받쳐 심성빈을 노려보며 비웃음과 도발이 섞인 목소리로 일부러 이간질했다.“이봐요, 얘 어떤 년인지 알아요? 지금 그쪽 호구로 보고 자기 애까지 떠넘기려는 수작이에요. 내 애를 배고서 감히 싱글인 척 선을 보다니! 이런 년한테 절대 속지 마세요.”백지유는 순순히 고개를 숙였고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목소리엔 일부러 꾸민 억울함이 실렸다.“헛소리하지 말라고요. 저 그런 적 없어요...”겉으로는 무력해 보이는 변명이었지만 실상은 아무런 설득력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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