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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1화

심서준이 남의 옷을 입혀 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 서툴고도 낯선 모습은 오직 계연수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손놀림은 분명 익숙지 않았다. 계연수가 허리끈을 정리하려 손을 뻗자, 심서준이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몇 번만 더 입혀 주면 금세 익숙해질 것이다.”방 안에는 방금 전까지 이어졌던 여운이 은은한 열기처럼 맴돌았다. 계연수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고, 그녀는 어느새 그 다정한 분위기 속으로 천천히 빠져들고 있었다.심서준이 그녀의 곁에서 몸을 떼었을 때, 계연수는 이미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제야 사람과 헤어지는 일이 이토록 아쉽게 느껴진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요 며칠은 손에 잡힌 일이 많지 않았다. 계연수는 심서준에게 줄 향낭을 하루빨리 완성하고 싶어 오후 내내 자수를 놓고 있었다.그때 시녀 하나가 급히 들어와 백씨가 찾아왔다고 전했다.계연수는 이 시간에 백씨가 무슨 일로 왔을까 의아했지만, 곧 사람을 들이라 이르고 다른 시녀에게는 다과를 준비하게 했다.잠시 뒤 방 안으로 들어선 백씨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계연수였다.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백씨를 맞이했다. 세월마저 평온하게 머무는 듯한 눈빛에는 온화함이 가득했고, 안에서부터 우러나는 단아한 기품과 고운 품격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예전의 백씨는 자신 또한 언제나 저토록 여유롭고 침착한 사람이라 여겼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거센 파도가 끝없이 들끓고 있었다. 겹겹이 밀려오는 파도가 금세라도 자신을 깊은 수렁으로 끌고 들어갈 것만 같았고, 계연수 앞에서 애써 유지하던 평정마저 더는 붙잡아 둘 수 없었다.그녀의 안색은 눈에 띄게 창백했다.계연수가 몸소 마중 나오자 백씨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동서, 그렇게까지 예를 차릴 것 없다. 나는 원래 격식 따지는 사람이 아니니까.”그렇게 말하며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뒤 조심스레 물었다.“이런 때 찾아와서 폐를 끼친 건 아니겠지?”계연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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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2화

백씨는 곁에 서 있던 장 어멈을 불러 책자를 건네받은 뒤, 직접 계연수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지난번에 동서에게 준 명부가 너무 엉망이라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폐만 끼친 것 같아 내내 마음에 걸렸지. 그래서 밤새 새로 정리해 다시 만들어 봤다.”그녀는 책자를 펼쳐 보이며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했다.“여기에는 각 가문별로 정리해 둔 것이다. 예년에는 어느 집에서 어떤 연회를 열었는지, 그때 심씨 가문에서는 어떤 예물을 보냈는지, 상대 쪽에서는 어떻게 답례했는지까지 모두 적어 두었다. 그리고 또 가문 이름이 아니라 별도의 명의로 예물을 보낸 경우도 하나하나 기록해 두었어. 경사와 상사는 따로 나누어 정리했고, 경성에서 심씨 가문과 교분이 있는 집안이라면 빠짐없이 적어넣었다. 앞으로 청첩이나 부고가 들어왔는데 어떻게 예를 갖춰야 할지 모르겠다면, 이 명부에 적힌 예년의 관례대로 하면 된다. 그러면 실수할 일은 없을 것이다.”계연수는 고개를 숙여 백씨가 건넨 명부를 펼쳐 보았다.과연 백씨의 말대로 내용은 매우 상세했다. 어느 집안의 노부인이 언제 회갑이나 수연을 맞는지까지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이처럼 치밀한 명부는 하루이틀 만에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직접 사람들과 왕래하며 하나씩 쌓아 올린 기록이 모여 비로소 완성된 것이었다.백씨는 밤새 새로 써 만들었다고 했지만, 계연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백씨의 기억력이 아무리 좋아도 이 정도 분량을 머릿속만으로 이틀 만에 다시 써낼 리는 없었다. 애초에 원본이나 필사본이 따로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물론 왜 굳이 그런 말을 했는지, 그리고 지금 이 명부의 내용이 모두 사실 그대로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계연수는 백씨를 바라보며 감사의 뜻을 담아 미소 지었다.“형수님께서 정말 제때 꼭 필요한 걸 보내 주셨네요. 이렇게 정리해 두시니 한눈에 알아보기 쉬워요. 그동안 형수님께서 수년간 애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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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3화

계연수는 애초에 이 일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백씨의 말을 듣고서야 왜 백씨가 갑자기 명부를 다시 가져다주었는지 비로소 이해했다.하지만 백씨가 화해의 뜻을 내비쳤다 해도, 심서준이 조정에서 처리하는 일에 계연수가 관여할 생각은 없었다.무엇보다 그녀는 심서준이 아무나 함부로 잡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믿고 있었다. 백씨의 동생이 도찰원에 들어갔다면 분명 죄를 저질렀기 때문일 터였다. 그렇다면 더욱 자신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계연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저는 그저 안채에 머무는 여인일 뿐입니다. 어찌 함부로 부군의 공무를 입에 올릴 수 있겠습니까? 이번 일은 형수님을 도와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백씨의 표정이 굳어졌다.큰마음을 먹고 체면까지 내려놓은 채 직접 찾아와 부탁했건만, 계연수가 이렇게 선을 그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입술을 몇 번 달싹이며 다시 한번 사정을 해 보려 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사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아버지가 도찰원에 불려간 이유가 무엇인지.심서준은 계연수를 지키기 위해 움직인 것이었고, 동시에 그녀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그는 직접 찾아와 한마디 하는 법도 없었고, 심지어 넷째 형에게조차 귀띔하지 않은 채 곧장 그녀의 아버지를 건드렸다.연세도 많은 아버지가 그런 일을 어떻게 견뎌 낼 수 있겠는가.백씨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이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태도를 심서준에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오늘 이 명부를 건넨 일을 심서준이 알게 된다면, 부디 조금이나마 가족의 정을 생각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동서가 말하기 곤란하다면 더는 청하지 않겠다. 억지로 부탁할 생각도 없다. 예전에는 내가 동서를 여러모로 못살게 군 것은 사실이다. 헌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는 결국 한집안 식구인데 서로 다툴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동서가 내 손에 있는 살림권을 모두 가져가겠다고 해도 나는 지금 당장 노부인께 말씀드려 전부 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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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4화

예전의 백씨는 말소리가 제법 컸다. 활기가 넘치는 목소리 탓에 가만히 있어도 강단 있고 기가 센 사람처럼 느껴지곤 했다.하지만 오늘의 백씨는 달랐다. 눈가에는 피로가 어려 있었고, 목소리도 한결 낮고 부드러워졌다. 그동안 계연수가 한 번도 본 적 없던 연약한 모습이었다.백씨가 돌아간 뒤, 계연수는 눈앞에 놓인 명부를 펼쳐 몇 장 넘겨 보았다.곁에서 지켜보던 용춘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안에 내용을 손본 건 아닐까요?”계연수는 두어 장을 찬찬히 살펴보았다.필체만 봐서는 고쳐 쓴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처음부터 새로 베껴 쓴 명부라면 내용을 바꿔 넣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백씨는 심서준이 자신의 동생을 도찰원에 가두자 급히 이 명부를 가져온 것이었다. 미리 준비해 둔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두꺼운 명부를 며칠 사이에 새로 베껴 쓰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아무리 빨라도 사나흘은 걸릴 분량이었다.계연수는 아마 기존 명부를 필사해 둔 사본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내용이 바뀌었을 가능성은 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었다. 결국 조심해서 살펴보는 수밖에 없었다.무엇보다 그녀는 심씨 가문의 지난 인맥과 왕래를 잘 알지 못했다. 설령 내용이 일부 달라졌다 해도, 지금으로서는 알아차릴 방법이 없었다.*그날 저녁 심서준이 돌아오자, 계연수는 곧바로 백씨 동생의 일을 물었다.마침 그녀는 심서준의 관복을 벗겨 주고 있었다.심서준은 계연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넷째 형수께서 다녀갔느냐?”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명부도 다시 가져다주셨어요. 형수님께서 저더러 부군께 동생 일로 선처를 부탁드려 달라고 하셨어요. 앞으로 집안 살림도 전부 제게 맡기겠다고 하셨지만, 그건 사양했어요. 제가 어떻게 그런 큰일을 맡겠어요.”심서준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못 맡는다는 것이냐?”계연수는 잠시 멈칫했다.“저는 여태 살림을 맡아 본 적도 없고, 모르는 것도 많아요. 아무래도 경험이 부족하잖아요.”심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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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5화

심서준은 오래지 않아 방으로 돌아왔다.“준비는 다 끝났느냐?”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내일이면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으니 챙길 것도 많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과 심서준의 갈아입을 옷 두 벌씩, 그리고 길에서 필요한 물건들만 간단히 준비했다.그것조차 그녀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방 어멈이 워낙 빈틈없는 사람이어서 필요한 것은 이미 하나도 빠짐없이 챙겨 둔 상태였다.심서준은 옅게 웃으며 계연수를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마차에 오른 뒤에야 계연수는 참았던 궁금증을 꺼냈다.“넷째 아주버님께서 형수님 일로 선처를 부탁하러 오셨나요?”심서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제 몸이 아파 봐야 비로소 기억하는 법이지.”성밖 장원으로 향하는 길은 조금 울퉁불퉁했다.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안에 켜 둔 촛불도 잔잔하게 일렁였다.계연수는 심서준을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부군께서 형수님을 경고하신 건 저 때문인가요?”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괜한 착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백씨의 동생이 언제 도찰원에 잡혀 들어갔는지조차 그녀는 몰랐다. 하지만 백씨가 갑자기 명부를 가져다주고, 심태숙까지 직접 찾아와 선처를 구한 데다, 오늘 아침 자신이 이 일을 심서준에게 이야기했는데 오후가 되자마자 모든 일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을 보니, 자꾸만 그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무엇보다 심서준은 늘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모든 것을 그녀 스스로 묻고, 스스로 짐작해야 했다. 어렵사리 물어도 대답조차 해 주지 않는 때가 많았다.심서준은 담담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너무도 태연한 그 한마디에 계연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는 그의 얼굴은 늘 그랬듯 차갑고 빈틈없었다.분명 묻고 있는 것은 자신인데, 그는 끝내 속 시원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계연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부군은 사사로운 정 때문에 법을 어기실 분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저 때문은 아닐 거예요...”말끝이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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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6화

심서준은 한 손을 들어 계연수의 뺨을 살며시 감쌌다.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넷째 형수의 친정을 건드린 게 정말 너 때문이었는지… 그게 그렇게 중요했느냐?”계연수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자신의 마음은 이미 충분히 드러났다고 생각했는데도, 심서준은 이제야 확인하듯 묻고 있었다.게다가 이렇게까지 진지한 얼굴이라니.속으로는 답답한 생각이 스쳤다.어쩌면 이렇게 사람 마음을 모르는 데다 무뚝뚝하기까지 할까.그래도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네.”그 말이 떨어지자 심서준의 눈빛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그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사사로운 정 때문에 법을 어기는 사람은 아니다. 헌데 그런 방법이 아니었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경고는 했을 것이다.”그러고는 계연수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한마디를 덧붙였다.“결국은 모두 너를 위한 일이었다.”그 말을 듣는 순간 계연수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요 며칠 동안 그녀는 줄곧 심서준이 자신을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조심스레 떠보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오직 자신만 담겨 있었으니까.*마차가 장원 앞에 멈춰 섰다.심서준은 계연수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게 했다.막 발을 디딘 순간, 그는 조용히 말했다.“고개를 들어 보거라.”계연수가 고개를 들자 수없이 많은 공명등이 밤하늘을 향해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끝없이 이어지는 불빛은 눈앞의 장원을 몽환적인 풍경으로 물들이고 있었다.계연수는 넋을 잃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문득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열두 살 무렵, 아버지에게 철없이 떼를 썼던 적이 있었다. 성인식을 치르는 날 밤에는 하늘 가득 공명등을 띄워 보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그리고 그 아래에서 천 가지 소원을 빌겠다고 말했다.그때는 아버지가 가장 뜻을 펼치던 시절이었고, 자신 또한 누구보다 사랑을 받으며 자라던 때였다.불과 일 년 뒤 계씨 가문에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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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7화

심서준의 장원은 규모가 제법 컸다.산 곳곳에 온천탕이 여럿 자리하고 있었고, 사방은 울창한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깊숙한 곳이라 인기척은 없었지만, 이따금 들려오는 새소리마저 계연수의 마음을 괜히 간질였다. 마치 누군가 몰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에 그녀는 몸을 물속으로 더욱 깊숙이 숨겼다.심서준은 원래 계연수와 온천에서 조금 더 머물 생각이었다.하지만 그녀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자 더는 억지로 붙잡지 않았다. 오래 머물지 않고 그녀를 데리고 침소로 돌아왔다.이곳은 심서준이 자주 찾는 장원이었다.외진 곳이라 한적하고 조용했지만, 하인들은 적지 않았다. 늘 손길이 닿는 곳답게 장원은 구석구석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었다.상 위에는 계연수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심서준은 그녀의 그릇에 완자를 덜어 주며 말했다.“앞으로 이곳에 오고 싶으면 언제든 와도 된다.”계연수는 그릇에 담긴 완자를 바라보았다. 먹음직스러운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이 장원은 요리 솜씨까지 이렇게 뛰어날 줄이야.그녀는 심서준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그래도 부군께서 함께 오실 때만 올 겁니다. 혼자 오면 무서워요.”계연수는 어려서부터 겁이 많은 성격이었다.아홉 살 전까지는 밤에도 혼자 잠들지 못했을 정도였다. 이 장원은 고즈넉하고 운치 있게 꾸며져 있었고, 곳곳에서 정성과 호사가 느껴졌지만, 혼자 와 있으면 왠지 적막하기만 했다.심서준이 곁에 없다면, 이곳에 오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그 말을 들은 심서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역시 계연수다운 대답이었다.그는 문득 말을 이었다.“내일은 한 사람을 만나게 해 주마.”계연수는 금세 눈을 반짝였다.“누구요?”심서준이 옅게 웃었다.“위운필.”계연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위운필은 선황이 총애하던 어용 화사(畫師: 화가)였다.황제의 누이 아들로 태어나 신분 또한 귀했고, 어려서부터 그림에 비상한 재능을 보여 평생 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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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8화

심서준은 입술을 살짝 다문 채 말없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는 느긋한 얼굴로 계연수를 바라보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어르신들은 원래 일찍 쉬시는 법이다. 지금 찾아가는 건 폐를 끼치는 일이니 적절하지 않다. 설마 위 선생께서 하룻밤 만에 떠나기야 하겠느냐.”말을 마친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계연수를 슬쩍 바라보며 덧붙였다.“다만 위 선생께서 내일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셨다. 잠시 길을 나서실 수도 있는데, 언제 돌아오실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구나.”계연수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그럼 어떡하죠?”심서준은 그녀 얼굴에 스쳐 가는 초조함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나직이 말했다.“내일은 내가 어떻게든 위 선생을 붙잡아 보마.”그 말을 하고도 심서준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암시는 이미 충분했다. 이제 그녀가 그 뜻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됐다.계연수는 잠시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곱씹는 사이 눈동자에 다시 희미한 기대가 번져 갔다. 이내 그녀는 망설임 없이 심서준의 품으로 몸을 기울였다.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 안고, 꾀꼬리처럼 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부군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가녀린 몸은 물결처럼 부드럽게 그의 품에 안겼다.따스한 체온이 가슴 깊이 전해졌고, 그녀의 두 손은 그의 등을 살포시 감싸고 있었다. 눈앞에는 거위빛 노란 옷자락이 화사하게 번졌고, 가까이 다가온 머리에는 옥비녀가 은은한 윤기를 머금고 있었다.그녀에게서 풍겨 오는 향기는 은은하게 코끝을 스쳤다. 마치 봄볕 아래 만개한 꽃들 사이에 들어선 듯한 향기였다.심서준의 눈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계연수가 먼저 품에 안겨 오는 순간마다 그는 숨길 수 없이 기뻤다.늘 냉정하고 단정하던 얼굴도 어느새 부드럽게 풀어졌고, 긴 손가락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그녀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몸은 저도 모르게 가볍게 긴장했다.턱은 자연스레 그녀의 가녀린 어깨 위에 내려앉았고, 느슨하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초록빛 귀걸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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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9화

식사를 마친 뒤, 심서준은 계연수에게 함께 뜰을 거닐자고 했다.그동안 조정의 일에 매여 지내느라 그녀와 함께하지 못한 일이 너무도 많았다. 어렵게 찾아온 이 여유만큼은 그동안 못다 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채워 주고 싶었다.계연수는 밤에 뜰로 나가 봐야 별다를 것이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심서준이 내키는 듯하니 말없이 그의 곁을 따랐다.그러나 뜰로 발을 내딛는 순간, 밤하늘 위로 불꽃이 연이어 피어올랐다.한 송이가 지면 또 한 송이가 뒤를 이었고, 눈부신 빛은 쉼 없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흘러가는 불빛에 뜰 안까지 환하게 물들었다.계연수는 넋을 잃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심서준이 자신을 굳이 뜰로 데려온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이토록 많은 불꽃놀이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불꽃이 밤하늘을 가득 밝히는 모습에 그녀는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어느새 눈앞이 아련하게 흐려졌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따뜻함이 비로소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심서준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마음을 쏟았는지, 이제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그녀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는 늘 알고 있었다.좋아하는 음식 하나까지 잊지 않았고,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으로 존경해 온 위 선생까지 어렵게 모셔 왔다.이토록 자신을 위해 애쓴 사람은 세상에 심서준뿐이었다.그 순간, 계연수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심서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불꽃이 터질 때마다 계연수의 얼굴은 환하게 빛났다가 다시 어둠에 잠겼고, 눈동자에는 촉촉한 물기가 번져 있었다.그녀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늘 밤을 위해 공들인 모든 수고가 아깝지 않았다.*그날 밤의 계연수는 평소와 달랐다.유난히 그의 말에 잘 따랐고, 예전보다 먼저 다가오는 일도 많았다.심서준이 바둑을 두자고 하자, 그녀는 평소처럼 핑계를 대며 미루지 않았다. 늘 몇 수 두지 못해 밀리기 시작하면 억지를 부리며 더는 두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날은 끝까지 조용히 바둑판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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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0화

심서준은 이 순간이 더없이 좋았다.품 안에 안긴 계연수는 한없이 부드러웠고, 그 따스한 온기마저 놓치기 싫을 만큼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늘 수줍어하던 그녀가 먼저 다가와 준 것이 그를 더욱 기쁘게 했다.그는 계연수를 한층 깊이 품에 끌어안은 채 쉰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온천에 다시 들어가고 싶구나.”아까 온천에서 계연수는 끝내 긴장을 풀지 못했다. 심서준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기에 반 시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녀를 데리고 나왔었다.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달랐다.모처럼 얻은 이 시간을 천천히 누리고 싶었다. 서두를 것 없이 느긋하게 밤을 보내고, 내일은 새벽같이 조정에 나갈 필요도 없었다. 계연수를 품에 안은 채 날이 밝을 때까지 함께 잠들고, 자신의 품속에서 천천히 눈을 뜨는 그녀를 바라보고 싶었다.계연수는 그에게 꽉 안겨 숨이 조금 막힐 정도였다.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심서준은 그녀를 안은 채 몸을 기울여 작은 평상 위로 눕혔다. 바둑판과 작은 탁자가 밀려 바닥으로 떨어졌고, 잘 다듬어진 백옥 바둑돌이 사방으로 흩어졌다.심서준은 계연수의 두 손을 붙잡아 손가락을 맞깍지 낀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부드럽게 풀어진 눈빛 아래에는 쉽게 감출 수 없는 짙은 기색이 어려 있었다.“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바로 쉬러 가도 된다.”그의 숨결이 바로 눈앞에 닿자 계연수의 심장은 다시 두어 번 크게 뛰었다.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좋아요.”심서준은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옅게 웃었다.그녀가 자신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심서준이 머무는 이 장원에도 온천이 있었다. 그는 계연수의 손을 잡고 온천으로 들어갔고, 계연수는 거의 그의 몸에 기대다시피 했다.사실 계연수는 물을 조금 두려워했다.예전에 물에 빠진 일을 겪은 뒤로는 연못만 보아도 저절로 물가에서 한발 물러섰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다시 물속으로 빠질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하지만 그런 모습마저 심서준에게는 사랑스러웠다.물기에 젖은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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