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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짜 결혼, 진짜 신분: Chapter 511 - Chapter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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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1화

이상하게도 김태하는 그 말을 웃으며 했다.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였는데도 분위기는 이상하게 가라앉았다.강지현은 눈을 깜빡이다가, 이유 없이 코끝이 시큰해졌다.“네가 늙으면 나도 늙는 거잖아. 그때도 넌 내 마음속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일 거야.”김태하는 말없이 미소 지으며 강지현의 접시에 반찬을 조금 덜어주었다.강지현은 김태하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분명 같이 밥을 먹고 있을 뿐인데, 이상하게 기쁘면서도 슬펐다.식사를 마친 뒤, 김태하는 강지현을 안고 소파에 기대 쉬었다. 창밖의 밤은 아름다웠고 두 사람 사이에는 조용한 낭만이 내려앉았다.“지현아, 신혼집 인테리어가 거의 끝나가. 네가 돌아오면 우리 예식 날짜부터 잡자.”강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가서 길일도 물어봐야겠네.”“할머님도 얘기하셨던 것 같아. 그때 같이 상의하자.”강지현은 최근 지순옥과 연락하며 나눴던 은주희 이야기가 떠올랐다.은주희는 강지현과 김태하가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김무언에게 화가 풀리지 않아 해원시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강지현은 은주희가 좋았다. 그래서 김태하의 손가락을 가만히 잡아당기며 말했다.“맞다. 돌아오면 어머님도 한번 뵈러 가자. 어머님이 널 얼마나 아끼시는데. 아버님이 그렇게 하셨으니, 나라도 쉽게 마음 돌리긴 힘들 것 같아.”김무언은 누구를 달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은주희를 다시 돌아오게 하려면 결국 그들이 나서야 했다.강지현은 김태하가 안쓰러웠고 김무언이 원망스러웠다.사실 지순옥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은주희가 차라리 김무언 곁에 있지 않는 편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김태하에게도 그토록 다정하고 속 깊은 어머니가 곁에 남지 않게 된다.게다가 지순옥의 말에 따르면, 은주희가 오랜 세월 김무언 곁을 지킨 건 두 사람이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했다.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의 부족한 부분까지 끌어안는 일이었다.은주희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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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2화

김태하가 고개를 들었다. 장난기 어린 강지현의 눈빛과 마주치자, 그제야 그녀가 일부러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네 생각.”“또 내 생각? 내 생각한다면서 내 말은 제대로 안 듣고 있었잖아.”“듣고 있었어.”김태하는 옅게 웃으며 강지현의 손을 감싸 쥐더니, 제 뺨에 가만히 가져다 댔다. 그늘이 드리운 깊은 눈매는 오히려 더 차분하고 단단해 보였다.“지현아, 우리 결혼도 했으니까 재산 관련해서 공증 받아두자.”강지현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재산 공증?”그러다 곧 피식 웃었다.“왜, 나중에 우리 사이 안 좋아지면 내가 네 재산이라도 빼앗아 갈까 봐 겁나?”“아니.”김태하가 부드럽게 설명했다.“네가 어떤 위험도 떠안지 않았으면 해서 그래. 주상 그룹 대표 자리가 너무 힘들면 나중에 그만둬도 돼. 미래 그룹도 충분히 탄탄한 회사니까. 난 네가 미래 그룹 부대표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됐어. 주상 그룹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그런 자리까지 내가 어떻게 감당해.”알고 있었다. 김태하가 그녀에게 더 많은 걸 주고 싶어 한다는 걸.사랑하면 원래 이렇게 늘 미안해지는 걸까. 그래서 김태하는 이제 미래 그룹까지 그녀에게 넘겨주려는 모양이었다.“넌 할 수 있어.”김태하가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미래 그룹 지분이나 직책만 말하는 게 아니야. 내 개인 명의로 된 재산까지, 전부 누릴 권리가 있어.”“우린 부부잖아. 네 건 내 거고, 내 건 네 거고... 이미 그런 거 아니야?”두 사람은 엄연히 혼인신고까지 마친 사이였다. 김씨 가문 사람들도 강지현에게 꽤 잘해주고 있었으니, 그녀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별다른 걱정이 없었다.“맞아. 그래도 공증을 해두면,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겨도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서.”김씨 가문에는 사람이 많았다. 김태하가 자기 재산을 어떻게 정리하든 크게 문제 삼을 사람들은 아니었다.하지만 미래 그룹은 달랐다.강지현은 본래 미래 그룹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게다가 김무언은 결코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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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3화

“응, 기억나.”강지현의 새카만 눈동자에 순식간에 빛이 돌았다.김태하와 함께한 순간들은 하나하나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하물며 첫 만남을 잊을 리 없었다.그때만 해도 그녀는 두 사람이 그저 서로 필요한 것만 주고받는 정략결혼 관계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김태하는 그녀가 물려받은 재산에는 관심이 없고, 집안에서 하도 결혼을 재촉해 어쩔 수 없이 나온 자리라고 말했다.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역시 강지현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말했던 것 같았다.김태하 또한 강지현이 미래 그룹의 재산을 탐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결혼한 뒤에도 돈 문제만큼은 확실히 선을 그었다.김태하는 자기 명의의 카드를 하나 따로 내주었지만, 강지현은 그것마저 거의 쓰지 않았다.“말해 봐.”김태하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듣는 순간, 강지현은 온몸에 힘이 풀렸다.그의 목소리는 너무 좋았다. 낮고 단단한 울림에는 남자다운 기운과 이상하리만큼 다정한 온기가 함께 있었다.“집안에서 재촉해서만은 아니었지.”“김태하, 너 그냥 나한테 관심 있었던 거잖아. 나랑 결혼할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고.”장난처럼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었지만, 김태하의 마음을 정확히 찔렀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곰곰이 떠올려 보면, 그때 김태하가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도 어딘가 어색하고 긴장돼 있었다.그러니 그날 식사 자리에서 강지현까지 덩달아 긴장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그때는 김태하의 고상한 분위기와 압도적인 기세에 눌린 줄만 알았다.하지만 그의 진짜 모습을 알고 나니 알 것 같았다. 김태하 역시 마음을 표현하는 데는 서툴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를 대할 때도 조심스럽게 마음을 떠보고 있었던 것이다.강지현은 뻔뻔하게도 이런 생각까지 했다.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어색하지 않고 쑥스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강지현이 짓궂게 놀리자, 김태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참지 못했다는 듯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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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4화

사실 김태하의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건 강지현도 느끼고 있었다.그래서 마음이 더 뒤숭숭했다.하지만 걱정하는 티를 너무 내고 싶지는 않았다. 괜히 김태하에게까지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한편, 같은 시각 하원영은 주상 그룹에서 야근 중이었다.어머니만큼 타고난 재능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기술은 익힐 만큼 익혔는데도 늘 한 끗이 모자랐다.인턴 평가 목표도 아직 10분의 1조차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또다시 실험 결과가 실패로 돌아간 걸 확인한 하원영은 의자에 털썩 기대앉았다.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을 만큼 좌절감이 밀려왔다.어쩌면 자신은 정말 주상 그룹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지도 몰랐다.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주변 건물들은 벌써 불이 거의 꺼져 있었다.하원영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른 뒤, 지친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때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화면에는 주시언의 이름이 떠 있었다.전화를 받자마자,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겹쳤다.“이제 퇴근해?”“오빠.”하원영은 얼른 뒤돌아보며 전화를 끊었다. 놀란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스쳤다.“어떻게...”“가자. 너무 늦었어. 데려다줄게.”주시언은 여전히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가까이서 희미하게 술 냄새가 나는 걸 보니, 그 역시 일을 마치고 온 모양이었다.사실 그는 오늘 주상 그룹 일 때문에 급히 해원시로 돌아오느라, 밀린 업무가 적지 않았다.하지만 주시언은 일정을 빈틈없이 조율하는 사람이었다. 원래 놓칠 뻔했던 협력 미팅이 마침 오늘 오후로 잡혀 있었고 그는 야근까지 하며 밀린 일을 어느 정도 만회한 셈이었다.차에 오른 뒤, 하원영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내가 아직 주상 그룹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퇴근 시간이 몇 시인지 주시언에게 말한 적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주시언이 담담하게 말했다.“야근한다고 SNS에 안 올리면, 나도 모르겠지.”그제야 하원영은 자신이 SNS에 뭘 올렸는지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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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5화

하원영은 순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했다.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나서도, 감사 인사를 받을 만한 일을 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또 일을 망칠 뻔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주단우 같은 사람을 상대할 때 그녀가 할 줄 아는 건 정면으로 맞서는 것뿐이었다. 다른 방법은 떠올리지도 못했다.하지만 오늘의 주시언은 정말 멋있었다.제대로 된 어른 같았다.주시언은 그때 그저 가볍게 웃기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다시 떠올려 보니 마음이 복잡했다. 예전엔 그렇게 당돌하던 하원영이 이제는 말끝마다 자신 없어하는 게 느껴졌으니까.“너 오늘 충분히 잘했어. 우리야 위치가 위치라, 대놓고 얼굴 붉히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난 네가 예전처럼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게 오히려 더 시원하고 좋아.”주시언이 불쑥 꺼낸 말에 하원영은 잠시 멍해졌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주시언이 세심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말도 결국 자신을 위로하려는 말일 뿐이었다.주상 그룹 안에서는 강지현은 말할 것도 없고 주시언도, 심지어 현다영까지 자신보다 나아 보였다.하씨 가문 저택에 도착했을 때, 주시언은 하원영이 들어가는 것만 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문 앞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곧이어 하원영의 모습이 누군가에게 떠밀리듯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주시언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곧바로 하원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받는 이는 없었다.그는 망설이지 않고 차에서 내려 하씨 가문의 초인종을 눌렀다.한참이 지나서야 사용인이 문을 열었다.“아가씨는 벌써 쉬러 들어가셨습니다. 특별한 용건이 없으시면 다음에 다시 오시는 게 어떨까요?”“쉬고 있으면 깨워 주세요. 꼭 지금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주시언은 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2층에서 그 모습을 본 하지유가 잠옷 위에 급히 겉옷만 걸친 채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그녀는 현관 앞에서 주시언을 가로막았다.“주시언 씨! 여긴 우리 집이에요.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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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6화

그해 큰 부상에서 회복한 뒤, 주시언은 본격적으로 몸을 단련하기 시작했다. 무에타이 같은 격투기도 따로 배웠다.그가 정말로 손을 쓸 줄은 몰랐는지, 사람들은 순간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경호원 둘은 그대로 옆에 있던 술장에 부딪혔다. 요란한 충격음에 하지유와 이연화도 놀라 뒤로 물러섰다.거실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틈을 타, 주시언은 곧장 계단을 뛰어올랐다.하원영의 방은 복도 끝에 있었다. 소란을 들은 하석철이 문을 열고 나오자, 마침 주시언이 복도 안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뒤로는 뒤늦게 따라붙은 사용인과 경호원들이 몰려오고 있었다.“주시언!”하석철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너 지금 뭐 하는 거냐?”“하원영은요?”주시언의 이마에는 어느새 잔땀이 맺혀 있었다. 콧등에 걸린 안경마저 흘러내릴 듯 위태로웠다.그도 알고 있었다. 하씨 가문에 이렇게 들이닥친 대가가 가볍지 않다는 것을.하지만 괜한 소동으로 끝난다 해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직접 확인해야 했다.“오빠!”그때 방 안에서 하원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밖에서 주시언의 목소리를 들은 하원영이 안쪽에서 힘껏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하석철의 손에는 하원영의 휴대폰이 쥐어져 있었다. 주시언의 시선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아저씨,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원영이는 아저씨 딸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무슨 죄수처럼 가둬 두신 겁니까?”주시언의 뒤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하지유와 이연화도 어느새 뒤따라 올라와 있었다.경호원 하나가 주시언의 팔을 붙잡으려 하자, 하석철이 눈짓으로 물러나게 했다.이미 여기까지 들이닥친 마당에, 이제 와서 붙잡는 시늉을 해 봐야 우스울 뿐이었다.하지유는 방금 전 주시언이 경호원들을 쓰러뜨리는 걸 보고 겁을 먹은 탓에 함부로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이연화와 하석철은 짧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잠시 뒤, 하석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로서 딸을 훈육하는 거다. 설마 그것까지 문제 삼겠다는 거냐?”“원영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런 식으로 벌을 받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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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7화

주시언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그는 하석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빛인데도 이상하게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하석철도 내심 흔들렸다.주씨 집안 사람과 괜히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일이 커져 밖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체면을 구기는 건 하씨 가문 쪽이었다.그렇게 되면 오히려 하원영에게 빠져나갈 틈만 만들어 주는 꼴이었다.이연화도 속이 복잡했다. 주시언이 아직까지 하원영과 이렇게 가까울 줄 누가 알았겠는가.하원영에게야 강압적으로 굴 수 있다지만, 그렇다고 주시언까지 붙잡아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아저씨,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원영이는 이제 단순히 주상 그룹 직원만은 아닙니다. 지현이 친구이기도 합니다.”“지현이 뒤에는 주상 그룹만 있는 게 아니라 미래 그룹도 있습니다. 아저씨도 원영이 때문에 굳이 여러 사람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으시겠죠.”주시언은 하석철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 오늘 하씨 가문이 왜 하원영을 문제 삼았는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하씨 가문은 예전부터 엄경미 쪽과 가깝게 지내 왔다.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몸을 사리면서 양쪽에 다 잘 보이려는 수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말을 마친 주시언은 곧장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경호원들이 긴장한 얼굴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섰고 하지유도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그러나 하석철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막으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자, 주시언은 그대로 하원영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주시언의 기억 속 하원영의 방은 아직 대학 시절에 멈춰 있었다.서재 옆에 붙어 있던 작은 방.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하원영의 방은 단출하다 못해 휑했다. 침대 하나, 구석에 놓인 책상과 의자, 그리고 옷장 하나가 전부였다.웬만한 원룸도 이 방보다는 물건이 많을 것 같았다.하원영은 문가에 서 있었다. 주시언을 본 순간, 그녀의 눈빛이 잠깐 밝아졌다. 반가움과 걱정이 얼굴에 동시에 스쳤다.주시언은 곧바로 그녀의 입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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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8화

“하원영, 잊지 마라. 네 보호자는 나야. 오늘 네 발로 이 집을 나서겠다면, 그 뒤는 네가 감당해야 할 거다.”하석철은 하원영을 너무 잘 알았다.하원영은 겉으로만 센 애였다. 밖으로는 이를 드러내고 온몸에 가시를 세운 것처럼 굴었지만 속은 작은 충격에도 쉽게 무너질 만큼 약했다.그녀는 어머니가 남긴 것들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하씨 가문에서 벗어날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오히려 주시언이 더 예상 밖이었다. 겉으로는 말 잘 듣는 도련님처럼 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 고집이 셌다.하원영과의 관계도 그랬다. 그는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제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였다.하원영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주시언을 바라보았다.발밑이 허공에 뜬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그렇게 하원영은 주시언에게 이끌려 방을 나섰다.“거기 서라.”하석철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뒤에서 들려왔다.이연화도 더는 보고만 있을 수 없었는지 입을 열었다. 다만 그녀의 말투는 한결 부드러웠다.“원영아, 아무리 우리한테 서운한 게 있어도 그렇지, 이 밤에 남을 따라 집을 나가겠다는 건 아니잖니. 소문이라도 나면 네 입장만 더 곤란해져.”그 말은 정확히 하원영의 약한 곳을 찔렀다.하씨 가문은 그녀를 반쯤 묻어 버린 깊은 구덩이 같았다.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곳이었다.하지유가 비웃듯 말했다.“엄마, 그냥 보내 줘요. 나가 봤자 어디로 가겠어요? 주씨 집안? 아니면 호텔? 주 회장님께서 주시언한테 하원영이랑 다시는 엮이지 말라고 하셨다면서요. 하루 이틀 버틴다고 평생 아버지 뜻 거스르고 살 수 있겠어요?”하씨 가문을 나가면 하원영에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지난 몇 년 동안 하씨 가문은 하원영을 철저히 망가뜨렸다. 그 사이 그녀는 이 바닥 사람들에게도 적지 않게 미운털이 박혀 있었다.지금은 이 집에 있는 게 숨 막힌다고 생각하겠지만 어머니의 유산도, 하씨 가문의 보호도 잃고 나면 삶은 더 막막해질 뿐이었다.주시언에게 기대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설마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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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9화

두 다리가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원영은 그렇게 순순히 주시언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하석철이 분을 참지 못하고 다시 하원영을 불러 세웠다.하지만 하원영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주시언이 먼저 돌아서서 그를 바라보았다.“아, 그리고 원영이 휴대폰은 돌려주시죠.”주시언은 그렇게 말하며 하석철에게 손을 내밀었다.하석철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이를 악물고는 마지못해 하원영의 휴대폰을 건넸다.하지만 곧바로 다시 하원영에게 말했다.“너 정말 주시언을 따라 나갈 생각이냐? 이 집 문을 나서는 순간, 네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알고는 있냐?”하원영의 머릿속은 이미 엉망이었다. 그러나 주시언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거의 몰아붙이듯 하원영을 데리고 하씨 가문을 빠져나갔다.더는 그녀에게 물러설 틈을 주지 않았고 의사를 물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대문을 나서는 순간, 차가운 밤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뻥 뚫린 듯 후련했다.하지만 그 후련함은 몇 초도 가지 못했다. 뒤따라 밀려온 불안이 순식간에 마음을 짓눌렀으니까.정신을 차린 하원영은 주시언의 손을 뿌리쳤다.“이제 됐어요. 얼른 가요.”그 말을 내뱉는 순간, 하원영은 스스로가 비겁하다고 느꼈다.분명 마음속으로는 주시언이 곁에 있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가 정말 곁에 남아주자, 그 호의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주시언은 하원영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콧등 아래로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 올리고는 다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이번에는 거의 끌다시피 그녀를 차에 태웠다.“뭐 하는 거예요? 나 주씨 가문에는 못 가요. 오빠 아버지가 아시면...”“아버지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우리 집에 가기 싫으면 다른 데로 가면 돼.”주시언은 드물게 완강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곧장 핸들을 꺾었다.차는 밤길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하원영을 하씨 가문에서 최대한 멀리 떼어놓으려는 듯, 주시언은 아예 먼 곳까지 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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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0화

하원영은 얼굴이 붉어진 채 주시언의 말을 끊었다.주시언 앞에만 서면 늘 이렇게 쉽게 불이 붙었다. 그가 늘 하원영의 가장 아픈 것을 찔렀기 때문이다.그렇게 말을 쏟아내고 나서야 하원영은 주시언의 얼굴에 스친 당혹감을 보았다. 곧이어 그의 눈빛도 복잡하게 흔들렸다.제 말에 상처받은 주시언을 보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하원영은 결국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침대에 웅크렸다.하원영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이 늘어놓은 핑계와 변명이 자신을 더 초라하게 만든다는 것을.문득 어머니가 임종을 앞두고 하씨 가문 사람들에게 남겼던 말이 떠올랐다.“저 아이는 제 아버지와... 똑같아.”“정 안 되면, 버려.”언제 잠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창밖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하원영은 주시언이 이미 갔을 거라 생각하며 방을 나왔다. 그런데 욕실로 향하려던 순간, 거실 쪽 큼직한 소파에서 그가 몸을 일으켰다.주시언의 몸 위에는 얇은 담요 한 장만 덮여 있었다. 그는 그렇게 소파에서 대충 하룻밤을 보낸 모양이었다.“오빠, 아직 안 갔어요?”하원영은 깜짝 놀랐다. 뒤늦게 죄책감이 밀려왔다.주시언은 잠이 덜 깬 얼굴로 짧게 대답하더니,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안경을 집어 썼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구겨진 셔츠를 대충 정리했다.“어젯밤엔 좀 피곤해서 그냥 있었어. 넌 잘 잤어?”주시언은 하원영의 옆을 지나가며 손목시계를 풀고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하원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적어도 소파에서 잔 오빠보다는 편하게 잤지.’“저기, 어제는... 내가 말이 좀...”한참을 망설였지만, 막상 사과하려니 말이 턱턱 막혔다.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주시언의 낮은 목소리도 함께 흘러나왔다.“네 말투야 이제 익숙해. 하씨 가문은 엄경미 눈치 보고 있는데, 너까지 주단우 쪽을 건드렸잖아. 분명 그걸 핑계로 널 몰아붙일 거야.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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