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블랙 황궁을 퇴사하려다 미친 황제와 엮여버렸다.: Chapter 61 - Chapter 70

92 Chapters

제61화. 내 보좌관을 건드린 자를 (1)

카엘루스는 위험하다는 핑계로 직접 이 거대한 수박 알(?)을 안아 들었다.​얇은 가운 위로 드러난 그의 팔 근육이 알의 무게감에 따라 단단히 조여지는 것을 보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저 팔에 맞으면 퇴직금도 못 받고… 요단강 건너는 거겠지?’​폐하에게 절대로 미움받지 않으리라 한 번 더 다짐하며, 나는 말했다.​“폐하, 무거우실 텐데 마력으로 띄울까요?”​그는 괜한 소리 말라는 표정으로 나를 한번 보더니 고개를 돌려 가버렸다.​어깨를 으쓱한 나는 황제를 따라 그의 집무실로 입성했다.​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저… 폐하? 제 책상이 굳이 그 … 폐하 책상 옆에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만?”“같이 있기로 했지 않나? 그대도 동의했다.”“… 그 같이 가… 이 같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더 이상의 대답은 필요치 않다는 듯 그는 이미 나와 황제 사이의 책상에 푹신한 비단 쿠션을 깔아 이 수박 알을 올려 두었다.​졸지에 황제와 나는 굉장히 어색하게… 수박과 나. 란. 히. 업무를 보게 되었다.​“자 그럼 업무를 시작하지.”​높이 쌓인 서류 뭉치 맨 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 들며 그는 말했다.​웅—.​덩치가 수박만 해진 솜뭉치가 한 번씩 웅웅 거릴 때마다 책상까지 진동하며 내 손바닥까지 전달되어 신경 쓰여 죽겠는데 저 황제는 아무렇지도 않나 보다.​어차피 크게 할 일도 없었는데 그의 바로 옆에 앉아 있기 불편해 죽겠다.​이미 내 자리에는 서류뭉치 따윈 없다.​그저 솜뭉치를 향해 깃펜으로 간지럽히며 장난치고 놀고 있…​카엘루스가 그런 나와 솜뭉치를 보더니 마음에 안 드는지 갑자기 솜뭉치가 있는 비단 쿠션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폐하?”​솜뭉치도 느꼈는지 웅웅 거리며 싫은 티를 냈다.​“일해라. 보좌관도. 알 덩어리도.”​알이 할 일이 가만히 있는 거 말고 또 있나…​괜히 알을 노려보며 카엘루스가 말하자, 솜뭉치도 지지 않고 갑자기 ‘키이이잉’ 하는 기괴한 금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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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내 보좌관을 건드린 자를 (2)

그녀의 시선은 먼저 카엘루스에게 그리고 그와 밀착해 있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내가 안고 있는 거대한 수박…! 아니 솜뭉치에게 향했다.​“…!”​그녀의 눈동자가 경악하며 커졌다.​지금 이 상황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 나도 알고 그녀도 알았다.​그녀는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더니 서늘한 미소를 띠며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폐하를 뵙습니다. 그리고 보좌관님도요.”​그녀가 말을 이었다.​“그렇게 위험한 물건을 감히 폐하 앞에 가지고 있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엘리노아 공녀.”“인사는 되었다.”​카엘루스가 냉담하게 말했다.​이자벨라는 그런 황제의 반응에 크게 당황하지 않은 눈치였다.​그저 그녀가 소매 속에 감춰 둔 작은 유리병을 만지작 거렸다.​어둠 속에서 만난 그 수상한 자가 건네준 기분 나쁜 검은 액체가 담긴 병이었다.​보름달이 뜨기 전 이걸 저 알 주변에 뿌려야 한다고 했었다.​문득 그 정체불명의 남자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이 액체가 알에 닿는 순간, 보좌관의 마력은 폭주할 것이고 괴물로 변한 그녀를 황제는 죽여야만 할 것입니다.]​바로 그녀가 원하는 바였다.​깊게 심호흡을 한번 한 이자벨라는 천천히 카엘루스와 내 곁으로 다가왔다.​“그 유물이 강해질수록 엘리노아 보좌관님의 생명력을 갉아먹을 겁니다.”​걱정스러운 표정의 이자벨라를 보자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날 싫어하는 여자 아니었나?’​이자벨라의 연기를 알아챈 카엘루스는 경계심을 가지고 그녀를 쳐다보았다.​“제가 가문에서 비책을 가져왔습니다. 한번 보시죠.”​알을 한번 힐끔 본 이자벨라는 자연스럽게 품 안에서 유리병을 꺼내 드는 척하며 책상 쪽으로 몸을 숙였다.​그러자 팔에 안겨있던 솜뭉치가 갑자기 우우웅-! 하며 거세게 진동하기 시작했다.​그도 경계를 하고 있었다.​“그만.”​카엘루스가 손을 뻗어 이자벨라가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도록 했다.​하지만 그 순간, 놀란 척 뒤로 물러서던 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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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퇴사 불가 선언 (1)

그때의 일을 나는 나중에 벨리안에게서 전해 들었다.​내가 정신을 잃은 직후, 집무실의 공기는 비명조차 얼어붙을 만큼 차갑게 가라앉았다고 했다.​쓰러진 내 창백한 뺨 위로 붉은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그것이 카엘루스의 소매를 적신 순간, 그의 눈동자에서 마지막 인간미마저 사라졌다.​그 자리를 채운 것은 지독한 파괴적 본능이었다.​“… 공녀.”​낮게 깔린 목소리가 바닥을 긁었다.​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떨던 이자벨라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굳어버렸다.​“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제발 스스로 알지 못하기를 바란다.”“그래야 죽여달라고 빌 수 있을 테니.”​카엘루스가 한쪽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그러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압력이 이자벨라를 짓눌렀다.​“아악! 폐하! 살려주세요! 저는 단지… 도와주려고…!!”“그 더러운 주둥이를 닫아.”​쾅—!.​집무실 문이 박살 나듯 열리며 근위대장과 기사들이 들이닥쳤다.​그들은 참혹한 광경과 폭주하는 검은 알의 마력에 압도당해 발을 뗐다.​“벨루아 공녀를 지하 감옥 최하층에 가둬라. 누구와의 면회도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그녀의 가문에서 반발한다면, 반역으로 간주해 멸문하겠다 전해라.”​카엘루스의 명령은 단호하고 잔인했다.​비명을 지르는 이자벨라를 기사들이 질질 끌고 가자, 집무실에는 거칠게 마력을 뿜고 있는 수박만 한 검은 알과 쓰러진 나, 그리고 카엘루스만이 남았다.​검은 액체에 오염된 알은 괴성을 지르듯 기괴한 진동을 내뿜고 있었다.​흡사 루체른 가에 있던 모습과 유사했다.​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보랏빛 광채가 어둠으로 변해 엘리노아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려 그녀의 손목을 옭아 매고 있는 것이었다.​“감히 내 것을.”​카엘루스가 엘리노아의 한쪽 팔을 고쳐 안고, 다른 손으로 알의 표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치이익—!​황제의 금빛 마력이 검은 오염물질과 충돌하며 불꽃을 튀겼다.​그의 손등에 핏대가 솟고 마찰로 인해 가운 소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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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화. 퇴사 불가 선언 (2)

미세한 균열 소리가 들리자 카엘루스와 나의 고개는 일제히 알로 향했다.​순간, 침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마력 폭발이 일어나서 왔더니, 역시 보통일이 아니군요.”​느긋하면서도 비꼬는 듯한 말투는 제국 최고의 마법사 중 한 명으로 불리는 벨리안이었다.​그는 챙이 넓은 모자를 비스듬히 쓴 채 화려한 마법사 예복을 펄럭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벨리안, 허락도 없이 여긴 웬일이지.”​카엘루스가 차갑게 쏘아붙였지만, 벨리안은 아량곳 하지 않고 거대한 대포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그의 안경 너머로 비치는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번뜩였다.​“폐하께서 직접 마력을 쏟아붓다니, 이런 진귀한 구경을 놓칠 수 없지 않겠습니까?”​벨리안이 알 주변에 남은 검은 액체의 흔적을 살피며 말했다.​찾아낸 흔적을 일일이 제거하는 그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그런데… 냄새가 좋지 않네요.”​마지막 남은 액체를 제거하기 전 손으로 찍어 맛보려는 찰나,​카엘루스의 경멸 어린 눈빛을 느끼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멈췄다.​“이건… 아무래도 심연의 눈물 같은데, 벨루아 공녀가 도대체 이걸 어디서 구한 걸까요?”“그게 뭐냐, 벨리안.”​낮은 목소리로 카엘루스가 물었다.​“이건 정화제가 아니라 생명체를 오염시키는 촉매제입니다. 이 액체는 강제 부화시키기 딱이겠군요.”“강제 부화라고?”​떨리는 내 목소리로 물었다.​벨리안은 나를 향해 예의 그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보좌관님. 제가 일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저 알은 원래 보름달에 맞춰 태어나야 하는데, 이 독한 액체와 폐하의 포악한 기운이 섞인 마력 때문에 지금 알이 마력 폭식 상태입니다. 아마 빠르게 껍질을 깨지 않으면… 안에서 터져 죽어버릴지도 몰라요.”​말을 마친 벨리안이 지팡이를 가볍게 휘두르자, 알 주변으로 복잡한 마법진이 펼쳐졌다.​“그래도 보좌관님은 운이 좋은 편이군요. 보통은 이런 상황이면 각인자가 타버릴 텐데… 꽤 질기신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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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신수의 이름 짓기 (1)

이거 하나는 알 것 같다.​지금 내 상황이 아주 망했다는 것쯤은 말이다.​나는 내 품 안에 안겨든 하얀 여우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눈처럼 새하얀 털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머리를 내 가슴팍에 비비며 세상 얌전한 척을 하고 있는 이 작은 생명체를 말이다.​“뀨우.”​작게 울음소리를 내는 여우가 내 손등에 자신의 코끝을 문질렀다.​아… 귀엽다.​너무 귀엽다!​“아니 아니, 잠깐만!”​나는 정신 차리려 애쓰며 여우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생각해 보니 너… 방금까지 대포알이었잖아.”“뀨?”​여우가 고개를 갸웃했다.​마치 ‘그게 뭐?’라고 하는 얼굴이었다.​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래… 이젠 대포알이 여우가 되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닌 거지.​길에서 사람이랑 부딪혔다고 이상한 물건을 줍지를 않나,​미친 황제 보좌관이 되다가 달걀 크기의 알이 대포알이 되었다가,​결국은 거기에서 신수가 나와서 여신의 기억 어쩌고 하는데,​그래, 뭐 대포알이 여우가 되는 것쯤이야…​“…이 땅에 상식이 사라졌구나.”​내 한숨 섞인 중얼거림을 듣던 벨리안이 흥미로운 듯 웃었다.​“보좌관님. 이건 단순히 사라진 게 아니고, 재탄생 쪽에 더 가깝지 않을까요?”“그런 위로 따위 필요 없어요.”“위로가 아니라 학술적 감상입니다.”​역시… 미친 황제 옆에는 미친 마법사가 있구나.​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품 안의 여우를 내려다보았다.​내 시선이 닿자마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그리고 꼬리가 흔들릴 때마다 은빛 마력 가루가 허공에 흩어졌다.​꼬리의 반짝임이 어찌나 예쁘던지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쓰다듬고 말았다.​부드러웠다.​상상 이상으로 말이다.​“와…”​손 끝에 닿는 털이 마치 구름과도 같았다.​그러자 여우도 눈을 가늘게 접으며 기분 좋은 듯 목을 울렸다.​“뀨우우~”“너, 생각보다 되게 얌전하다.”“뀨.”“아까는 날 죽일 뻔했으면서 말이지.”“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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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신수의 이름 짓기 (2)

“솜뭉치?”“기각.”​카엘루스가 즉시 말했다.​“왜요?”“너무 다정하게 들린다.”“아니, 이름이 다정하면 안 되나요?”“안 된다.”“그럼 대포알?”“그거 괜찮군.”​벨리안이 옆에서 끼어들었다.​“학술적으로 ‘제1형 기억계 신성수’라고 부르면 어떨지요?”“싫어요.”“왜죠? 매우 정확한 명칭입니다만.”“너무 안 귀엽잖아요.”“신수에게 귀여움이 중요하나요?”“중요하죠.”​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벨리안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너는 뭐가 좋아?”​나는 여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나는 다시 여우를 내려다보았다.​“너는 뭐가 좋아?”“뀨.”“뀨?”“뀨우.”“… 뀨라고?”​여우가 꼬리를 살랑살랑거렸다.​“그럼 이름은 뀨?”​그 순간 여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뀨!”​녀석은 기쁜 듯 내 품에서 폴짝 뛰었다가 다시 안겼고, 벨리안은 충격받은 얼굴로 굳었다.​“보좌관님. 설마 신수의 이름을 정말… 울음소리로 정하실 생각입니까?”“본인이 마음에 든다잖아요.”“하지만 역사적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다. 이름에는 격이 있어야…”“뀨.”​여우가 벨리안을 향해 짧게 울었다.​그 순간 벨리안의 모자 끝에 작고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벨리안이 입을 다물었다.​“뀨, 좋은 이름이네요.”​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카엘루스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너무 귀엽다.”“귀여우니까요.”“마음에 안 든다.”“폐하가 마음에 들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있다.”“뭔데요?”​카엘루스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앞으로 저 짐승도 너도 모두 내 침실에 머물 테니까.”​나는 그대로 굳었다.​“…네?”“벨리안이 말하지 않았나. 가까이에서 함께 마력을 주입해야 한다고.”“그게 왜 폐하 침실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지죠?”“가장 안전하다.”“제 방도 있습니다.”“없다.”“있어요.”“없어진 것으로 하지.”“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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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루체른가 가족 회의 (1)

황궁 알현실의 공기는 평소보다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알현실 중앙에 선 두 남자.​루체른 공작가의 현 가주인 칼라일 루체른과 제국 최대 정보 길드 이클립스의 수장이자 내 둘째 오라버니인 카시안 루체른의 기세가 황궁의 화려한 금빛 장식마저 서늘하게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나는 황제의 옆자리에 앉은 채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망했다.’​정말 망했다.​처음 오라버니들이 황제에게 공식 알현을 요청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당연히 내 방에 얌전히 숨어 있을 생각이었다.​가족 문제는 가족끼리.​황제 문제는 황제가 알아서.​이미 복잡해진 문제에 굳이 내가 더해진다고 풀릴 것도 아니고, 나는 가능하면 그 사이 어디에도 끼지 않는 것이 인생을 오래 사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카엘루스는 그런 나를 보며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네 오라비들이 찾아왔다.”“아, 그럼 저는 잠시 제 방에.”“너를 찾더군, 같이 가지.”“네?”“어차피 네 이야기다.”​그래서 나는 지금 제국의 황제 옆에 그것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아니, 도대체 왜 내 자리가 여기야?’​보통 알현실에서 황제 옆자리는 황후나 앉는 자리 아니던가.​아니, 물론 정확히는 황후의 자리가 따로 있는지는 모른다. 나는 황후가 되어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될 생각 따위 추호도 없다.​아무튼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있어서는 안 될 위치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었다.​알현실 중앙에 선 칼라일 오라버니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시리도록 차갑다.​이 엄청난 차가움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내 옆에 앉은 황제를 향한 것이었다.​“폐하.”​칼라일 오라버니가 예를 갖추었다.​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예법이었다.​그러나 그 낮은 목소리 아래에는 칼날 같은 기운이 숨겨져 있었다.​“갑작스러운 알현 요청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카엘루스는 한쪽 팔걸이에 느긋하게 기대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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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루체른가 가족 회의 (2)

​​카엘 숙부는 주변에 겨누어진 검들을 대충 훑어보더니 심드렁하게 손가락을 까딱였다.​그러자 기사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다르게 뽑은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흉흉하게 굴지 마라. 늙은 사람 놀란다.”​저 얼굴로 늙었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외모로 볼 때는 황궁에 있는 기사들 중 절반이 카엘 숙부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황실 기사들 역시 표정이 굳어졌다.​“황궁의 결계를 멋대로 뚫고 들어온 대가를 치르게 할 수도 있다.”​카엘루스가 흥미롭다는 듯 카엘 숙부를 보며 말했다.​“그 결계, 내가 삼십 년 전에 고쳐준 거다.”​카엘 숙부가 태연하게 대답했다.​“내가 만든 문으로 내가 들어왔는데 무슨 대가를 치르지?”​알현실에 또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카시안 오라버니가 작게 중얼거렸다.​“역시 숙부님은 미쳤어.”“들린다.”“존경한다는 뜻이었습니다.”“거짓말도 여전하군.”​카엘 숙부는 피식 웃더니 느긋하게 내 쪽으로 걸어왔다.​카엘루스의 시선이 서늘하게 그를 따라 움직였다.​“가까이 오지 않는 게 좋을 텐데.”“왜?”“엘리노아가 놀란다.”“꼬맹이는 나보다 네 옆에 앉아 있는 걸 더 놀라워하는 것 같은데.”​역시 대현자 K였다.​하지만 나는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카엘루스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기 때문이다.​무섭게 예쁜 얼굴로 그렇게 바라보면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나는 뀨의 등을 쓰다듬으며 매우 바쁜 척했다.​“뀨, 털이 조금 엉켰네.”“뀨?”“아니야. 그냥 제발 가만히 있어.”​카엘 숙부의 시선이 그제야 내 품 안의 뀨에게 닿았다.​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좁아졌다.​방금 전까지 장난스럽던 얼굴이 순식간에 대현자 K로 바뀌었다.​“…….”​그가 말없이 손을 뻗자 뀨의 털이 보송하게 부풀어 올랐다.​“뀨우.”​뀨가 작지만 분명하게 경고하듯 울었고, 카엘 숙부가 멈칫했다.​“성격 한번 더럽군.”“뀨!”​뀨가 발끈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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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꿈을 보여주는 신수 (1)

“…으음”​엘리노아는 이불속에서 작게 몸을 뒤척였다.​북부의 겨울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포근했고, 마치 거대한 난로 옆에 누운 것만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그녀는 몽롱한 정신으로 조금 더 이불을 끌어안고자 했다.​그 순간이었다.​말랑.​“???”​손끝에 닿은 감촉이 이상했다.​이불이 아니었다.​굉장히 부드러운 털이었다.​엘리노아가 천천히 눈을 뜨고, 그대로 굳었다.​“… 뭐야.”​새하얀 털뭉치 하나가 그녀의 품에 얼굴을 처박은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아니.​정확히는 어제보다 좀 더 커져있는 뀨였다.​“뀨?”​졸린 듯 눈을 끔뻑이는 모습이 여전히 귀여웠다.​하지만 풍성해진 꼬리며 희미하게 은빛으로 빛나는 털이 어제와는 또 다른 성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잠깐.”​엘리노아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폐하?”​카엘루스가 바로 옆에 누워 있었다.​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아래 붉은 눈이 느리게 그녀를 향했다.​“시끄럽군.”​잠이 덜 깬 목소리였다.​엘리노아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왜 제 신수가 폐하 품에 들어가 있는 거죠?”​카엘루스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그리고는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네 신수?”​그의 커다란 손이 자연스럽게 뀨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언제 사이가 나빴냐는 듯 기분 좋게 목을 늘어뜨렸다.​“어젯밤 먼저 내 품으로 기어든 건 저 녀석이다.”“뀨?”“봐라. 인정하지 않나.”“저기… 그걸 왜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는데요?”​엘리노아가 경악한 얼굴로 외치자 카엘루스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아침부터 사람 놀리는 게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그때 갑자기 뀨가 움직임을 멈췄다.​“… 뀨?”​녀석의 눈동자가 허공 한 곳을 멍하니 바라봤다.​파지직.​희미한 은빛이 털 사이에서 새어 나오더니 카엘루스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엘리노아도 본능적으로 이상함을 느꼈다.​“뀨? 왜 그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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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꿈을 보여주는 신수 (2)

“이건…”​그가 낮게 중얼거리자 카엘루스가 시선을 돌렸다.​“뭐가 보이지.”​대현자K는 잠시 말없이 허공으로 손을 뻗자 희미한 빛이 그의 손끝을 스치고 지나갔다.​“굉장히 오래된 계열의 마력입니다.”​카시안이 벽에 기대며 물었다.​“신성력 같은 건가?”“조금 다릅니다.”​대현자K의 시선이 천천히 뀨에게 향했다.​녀석은 엘리노아 품 안에서 꼬리를 동그랗게 말고 있었다.​“…저 신수는 기억 속 감정을 끌어내고 있습니다.”​엘리노아가 눈을 깜빡였다.​“감정이요?”“예.”​대현자K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보통 기억 마법은 정보를 읽거나 지우는 방식입니다.”“하지만 저 아이는 다릅니다.”​그의 눈빛이 묘하게 깊어졌다.​“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감정이 남아 있는 기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순간.​엘리노아는 아까 환상 속 루세티아를 떠올렸다.​햇살과 꽃잎, 행복한 웃음이 가득했으나 설명할 수 없던 슬픔까지 모두 말이다.​카시안이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좋은 기억만 보여주는 신수라.”“생각보다 귀엽네.”“뀨.”​뀨가 자랑스럽게 꼬리를 흔들었다.​엘리노아는 아직도 얼떨떨한 얼굴이었다.​“근데 왜 폐하랑 닮은 사람이 나온 거죠?”​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카엘루스의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그녀에게 향했다.​대현자K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카엘루스를 바라봤다.​하지만 카엘루스는 짧게 말했다.​“모른다.”​짧고 담담한 목소리였다.​그런데 이상하게도.​그 한마디가 어딘가 쓸쓸하게 들렸다.​카시안이 분위기를 바꾸듯 피식 웃었다.​“뭐, 아무튼 재밌어졌네.”​그는 자연스럽게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당분간 나도 여기 머무르면서 좀 지켜봐야겠다.”​엘리노아가 고개를 들었다.​“네?”“황궁 분위기가 심상치 않거든.”​그 순간.​대현자K도 조용히 입을 열었다.​“나도 아무래도 당분간 머물어야 할 것 같군.”​엘리노아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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