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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1화

아침이 되자 계연수는 일찍 눈을 떴다. 오늘은 심씨 노부인께 조금이라도 일찍 문안을 드리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그녀는 심서준을 깨우지 않으려 조심조심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허리를 감고 있는 그의 팔이 너무 단단했다. 몇 번 슬그머니 빼 보아도 꿈쩍도 하지 않자,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를 살짝 밀었다.그런데 밀다 보니 심서준의 몸이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계연수가 고개를 들자 아니나 다를까, 심서준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오늘은 절대 늦장을 부릴 수 없었기에 계연수는 황급히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심서준은 평소라면 무슨 일이든 느릿느릿하던 그녀가 오늘따라 토끼보다 빠르게 도망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그녀가 한동안 풍한을 앓은 탓에 두 사람은 꽤 오래 가까이하지 못했다. 게다가 오늘은 마침 휴무일이었다. 그는 본래 계연수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일이란 것이 끝내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심서준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계연수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모처럼 얻은 한가한 시간이 방해받은 것이 불쾌할 뿐이었다.결국 그는 계연수를 따라 일어나 함께 심씨 노부인께 문안을 드리러 갔다. 그 길 내내 얼굴은 끝까지 어두웠다.오늘 심씨 노부인의 처소는 유난히 떠들썩했다. 심태숙을 비롯해 큰방의 젊은 식구들까지 모두 와 있었다. 큰도련님과 둘째 도련님, 아가씨들도 빠짐없이 자리하고 있었다.마침 휴무일이라 관청에 나갈 필요도 없었고, 심정우가 공을 세운 덕분에 모레 경축연까지 열릴 예정이었다. 오전에는 맞은편 큰아버지 댁 사람들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기로 되어 있어, 방 안의 분위기는 한껏 들떠 있었다.계연수는 안으로 들어서자, 웃음을 머금고 공손히 문안을 올렸다. 이 집안의 경사스러운 분위기를 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서준은 여전히 차갑고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가 들어선 순간, 방 안을 가득 채우던 들뜬 기운마저 조금 가라앉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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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2화

심태숙은 심서준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괜한 일을 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상대가 자신에게까지 찾아와 부탁한 데다, 술기운에 머리가 흐려진 탓에 덜컥 들어주겠다고 해 버렸을 뿐이었다.그는 더는 캐묻지 않고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심서준은 잠시 앉아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심씨 노부인이 그를 불러 세웠다.“모처럼 집에 있는 날인데, 조금 더 앉아 있다 가면 어디가 덧나느냐?”애초에 오늘 그가 집에 남은 것도 계연수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모든 일을 미리 정리해 두었건만, 정작 계연수는 바빠져 버렸다. 아직 마음 한구석에 가라앉지 않은 불쾌함이 남아 있던 심서준은 관아에 들러야 한다는 말만 남기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심씨 노부인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속이 답답해 숨까지 막힐 지경이었다.저 아들이 언제 한 번 살갑게 군 적이 있었던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다정한 말 한마디를 건넨 적이 없었다. 그나마 며느리라도 고분고분하고 살가우니 망정이지, 며느리까지 심서준 같은 성정이었다면 자신은 도저히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그러면서도 방금 심서준이 계연수의 뒷모습을 따라가던 눈빛을 떠올리자, 또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심서준은 밖으로 나온 뒤 본래 관아로 가 공무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 서재로 향했다.그는 한곳에 멈춰 서서, 구석에 놓인 그림 상자에 누군가 손댄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이곳은 본래 아무나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수많은 깊은 밤, 심서준이 홀로 머물던 장소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구석에 두었던 그림을 하필 계연수가 보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그녀가 대체 어디까지 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림 속 많은 장면들은 그가 계연수를 구한 뒤 꿈속에서 보았던 모습들이었다. 그 꿈들을 잊지 못해 화폭에 남긴 것이었다.사실 심서준은 계연수에게 이 그림들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한때 그녀를 두고 남에게는 결코 드러낼 수 없는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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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3화

계연수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저녁은 심씨 노부인의 처소에서 함께 들었다. 심씨 노부인은 오늘 하루 백씨에게 무엇을 배웠는지 하나하나 물었고, 계연수는 그 대화를 나누며 노부인의 속뜻을 어렴풋이 깨달았다.노부인은 앞으로 자신을 중용해, 조금씩 집안 살림을 맡기려는 듯했다.다행히 계연수의 대답도 심씨 노부인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녀를 대하는 태도도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방으로 돌아오니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하지만 계연수는 손에서 명단을 놓지 않았다. 백씨에게 받은 연회 초대 명단이었다.오늘 밤 안으로 한 번은 꼭 훑어볼 생각이었다. 어느 집안에 누가 있는지 정도는 미리 익혀 두어야 했으니까. 이제 자신은 심씨 가문의 둘째 며느리였고, 손님을 맞이하고 인사를 나누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역할이었다. 정작 연회에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해 난처한 상황이 생겨서는 안 됐다.*방 어멈에게 들으니 심서준은 아직 서재에 있다고 했다.그녀는 괜히 그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계연수는 원래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지만, 맞은편에 누군가 앉아 있으면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혼자 안채로 들어가 작은 온돌 탁자 앞에 자리를 잡았다.뒤따라온 방 어멈이 다과와 보양탕을 준비해 두었다며, 먹을 것인지 묻자 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후작께도 부인께서 돌아오셨다고 전할까요?”계연수는 손을 내저었다.“아니다. 부군께서도 바쁘실 텐데 괜히 방해하지 말거라.”*한편, 서재를 나온 심서준은 곧장 안채로 향했다.걸음을 멈춘 채 발을 걷어 올리자, 희미한 등불 아래 앉아 있는 계연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찹쌀떡을 한 손에 든 채 온돌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책자를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었다.얼굴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가끔 생각난 듯 찹쌀떡을 한입 베어 물 뿐, 시선은 줄곧 책장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심서준은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계연수가 자신의 서재에서 그림을 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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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4화

계연수의 눈앞은 어느새 심서준의 그림자와 은은한 침향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정신이 몽롱해진 채 한참을 넋 놓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였다. 어느새 그녀는 심서준의 품에 안긴 채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심서준은 명단을 몇 장 넘겨 훑어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갔다.“이 집안은 우리와 왕래가 잦고, 여기는 적당히 예만 갖추면 된다.”그의 목소리는 특유의 낮고 깊은 울림을 머금고 있었다. 서두르는 법 없이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했고, 두 집안 사이에 얽힌 사정까지 곁들여 이야기해 주니 복잡한 관계도 어렵지 않게 머릿속에 들어왔다.한참 설명을 마친 심서준은 명단을 탁자 위에 툭 던져 놓았다.“네가 기억해야 할 건 왕래가 잦은 서너 집뿐이다. 나머지는 굳이 외울 필요 없다. 설령 기억하지 못해도 그쪽에서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할 테니까.”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계연수를 내려다봤다.“설마 이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외우겠다고 밤을 새울 생각은 아니겠지?”계연수는 멍하니 심서준을 올려다봤다.등불 아래 비친 그의 얼굴은 밝음과 어둠이 반씩 드리워져 있었지만, 무심한 말투조차 이상하리만치 따뜻하게 느껴졌다.그는 직접 명단을 봐 주고, 곁에 앉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고요한 밤이 깊어 가는 동안에도 귀찮은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복잡한 집안 관계를 몇 마디 말만으로 알기 쉽게 정리해 주었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괜히 애쓸 필요는 없다고 말해 주었다.그 순간, 계연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부군께서는 왜 저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주세요?”계연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혼인 전에는 심서준이 자신에게 이렇게 다정할 사람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함께 살기 시작한 뒤의 그는 그녀가 알고 있던 사람과는 조금 달랐다.가끔씩 무심한 얼굴 사이로 스쳐 가는 다정한 눈빛 하나에도 가슴이 뛰었고, 어느새 그에게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까지 생겨났다.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그래서 심서준이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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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5화

심서준은 자신이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그는 계연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넌 내 부인이다. 그러니 난 너한테만 잘해 줄 것이다.”그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반박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계연수의 마음 한구석에는 이유 모를 서운함이 잔잔하게 번져 갔다.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심서준의 품에 살며시 기대었다. 지금의 표정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그런데 막 고개를 숙인 순간, 몸이 다시 한 번 휘청하며 시야가 빙글 돌았다. 어느새 심서준에게 눕혀진 채 그의 아래에 깔려 있었다.짙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을 마주한 계연수는 더 이상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며칠을 한 침상에서 함께 지내며, 그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뜨거운 숨결이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심서준의 낮게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연수야. 우리, 꽤 오래 참지 않았느냐.”계연수의 볼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그녀는 그의 가슴을 살짝 밀며 머뭇거렸다. 오늘 하루만 해도 백씨를 따라 집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워낙 저택이 넓다 보니 몇 번 오간 것뿐인데도 온몸이 무겁게 지쳐 있었다.게다가 내일도 하루 종일 바쁠 예정이었고, 모레 열릴 연회까지 생각하면 쉴 틈이 없었다. 심서준처럼 아무리 움직여도 지칠 줄 모르는 사람과는 달랐다.하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짙은 눈빛을 마주하자 거절의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잠시 망설이던 계연수는 결국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허락이 떨어지자 심서준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익숙한 손길은 자연스럽게 허리끈으로 향했다.찹쌀떡의 은은한 단내가 배어 있는 그녀의 입술은 한 번 닿을수록 쉽게 떼어낼 수가 없었다. 입맞춤은 목덜미를 따라 천천히 이어졌고, 그녀의 몸에 손이 닿을 때마다 그는 좀처럼 이성을 붙잡기 어려웠다.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늘 부족하다는 생각뿐이었다.허리끈이 풀리자 벌어진 옷깃 사이로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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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6화

계연수는 원래 어젯밤 제 말을 듣지 않은 일을 두고 심서준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그의 진심을 듣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다시 따뜻해졌다.*심서준은 더는 덧붙일 것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먼저 나갔다.계연수도 몸단장을 마친 뒤 앞채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손님들은 오지 않았지만,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할 일이 적지 않았다.심씨 노부인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계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형수 곁에서 잘 배워 두거라. 네 형수가 이 집안 안팎을 여러 해 동안 도맡아 왔으니, 네가 배울 것이 많을 게다.”계연수는 공손히 대답했다.백씨는 드물게 별말 없이 조용했다. 문안 인사를 마친 뒤에는 계연수를 데리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이미 칠월이라 그런지, 이른 아침인데도 더위가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계연수는 백씨를 따라 이곳저곳을 살피며 준비를 돕다 보니 어느새 몸에 땀이 배었다.오전이 반쯤 지났을 무렵, 일찍 도착한 친족들도 하나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심씨 노부인 쪽 친척과 백씨의 친정인 영국공부 사람들, 그리고 심씨 본가 쪽 사람들이 먼저 와 화청으로 들어가 심씨 노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런데 계연수가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큰 외숙모와 둘째 외숙모가 고하운, 고하영을 데리고 온 것이다. 심지어 외조모까지 함께였다.그리고 그녀의 어머니 고씨가 외조모를 부축한 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그때 백씨가 계연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고씨 집안은 네 친정 식구들이니 당연히 초대해야지. 게다가 네 어머님도 아직 우리 어머님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신 적이 없잖니. 오늘이 서로 얼굴을 뵙고 이야기 나누기엔 딱 좋은 기회다. 예전에도 어머님께서 고씨 집안을 따로 초대한 적이 있으셨으니, 그만큼 좋게 여기신다는 뜻이지.”계연수는 고개를 돌려 백씨 얼굴에 떠오른 웃음을 바라보았다.사실 고씨 집안 사람들을 초대한 것 자체는 정이나 예의로 보아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와 큰 외숙모 집안 사이에는 말 못 할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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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7화

고씨 노부인의 말에 계연수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어린 시절의 추억은 분명 소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모든 것이 너무도 낯설게 변해 버린 것 역시 세월의 무상함이었다.잠시 침묵하던 계연수는 선뜻 대답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돌렸다.“여기서 계속 서서 이야기하기도 그러니, 우선 화청으로 들어가 앉아서 말씀 나누시죠.”그때 옆에 있던 큰 외숙모 장씨가 불쑥 끼어들었다.“연수야, 네 셋째 사촌 여동생도 이제 혼담이 오갈 나이가 됐다. 너는 지금 심씨 가문에 시집와 인맥도 넓어졌으니, 혼처 하나 알아봐 줄 수는 없겠느냐?”계연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고씨 노부인이 먼저 장씨를 나무랐다.“지금 그런 말을 꺼낼 때냐? 연수가 심씨 가문에 시집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런 부탁을 하느냐. 아직 자리도 완전히 잡지 못했는데 뭘 그리 서두른단 말이냐.”장씨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조급한 게 아니라, 하운이 혼사가 더는 늦어질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곧 열다섯이 되잖아요.” “심씨 가문이 평남후부와 가까운 사이라면서? 듣자 하니 평남후부 세자도 아직 혼인을 안 했다던데, 하운이를 평남후부 큰부인께 한 번만 소개해 줄 수 없겠느냐?”계연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뜬금없이 하운이를 데리고 최씨 큰부인을 찾아가는 것부터가 실례예요. 게다가 큰 외숙모께서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평남후부 세자는 가문도 뛰어나고 폐하의 총애까지 받는 분이에요. 경성에 그 혼처를 바라는 규수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평남후부에서 왜 하필 고씨 집안을 선택하겠어요?”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애초에 저와 최씨 큰부인의 사정이 그리 각별한 것도 아니고, 설령 가까운 사이라 해도 마찬가지예요. 친분을 믿고 사람을 억지로 밀어 넣는다면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괜한 부담만 드리는 일이죠.”계연수는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순간 장씨의 표정이 굳어졌고, 고하운의 얼굴도 함께 굳어졌다.고씨 노부인은 차가운 눈빛으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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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8화

장씨는 유씨의 말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이를 악물 뿐 끝내 화를 터뜨리지는 못했다.계연수는 오늘 같은 날 친정 식구들끼리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런 이야기는 집에 돌아가서 따로 하세요. 괜히 남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면, 체면을 구기는 건 저 하나만이 아니에요.”심씨 가문에 시집온 뒤의 계연수는 전과는 달랐다.말투에는 어느새 안주인의 기품이 배어 있었고, 담담하면서도 엄중한 표정에서는 심서준을 닮은 위엄마저 느껴졌다.장씨는 괜스레 민망해졌다. 이제는 계연수를 함부로 대할 수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하운은 말없이 계연수를 바라보다가 손을 꼭 움켜쥐었다.계연수는 다시 두 외숙모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오늘은 귀한 손님들이 많이 오셨어요. 괜히 누구와 친분을 쌓겠다고 따라다니며 눈도장을 찍으려 하지 마세요. 그런 모습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좋지 않게 비칠 뿐이에요. 정말 셋째와 넷째 사촌 동생의 혼사를 생각하신다면, 오히려 당당하게 행동하시는 편이 낫습니다. 괜히 누구에게 아첨하거나 비위를 맞추려 하지 마세요. 그 편이 훨씬 좋은 인상을 남깁니다.”“심씨 가문과 교류하는 명문가들은 어느 집이나 고씨 가문보다 가문이 높아요. 그렇다고 해서 이 집안, 저 집안 모두 찾아다니며 비위를 맞추실 건가요? 그게 다 가능하기나 하겠어요?”계연수는 고개를 저었다.“상대가 먼저 다가오면 예를 갖춰 응하면 됩니다. 헌데 먼저 나서서 매달릴 필요는 없어요. 오늘 안채에서는 규수들끼리 시회도 열리고, 유상곡수 연회에 투호와 화령 놀이도 마련돼 있어요. 그 자리에서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까지 모두 누군가의 눈에 들어갑니다. 자칫 실수라도 하면 잃는 건 명예예요. 큰 외숙모께서도 그 점을 잘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계연수가 미리 이런 말을 꺼낸 것은 괜한 걱정 때문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장씨가 고하운을 데리고 무리수를 두었다가 문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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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9화

심씨 노부인은 화청에서 친분 있는 몇몇 노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은 심씨 가문의 경사였으니 오가는 말도 모두 축하 인사뿐이었고, 화청 안은 시종 떠들썩했다.계연수가 고씨 가문 사람들을 데리고 와 인사를 올리자, 심씨 노부인은 외부 손님들 앞에서 그녀의 체면을 충분히 세워 주었다. 얼굴에 웃음을 띠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녀들에게 자리를 안내하고 차를 내오라 일렀다. 또 고씨 노부인을 자신의 곁자리로 불러 앉히고, 고씨에게도 따로 눈길을 주었다.고씨는 예전에도 심씨 저택에 한두 번 온 적이 있었기에, 심씨 노부인도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그때의 고씨는 온화하고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여인이었다. 와서 인사를 올릴 때도 늘 조용했고, 몸가짐에는 부드럽고 가련한 기색이 배어 있었다.한때 심씨 노부인은 앞날이 창창하고 성정마저 자유분방했던 계정윤이 어째서 하필 이런 여인을 마음에 두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뒤늦게 생각해 보면, 고씨의 뼛속까지 스민 그 온유함이야말로 사내들이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부드러운 덫이었을지도 몰랐다.심씨 노부인은 지나치게 유약하고 온순한 여인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내들이 그런 부류를 좋아한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오랜만에 다시 본 고씨는 여전히 조용하고 온화했다. 눈썹과 눈매에는 옅은 수심이 어려 있었고, 언제라도 비가 내릴 듯 촉촉한 눈빛은 이 나이가 되어서도 쉽게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수수하고 단정한 옷차림만으로도 세속의 먼지가 닿지 않은 듯한 가녀린 분위기가 풍겼다. 마치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그대로 흩어져 버릴 사람처럼 보였다.이런 여인은 예로부터 깊은 꾀를 품는 법이 없었다.심씨 노부인은 저도 모르게 계연수를 바라보았다.계연수의 얼굴은 고씨를 네댓 푼쯤 닮아 있었다. 그러나 고씨 특유의 가련하고 유약한 기색은 없었다. 눈매에 깃든 부드러움은 닮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안에는 계정윤의 그림자가 두어 푼 섞여 있었다.그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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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0화

화청 한쪽에서 몇몇 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명씨의 시선이 고하운에게 닿았다.백씨 곁의 큰 시녀가 조용히 손짓해 알려 준 덕분이었다.명씨는 고하운을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았다.얼굴은 그럭저럭 봐 줄 만했다. 게다가 계연수와 정말 한두 푼쯤 닮은 구석이 있었다. 바로 그 미묘한 닮은 점 덕분에 고하운의 용모도 제법 돋보이는 편이었다.다만 사람 자체는 확실히 백씨가 말한 그대로였다.온몸에 조심스럽고 위축된 기색이 배어 있었고, 눈동자는 이따금씩 여기저기를 흘끔거리는 것이 마음이 단단히 자리 잡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다. 거기다 고하운이 재주도 평범하고 품행도 그저 그렇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 소문이 틀리지는 않은 듯했다.곁에 있던 어멈이 몸을 숙여 명씨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고씨 집안 셋째 아가씨는 몸가짐이 썩 평범해 보입니다.”명씨는 옅게 웃었다.그녀가 백선혁에게 찾아 주려던 아내가 바로 그런 평범한 여자였다.“가서 고씨 집안 셋째 아가씨를 이리 불러오너라. 허리에 찬 향낭의 수가 곱다 하며, 어찌 수놓았는지 묻고 싶다고 하면 된다.”어멈은 곧바로 명씨의 뜻을 알아차렸다. 고씨 집안 셋째 아가씨와 말을 섞을 구실을 만드는 것뿐이었다.어멈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한편 고하운은 어머니 곁에 얌전히 앉아 있었지만, 속으로는 꽤 긴장하고 있었다.화청은 넓었고, 사방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사람마다 귀한 기품이 배어 있었다. 젊은 규수들 역시 서넛씩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차림새 하나하나가 모두 고귀했다.그런 곳에 홀로 앉아 있으니,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걸어 주지 않는 고하운으로서는 자연히 몸 둘 바를 몰랐다.곁에 앉은 어머니 장씨 역시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마치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그 모습을 보자 고하운의 마음속에 수치심이 피어올랐다.언젠가 자신도 높은 문중에 시집갈 수만 있다면, 그때는 이 사람들이 도리어 자신에게 다가와 비위를 맞추게 될 것이다.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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