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버린 아내가 그룹 회장이었다: Chapter 31 - Chapter 40

52 Chapters

제31화 — 두 개의 칼날

강민호의 인터뷰가 역풍을 맞은 그 주, 서영애는 한 사람을 호텔 라운지로 초대했다.강윤서였다."HW그룹의 따님이 직접 와주시다니, 영광이네요."서영애가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강윤서는 다리를 꼬고 앉아,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용건만 말씀하시죠. 저, 시간 아까운 사람이라.""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우리, 원하는 게 같잖아요."서영애가 찻잔을 내려놨다."나는 서지안을 JL 회장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싶고, 부회장님은 서지안을 강도현 씨 곁에서 떼어내고 싶고. 어때요....? 손잡을 만하지 않아요?"강윤서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적의 적은 동지라… 나쁘지 않네요."두 개의 칼날이, 그렇게 한 곳을 향했다.며칠 지나지 않아, JL그룹에 이상 기류가 흘렀다.서지안이 야심 차게 추진하던 자회사 정상화 프로젝트. 그 핵심 자금줄이던 투자은행 두 곳이, 돌연 발을 뺐다. 이미 구두로 합의된 투자였다."회장님, 이상합니다. 갑자기 양쪽 다 발을 빼다니…"한정우가 보고하는 사이, 서지안의 눈이 가늘어졌다."누가 뒤에서 압력을 넣은 거예요. 그것도, 은행이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손이."답은 곧 드러났다. HW그룹이었다. 자산 규모로 JL의 다섯 배가 넘는 초대형 그룹. 그 HW가 거래 은행들에 무언의 신호를 보내자, 은행들은 알아서 JL에서 손을 뗀 것이다.강윤서의 솜씨였다.같은 시각, 강도현에게도 압박이 들어왔다."도현 씨. 요즘 JL 그 여자 일에 신경 많이 쓰던데."강윤서가 그의 집무실로 찾아와 도도하게 말했다."잊었어요? TK가 차세대 기술로 재계에 떠오르자, 우리 HW가 제일 먼저 손을 내밀었죠. 두 집안이 그 큰 그림을 그리면서, 우릴 약혼까지 시켰고요. 그런데 당신이 엉뚱한 데 한눈팔면… 그 협력, 어떻게 될까요?"강도현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윤서야. 사업과 감정을 섞지 마. 그 기술 협력은 협력대로 진행해. 하지만 내 사람 문제는,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야.""내 사람?"강윤서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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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 그녀만의 패

"국내 투자은행은 전부 막혔습니다. HW가 손을 쓴 이상, 어느 곳도 JL과 거래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한정우의 보고는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서지안의 표정은 오히려 차분했다."국내가 막혔으면, 국외로 가면 되죠.""국외라니요…?""강윤서 부회장이 한 가지 놓친 게 있어요. 제가 지난 10년을 어디서 보냈는지."서지안은 노트북을 열었다. 그녀가 해외에서 맨손으로 키운 무역회사. 그 회사가 5년 만에 매출 1조를 넘기는 동안, 그녀가 쌓은 건 돈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에 흩어진 신뢰의 네트워크. 그것이야말로, 서영애도 강윤서도 모르는 그녀만의 패였다.그날 밤, 서지안은 화상 회의를 열었다. 화면 너머에는 싱가포르의 글로벌 투자펀드 대표, 제임스 라우가 앉아 있었다. 3년 전, 그녀의 회사가 가장 어려웠을 때 함께 위기를 넘긴 파트너였다."지안, 오랜만이네요. 그쪽 소식은 듣고 있어요. JL그룹 회장이 됐다고?""맞아요. 그래서 연락드렸어요. JL의 자회사 정상화 프로젝트, 함께하실 생각 있으세요?"제임스가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솔직히 말하죠. JL이 지금 안팎으로 시끄럽다는 거, 알고 있어요. 리스크가 큰 거래예요.""네. 하지만 사람을 보고 투자하신다고, 늘 말씀하셨죠."서지안은 흔들림 없이 그를 바라봤다."3년 전, 모두가 제 회사를 포기했을 때 대표님은 절 믿어주셨어요. 그 믿음, 후회 안 하게 해드렸잖아요. 이번에도 약속드립니다. 제가 직접,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조건은요?""3년 안에 자회사를 흑자로 돌리겠습니다. 만약 목표에 못 미치면, 제 개인 지분으로 손실을 전부 보전하죠."자기가 가진 모든 걸 건 제안이었다. 그 정도의 각오가 아니면, 이 거래는 성사될 수 없다는 걸 서지안은 알고 있었다.화면 너머 제임스가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당신이라면 믿어보죠. 필요한 자금, 우리 펀드에서 댑니다."국내 은행 두 곳이 막은 금액의, 세 배가 넘는 투자였다.며칠 뒤, JL그룹은 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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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 건드리면 안 될 것

서영애의 사람이, 강민호를 다시 찾아왔다."강민호 씨. 서지안의 진짜 약점이 뭔지 아세요? 바로 그 아이예요. 서아 양육권만 가져오면, 서지안은 무너집니다. '회장이라는 사람이 제 자식 하나 못 지킨 무능한 엄마' 그 소문 하나면 충분하죠. 비용도, 변호사도 전부 저희가 댑니다. 강민호 씨는 그저, 아빠로서 권리를 주장하기만 하면 돼요."강민호는 망설였다. 그러나 그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명분은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다. '서아를 위해서.' 하지만 그 그럴듯한 말 아래에서 진짜로 꿈틀거린 건, 서지안을 다시 제 곁으로 끌어오고 싶은 비뚤어진 욕망이었다."…하겠습니다. 어차피 서아는, 원래 우리 딸이니까."스스로를 속이며, 강민호는 또 한 번 어둠의 손을 잡았다.일주일 뒤, 서지안 앞으로 한 통의 법원 서류가 도착했다.[양육권 변경 청구 소송]청구인은 강민호였다. 서류 뒤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대형 로펌이 변호인으로 붙어 있었다. 권고사직 후 재취업도 못 한 강민호가, 그런 로펌을 쓸 돈이 있을 리 없었다."서영애군요."서지안은 단번에 알아챘다. 정공법으로 안 되자, 가장 비열한 길을 택한 것이다. 강민호의 미련을 미끼로, 서아를 무기로 삼아.서지안은 강민호를 직접 만났다."서아를 두고 소송이라뇨. 정말 이렇게까지 하실 거예요?"강민호는 시선을 피하면서도, 끝내 입을 열었다."서아는… 내 딸이기도 해. 아빠가 딸 찾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그리고 지안아, 생각해봤어. 우리 셋이 다시 가족이 되면… 서아한테도 그게 제일 좋잖아. 너도, 회장 일에 애 키우기 힘들 거 아니야.""가족?"서지안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강민호 씨. 당신, 정말 서아를 위해서 이러는 거예요? 아니잖아요. 날 흔들려고, 그 애를 이용하는 거잖아요. 누구한테 돈 받고, 누구 사주를 받아서."강민호의 얼굴이 굳었다. 정곡이었다."10년 동안 서아 등하원 한 번 안 챙긴 사람이, 이제 와서 아빠 노릇이요? 당신이 진짜 원하는 건 서아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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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 엄마의 자격

"회장님, 이번 건은 TK 법무팀의 지원을 받으면 훨씬 수월합니다. 강도현 회장님도 도움을 자청하셨고.....""아뇨."서지안은 또 한 번 고개를 저었다."이건 회장으로서가 아니라, 엄마로서 싸우는 거예요. 서아 일만큼은, 제 두 발로 끝까지 갈 거예요."그녀는 차분히 자료를 정리했다. 강민호의 양육권 변경 청구에 맞설 증거들이었다.가사조사가 시작됐다.강민호 측은 '아버지의 정당한 양육권'을 내세웠다. 하지만 서지안이 제출한 자료 앞에서, 그 명분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지난 10년간 서아의 등하원, 예방접종, 병원 진료, 학부모 상담 기록 그 어디에도 강민호의 이름은 없었다. 전부 서지안 혼자였다.반면 강민호는 현재 무직에, 안정된 거주지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서지안의 변호인은 한 가지 정황을 더 짚었다."청구인은 최근, 제3자로부터 거액을 받고 전처를 음해하는 인터뷰를 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양육권 소송의 막대한 변호 비용 역시, 청구인 본인의 자력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과연 이 소송이, 진정 아이를 위한 것입니까?"조사관의 시선이 강민호에게 향했다. 강민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조사가 끝난 뒤, 복도에서 두 사람은 마주쳤다."강민호 씨."서지안이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서아한테 물어본 적 있어요? 그 애가 뭘 원하는지. 어떤 게 행복한지."강민호의 어깨가 움찔했다."당신은 단 한 번도, 그 애 마음을 물은 적이 없어요. 10년 동안도, 지금도. 당신이 원하는 건 서아의 행복이 아니라, 그 애를 통해 날 다시 붙잡는 거잖아요.""…그게 뭐가 나빠. 가족을 되찾으려는 게.""가족은, 사람을 도구로 쓰는 게 아니에요."서지안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칼처럼 분명했다."훗날 서아가 자라서, 아빠가 자길 어떻게 이용했는지 알게 되면, 그때 당신은, 그 애 눈을 똑바로 볼 수 있겠어요?"강민호는 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집으로 돌아온 강민호는, 오래된 사진첩을 꺼냈다. 서아의 백일 사진.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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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 묻어둔 진실

서영애는 오래된 금고를 열어, 빛바랜 서류 한 묶음을 꺼냈다.15년 전, 그날의 흔적이었다. 한 건의 교통사고. 그리고 그 직전 움직인 자금. 그녀는 그것을 완벽하게 묻었다고 믿어 왔다."서지안이 정 안 흔들린다면… 이 일이 영원히 묻혀 있는 한, 그 아이는 끝내 날 무너뜨릴 수 없어."서영애는 당시 사고 현장에 있던 운전기사를 떠올렸다. 그동안 거액을 쥐여주며 입을 막아온 인물. 그녀는 비서에게 지시했다."그 사람, 다시 한번 단속해. 행여 입을 열 기미가 보이면, 조용히 처리하고."가장 깊은 곳에 묻어둔 칼을, 서영애는 다시 손에 쥐었다. 같은 시각, 서지안은 아버지의 유품 상자를 열고 있었다.양육권 싸움을 끝낸 그녀의 시선은, 이제 더 깊은 과거를 향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 그 진실.그녀는 아버지가 남긴 USB를 다시 재생했다. 지직거리는 잡음 속, 돌아가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영애를 조심해라. 네 어미가 세상을 떠난 그 사고…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증거는, 여기에…"음성은 거기서 끊겼다."여기라니… 아버지, 그게.... 어디예요."서지안은 유품을 하나하나 살폈다. 낡은 만년필, 회중시계, 그리고 손때 묻은 수첩 한 권. 수첩을 넘기던 그녀의 손이, 마지막 장에서 멈췄다.거기엔, 아버지의 필체로 적힌 짧은 메모가 있었다.[지안에게. 진실은, 우리가 마지막 여름을 보낸 그곳에.]마지막 여름. 서지안의 눈이 커졌다.열다섯,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던 그해 여름이었다. 가족이 마지막으로 함께 머문 곳. 강원도 깊은 산자락에 자리한,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별장이었다.붉은 기와를 얹은 아담한 이층 목조 주택. 마당에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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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 별장의 비밀

강원도 산자락의 별장은, 15년의 세월만큼 낡아 있었다.한때 어머니의 수국이 흐드러지던 마당은 잡초로 무성했고, 붉은 기와에는 마른 이끼가 내려앉아 있었다. 다만 별장을 둘러싼 자작나무 숲만은, 그날처럼 바람에 사그락사그락 은빛으로 흔들렸다.서지안은 삐걱이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닫힌 공기 속에서, 오래 묵은 나무 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햇살에 데워진 마루의 그 포근한 냄새는 아니었지만,  그 안에 분명, 어머니의 여름이 잠들어 있었다. 손길이 닿았던 툇마루, 빛바랜 가족사진. 그 모든 것이, 잊고 있던 기억을 한꺼번에 불러왔다.그녀는 아버지의 메모를 떠올렸다. '진실은, 우리가 마지막 여름을 보낸 그곳에.'서지안은 별장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가 쓰던 방의 낡은 마룻장 하나가 들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들어 올리자—그 아래, 작은 철제 상자가 숨겨져 있었다.상자 안에는, 빛바랜 편지 한 통과 낡은 녹음테이프가 들어 있었다.편지는, 어머니의 필체였다.[여보.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건 사고가 아닐 거예요. 아가씨가… 나를 위협하고 있어요. 회사를 차지하려고, 우리 가족을 무너뜨리려 해요. 지안이를 부탁해요. 부디, 우리 아이만은 지켜줘요.]서지안의 손이 떨렸다. 어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곁엔, 늘 서영애가 있었다.떨리는 손으로, 서지안은 휴대폰에 낡은 테이프를 연결해 재생했다. 잡음 끝에, 익숙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영애였다."언니. 그만 욕심부려요. JL은 우리 서씨 핏줄이 이어가야 할 자리예요. 그런데 바깥에서 굴러들어온 언니가, 오빠 곁에서 사사건건 내 앞을 막아서? 언니만 없으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텐데."이어, 어머니의 떨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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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 어둠 속의 빛

헤드라이트 불빛이 눈앞에서 급정거했다.끼익—! 차 문이 거칠게 열리고, 한 사람이 뛰어내렸다."지안아!"강도현이었다.서지안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그가 단숨에 달려와, 휘청이는 그녀를 받아 안았다."괜찮아? 다친 데 없어?"그의 뒤로, 검은 정장의 경호원들이 차에서 쏟아져 나왔다. TK인터내셔널의 인력이었다. 서지안을 쫓던 사내들이, 그 기세에 멈칫하더니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뭐 해! 잡아!"강도현의 한마디에 경호원들이 사내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숲속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수적으로 밀린 서영애의 부하들은, 결국 어둠 속으로 줄행랑을 쳤다.소동이 가라앉은 뒤, 강도현은 서지안의 흐트러진 머리와 긁힌 뺨을 보며 표정이 일그러졌다."왜 혼자 왔어. 이런 위험한 일을, 왜 나한테 말도 안 하고.""…괜찮아요, 선배."서지안은 숨을 고르며, 그러나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걱정 마세요. 저들이 노린 건 이 상자지만, 안에 든 증거는 이미 안전한 서버로 보내뒀어요. 별장에 도착하자마자요. 저들이 절 잡았어도, 소용없었을 거예요."강도현이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헛웃음을 지었다."…넌 정말, 이런 순간에도 머리가 돌아가는구나.""제 싸움이니까요. 끝까지 제가 지켜야죠."그제야 강도현의 얼굴에 안도가 번졌다. 그리고 곧,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그래서… 찾았어? 어머니 일에 대한 진실."서지안은 품에 안은 상자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어머니의 편지와 녹음에 대해 들려주었다. 사고가 아니었다는 것. 서영애가 어머니를 위협했다는 것. 그 모든 것이, 15년간 이 별장에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이야기를 들은 강도현의 머릿속에, 두 개의 얼굴이 스쳤다. 어려운 시절, 아무 조건 없이 손을 내밀어 주었던 서 회장의 인자한 얼굴. 그리고... 굶주리던 자신에게 말없이 빵과 우유를 건네며 "꼭 뭐라도 될 사람 같은데" 하고 웃어주던, 학창시절 그 햇살 같던 서지안의 앳된 얼굴.은인과, 첫사랑. 그 두 사람에게서 받은 빛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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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 빛이었던 사람들

서지안과 강도현은, 곧바로 운전기사를 쫓기 시작했다.15년 전 사고 현장에 있던 그 남자. 이름은 박재수. 사고 직후 거액을 받고 자취를 감춘 인물이었다. 서지안이 가진 옛 기록과 강도현의 TK 정보망이 합쳐지자, 흩어졌던 단서들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다."이름을 몇 번 바꿨네요. 마지막 흔적은… 강원도 어느 항구 마을."서지안이 자료를 짚으며 말했다. 강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서영애도 같은 곳을 쫓고 있을 거야. 우리가 먼저 닿아야 해."두 사람은 밤을 새워 단서를 맞춰 나갔다. 늘 혼자였던 서지안에게, 누군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머리를 맞댄다는 건... 낯설지만, 묘하게 든든한 일이었다.***자정이 넘은 시각. 잠시 자료에서 눈을 뗀 강도현은, 창밖의 불빛을 바라보다 오래된 기억 속으로 잠겨 들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두 개의 빛이, 그곳에 있었다.하나는 서 회장이었다.첫 거래를 성사시킨 날, 서 회장은 강도현을 허름한 국밥집으로 데려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국밥 한 그릇. 비싼 음식점이 아니라, 그게 더 마음에 박혔다. 서 회장은 깍두기를 그의 앞으로 밀어주며, 인자하게 웃었다."천천히 가도 되네, 젊은이. 빨리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무너지지만 않으면 돼."그러고는 문득,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도 자네만 한 딸이 하나 있어. 지금은 어딘가서, 평범하게 제 삶을 꿋꿋이 살고 있지. 자네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그 아이 생각이 나는군."그때 강도현은 몰랐다. 그 '딸'이, 자신이 평생 잊지 못한 그 사람이라는 것을.서 회장의 손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훗날 강도현이 또 한 번 자금난으로 모든 걸 잃을 뻔했을 때, 거래처가 등을 돌리고 은행마저 문을 닫아걸던 그날, 마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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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 묵호항의 증인

새벽의 묵호항은, 짙은 물안개에 잠겨 있었다.비릿한 바다 냄새, 끼룩대는 갈매기 소리, 출항을 준비하는 어선들의 엔진음. 서지안과 강도현은 그 안개를 헤치며, 박재수가 일한다는 낡은 어선을 찾아 나섰다.수소문 끝에, 부두 끝 허름한 컨테이너 숙소에서 한 남자를 찾아냈다. 예순을 바라보는 초췌한 얼굴, 술기운에 젖은 눈. 박재수였다. 거친 바닷바람에 그을린 피부와 깊게 팬 주름은, 한때 그가 어느 재벌가의 운전기사였다고는 믿기 힘든 행색이었다. 15년을, 그는 이름을 바꿔가며 도망치듯 살아온 듯했다. 누군가 자신을 찾아올까, 늘 어깨를 움츠린 채로."박재수 씨."서지안이 다가서자, 남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마치,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누, 누구요…""15년 전, 그 사고. 제 어머니가 타고 있던 그 차를 몰았던 분이시죠."박재수의 손에서 술병이 툭 떨어졌다.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바로 그때였다."거기까지!"컨테이너 밖에서, 검은 옷의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서영애가 보낸 자들이었다. 한발 먼저 도착해, 박재수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그 늙은이, 이리 넘기시죠. 곱게."강도현이 서지안과 박재수를 등 뒤로 감추며, 앞을 막아섰다."넘기면, 이 사람 입을 영원히 막을 셈이겠지. 어림없어."그의 신호에, 뒤따라온 TK 경호원들이 사내들과 맞붙었다. 좁은 부두 위에서 거친 몸싸움이 벌어졌다. 고함과 파도 소리가 뒤엉켰다.사내 하나가 강도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강도현은 침착하게 그 팔을 비틀어,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그대로 메다꽂았다."서지안한테는, 손가락 하나 못 댄다."낮게 깔린 목소리에,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 평소의 다정한 그가 아니었다."이쪽으로!"서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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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 지켜야 할 것

검은 그림자가 흉기를 치켜든 채, 박재수를 향해 달려들었다."안 돼!"서지안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녀가 움직이기도 전에,강도현이 박재수를 끌어안듯 감싸며, 등으로 그 칼날을 막아섰다.퍽, 둔탁한 소리. 흉기가 강도현의 등을 깊게 파고들었다. 새하얀 셔츠 위로, 붉은 피가 순식간에 번졌다."강도현!"서지안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강도현은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휘청이는 몸을 가까스로 버텼다. 그 틈에 달려온 경호원들이, 흉기를 든 사내를 바닥에 제압했다. 나머지 사내들도 곧 하나둘 무릎 꿇렸다. 짧고 거친 소란이, 그제야 가라앉았다.서지안이 강도현에게 달려갔다."선배! 등이… 피가, 이렇게 많이…"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등이었다. 하필, 등이었다. 척추는 다치지 않았을까. 잘못되면 다시는 걷지 못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처음이었다. 늘 침착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무너진 것은.서지안은 떨리는 손으로 목에 두른 스카프를 풀어, 그의 등 상처를 힘껏 눌러 지혈했다. 흰 스카프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래도 피는 좀처럼 멎지 않았다."괜찮아."강도현은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도, 옅게 웃어 보였다."이 정도로는… 안 죽어. 그보다… 박재수 씨는?"자신의 상처보다 증인을 먼저 챙기는 그 모습에, 서지안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왜 이 사람은,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무엇이 이 남자를, 이토록 자신의 일에 뛰어들게 만드는 걸까."…왜요. 왜 이렇게까지 다치면서."강도현이 그녀를 바라봤다. 피 흘리는 와중에도, 그 눈빛만은 흔들림이 없었다."지켜야 할 게 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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