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버린 아내가 그룹 회장이었다: Chapter 11 - Chapter 20

50 Chapters

제11화 — 흔들리는 왕좌

기자회견 다음 날 아침, JL그룹 본사는 발칵 뒤집혔다.검찰이 서동철 전무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비자금 조성, 횡령, 그리고 허위사실 유포.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서동철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끌려 나갔다.이사회는 긴급 회의를 열었다."이번 일로 확실해졌습니다. 회장님은 위기 앞에서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가장 보수적이던 노(老) 이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선대 회장 시절부터 회사를 지켜온 인물이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엔 의심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후계자라니. 게다가 이혼에, 어린 딸까지. 하지만."그가 서지안을 똑바로 바라봤다."위기 대처 능력, 결단력, 그리고 무엇보다 도망치지 않는 용기. 회장이 갖춰야 할 모든 걸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회장님을 지지합니다."회의실의 임원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서지안은 천천히 일어섰다."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입니다."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단했다."JL그룹은 지난 10년간 곪아 있었습니다. 친인척의 사익, 불투명한 거래, 무너진 원칙. 저는 그걸 전부 도려낼 겁니다. 아플 겁니다. 하지만 그래야 이 회사가 삽니다."누군가 작게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 박수는 곧 회의실 전체로 번졌다.회의가 끝나고, 서지안은 창가에 섰다. 발아래로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10년 전, 이 도시 어딘가의 작은 빌라에서 그녀는 도시락을 쌌다. 그리고 지금, 그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멀었어."그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서동철은 끝이 아니었다. 그저 시작이었다. 진짜 적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 그녀가 받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서지안 회장님. 서동철은 그저 꼬리였을 뿐입니다. 머리는… 따로 있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6
Read more

제12화 — 바닥

강민호의 하루는 무너지고 있었다.권고사직 후 재취업은 번번이 실패했다. 어디를 가도 JL그룹 입찰을 말아먹은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업계는 좁았다."강민호 씨? 아, 그… JL 건 그 사람."면접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걸, 그는 이제 익숙하게 알아봤다.집에 오면 어머니의 한숨이 기다렸다."민호야, 우리 이러다 진짜 길바닥에 나앉는 거 아니냐. 서아라도 있었으면 양육비라도…""엄마!"강민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어머니의 눈가가 붉어졌다.그날 밤, 강민호는 오래된 휴대폰 사진첩을 넘겼다. 서아의 돌잔치. 서아가 처음 걸은 날. 그리고 그 옆에서 환하게 웃는 지안.10년 동안, 그는 그 웃음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매일 새벽 도시락을 싸던 손. 자기 어머니 한약을 달이던 손. 회사 사람들 밥상을 차리던 손. 그 손을 잡아준 적이 있었던가."내가… 뭘 한 거지."그는 사진 속 지안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쓸었다.다음 날, 강민호는 충동적으로 JL그룹 본사 앞으로 향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자신도 몰랐다. 그냥, 얼굴 한 번만 보고 싶었다.로비에서 한참을 서성이던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서지안이 걸어 나왔다. 완벽한 정장, 흔들림 없는 걸음. 그 옆에는 키 큰 남자 강도현이 함께였다. 두 사람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걷고 있었다.지안이 작게 웃었다. 강민호가 10년 동안 한 번도 끌어내지 못한, 그 진짜 웃음을.강민호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그리고 그 순간, 지안의 시선이 우연히 그를 스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6
Read more

제13화 — 빈자리

지안의 눈이 강민호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본 것처럼, 시선은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그게 강민호를 더 무너지게 했다. 분노도, 원망도 아닌, 완전한 무관심.옆에 있던 강도현이 그 시선을 눈치챘다."아는 사람?""아뇨."지안은 짧게 답하고 차에 올랐다.강민호는 멀어지는 차를 멍하니 바라봤다. 손에 쥔 휴대폰에는, 차마 보내지 못한 메시지가 떠 있었다.[미안해. 정말 미안해.]뜨거웠던 연애. 그렇게도 사랑했었던 그녀를 왜 그런 취급하게 되었었는가......그는 끝내 그 메시지를 지웠다.한편 시댁 본가. 시어머니 김 여사는 텅 빈 서아의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작은 침대, 흩어진 장난감, 벽에 붙은 삐뚤빼뚤한 그림. '엄마 아빠 할머니'라고 적힌 가족 그림이었다.양육권 소송은 완패였다. 변호인단 스무 명 앞에서,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의 까진 무릎 사진, 짝짝이 양말, 방임의 증거들.김 여사는 손주의 그림을 손에 쥐었다."내가… 그 며느리한테 못되게 군 죗값을 이렇게 받는구나."10년 동안 그녀는 며느리를 '집에서 노는 여자'라 무시했다. 명절마다 일을 떠넘겼고, 아들 편만 들었고, 손주 앞에서 며느리 흉을 봤다.그 손주가 이제, 그녀를 '나쁜 할머니'로 기억할 것이다.김 여사의 주름진 손등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너무 늦게 온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6
Read more

제14화 — 그 사람의 온도

주말, 서지안은 오랜만에 일에서 손을 놓고 서아와 시간을 보냈다.놀이공원. 서아는 솜사탕을 들고 깡충깡충 뛰었다."엄마! 저거 타자! 저거!""천천히, 서아야. 넘어져."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생각보다 잘 노네, 회장님."강도현이었다. 캐주얼한 차림. 회사에서 보던 서늘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분위기였다."여긴 어떻게…""비서한테 물어봤지. 회장님 주말 일정.""그걸 왜......""같이 있고 싶어서."지안의 말문이 막혔다. 그때 서아가 강도현을 빤히 올려다봤다."아저씨 누구야?"강도현이 무릎을 굽혀 서아와 눈높이를 맞췄다."엄마 친구. 너 이름이 서아지?""어떻게 알아?""엄마가 자랑 많이 했거든. 세상에서 제일 예쁜 딸이라고."서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강도현의 손을 잡았다."아저씨, 같이 회전목마 타자!"지안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10년을 함께 산 강민호도, 서아와 이렇게 편하게 손을 잡은 적이 없었다.오후 내내 강도현은 서아를 목말 태우고, 풍선을 사주고, 함께 웃었다. 지친 서아가 그의 어깨에서 잠들었을 때, 강도현이 조용히 말했다."3년 전에 너한테 투자한 거, 사실 사업 때문이 아니었어.""…그럼요?""그냥, 무너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네가… 눈에서 안 떠나더라."석양이 두 사람을 붉게 물들였다."이제는 옆에 있어도 될까. 회장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강도현으로."지안의 심장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뛰었다.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멀리서 그 모든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7
Read more

제15화 — 함정

월요일 아침, 또 한 번 기사가 터졌다.[JL 서지안 회장, TK그룹 강도현 회장과 열애?… 재벌가 권력 결합설]이번엔 사진까지 있었다. 놀이공원에서 서아와 함께 있는 세 사람. 마치 가족처럼 보이는 사진이었다.회장실에서 그 기사를 본 강도현의 표정이 굳었다."이건 단순한 가십이 아니야.""무슨 뜻이죠?""우리 둘을 엮어서, '권력 야합'으로 몰아가려는 거야. TK가 JL을 집어삼키려 한다는 프레임. 그러면 JL 이사회가 날 경계하게 되고, 네 입지는—""제가 당신 뒤에 숨은 꼭두각시처럼 보이겠죠."지안이 차갑게 기사를 덮었다.겨우 되찾은 신임이었다. '애 딸린 이혼녀'라는 편견을 실력으로 깨부쉈는데, 이번엔 '남자 뒤에 숨은 여자'로 끌어내리려는 것이다."누구 짓이죠?"강도현이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서동철이 잡혀가면서 던진 말 기억해? '머리는 따로 있다'고."지안의 눈이 가늘어졌다."그 머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거군요."그때 비서가 들어왔다."회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약속은 없으신데, 회장님을 꼭 뵙겠다고…"문이 열렸다. 우아한 정장을 입은 중년 여성이 들어왔다. 기품 있는 미소. 하지만 그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오랜만이구나, 지안아."지안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고모."선대 회장의 여동생. 서동철의 누나. 그리고 10년 전, 어린 지안을 가장 먼저 집에서 내쫓으려 했던 사람.진짜 머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7
Read more

제16화 — 진짜 적

서영애. 선대 회장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자, JL그룹 지분 12%를 쥔 대주주.그녀는 우아하게 소파에 앉아 차를 음미했다."네 동생 동철이는 멍청했어. 비자금 같은 걸 직접 만들다니. 꼬리가 잡히는 짓을 하다니, 쯧.""고모가 시킨 일이잖아요.""증거 있니?"서영애가 미소 지었다."없지. 난 한 번도 직접 손을 댄 적이 없거든. 동철이가 알아서 움직였고, 알아서 잡혀갔어. 난 그저… 지켜봤을 뿐이야."지안은 알았다. 이 여자는 서동철과 차원이 다르다. 영리하고, 인내심 있고, 잔인했다."원하는 게 뭐죠?""간단해. 회장 자리에서 내려와. 네 아버지가 남긴 유언장? 그거 무효로 만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정신 감정이니, 강압이니… 변호사들이 알아서 그림을 그려줄 거야.""거절하면요?"서영애가 찻잔을 내려놨다. 달그락,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네 약점은 하나가 아니야, 지안아. 이혼, 딸, 그리고… 강도현."그녀의 눈이 번뜩였다."강도현이 3년 전 너한테 투자한 자금. 그 출처를 캐면 재밌는 게 나올 텐데. 외국 자본, 불법 우회 투자… 잘못 걸리면 강도현도, 너도 전부 끝이야. 사랑하는 사람까지 같이 무너지는 거, 보고 싶니?"지안의 손끝이 떨렸다.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강도현까지 끌어들이는 협박.서영애가 일어섰다."일주일 주마. 잘 생각해. 넌 똑똑한 아이니까, 답을 알 거야."문이 닫히고, 회장실에 정적이 흘렀다.강도현이 지안의 어깨를 잡았다."흔들리지 마. 나 때문에 물러설 생각이라면. ""아뇨."지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는 두려움 대신, 서늘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제가 왜 물러서요. 저 여자, 한 가지 실수를 했어요.""실수?""저를 협박했다는 거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7
Read more

제17화 — 반격의 패

지안은 그날 밤 한숨도 자지 않았다.서영애의 약점. 분명히 있었다. 10년을 숨어 살며 그녀가 배운 건, 완벽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더 깊은 곳에 비밀을 숨긴다는 것이었다."한 실장님. 고모, 서영애의 지난 20년 자금 흐름을 전부 추적해 주세요. 특히 해외 재단으로 빠져나간 돈.""회장님, 그건 시간이…""3일 안에요. 그리고."지안이 노트북을 열었다. 아버지가 남긴 개인 금고에서 찾아낸, 오래된 USB 하나."아버지가 왜 저를 그렇게까지 숨겼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USB 안에는 선대 회장이 생전에 남긴 음성 파일이 있었다. 지직거리는 잡음 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지안아. 네가 이걸 듣고 있다면, 내가 곁에 없다는 뜻이겠지. 영애를 조심해라. 네 어미가 세상을 떠난 그 사고…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증거는 여기에…"지안의 손이 멈췄다.어머니의 죽음. 그녀가 열다섯 살 때,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떠난 어머니. 그게… 사고가 아니었다고?음성은 계속됐다."영애는 그룹을 통째로 삼키려 했다. 네 어미가 그걸 알아챘고… 그래서. 나는 너만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너를 평범한 곳에 숨긴 거다. 미안하다, 지안아. 강해지거라. 그리고… 반드시 진실을 밝혀라."음성이 끝났다.지안은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두 손이 떨렸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었다.그리고 천천히, 그녀는 눈물을 닦았다."고모. 당신이 먼저 건드렸어요."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강도현의 번호."도현 씨. 저 좀 도와주세요. 이번엔, 끝을 볼 거예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7
Read more

제18화 — 매달리는 사람들

같은 시각, 강민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강민호 씨 되시죠? 저는 서영애라고 합니다. 서지안 회장의 고모예요."강민호는 어리둥절했다."무슨 일로…""간단한 부탁이 있어요. 강민호 씨, 돈 필요하지 않아요? 재취업도 안 되고, 어머니 모시기도 힘들 텐데."강민호의 손이 멈췄다."전처에 대해, 그러니까 서지안 회장에 대해 몇 가지만 증언해 주면 돼요. '결혼 생활 중 정서가 불안정했다', '아이를 방치한 적이 있다'… 뭐 그런 거요. 사례는 충분히 하죠. 3억이면 어때요?"3억. 지금의 강민호에게는 상상도 못 할 돈이었다. 그 돈이면 어머니도, 자신의 삶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전화를 끊고, 강민호는 오래 앉아 있었다.3억. 거짓 증언 한 번이면 되는 돈. 어차피 지안은 이미 자기를 모르는 사람 취급했다. 죄책감 따위, 그 무관심한 눈빛 앞에서는 의미가 없었다.그는 펜을 들었다. 서영애 측이 보낸 증언서 초안. '서지안은 결혼 생활 중 정서가 불안정했으며, 아이를 방치한 일이 있었다.' 이 문장 끝에 서명만 하면, 모든 게 끝나는 거였다.그런데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휴대폰 사진첩 속, 새벽 도시락을 싸던 지안의 굽은 등이 떠올랐다. 그리고 더 오래된 기억 하나가, 불쑥 가슴을 찔렀다.연애하던 시절. 비 오는 날,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걷던 길. 그녀는 자기 쪽 어깨가 다 젖는 줄도 모르고 우산을 그에게 기울였다. "넌 감기 걸리면 일주일은 앓잖아." 그렇게 말하며 웃던 얼굴.그 사람을, 정서가 불안정했다고? 아이를 방치했다고?10년 동안 단 하루도 서아 곁을 떠난 적 없던 사람을, 돈 3억에 거짓으로 팔아넘기겠다고.강민호의 손이 떨렸다.자신은 무능했고, 비겁했고, 못났다. 아내를 무시했고, 말로 상처 줬고, 결국 잃었다. 그건 돌이킬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서명만큼은...이건 그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전히 버리는 일이었다."이것까지 하면… 난 진짜 쓰레기가 되는 거야."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7
Read more

제19화 — 우리가 사랑했던 시절

그날 밤, 강민호는 잠들지 못했다.천장을 보고 누워 있는데, 자꾸만 오래된 기억들이 밀려왔다. 막아도 막아지지 않았다. 마치 둑이 터진 것처럼.처음 지안을 본 건, 열두 해 전 가을이었다.작은 출판사 앞 카페.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강민호는 면접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고, 떨어졌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우산도 없었다.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멍하니 비를 보고 있을 때, 누군가 옆에 우산을 내밀었다."이거 쓰세요. 저는 가게 들어갈 거라."그게 지안이었다. 평범한 카디건, 화장기 없는 얼굴. 그런데 웃는 모습이 이상하게 환했다.강민호는 그 우산을 돌려주겠다는 핑계로 다음 날 다시 그 카페에 갔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어느새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이가 됐다.지안은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늘 화제를 돌렸다. 강민호는 그게 그저 수줍음인 줄 알았다. 그녀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는, 상상도 못 했다.대신 지안은 강민호의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 면접에서 또 떨어진 날, 그가 술에 취해 "나는 왜 이렇게 안 풀릴까" 하고 한탄하면, 그녀는 핀잔 한 번 주지 않았다."민호 씨는 분명 잘될 거예요. 지금은 그냥, 때가 안 온 것뿐이에요."그 말이 좋았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 같았다.비 오는 날엔 우산 하나를 나눠 썼다. 지안은 늘 자기 어깨가 젖는 줄도 모르고 우산을 그에게 기울였다."넌 감기 걸리면 일주일은 앓잖아."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웃음에, 강민호는 결혼을 결심했다.청혼하던 날, 그는 가진 돈을 탈탈 털어 작은 반지를 샀다. 한강이 보이는 벤치에서,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내밀었다."내가… 가진 게 별로 없어. 근데 너한테 평생 잘할 자신은 있어. 나랑 결혼해 줄래?"지안은 한참을 말없이 그를 보다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나도… 평범하게, 따뜻하게 살고 싶었어. 민호 씨랑."그때 강민호는 몰랐다. 그녀가 말한 '평범하게'라는 말에, 얼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7
Read more

제20화 —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변화는 천천히 왔다. 너무 천천히 와서, 강민호는 알아채지도 못했다.회사에서 작은 승진을 한 뒤부터였던 것 같다. 월급이 조금 오르고, 사람들이 '강 대리'라고 불러주기 시작했을 때. 강민호는 처음으로 어깨가 펴지는 기분을 느꼈다.그러자 집이 작아 보였다. 라면을 나눠 먹던 단칸방의 추억은, 어느새 '가난했던 시절'이라는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그리고 그 부끄러움의 화살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로 향했다."넌 종일 집에서 뭐 하냐?"처음 그 말을 내뱉은 날, 지안은 잠시 그를 빤히 보다가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강민호는 죄책감을 느꼈지만, 사과하지 않았다. '사실이잖아' 하고 자기를 합리화했다.육아는 온전히 지안의 몫이 됐다. 강민호는 야근을 핑계로 늦게 들어왔고, 주말엔 피곤하다며 잠만 잤다. 서아가 처음 걸은 날도, 처음 '아빠'라고 부른 날도,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지안이 "오늘 서아가 처음 걸었어"라고 들뜬 목소리로 말하면, 강민호는 휴대폰을 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아 진짜? ."말과는 다른 무미건조한 표정. 그게 다였다.어머니가 집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어머니는 며느리를 마뜩잖아 했다. "집안일 하는 여자가 뭐가 힘드냐", "우리 민호가 아깝다" 같은 말을 서슴없이 했다.강민호는 그때 아내의 편을 들었어야 했다. 단 한 번이라도.하지만 그는 어머니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곧 동조였다. 지안이 부엌에서 혼자 명절 음식을 하는 동안, 강민호는 거실에서 어머니와 TV를 봤다.지안은 점점 말이 없어졌다. 강민호는 그게 편했다. 다투지 않으니 평화로운 줄 알았다. 사실은, 그녀가 기대를 하나씩 접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가끔, 아주 가끔, 지안이 새벽에 혼자 베란다에 서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어두운 창밖을 보며,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강민호는 그때 물었어야 했다. "무슨 일 있어?" 하고.하지만 그는 그냥 다시 잠들었다. '여자들 다 그렇지 뭐' 하고.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새벽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8
Read more
PREV
12345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