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바람에 흩어진 맹세: Bab 11 - Bab 20

22 Bab

제11장

마침내 불길이 잦아들었을 때, 소지환의 열 손가락은 이미 살점이 터져나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그는 이성을 잃은 듯 검게 그을린 폐허를 향해 몸을 던졌다. 검은 도포 자락이 사방으로 튀는 불똥에 사정없이 태워져 무수한 구멍이 뚫렸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왕야! 위험하옵니다!”호위들이 황급히 달려들어 그를 가로막았다.“물러가라!”소지환은 핏발 선 눈으로 포효하며 단 한 번의 손바닥질에 호위를 후려쳐 멀리 내던졌다.그는 열기가 가시지 않은 뜨거운 잿더미 속에 무릎을 꿇은 채 맨손으로 부러진 대들보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까맣게 탄 나무 가시들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먼저 입은 상처와 뒤엉켰고, 검붉은 선혈이 숯덩이를 타고 뚝뚝 떨어져 잿더미 위에 어두운 핏자국을 남겼다.한 개, 두 개.열 개, 스무 개.그는 감각이 마비된 듯 폐허 속의 목재들을 나르고 또 날랐다. 손톱이 뒤집혀 찢겨 나가고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하얀 뼈가 흉측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하늘에 어슴푸레하게 새벽빛이 밝아올 때까지, 타다 남은 뼛조각 몇 개 외에는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더 찾거라!”소지환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찢겨 쇳소리를 내고 있었다.“왕부를 통째로 뒤엎어서라도 반드시 그이를 찾아내야 한다!”그때 마른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치더니 장대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차디찬 빗줄기가 소지환의 몸을 사정없이 때리며 턱 끝을 타고 흘러내렸으나, 그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는 없었다. 검은 비단 도포가 흠뻑 젖어 수척한 몸에 달라붙은 채 폐허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와도 같았다.“왕야...”집사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우산을 받쳐 들고 조심스레 다가왔다.“채안 낭자께서는 이미...”“이미 어찌 되었단 말이냐?”소지환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눈빛 속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서슬 퍼런 살기가 번뜩였다.집사는 혼비백산하여 반 걸음 물러서면서도 이를 악물고 말을 이어갔다.“화염이 워낙 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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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꼬박 이레 동안, 소지환은 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안으로 들여보낸 수라상은 손도 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들려 나왔고 바닥에는 빈 술단지만이 어지러이 굴러다닐 뿐이었다. 호위는 더는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끝내 상전의 옥체가 보전되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목이 날아갈 각오를 하고 처소의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이윽고 난장판이 된 처소와 구석에 초라하게 웅크리고 있는 소지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강채안이 남기고 간 헌 옷을 품에 꼭 껴안고 있었다. 턱밑에는 거뭇한 수염이 거칠게 돋아났고, 눈 밑은 깊이 가라앉아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정의 권세를 한손에 쥐고 흔들던 섭정왕의 위엄은 이 처량한 사내에게서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왕야.”호위는 무릎을 꿇으며 간곡히 아뢰었다.“더는 이리 옥체를 해치지 마시옵소서. 채안 낭자의 죽음이 그토록 억울하고 원통하니, 낭자 역시 왕야께서 하루빨리 흉수를 찾아 원혼을 달래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옵니다.”소지환이 무겁게 눈을 들어 올렸다. 호위의 말에 그의 눈시울이 다시금 번져졌다.“알았으니, 그만 물러가라.”“예.”호위는 더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서둘러 밖으로 물러났다.문이 닫히는 그 찰나, 소지환은 마침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렸다. 옥 비녀를 꽉 움켜쥔 채 바닥에 엎어졌다. 차디찬 바닥에 이마를 짓찧으며 얼굴 가득 눈물을 쏟아냈다.그녀는 정말로 세상을 떠났다.그가 매번 모질게 외면할 때마다 조금씩 사그라들던 목숨은, 스무 대의 모진 형벌 아래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끝내 한마디조차 전하지 못했다. 서역에서 공수해 온 그 단도가 오직 그녀만을 위해 마음을 써서 구한 물건이었다는, 그 단 한마디를.“강채안...”소지환은 옥 비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나직이 이름을 불렀다. 이윽고 눈물이 툭툭 바닥을 적셨다.“돌아와 다오, 제발 돌아와 다오...”그러나 그를 맞이하는 것은 창밖을 사납게 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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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소지환은 강서하의 처소 문 밖에 우두커니 선 채, 손에 쥔 백옥 비녀를 부서뜨릴 듯 꽉 움켜쥐었다.본래는 이쯤에서 인연을 끊고자 여비를 넉넉히 쥐어주며 좋게 헤어지려던 참이었다.그러나 채 문을 밀치기도 전에, 안쪽에서 귓전을 찌르는 날카로운 악다구니가 터져 나왔다.“이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강서하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아양 섞인 부드러움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리어 칼날처럼 매섭고 표독스러울 뿐이었다.“왕야께서 이제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는데, 겨우 이따위 작은 일조차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다는 말이냐? 내가 총애를 잃고 내쳐진다면 너희 중 누구 하나도 무사치 못할 줄 알거라! 내 죽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너희부터 지옥으로 끌고 들어갈 것이야!”소지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안을 살폈다.화려한 비단옷을 걸친 강서하는 얼굴을 흉측하게 일그러뜨린 채, 손에 쥔 가늘고 긴 채찍을 바닥에 무릎 꿇은 여종에게 사정없이 휘두르고 있었다. 여종은 감히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매질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어깨가 순식간에 터져 핏자국이 배어 나왔으나, 입술을 짓씹으며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한심한 것들! 죄다 밥만 축내는 버러지들이로구나!”강서하는 악에 받쳐 고함을 지르더니 곁에 있던 다른 여종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왕야의 동태를 알아오라 일렀거늘, 그것조차 알아내지 못하니 내 너희를 어디다 쓰겠느냐?”이미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여종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강서하는 구석에 웅크린 가장 여리고 마른 아이에게 다가가 음산하게 협박하기 시작했다.“네 어미가 폐결핵을 앓고 있으며, 집에는 보살펴야 할 어린 동생이 셋이나 있다고 하였더냐? 만일 내가 네년의 품삯을 끊고 이 마당에서 매 맞아 죽게 만든다면, 네 남은 식솔들은 어찌 살아가겠느냐?”그 잔인한 말에 어린 여종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 울부짖으며 맨바닥에 이마를 찧고 또 찧었다.“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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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왕... 왕야...”강서하의 목소리가 잘게 떨려왔다. 순식간에 핏기가 가신 얼굴에 이내 가련한 기색이 들어찼다.“어찌 이곳까지 발걸음을 하셨사옵니까...”이윽고 소지환이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서슬 퍼런 한기는 마주하는 이를 그대로 얼려버릴 듯 매서웠다.“계속해 보아라.”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소름 끼칠 정도의 고요함이 깃들어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리 신이 나 떠들지 않았느냐?”강서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이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왕야, 제발 제 청을 들어보시옵소서. 신첩은 그저... 그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저도 모르게 실언을 한 것이옵니다...”“화가 치밀어?”소지환이 차갑게 비웃었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서 사시나무 떨듯 웅크린 여종들을 훑고는, 다시 강서하에게 멎었다.“화가 난다는 이유로 이리 매질을 장난삼아 한단 말이냐?”“이 비천한 것들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기에 그저 훈육을 하려던 것뿐이옵니다...”강서하는 황급히 변명하며 소지환의 소매자락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왕야도 아시지 않사옵니까. 신첩은 평소 개미 한 마리조차 밟지 못하는 사람이옵니다...”짝!소지환의 손바닥이 강서하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워낙 힘이 실린 탓에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나뒹굴었다.강서하는 얼떨떨하게 뺨을 감싸 쥐었다. 입가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왕야... 지금 저를 치신 것이옵니까?”“어디 친 것뿐이겠느냐?”강서하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는 한 조각의 온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네년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강서하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침내 모든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났음을 깨달은 그녀는 울부짖으며 기어와 소지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왕야! 제가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그저 왕야를 너무도 연모한 나머지 눈이 멀어 이리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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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소지환은 옥사 입구에 우뚝 선 채, 눈빛에 들끓는 분노를 번뜩였다. 호위들이 강서하를 거칠게 끌고 가더니 가장 깊숙하고 음습한 옥사 안으로 사정없이 밀쳐 넣었다.강서하는 비틀거리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한때 비단결 같던 화려한 의복은 흙먼지로 뒤덮였고 머리가 산발로 흐트러져 예전의 고운 자태는 찾아볼 수 조차 없었다.“왕야! 왕야, 살려주시옵소서!”강서하는 바닥을 기어와 쇠창살을 움켜잡으며 애처롭게 오열했다.“신첩이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제발 언니를 보아서라도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언니?”소지환이 차갑게 실소를 터뜨리며 천천히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손아귀로 그녀의 턱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뼈가 으스러질 듯한 악력이었다.“네까짓 년이 감히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느냐?”강서하는 뼈가 깎이는 듯한 고통에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면서도 감히 거역하지 못한 채, 그저 애달프게 목숨만을 구걸하였다.“왕야... 참으로 잘못하였나이다...”소지환은 냉정하게 손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그리고 얼음장처럼 시린 목소리로 명하였다.“집행하라.”호위가 즉시 앞으로 나서더니 팔팔 끓는 가마솥의 뜨거운 물 한 바가지를 강서하에게 그대로 퍼부었다.“아아아악!”옥사의 공기를 찢는 듯한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강서하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어느새 살갗은 순식간에 붉게 부풀어 오르며 물집이 잡혔다. 그녀는 바닥을 뒹굴며 고통으로 울부짖었다.“아프냐?”소지환은 한 치의 동요도 없는 싸늘한 낯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네년이 사람을 시켜 강채안에게 끓는 물을 끼얹었을 때, 그 사람이 느꼈을 고통을 단 한 번이라도 헤아려 보았더냐?”강서하는 극심한 통증에 차마 말도 잇지 못하고, 그저 몸을 웅크린 채 식은땀과 눈물 범벅이 되어 바닥을 기었다.소지환이 다시 손짓을 하자, 호위가 달려들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가늘고 긴 은침 하나가 그녀의 손톱 밑을 향해 서서히 파고들었다.“왕야! 신첩이 참으로 뉘우치고 있사오니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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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눈을 뜨는 순간,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뼈마디 하나하나가 맷돌에 갈려나간 듯 으스러지는 것 같았고, 살갗의 구석구석마다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쉼 없이 밀려들었다. 나무 창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을 찌를 듯 강렬했다. 강채안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좁히며, 멍한 머릿속으로 지금 자신이 황천 어귀에 서 있는 것인지 아직 이승에 붙들려 있는 것인지 가늠하려 했다.그때 기억이 한꺼번에 쏟아졌다.가사약, 섭정왕부... 그리고 그날 밤을 집어삼켰던 불길.당시 소지환의 곁을 지키던 시녀 하나를 매수했었다. 수년에 걸쳐 한 푼 두 푼 모아온 전 재산을 그 손에 쥐여주고, 단 하나만 부탁했다. 자신의 숨이 끊어지거든 불을 질러 혼란을 일으켜 달라고. 그 틈에 시신을 왕부 밖으로 빼돌려, 인적 없는 깊은 숲속 어딘가에 그냥 던져두면 그만이라고.거두어줄 이 하나 없는 황야에서 홀로 썩어가는 신세가 되어도 아깝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것이 그녀가 바랐던 끝이었다.그런데 살아있었다.삐걱.그때, 나무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역광을 등진 훤칠한 그림자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강채안의 온몸이 반사적으로 굳어들었다. 손은 이불 자락을 꽉 움켜쥐었고, 눈빛은 저도 모르게 날이 서며 문 쪽을 향해 꽂혔다.“정신이 드시는구려.”들어선 이의 목소리는 낮고도 온화했다. 그 안에 나지막한 안도가 배어 있었다.그는 침상 곁으로 빠르게 다가와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탕약 한 사발과 맑은 미음 한 그릇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제야 강채안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소박한 흰 도포, 흐트러짐 없이 고른 이목구비. 맑고 청초한 기품이 온몸에서 풍겨 나왔다. 속세의 먼지가 닿지 않는 사람처럼 어딘지 이 세상과 조금 비껴선 듯한 인상이었다.“그리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그는 그녀의 서슬 퍼런 눈빛을 읽고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채, 탕약 사발을 탁자 끝에 살며시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웃었다.“서운조라 하오. 이 골짜기에서 의원 노릇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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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시냇물처럼, 시간은 소리 없이 흘러갔다.서운조의 정성 어린 손길이 날마다 이어지자 강채안의 몸에 새겨졌던 크고 작은 상처들도 조금씩 빛을 잃어갔고, 안색에도 서서히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게다가 말수도 늘었다. 약재를 늘어놓은 선반 주변을 어지럽히는 참새들을 향해 소리를 치기도 했고, 서운조가 약을 달이다 실패하여 얼굴에 그을음을 잔뜩 묻힌 채 멋쩍게 서 있을 때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서운조 역시 약초를 구하러 산 아래로 내려갔다 돌아오는 길이면 어김없이 작은 것들을 챙겨왔다. 어떤 날은 계피향이 은은한 계피사탕 한 봉지였고, 어떤 날은 저잣거리에서 갓 들여온 이야기책 몇 권이었으며, 또 어떤 날은 투박하지만 들꽃 같은 정취가 배어있는 나무 비녀이기도 했다. 나른한 오후면 강채안은 마당에 놓인 대나무 의자에 몸을 파묻고 책장을 넘겼다. 선비와 규수의 사랑 이야기, 협객들의 무용담. 따스한 햇살을 등에 받으며 그 안으로 깊이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만큼 해가 기울어 있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초저녁, 서운조가 평소보다 일찍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탈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하나는 눈매가 영민해 보이는 백여우 탈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늘하면서도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청란(青鸞) 탈이었다.“오늘 밤 산 아래 마을에서 연등회가 열린다오.”서운조는 백여우 탈을 그녀의 눈앞에 내밀며 다정하게 웃었다.“강물 위로 등불이 흘러가 장관을 이룬다 하니, 제법 떠들썩할 것이오. 함께 가시겠소?”강채안은 순간 굳어버렸다.연등회. 그 단어가 귓속에서 잠깐 맴돌았다. 마치 오래전에 잊어버린 언어처럼,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자신의 것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말이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피비린내 나는 어둠과 얼음처럼 차가운 명령들뿐이었다. 사람이 넘쳐흐르는 축제란 지난날의 그녀에게 언제나 위험의 다른 이름이었다. 방심하면 죽는 곳,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안 되는 곳. 몸 안 깊숙이 새겨진 경계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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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근래 도성 안팎에 난데없이 역병이 다시 창궐하자, 서운조는 서둘러 행장을 꾸려 하산할 채비를 서둘렀다.“이번에는 저도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강채안이 약초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품에 안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서운조는 그녀를 한 번 바라보더니, 부드럽게 웃었다.“그리합시다.”저잣거리 어귀에 임시 의원 자리를 펼쳐 놓자마자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서운조가 온화한 얼굴로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맥을 짚는 동안, 강채안은 그 곁에서 익숙한 손길로 약재를 빻고 나누어 담았다. 때로는 말 없이 침을 건네며 그와 소리 없는 호흡을 맞추었다. 이렇듯 분주하면서도 평온한 나날이 그녀는 참으로 좋았다.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준비해 온 약재가 바닥을 드러냈다. 강채안은 잠시 머물고 있는 거처로 발길을 돌렸다.푸른 박석이 깔린 길을 따라 혼자 걷던 중이었다. 마을 어귀의 개울가를 막 지나치려던 순간, 정적을 갈라놓는 비명이 사방을 찢었다.“아이고, 내 새끼! 우리 아이가 물에 빠졌소!”대여섯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거센 물살이 야속하게도 아이를 깊은 물살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강가에 모여든 어른들은 혼비백산하여 발만 동동 구를 뿐, 감히 뛰어드는 이는 없었다.그 순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암위로 살아온 세월이 뼛속 깊이 새긴 본능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사람이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는지. 강채안의 몸은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아오르고 있었다. 돌난간을 가볍게 박차고 도약한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얼음장 같은 강물이 옷자락을 무겁게 끌어당겼지만 개의치 않았다. 빠르게 헤엄쳐 아이 곁으로 다가간 그녀는 아이를 등에 업고 숨을 몰아쉬며 강가로 돌아왔다.물을 잔뜩 들이켜고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어미의 품에 안겨주었을 때, 강채안 역시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얇은 면사마저 비틀어져 뺨에 달라붙었다. 그녀가 매무새를 고치려 고개를 숙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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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장

소지환은 끝내 떠나지 못했다.천신만고 끝에 찾아낸 그녀였다. 데려가지 못한 채 돌아선다는 것은,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는 의원 맞은편의 주막을 통째로 사들여 가장 좋은 방을 차지했다. 창을 열면 의원 안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였다.매일 이른 아침, 그는 그 창가에 서서 강채안이 서운조를 도와 의원 문을 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찾아온 아녀자와 어린아이들을 다정하게 안내하는 모습을, 뒷마당 약초밭에 쪼그리고 앉아 새로 심은 약초에 물을 주는 모습도 전부 눈에 담았다.그 풍경들이 매 순간 그의 심장을 찔렀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눈길을 차마 돌릴 수가 없었다.생기가 넘쳤다. 평온했다. 때로는 엷은 웃음까지 머금었다.그런 강채안의 모습은, 그가 단 한 번도 온전히 가져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영영 잃어버린 것이기도 했다. 회한이 시시각각 그의 이성을 갉아먹었다.그는 서툴게나마 속죄를 시작했다. 먼저 약재였다. 수하들에게 명하여 천하의 희귀한 약재들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으게 했다. 백 년 묵은 산삼, 얼음처럼 투명한 설련화, 이역만리에서 건너온 영초까지. 함과 상자에 겹겹이 쌓인 것들이 호위들의 손에 받들려 의원 문 앞으로 정중히 배달되었다.“왕야의 명이십니다. 채안 낭자의 기력을 보하기 위해 하사하신 것이옵니다.”강채안은 그 귀한 것들을 덤덤히 곁눈질할 뿐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받지 않겠소. 의원에는 약재가 차고 넘치니 이런 것은 소용없구려. 도로 가져가시오.”추호의 미련도 없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매번 그 진귀한 약재들은 고스란히 주막으로 되돌아와 소지환의 방 안에 쌓여갔다.약재가 통하지 않자, 그는 오래된 기억을 뒤졌다.수년 전의 일이었다. 강채안이 임무를 마치고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돌아왔던 날, 그가 드물게 먹고 싶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었다. 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답했다.“약과이옵니다.”당시 그는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주방에 대강 만들라 일렀을 뿐, 그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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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서운조와 강채안이 이번에 산을 내려온 것은 역병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들불처럼 번지는 역병의 기세는 두 사람의 짐작을 아득히 뛰어넘었다.처음에는 그저 간간이 기침을 하고 열이 오르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도성의 크고 작은 골목마다 어김없이 병마가 들이닥쳤다. 약방 문 앞에는 얼굴이 누렇게 뜨고 피골이 상접한 백성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자신들이 불치병에 걸린 줄로만 여긴 이들은 날마다 맨바닥에 누워 천명을 받아들이듯 통곡을 쏟아냈다.서운조가 운영하는 의원은 밀려드는 환자들로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의 안색에는 깊은 피로가 역력했고 눈가에는 핏발이 서렸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서를 들추며 처방을 맞추느라 눈 한 번 붙이지 못했다. 좁은 마당에는 매일같이 쓰고 묵직한 탕약 냄새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감돌았다.강채안은 그의 곁을 지키며 묵묵히 궂은일을 나누어 맡았다. 약재를 찧고 나누어 담는 일에만 머무르지 않고, 서운조를 도와 환자들의 증세와 탕약 복용 후 나타나는 거부 반응을 기록하는 법을 익혔다. 병세가 극도로 위중한 백성들의 상처를 친히 싸매고 탕약을 입에 흘려 넣어 주기까지 했다. 그녀의 손길에는 타고난 과단성이 서려 있었으되, 이번만큼은 사람을 해하기 위함이 아닌, 오직 살리기 위함이었다.어느덧 고을 백성들의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한 끼조차 굶기를 거듭 하였으니, 약재를 구하는 일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서운조와 강채안은 서로 시선을 나누었다.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두 사람의 마음은 이미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제게 아직 섭정왕부에서 가지고 나온 옥가락지가 있으니, 이것을 처분하면 될 것입니다.”강채안이 품속에서 가락지를 꺼내어 서운조의 손바닥 위에 조용히 올려놓았다. 서운조는 잠시 침묵을 지켰으나, 끝내 그것을 거두어들였다.그들은 서운조가 오랜 세월 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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