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도진은… 어디에 있을까.'그 질문은 소문보다 더 위험했다.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도진은 군영 근처 언덕에서 말에게 풀을 뜯기게 하며 서 있었다.곧 어두워질 하늘이 붉은 빛을 천천히 거두어가고 있었다.“경.”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도진은 천천히 돌아봤다.무관 하나가 다가와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오늘… 궁 안이 어수선하옵니다.”“들었다.”도진의 대답에는 공기의 온도가 섞여 있었다.서늘하고, 단단하고, 언제든 칼날이 될 수 있는 온도였다.무관은 잠시 주저했다가, 마침내 속내를 드러냈다.“경, 궁에서도 말이 나도는 것 같습니다.”“무슨 말이.”“…빈마마 처소와…경을 함께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있사옵니다.”그 순간 바람이 지나갔다.도진의 옷자락이 흔들렸다.그러나 그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그런 말이 어디에서 나왔다.”“아무도 모릅니다.”무관이 고개를 더욱 숙였다.“누군가는 보았다 하고, 누군가는 들었다 하고…아마도, 경께서 다치신 그날 저하께서도 그 근처로 가셨다 하여…”도진의 눈빛이 아주 가늘어졌다.“…저하께서?”“예, 경. 그 말 때문인지 사람들은 더 쉽게 이야기를 만들고 있사옵니다.”바람은 연회를 좋아하지 않는다.그러나 소문은 늘 연회를 벌인다.하나의 말이 사람들의 입을 옮겨 다니면 그 말 주변으로 그럴싸한 장식이 붙는다.그리고 그것이 모양을 가지는 순간,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도진은 말고삐를 쥔 손을 살짝 힘주어 쥐었다.“저하께서… 어디로 가셨다는 말이 퍼졌느냐.”무관은 답하기를 망설였다.“말 그대로라 하옵니다. 빈마마 처소 담장 근처를… 잠시 거닐었다 하오나실은 본 사람이 있는지도 명확지 않사옵니다.”도진은 한 번 눈을 감았다.어젯밤, 세자의 시선이 자신을 꿰뚫듯 바라보던 순간이 떠올랐다.'저하께서… 이미 무엇을 결론내리신 것이 아닐까.'궁에서 ‘결론’은 곧 ‘의심’이었다.의심은 곧 ‘처벌’이었다.처벌은 곧 ‘죽음’이었다.도진은 눈을 천천히 뜨며 말했다.“빈마마의 처소
“무엇을 말하고 싶으냐.”“사람들의 눈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면…사실은 금세 그 모습이 달라질 수 있사옵니다.”이수는 고개를 들었다.눈동자는 여전히 조용했지만, 그 안에 스치는 빛은 흔들리지 않았다.“빈은… 어느 누구와도 밤을 함께 한 적이 없사옵니다.”그 말은 명백한 부정이었다.대비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빈.”한참 뒤, 대비가 입을 열었다.“세자저하의 마음은 너뿐 아니라, 이 나라의 것이다. 저하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곧 이 나라의 기강이 된다.”손가락이 찻잔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돌았다.“빈이 지켜야 할 것은 자신의 억울함만이 아니다.저하의 얼굴과 나라의 체면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그 말은 곧, 빈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경고였다.이수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분부… 명심하겠사옵니다.”“그래. 앞으로는 빈의 처소 앞에 드나드는 그림자들이 더 이상 말을 낳지 않도록 하거라.”그 말에 선명하게 어젯밤 담장 너머의 그림자가 떠올랐다.'누가… 그 앞에 서 있었던 것인가.'이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침묵이 곧 순종인 양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대비전에서 물러나며, 이수는 바닥만 보며 걸었다.상궁이 옆에서 나지막이 물었다.“마마…”“괜찮다.”이수는 짧게 잘랐다.“지금은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얼굴을 해야 할 때다.”그 말 뒤에, 그녀는 아주 조용히 한 마디를 더했다.“소문이… 이제 모양을 갖추었구나.”그 시각, 군영으로 돌아가던 도진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아침부터 들려오는 말들이 하나의 방향을 향해 모이고 있었다.세자, 세자빈, 그리고 자신.셋의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는 동안, 누군가의 얼굴은 점점 더 선명한 혐의로 물들어 갈 것이다.'그 얼굴이… 어디를 향할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도진은 하늘 한 번을 올려다보았다. 햇빛은 맑았다.그러나 눈을 감고 나면 그 빛 너머로 어제 세자의 눈빛이 겹쳐 보였다.'저하께서
도진의 목소리가 낮게 잘렸다.무관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죄송하옵니다, 경.”“더 말하면, 그 말이 진짜가 될 수도 있다.”도진의 말은 날카로웠지만, 그 안에는 두려움에 가까운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무관은 입술을 깨물며 물러났다.남겨진 자리에서, 도진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이미… 이렇게 되었구나.'그는 처음부터 이 길의 위험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만큼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이 모양을 갖출 줄은 몰랐다.소문은 언제나 처음에는 모양이 없다.그러다 어느 날, 누가 한 번 더 선을 그어주면 갑자기 얼굴을 갖게 된다.그리고 그 얼굴은, 대개 한 사람을 향해 있다.'그 얼굴이… 마마를 향하고 있다.'점심을 조금 지난 시각,이수의 처소에 상궁이 다급한 얼굴로 돌아왔다.“마마. 대비전에서 빈마마를 뵙고 싶어 하신다 하옵니다.”이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며, 바닥에 놓인 치맛자락을 정리했다.“지금 당장인가.”“예, 마마. 전갈이 많지 않아, 오히려 더 무서운 때이옵니다.”이수는 작은 숨을 내쉬었다.“옷매무새는 괜찮느냐.”“아주 단정하시옵니다.”“그렇다면… 갈 준비는 이미 된 것이겠지.”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수는 창을 한 번 돌아보았다.햇빛은 이미 높이 떠 있었다.그러나 방 안 공기는 전혀 따뜻하지 않았다.대비전이라.대비에게 불려가는 길은 반갑기도, 안온하기도 어려운 길이었다.궁에서 누구든 대비의 눈 밖에 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발걸음을 떼며, 이수는 상궁에게 조용히 물었다.“궁 안의 소문이… 대비마마의 귀에까지 들어갔느냐.”상궁은 대답 없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그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대비전 앞 마당의 공기는 다른 곳보다 한층 무거웠다.바람이 지나가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듯한 곳.세월과 권력이 한데 엉켜 딱딱하게 굳은 공기의 자리였다.이수는 규정된 자리까지 걸어가 정해진 예를 갖췄다.“빈, 뵙고 싶었다.”대비의 목소리는 의외로 부드러웠다.이수는 머리를 조아린 채 답했다.“분부하
“경은 이미 충분히 책임을 자각하고 있으니, 더 문책할 것까지는 없사옵니다.다만 군영의 기강을 다시 한번 다잡게 하시옵소서.”말만 들으면 벗을 감싸는 평범한 말 같았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현의 목 안쪽에는,눈에 보이지 않는 쓴 맛이 올라오고 있었다.낙마… 실수.그는 그 단어들이 마음 한구석에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그리고 동시에, 낙마 소식을 들었을 때 얼굴빛이 식어버렸다는 어떤 소문도 기억 속 어딘가를 건드렸다.'누가… 그 얼굴을 보고 있었던 것이냐.'조회가 끝나고 대신들이 물러난 뒤에도, 현은 한동안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수렴청정의 형식은 이미 옅어졌으나, 대비의 영향력은 아직도 깊었다.왕이 일어나자, 대비의 사람으로 보이는 이들이 멀찍이 방 밖을 스쳐 지나갔다.그리고 그 시선이, 한순간 세자에게 머물렀다가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사라졌다.현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이 궁은 지금, 누굴 보고 있는 것인가.'궁녀들에게 소문은 먼저 ‘형체 없이’ 퍼졌다.멀리서 보았다는 사람, 들은 것 같다는 사람,누군가에게서 들었다는 사람.“… 어제 밤에 말이야, 빈마마 처소 담장 쪽에 누가 서 있었다더라.”“아니, 누가 서 있었는지는 아무도 못 봤다잖아. 다만 사내의 옷자락이 보였다나.”그리고 그 말 사이사이에 새로운 조각들이 덧붙었다.“낙마하셨다는 경께서…그 근처를 자주 지나다니셨다지 않아.”“요사이 저하께서도 빈마마 처소 쪽으로 발길을 여러 번 옮기셨다더라.”도진의 이름과, 세자의 이름과, 세자빈의 처소가하나의 문장 안에 자연스럽게 묶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누군가는 호기심에서,누군가는 악의 없는 장난처럼,누군가는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그러나 이유가 어떻든, 그 말들이 향하는 곳은 늘 같은 곳이었다.빈의 처소.이수는 오전 내내 내전에서의 예를 지키느라 몇 번이고 사람들을 만났다.왕비, 후궁들, 나이가 있는 빈궁들.“빈은 요사이 잘 지내고 있느냐.”“안색이 예전보다 더 희어졌구나.”
세자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움직이는 순간,더 많은 의심과 위험이 그녀에게 향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는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나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단 말인가.'도진의 속마음에 처음으로 ‘무력함’이라는 것이 스며들었다.그 서늘한 감정은, 다가오는 비극의 첫 진동처럼 그의 폐부 깊이 파고들었다.현은 침상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머리를 감싸 쥔 손끝이 창백했다.그는 방 안의 고요를 이기지 못한 듯 천천히 눈을 떴다.“…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그 말은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도진일까, 이수일까. 아니면 그 자신일까.'그는 문득 도진을 보러 갔던 이상한 충동을 떠올렸다.'경에게 다친 이유를 확인하려고 간 것인가?'아니었다.그보다 더 깊고 어두운 이유가 있었다.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빈은… 지금 나를 피하고 있다.'그 생각이 들자 심장이 서늘하게 조여들었다.그리고 또 다른 생각이 스쳤다.'그녀는… 누구를 걱정하며 밤을 지새웠을까.'문득, 현의 시선이 방문 쪽으로 향했다.그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내가 직접 확인해야 한다.새벽의 끝, 무너지는 평온빈의 처소, 군영의 훈련장, 세자의 침전세 곳에서 동시에 숨이 멎은 듯한 기척이 흘렀다.잠들지 못한 사람들.멀리서 서로를 느끼는 그림자들.그림자 아래 감춰진 말들.궁은 아직 조용했다.그러나 그 고요는 태풍의 눈처럼 위험했으며,조금만 건드려도 무너질 듯한 얇은 막이었다.그리고, 새벽의 끝이 서서히 밝아오는 순간, 궁의 공기는 명확하게 달라져 있었다.무언가가 곧 변하기 시작할 것처럼.아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찾아왔다.그러나 아무 일도 없던 것은 아니었다.동틀 무렵의 햇빛이 처마 끝을 적실 때, 궁은 이미 여러 겹의 말들로 덮여 있었다.한밤중에도 깨어 있던 사람들의 입이 새벽 공기와 함께 천천히 열린 것이다.이수는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손길은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했지만,그녀의 시선은 자꾸 거울 뒤를 보는
하지만 그는 손을 검으로 가져가지 않았다.지금은 무기를 허리에 두른 상황이 아니기도 했지만,무엇보다 지금 이 의심에서 먼저 칼을 꺼내는 순간,궁 전체가 더욱 어수선해질 것을 알았다.그저 고개를 돌려 천천히 주위를 훑었다.그러나 그림자는 이미 사라진 듯,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도진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이 궁은… 지금, 너무 많은 이가 서로를 훔쳐보고 있구나.'그는 스스로도 모르게 한 사람을 떠올렸다.'마마… 그곳은 괜찮은겁니까.'그녀의 처소에 발길을 옮길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마음은 자꾸 그곳으로 향했다.그때 저 멀리서 군영의 북소리가 짧게 울렸다.새벽 훈련을 준비하는 소리.그러나 도진은 그 울림 속에 다른 의미를 읽었다.'궁이… 움직인다.'이수는 새벽녘이 되어도 잠들지 못했다.방 안은 진득한 침묵에 잠겨 있었고,이수는 등불이 꺼질 때까지 그 앞에 앉아 있었다.어둠과 시선이 만나면 무언가가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나는 지금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가문도, 명예도, 심지어 세자의 은총조차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지킬 수 있는 것이라곤 마음 뿐.그러나 바로 그 마음조차 지금 가장 숨겨야 할 것이었다.문득, 이수는 자신이 어젯밤 상궁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나는…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그러나 그녀의 속마음은 지금도 흔들리고 있었다.'경이… 다치지 않았다면.'그 생각이 찌르듯 올라왔다.이수는 바로 눈을 감았다.마음이 더 이상 흔들려서는 안 되었다.그때 밖에서 짧은 발걸음이 들렸다.“마마. 저하께서 아침 조회 전에 빈마마의 안부를 묻고 계시옵니다.”그 순간, 이수의 손끝이 떨렸다.“저하께서…?”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혹은, 차마 예상하고 싶지 않았던 말.상궁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예, 마마. 저하께서… 빈마마의 ‘어젯밤 안위’를 물으셨사옵니다.”그 말 속에 담긴 의미는 너무도 선명했다.세자는 이미 움직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위로인지,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도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사람들의 시선도, 사인회장도, 현실도 그에게는 모두 멀어졌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그리고, 정말로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하듯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입맞춤을 했다.그 순간 도진의 다리가 풀렸다.머리가 가벼워졌다.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세상이 기울었다.그는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이수의 손이
비는 오후 내내 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도심의 커다란 유리 건물들은 회색 안개 속에서 윤곽이 무뎌져 있었고,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산을 들고 바삐 움직였지만,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냄새는 오히려 공기를 맑게 정돈하고 있었다.도진은 백화점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늘 그렇듯, 아무 계획 없이 들른 곳이었다.욕망도, 필요도 없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는 곳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했고, 어떤 자극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비가 어깨를 적셔도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몇 백 년 동안 수없이 맞아온 비였다.어떤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