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홍양은 저도 모르게 자꾸 그녀를 훔쳐보고, 그녀가 궁금하고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을 애써 눌러야 했다.한양에 두고 온, 부인과 아이들을 떠올렸다. 절대,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고고한 선비이기를 바랐다.“나리.”그가 뒤를 돌아보자, 게슴츠레 눈을 뜬 하령이 곁으로 다가왔다.“송구합니다. 깜빡 잠이 들었나 봐요. 이만, 소인은 가보겠습니다.”홍양은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다음날, 온 마을을 뒤덮은 거센 눈발에 홍양은 관아에서 나와,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늘 자신을 맞아주던 하령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눈이 오는 게 어딜 간 게야?”그는 구들장으로 가, 그녀와 자신의 방에 장작을 밀어 넣고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향리가 나무를 지고 들어오며, 그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하령이 보이지 않는구나.”“아까 마주쳤을 때, 빨래터에 간다고 했습니다.”홍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방으로 들어갔다.등불을 켜고, 서책을 폈다. 어쩐지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거세지는 바람과 눈발이 신경이 쓰여 자꾸만 밖을 내다봐야 했다.결국, 참지 못하고 방문을 넘었다. 눈발은 더 거세지고, 눈은 발목을 넘어 무릎깊이까지 쌓이고 있었다.“왜 이리 안 오는 게야?”초조한 발걸음이 눈 위에 발자국을 깊게 남겼다.그는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설피를 짚신 위에 단단히 묶고, 도롱이를 걸친 뒤 삿갓을 눌러썼다.한발 한발 걷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겨우 빨래터에 도착했지만, 하령은 보이지 않았다.그의 심장이 불안함을 감지한 듯,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그는 빨래터 인근을 다 뒤졌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근처 산으로 오르며 하령의 이름을 불렀다.“하령아! 하령아!”정신없이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그는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하령아!”“나, 나리.”희미하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바위 위에 위태롭게 앉아 있었다.“왜! 왜 이런 곳에 있느냐?”
스물다섯의 젊은 홍양은 듬직한 두 아들을 품에 안았다.어느새 의젓해진 큰 아들의 어깨를 붙잡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걱정과 근심, 애정이 가득 담긴 얼굴이었다.“문아, 아 아비가 없는 동안 동생과 어머니는 네가 지켜야 한다. 알겠지?”“네. 아버지.”진도 홍 씨 가문의 장자답게, 그는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우렁차게 대답했다.“늦겠습니다. 대감. 어서 서두르세요.”곧 산달이 다가오는 부인은, 먼 길을 떠나는 지아비 앞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아쉬움의 눈빛도, 다정한 인사말도.그것이 이 큰 저택과 집안을 지탱하는 그녀의 책임감임을 알기에, 서운하지는 않았다.그는 그녀를 품에 안으려던 손을 거두며, 담담히 말했다.“다녀 오리다.”홍양은 말에 올라탔다.자신을 향해 허리를 숙인 아들들과 부인은, 그가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고 그를 배웅했다.홍양은 전라 나주목 관할의 군수로 임명이 되어 길을 나서는 길이다.3년. 가족과 떨어져 고생을 하겠지만, 한양에 다시 돌아오면 그는 더 높은 자리로 갈 수 있을 것이다.그것을 위해서는 이 정도 불편함쯤은 충분히 감수할 만하며,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가족을 두고 멀리 떠나야 하는 그의 걱정과 부담을, 그의 부인은 단칼에 잘라 냈다.어서 다녀와, 가문을 빛내라며 그를 독려했다.그 독려에 그 또한 그리하리라 마음 먹었다.먼 길을 달려, 바다가 보이는 전라도 나주목에 도착했다.넓은 평야와 산,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 좋은 곳이었다.“어서 오십시오. 군수 나리. 이쪽으로 오시지요.”향리가 홍양이 거처할 가옥으로 안내를 했다.아담하지만, 기품이 넘치는 곳이 꽤 마음에 들었다.특히나 사랑방에 올라 보이는 강가의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다.그때, 관리의 뒤로 수줍게 고개를 숙인 소녀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인사 올리거라. 군수 나리시다.”“처음 뵙겠습니다. 나리. 윤가 하령이라 하옵니다.”다소곳하게 모은 손부터, 고개를 들 때 드러난 매끄러운 이마와 가는 눈매가
날카로운 목소리에 다시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방안은 피가 낭자했고, 폐비는 목에 칼을 꽂은 채 엄청난 피를 흘리며 누워 있었다.연화가 가까이 다가가자, 눈을 희미하게 뜬 폐비와 시선이 마주쳤다.눈을 파르르 떨던 폐비가 힘겹게 입을 열었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입모양으로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말을 연화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고맙네.’힘겹게 말을 마친 폐비를 향해 연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침내 폐비의 고개가 툭- 연화의 품에 떨어졌다.온몸에 피를 묻힌 채, 궁으로 돌아온 그녀의 행색에 궁인들이 모두 아연실색했다.그녀가 궁으로 도착했다는 소식에, 겸이 한달음에 달려왔다.소름 끼치는 행색이었다.“연화야!”그러나 겸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어찌, 그곳에 혼자 간 것이야? 이제 네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는데!”“마무리 짓고 싶었습니다. 근데, 스스로 떠나셨습니다.”“그래, 그래.”그녀의 등을 쓰다듬는 그의 따뜻한 손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그 업보를 다 어찌할는지요.”“그 정도 각오도 않고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이제, 정말 끝인가요?”“아니, 생은 길고 왕관의 무게는 무겁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어찌 풍파가 없겠느냐.”“그렇겠지요?”그의 턱이 연화의 어깨에서 들썩였다.“하지만 너와 나, 우리가 함께 라면 견디지 못할 일들이 무엇이겠느냐.”연화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이제는 소년티를 벗은 중후하고 인자한 그가, 큰 품에 그녀를 품고 있다.헤쳐나가지 못할 일이 어디 있으랴.함께 전장을 돌고, 모진 궁궐의 암투와 풍파를 함께 거쳐 왔는데.그 모든 것이 서로에 대한 연심과 끈끈한 연대로 이루어진 것이니, 그와 함께라면 남은 삶은 축복이 될 것이다.연화는 겸의 손의 꽉 그러쥐었다.“전하, 피곤합니다. 자고 싶어요. 곁에 계셔주실 거죠?”그녀를 향한 애정 어린 눈빛이 스며들고, 그녀의 곤한 눈가를 쓰다듬는 손길은 퍽-부드러웠다.“그러고
무어라 답을 해야 할까?언젠가는 세자가 알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오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이제는 궁 안 모든 이가 연화가 호위무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자신과 임금을 지키던 무사가 어머니가 되어 중전의 자리에 앉았다는 걸 세자가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언제, 어떻게 이야기해야 세자가 이해할 수 있을까.늘 고민했지만,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었다.늘 당차고 침착하던 연화도 이 순간만큼은 평정심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굳은 표정으로 선 연화를 향해, 세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소자는 아직 어려서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세자, 그것은…”“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소자는 홍연 대장도, 지금의 어마마마도 정말 좋습니다.”세자의 속 깊은 말에 감동한 연화는 그를 살포시 안았다. 그것이면 충분했다.그 작은 품에서 나오는 포용과 아량에 연화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세자를 속이거나 숨기려 했던 건 아닙니다. 다만 시간이 좀, 필요했어요. 시간이 지나면 세자도 이 상황을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거예요.”“예, 어마마마. 그때가 되면 어마마마께서 직접 들려주세요.”“그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세자.”“그리고, 오늘 소자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마마마.”세자의 진심 어린 고마움에 연화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고, 그를 더욱 꼭 껴안았다.세자를 산에서 내려 보낸 후 연화는 일행들과 헤어져 곧장 폐비가 머무는 궁으로 향했다.궁이 눈앞에 들어오자, 억눌렸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말에서 뛰어내리듯 내려, 대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갔다.연화를 발견한 나인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뉘, 뉘신지…”“폐비는 어디 계신가?”나인은 연화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 보였다.“마, 마마께서는…”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그녀에게 뒷걸음질 치는 나인을 지나쳐 안채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겁에 질린 듯한 세자의 목소리에, 연화는 세자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단호하게 말했다.“세자! 칼을 드세요.”얼이 빠진 듯 멍하니 서 있던 세자는 연화의 명령에 엉거주춤 허리에 있는 칼을 뽑아 들었다.하지만 세자가 칼을 뽑아 들었을 때는 이미 괴한들이 그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세자는 두 손으로 칼을 꽉 움켜쥔 채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온몸을 떨고 있었다.연화는 가슴속에 감춰 두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그리고 자신과 세자를 향해 달려드는 괴한의 심장을 단숨에 꿰뚫었다.그리고 또 다른 괴한이 달려들기 전에 좀 더 튼튼한 칼을 확보해야 했다.연화는 잽싸게 쓰러진 괴한의 칼을 빼들어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연화가 싸움에 끼어들자, 상황은 짧은 시간 안에 정리되었다.연화는 자신이 생포한 괴한을 향해 물었다.“우두머리가 누구냐?”칼이 목에 닿아 있었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연화는 주저 없이 그의 목을 베었다.다음 괴한에게 다가가 물었다.“우두머리가 누구냐?”동료가 자비 없이 죽임 당하는 것을 목격한 괴한은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저기! 저 자입니다!”그가 가리킨 곳을 확인한 연화는, 이 괴한 역시 망설임 없이 목을 베어냈다.그리고 천천히 우두머리 쪽으로 다가갔다.“누가 시켜서 왔느냐?”“말할 거였으면 이런 위험한 짓은 하지도 않았소. 어서 죽이시오!”연화는 우두머리의 눈을 바라보았다.“죽음을 각오한 눈이군.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해 무언가 거래를 해둔 모양이지?”“……”“어차피 죽으면 대가를 받을 수 없을 테니, 식솔들을 상대로 거래했겠군.”“아니요! 나에겐 거둘 식솔도 없소! 그러니 어서 죽이시오!”괴한은 용맹하게 소리쳤지만, 연화는 그의 눈에 두려움이 어리기 시작한 것을 눈치챘다.연화는 그를 향해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당연히 죽어야지. 세자와 중전을 시해하려 했으니, 그건 마땅한 벌이다. 다만, 어떻게 죽을 것인지가 중요하지.”우두머리의 눈빛과 표정은 이미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움에 차 있었다.
생소하고도, 간지러운 그 단어에 연화의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예, 전하.”“부인. 부인.”연화가 킥-킥-웃으며 대답했다.“예, 전하. 어찌 부르시기만 하십니까? 닳겠습니다.”“나 또한 믿기지가 않아서요. 정말 부인이, 내 연화가 맞는 것이오?”“예, 전하. 연화입니다. 이제 정말, 하나뿐인 전하의 여인이 되었습니다.”겸이 연화의 두 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앞으로 많이 고될 것이오. 궐 안 살림을 맡는 일이니, 해야 할 일도 많을 것이오. 바쁘다고 나를 내치면 안 되오.”그녀를 바라보는 눈에 걱정과 애잔함이 느껴졌다.“그럴 리가요. 언제나 소첩에게 있어 첫 번째는 전하이시옵니다.”“이전처럼 사랑을 나누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지켜보는 이들이 많을 테니까.”“예, 괜찮습니다.”겸이 입술을 굴리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어? 괜찮으면 안 되는데, 나만 서운한 것입니까?”연화가 소리 내어 웃었다.“아닙니다. 소첩도, 실은 너무너무 안타깝습니다.”둘은 조용히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모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연화는 언제 그랬냐는 듯, 우아하고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을 그의 앞에 앉아 있었다.그녀와 전장을 누비며, 함께 했던 그 긴 시간들이 아련한 추억 속으로 남겨지고 있었다.“연화야, 너와 나는 어쩌면 운명이었나 보다.”“예, 운명입니다.”겸은 연화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행복이 밀려들었다.“아름답구나.”겸은 연화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그녀는 이제 마음껏 그를 받아들였다.두 사람의 몸이 이불 위로 쓰러졌다. 서로를 향한 깊은 감정을 확인하며, 천천히 서로의 몸을 탐했다.문밖에서는 상궁이 목소리를 높여 무언가를 계속 외치고 있었지만, 겸과 연화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그들의 세상에는 오직 둘 뿐이었다.기품 있게 펄럭이던 곤룡포가 그의 손에 하찮게 내던져졌다.그녀를 향한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얼마나 마음껏 품에 안고 싶
“부인, 혼례라니… 너무 갑작스럽지 않습니까? 저러다 또 곡기라도 끊으면…” “대감, 대감께서는 어찌 저 아이하고만 있으면 천치가 되시는겁니까?” “천치라니! 거참, 말이 심하지 않소?” “보시고도 모르시겠습니까? 열흘 동안 곡기를 끊은 아이 혈색이랑 품이 저리 좋답니까?” “아… 생각해 보니 그렇구려… 내가 또 당했나 보오… 이것 참…” 부인은 보이지 않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감께서는 언제까지 저 과년한 아이를 끼고 사시렵니까?” “그것은… 혼사자리가 마땅치 않아…” “예, 마음에 드는 혼처
쿵쿵쿵- “또 밥을 다- 남기셨네! 이러다 정말 죽는다니까요!” 문 앞의 밥상 앞에 앉아 막둥어멈이 큰 소리를 쳤다. 누군가가 꼭 들으라는 듯이. “안 먹을 테니 헛수고 말고 가져가!” 방 안쪽에서도 누군가가 들으라는 듯 우렁찬 대답이 들려왔다. 그들의 바람이 통하기라고 한 듯, 홍양이 연화의 방 앞으로 걸어왔다. 그 모습에 막둥어멈이 자리를 비켜서자, 홍양이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자물쇠를 풀었다. 덜컹-문을 잡아당겼지만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고 있었다. “이게 왜 이러는 것이냐?” 당황한 홍
“그대는…!”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겸과 영도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소인을 기억하시는지요?”방금 전까지 연무장에서 놀라운 실력을 보여준 그 왜소한 사내가, 다시금 겸 앞에 섰다.허나 지금 이 순간, 더 놀라운 것은 그 얼굴이었다.겸은 그를, 아니 그녀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실은, 오라버니보다 제가 한 수 위입니다.”돌직구처럼 날아드는 말에 연무장은 다시 한 번 술렁였다.“무술대회에 제가 나갔다면 장원은 제
행인은 겸을 한번 훑어보더니, 곧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홍대감님 댁이라면 이 마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오십시오.” 겸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백성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신하라니, 역시 스승다웠다. 그 덕분에 수월하게 홍양의 대문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홍양대감의 저택 앞. 담장 너머로 하늘을 향해 부드럽게 치솟은 용마루들이 가문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