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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의 오른팔을 타고 뜨거운 선혈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그녀는 깊게 팬 상처를 움켜쥔 채 신음 섞인 숨을 몰아쉬었다.
고통으로 미간이 일그러졌으나, 두찬을 응시하는 눈빛만큼은 서늘할 정도로 생생했다.
“야, 곽두찬! 이제 그만 끝내자!”
먼저 죽음을 입에 올리는 당돌함에 두찬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기괴하게 씰룩였다.
그는 수빈의 심장을 향해 총구를 고정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 오 형사. 아니… 오수빈.”
눈앞의 총구에도 수빈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 남자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철컥, 안전장치를 푼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그때였다.
“흑….”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릴 만큼 무거운 정적 속에서, 이질적인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예리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눈을 질끈 감으며 미간을 짚었다.
“흑……, 흐윽.”
참다못한 예리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옆자리 남자를 째려봤다.
극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부터 옆자리 남자는 넓은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맙소사, 요새도 이런 신파극에 우는 사람이 있어?’
축축하게 젖어 형체를 잃은 휴지로 연신 눈가를 찍어내던 은호가 다급하게 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이미 다 써버렸는지 빈손만 허무하게 휘저을 뿐이었다.
예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방에서 정갈하게 접힌 손수건을 꺼내 옆으로 툭 건넸다.
갑작스럽게 시야에 들어온 손수건에 은호의 울음이 멎었다.
은호가 붉어진 눈시울로 고개를 돌렸으나, 예리는 여전히 시선을 무대에 고정한 채 무심하게 팔만 뻗고 있을 뿐이었다.
은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손수건을 받아 갔다. 손끝이 아주 잠깐 스쳤지만, 예리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정면만을 바라봤다.
“…감사합니다.”
은호의 속삭이는 듯한 작은 대답과 동시에 닫혀 있던 무대의 막이 다시 서서히 올라갔다.
총알이 관통한 듯 무대 위 남자 배우의 가슴과 입가에서는 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주원아, 김주원!”
수빈의 절규 섞인 부름에도 주원은 그저 품에 안겨 흐릿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거칠고 힘겨운 호흡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네가 왜! 도대체 왜...!”
주원은 떨리는 손을 간신히 들어 수빈의 젖은 뺨을 어루만졌다.
“네가 날 예전에 구해줬을 때부터… 내 목숨은 네 거나 마찬가지였어, 수빈아.”
“흑, 흐흑….”
수빈이 자신의 볼에 닿은 주원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잡았다. 뜨거운 눈물이 주원의 손등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김주원, 죽지 마! 나랑 끝까지 함께하기로 약속했잖아. 이렇게 무책임하게 가면 안 되는 거잖아!”
수빈이 피가 뿜어져 나오는 주원의 가슴을 두 손으로 필사적으로 눌렀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생명력을 막을 길은 없었다.
“너랑 한 약속, 다 지키고 싶었는데…… 미안해.”
“너 절대 안 죽어. 아니, 죽게 안 놔둘 거야. 그러니까 벌써 미안하단 말 하지 마!”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주원은 희미한 미소를 남긴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힘없이 떨어진 그의 손이 무대 바닥에 툭, 부딪혔다.
주원을 끌어안고 오열하던 수빈이 품속에서 검은 물체를 꺼내 든 건 바로 그때였다.
금속 특유의 서늘한 빛이 반짝였다.
"어, 안 되는데…!"
은호가 작게 읊조렸다. 그의 시선은 수빈이 쥔 총구 끝에 못 박혀 있었다.
“주원아,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 사랑해…….”
수빈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관자놀이에 차가운 총구를 바짝 갖다 붙였다.
탕—! 찢어질 듯한 굉음이 극장 안을 집어삼켰다.
그와 동시에 무대 위의 모든 불이 꺼지며 지독한 암전이 찾아왔다.
여기저기서 억눌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은호의 커다란 어깨 역시 아까보다 더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제 끝인가….’
예리는 습관적으로 은호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암전으로 가라앉은 어둠 속에서는 헛수고였다.
예리는 피곤한 듯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너머로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사랑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목숨까지 거는 건지….’
예리의 눈시울은 건조하기만 했다.
총구 앞에서도 그렇게 당당하던 주인공이 고작 사랑하는 남자의 죽음 하나에 생을 마감하다니.
그렇게 예리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어두웠던 공간이 다시 밝아졌다. 배우들이 한 명씩 무대 위로 올라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남녀 주인공이 손을 잡고 등장했다. 관객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열렬한 기립박수를 보냈다.
예리도 친구 주은의 등장에 마지못해 일어나 손바닥을 부딪쳤다.
그러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예리의 시야에 은호의 모습이 들어왔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커다란 두 손을 성실하게 맞부딪치며 무대 위 배우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마지막 배우가 허리를 숙이자 객석 곳곳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며 사람들이 일제히 출구로 몰려들었다. 이를 본 예리는 미련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예리가 무심하게 휴대폰을 확인하며 인파가 빠지길 기다리는 동안, 은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손수건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객석이 어느 정도 비워지자 예리가 먼저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으로 향하려던 찰나,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불러 세웠다.
“저기, 잠시만요…!”
예리가 무심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서나 작다는 소린 듣지 않는 키였지만, 그의 넓은 가슴팍에 가로막힌 시선은 한참이나 올라가서야 겨우 눈을 맞출 수 있었다.
은호가 예리의 손수건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 주변은 짓무른 듯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여운 탓인지 붉어진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방울이 묘하게 처연하고도 위태로워 보였다.
평소 타인이 우는 꼴이라면 치를 떨던 예리였다.
그런데 눈앞의 이 남자만큼은, 그 모습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제가 가겠습니다. 사장님은 기계부터 보러 가시죠.”소진이 도운의 어깨를 손으로 툭 치더니 빠르게 지나쳐 아이에게 다가갔다.“저, 감사합니다…!”도운은 잠시 멈칫하며 소진을 한 번 돌아보고는 창고로 전력 질주했다.소진이 얼굴이 새빨개진 채 발버둥 치는 아이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아이고, 많이 아프지? 잠깐만 이렇게 있어봐.”지갑에서 카드를 꺼낸 소진은 피부를 따라 가볍게 밀었다. 몇 번 반복하자 거짓말처럼 자그마한 검은색 벌침이 딸려 나왔다.“자, 이제 안 아플 거야. 다 됐어.”소진은 빨갛게 부어오른 팔을 놓아주며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아버님,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까운 병원에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아이 아빠는 연신 고개를 깊게 숙이며 감사를 표하더니, 아이를 품에 꼭 안은 채 주차장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갔다.“강 비서님, 어떻게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렇게 능숙하게 대처하셨습니까? 저 정말 감탄했습니다. 대단하시네요.”은호가 진심 어린 얼굴로 작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소진이 뿌듯함이 가득 담긴 미소를 씨익 지어 보였다.“이 정도는 기본입니다.”자신만만하게 대꾸한 소진이 지갑 속으로 카드를 척 집어넣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도운이 땀범벅이 된 채 돌아왔다. 옷자락 여기저기에 기름때가 묻어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얼굴에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도운이 소진의 앞으로 성큼 달려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아이 아버지는 주차장에서 만났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당장 가봐야 하는 상황이라 눈앞이 캄캄했는데… 선생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공장 일은 잘 해결하셨나요? 아까 꽤 위험해 보이던데요.”소진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도운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덕분에 큰 고비는 넘겼습니다. 기계도 기계지만, 선생님이 아이를 돌봐주신 덕분에 온전히 공장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어요. 저한테 은
예리가 당혹감 어린 눈으로 도운을 살폈다.애초에 작전에 없던 행동이었다. 의뢰받고 온 걸 들키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우와, 저 결혼정보회사 광고는 많이 봤는데 실제로 근무하시는 분은 처음 봬요!”다행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반가워할 뿐, 별다른 경계심은 보이지 않았다.예리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에 힘을 빡 준 채 은호를 쏘아보았다. 따가운 시선이 꽂혔을 텐데도 은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입꼬리만 슬쩍 올렸다.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괜한 기대였다.분노 게이지가 꽉 찬 예리가 당장이라도 다른 주제로 얼버무리려는데, 난데없이 은호가 손을 내밀었다.예리가 ‘뭐요?’라는 눈빛으로 두 눈썹을 까딱였다.“명함 좀 주시겠습니까? 저는 아까 차에 두고 내려서요.”갑자기 자기 명함은 왜 물어보는지. 매고 있던 라탄 크로스백을 열어 뒤적이면서 예리는 속으로 투덜거렸다.오늘따라 왜 이렇게 돌발 행동이 많은지 모르겠다.“여기요.”명함 케이스에서 한 장 빼내어 은호의 손바닥 위로 얌전히 내려놓았다.은호는 명함을 도운 쪽으로 돌려 공손히 내밀었다.“실은 아까 대표님을 뵙자마자 저희 회원으로 모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희 회사에 등록해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대표님 같은 분이라면 저희 쪽에서도 아주 귀한 분이 될 것 같아서요.”팔짱을 단단히 낀 채 은호를 예의주시하던 예리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도운의 경계심을 부드럽게 허물더니 순식간에 영업으로 화제를 돌렸다. 예리 입에서 낮은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명함에 적힌 내용을 읽어보던 도운이 아하하,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감사한 제안입니다만,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은호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한 번 다셨다."하긴, 대표님 같은 분이시면 이미 만나는 분이 계실 수도 있겠네요. 제가 그 생각을 미처 못했습니다."도운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만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그럼, 마음에 두고 계신 분이라도 있
“우리 친구도 한번 해볼까요?”“네!”아이는 도운을 따라 중심화만 남긴 채,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머지 꽃들을 툭툭 솎아 냈다.“와, 아주 잘하는데? 하이파이브!”도운이 살갑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신이 난 아이가 도운의 손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짝! 소리가 과수원에 시원하게 울려 퍼졌다.“아야야! 와, 친구 힘이 장난 아닌데? 나중에 우리 농장에서 스카우트해야겠어!”도운이 엄살을 떨며 과장되게 손을 털어 보였다. 주변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져나오자, 그는 숙였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이렇게 측화를 솎아주면 병해충도 줄어듭니다. 그러니 꽃을 없앤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가을에 만날 크고 맛있는 사과를 위한 준비라고 생각해 주세요."이번엔 도운이 직원들이 챙겨온 소품 상자 앞으로 가뿐하게 다가갔다.“여기 있는 소품들은 마음껏 사용하셔도 됩니다. 꽃따기도 하시고, 사과꽃 배경으로 사진도 찍으며 자유롭게 즐겨주세요. 궁금한 점이 생기면 언제든 직원들을 불러주시고요”말을 끝내려던 도운이 생각난 것이 있는지 손뼉을 짝 부딪쳤다.“혹시 사진기사가 필요하다면 저를 찾아주시면 됩니다! 대학 사진 동아리 출신이라 자신 있습니다!”장난스레 카메라 셔터 누르는 모션을 취하는 도운을 지켜보던 예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이쯤이면 사람은 파악됐다. 남은 건 문양뿐이었다.긴 토시를 착용한 도운의 맨손목을 어떻게 확인할지 물끄러미 가늠하는 예리의 등 뒤로, 은호가 조용히 다가왔다.“나 팀장님.”“앗, 깜짝이야.”“다들 체험하러 간 것 같습니다. 저희도 갈까요?”“아… 네, 그러죠.”예리가 가지 하나를 가볍게 잡아 측화를 솎아 내기 시작했다. 소진도 그 옆에서 묵묵히 손을 보탰다.“사과 따기 체험은 예전에 해봤어도 사과꽃 따기는 처음이네요. 팀장님 따라다니면서 정말 별의별 체험을 다 해보는 것 같습니다.”똑 따낸 꽃 한 송이를 바닥에 떨어뜨린 소진이 자조하듯 중얼거렸지만, 입가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강 비서님, 그동안 팀
먼저 옷을 갈아입고 나와 마당에서 기다리던 예리의 시야에, 쭈뼛거리며 걸어 나오는 은호의 실루엣이 들어왔다.늘 자로 잰 듯 완벽하게 피팅 된 슈트 차림만 보다가, 헐렁한 작업복을 입은 그는 무척 낯설었다. 거기에 사과를 든 꿀벌이 엄지를 치켜세운 티셔츠와 냉기 어린 얼굴의 조합이라니.그 환장의 불협화음에 예리는 뿜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꾹 깨물었다.“이사님, 생각보다… 되게 잘 어울리시는데요?”은호가 티셔츠 밑단을 어색하게 만지작거릴 때였다. 도운이 무선 마이크를 어깨에 메고 다시 나타났다.“자, 여러분 집중해 주세요! 지금부터 사과나무밭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도보로 이동할 예정이니, 친한 분끼리 두 분씩 짝을 맞춰 길게 줄을 서주세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갖췄다. 은호 혼자 갈 길을 잃고 어색하게 서 있자, 소진이 그의 등을 예리 쪽으로 가볍게 밀어 넣었다.“우리 이사님, 나 팀장님이랑 같이 서세요. 저는 두 분 뒤에 설게요.”소진의 센스 넘치는 배려 덕에 얼떨결에 예리의 옆자리를 꿰찬 은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줄 다 서셨으면, 출발하겠습니다!”도운의 활기찬 구령 들으며 예리는 오랜만에 마주하는 평화로운 시골 풍경을 눈에 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 하얀 사과꽃 물결이 일렁이는 과수원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웠다.***옆에서 나란히 걷던 은호 역시 풍경을 눈에 담는 척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제 옆의 예리를 내려다보았다.높게 질끈 묶어 올린 예리의 뒷머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볍게 찰랑였다.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예리의 향이 코끝에 은은하게 번졌다.은은한 배향이 섞인, 서늘하고 달콤한 꽃향기를 맡으며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던 은호가, 조심스럽게 먼저 말을 건넸다.“하도운 씨 말입니다. 사진보다 훨씬… 매력적이시더군요.”예리는 시선을 은호 대신 맨 앞에서 씩씩하게 걸어가는 도운에게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목소리도 좋고 성격도 쾌활해서 괜찮아 보이더라
예리는 화끈거리는 볼을 손으로 슥 문지르며 물었다.“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아니요.”정작 은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그를 의식하고 난리가 난 쪽은 예리였다. 그녀는 후다닥 손을 내리고 목을 가다듬었다.“그러면 왜 그렇게 쳐다보시는데요?”여전히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은호를 힐끔거리며 물었다.“도운 씨가 아윤 씨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알아낼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으신지 궁금해서요.”“아… 그게 궁금하셨구나.”나한테 개인적인 질문이 있는 게 아니고.“그건… 오늘 직접 보시면 알게 될 거예요. 백 마디 설명 듣는 것보다 눈으로 한 번 확인하는 게 훨씬 빠르거든요.”누가 봐도 어물쩍 넘어가려는 태도였지만, 은호는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캐묻지 않았다.예리는 재빨리 창밖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그가 또 곤란한 질문을 던질까 봐. 아니, 실은 제 요동치는 속마음을 들킬까 봐서였다.‘왜 서운한 감정이 드는 거지?’예리는 툭, 차가운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은호가 항상 자신에 대해 궁금해할 거라고 착각하는 것도 웃겼고, 그게 아니라고 서운함을 느끼는 스스로가 더 기가 막혔다.말도 안 되는 생각임을 알았지만, 아무래도 그의 문양에 감정적으로 동화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요상한 마음 상태가 설명되지 않았다.작은 한숨을 삼킨 예리가 창밖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시골 풍경만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아침 일찍 출발한 차는 ‘햇살 사과’라 적힌 커다란 이정표가 세워진 넓은 부지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섰다.차에서 내린 은호가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참 많네요. 가족끼리 온 분들도 꽤 보이고요."창고 앞마당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아이를 동반한 부모들도 보였지만, 유독 젊은 여성들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그도 그럴 것이, 청년 농업인을 홍보하는 다큐에 출연한 뒤로 도운의 훈훈한 외모가 온라인상에서 크게 화제가 된 영향이었다.“팀장님
계약서에 서명을 마친 은호가 고급 만년필의 뚜껑을 닫아 서류 위로 내려놓았다.“작가님, 이번 전시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도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하게 잘 살피겠습니다.”병훈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은호의 손을 마주 잡았다.“네, 저도 해상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 이사님.”그간 골머리를 앓던 거장 이병훈 작가와의 계약이 성공리에 마무리되자,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직원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은호가 맞잡은 손을 놓으려 할 때였다.“저, 이사님….”병훈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은호가 의아한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는 선뜻 입을 떼지 못한 채 직원들을 힐끔거렸다.“잠시 자리 좀 비켜주시죠.”은호의 차분한 지시에 눈치를 보던 직원들이 하나둘 각자 서류와 짐을 챙겨 회의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들이 모두 나가는 동안 병훈은 조용히 굳은살 박인 손끝만 내려다보았다.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정적이 회의실을 감돌았다.“이제 말씀하셔도 됩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어떤 건가요?”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병훈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사실… 계약 직전까지 고민이 아주 많았습니다.”불길한 이름이 머릿속을 스치자, 은호는 씁쓸하게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저희 형들 때문입니까?”병훈이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주변에서 다들 말리더군요. 굳이 해상과 일하면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겠냐고….”병훈이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해상 아트센터를 감싸안고 있는 드넓은 호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은호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유동현 사장님이 백화점 VIP 컬렉터들과 거래 갤러리들을 움직이기 시작한 뒤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해상 아트센터와 손잡으면 대형 컬렉터들이 등을 돌릴 거라는 말이 업계에 퍼졌어요. 그래서 계약을 망설이는 작가들이 적지 않습니다.”은호의 턱선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동안은 아트센터에서 직접 접촉한 작가들에게만 훼방을 놓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업계
예리는 점심조차 1층 카페의 샌드위치로 대충 때운 채, 해성 관련 자료를 훑는 데 여념이 없었다.해상 그룹.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IT와 통신, 금융을 넘어 이커머스까지 국민의 일상을 장악한 그들은 거대한 블랙홀이라 불릴 만큼 압도적인 영향력 가졌다. ‘해상이 무너지는 날엔 대한민국 전 국민이 무너진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다.그런 박 회장의 직접 움직이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의뢰 대상이 유은호라는 점이 예리를 더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마흔에 가까운 두 아들에게 직접 생선 살을 발라주는 사진이 화제가 될 만
“그러니 은호 너라도 가야 하지 않겠니? 엄마는, 우리 착한 아들이 절대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아.”해미가 쥐고 있던 은호의 손에 힘을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과 달리, 눈빛은 서늘할 만큼 강압적이었다.해미가 자신을 '아들'이라 불러줄 때마다, 그는 매번 무너졌다. 그녀가 목적이 있을 때만 어머니 행세를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은호에게는 그 가식적인 온기조차 절실했다.그녀와 두 형조차 자신을 외면한다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는 공포. 은호는 이번에도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착한 아들의 가면을 쓰기로
“그래서? 너는 그 여자가 신랑 전 애인인 줄 어떻게 알았어?”이야기에 몰입하느라 젓가락질 한 번 못 한 주은이 물었다.“화장실에서 나란히 서서 손을 씻는데, 그 여자 손목에 문양이 보이더라고. 묘하게 예감이 이상해서 따라 나갔지.”예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무심하게 덧붙였다.“그런데 신랑을 몰래 지켜보더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눈빛에 문양까지 반짝이는데, 전 애인 말고는 설명이 안 되지.”“와,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있냐.”“내가 항상 말하잖아. 사랑, 그거 별로 특별한 감정 아니라고. 오늘 네 배역도 솔직히 이해 안
웨딩홀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혜영의 부모가 경악한 얼굴로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이게 무슨…!”하객들은 이 상황을 놓칠세라 앞다투어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하기 시작했다.“뭐, 뭐라고요…?”혜영이 귀를 의심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여자는 대답 대신 가방에서 사진 뭉치를 꺼내 혜영의 가슴팍으로 사납게 내던졌다.사진들이 파르르 흩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한 장, 한 장 주워 확인하던 혜영이 비명을 막으려는 듯 급히 입을 틀어쥐며 주저앉았다.“이, 이게….”하지만 사시나무 떨듯 잘게 떨리는 손끝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