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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위험한 반문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3 18:20:54

밤은 이미 궁을 완전히 삼켜버렸다.

달빛은 높고 얇아서 궁의 지붕들을 희미하게 빛으로 두드릴 뿐,

회랑에는 그림자만 길게 늘어져 있었다.

바람조차 살금살금 스치는 듯한 고요한 밤.

그 고요 속에서 한 사람의 방만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세자의 처소였다.

현은 책상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

등불은 작은 불씨처럼 흔들렸고, 그 불빛 아래에서 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하루 내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장면.

전날 밤 회랑에서 보았던 이수와 도진의 모습.

정확히 무엇을 본 것이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 침묵 속의 떨림, 눈빛의 잔해,

서로를 향한 알 수 없는 맴돌음.

그 모든 것이 현의 마음 한 부분을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깨워냈다.

그는 하루 종일 그 감정을 억눌렀다.

'빈이 흔들린 마음을 숨기려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내가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 하는 것인가.'

그 질문은 현 자신에게조차 위험한 것이었다.

그는 책상 위 술잔을 집어 들었지만 입에 대지 못했다.

술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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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기억   61. 고백의 잔향

    대비전에서 나왔을 때의 공기는 아침보다 훨씬 더 묵직해져 있었다.그 묵직함은 단순한 습기나 온도의 문제가 아니었다.궁이라는 공간이 한 사람을 향해 시선을 모으기 시작할 때 특유의, 설명할 수 없는 압력이 생긴다.이수는 그 압력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회랑 끝에서 들려온 기척은 숨을 참듯 조용했지만,그 안에 감춰진 감정만큼은 은근히 번져 있었다.돌아보기도 전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세자였다.그는 오늘 유난히 빛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햇살보다 그늘을 선택하는 듯한 모습이었고,그 그늘 속에서 서 있는 그의 눈빛은 아침보다 더 깊고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이수는 천천히 다가가며 예를 갖추었다.“저하를 뵙사옵니다.”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그러나 본인은 알고 있었다.그 평온함은 겨우 마음을 붙잡고 있는 얇은 실과 같다는 것을.세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그녀의 얼굴을 조용히 살폈다.오늘 하루 동안 그 얼굴에 어떤 그림자가 드리워졌는지 읽어내려는 듯한 시선.“대비전에서의 일은… 별일 없었습니까?.”그가 먼저 물었다.그 질문은 ‘괜찮았느냐’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대비가 무엇을 말했고, 그 말이 빈을 어떻게 흔들었는지를 묻는 말이었다.이수는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대비마마의 은덕으로 소첩은 무사히 물러나왔사옵니다.”세자는 아주 미세하게 눈을 좁혔다.“무사히라.”그는 그 단어를 천천히 되뇌었다.“허나 빈의 얼굴은… 그리 무사해 보이지 않는구려.”이수는 그 말에 더 이상 눈을 들 수 없었다.그녀는 말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오늘 하루 동안 마음에 새겨졌음을 알고 있었다.대비의 말, 내명부의 시선, 궁인들의 속삭임, 그리고 도진의 답하지 못한 침묵까지.그것들이 모두 그녀의 얼굴에 자연스레 드리워졌다는 사실을 세자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대비마마께선… 무어라 하셨습니까.”그의 물음은 조용했으나 가볍지 않았다.이수는 한 번도 세자에게 거짓을 말해본 적이 없었다.그러나 오

  • 천년의 기억   60. 숨은 바람이 흔드는 자리

    대비전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길고, 언제나 조용했다.그러나 오늘은 그 고요함조차 속뜻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이수는 회랑의 기둥 사이를 따라 걸으면서도 단 한 번도 마음이 안정되는 순간이 없었다.발걸음은 일정했으나 가슴 속은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대비마마께서… 왜 다시 부르신 것이오.'분명 아침에 뵈었다.그때의 대화도 간단하지 않았다.그러나 그 뒤로 불과 조금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궁 안에서는 이미 무언가 움직인 것이다.그녀의 옷자락을 스치는 바람도 평소와는 달라져 있었다.궁은 언제나 조용히 움직이고, 움직일 때마다 가장 약한 곳을 먼저 건드렸다.그리고 오늘 약한 곳은 분명 빈이었다.대비전 앞마당을 지나 문이 열리는 순간, 이수는 스스로 마음을 단단히 가다듬었다.전각 안은 더 어둡고, 더 고요했다.방금 누군가가 속삭인 말들이 아직 공기 속에서 가라앉지 않은 것처럼미묘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대비는 방금 전과 같은 자리,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지만그 눈빛에는 약간의 온도가 바뀌어 있었다.그 온도는 궁이 파악한 정보가 늘어나고 그 뜻이 보다 선명해질 때 나타나는 변화였다.이수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가 정중히 예를 올렸다.“대비마마, 소첩이 말씀을 듣고 다시 뵈러 왔사옵니다.”대비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그래. 빈이 와야 할 것이었다.”그 한 마디에 이수의 목 안쪽이 미세하게 조여왔다.대비는 손끝을 들어 곁에 있던 상궁에게 눈짓했다.상궁은 한 폭의 두루마리를 조심스럽게 펼쳤다.그 안에는 궁인들의 보고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조각들이 정돈된 글로 옮겨져 있었다.이수는 그 문서가 무엇을 뜻하는지 읽기 전에도 이미 알 수 있었다.대비가 말했다.“금일 새벽, 네가 회랑을 지나던 길에 세자저하와 마주쳤다 하지.”이수의 숨이 뚝 멎는 듯했다.'벌써… 벌써 이 일이 대비전까지…'궁의 움직임이 얼마나 빠른지 오늘만큼 뼈저리게 깨달은 적은 없었다.“그리고 그 직후, 도진 경이 빈 곁에 있었음을 본 이들이

  • 천년의 기억   59. 장막의 잔향

    도진의 목소리가 회랑 한쪽에 닿아왔을 때,이수는 아직도 세자의 마지막 말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리고 있었다.그 울림은 금방 사라지지 않았고,마치 얇은 장막처럼 마음을 덮어 숨을 쉽게 내쉬지도, 들이쉬지도 못하게 했다.“…괜찮으시옵니까.”그 한 줄의 물음은 마치 누군가 문틈 사이로 손을 내밀어조심스레 그녀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이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도진은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너무 가까이도, 그렇다고 멀리도 아닌,자신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끝없이 계산한 끝에 도달한 듯한 위치.햇빛이 아직 그의 얼굴을 완전히 비추지 않았고,미묘한 그림자가 눈가에 걸려 표정의 진의를 더 알 수 없게 만들었다.이수는 숨을 고르듯,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경이… 어찌 여기를 찾았소.”그 말투는 자신을 낮추지 않았고, 상대만을 높이지도 않았다.궁 규범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절묘한 중심에 선 말이었다.도진은 고개를 조금 숙였다.“빈마마께서… 혼자 두기엔 오늘의 바람이 심상치 않아 보였사옵니다.”그 말은 ‘걱정된다’는 뜻이었고, 곁에 있고 싶다는 속마음이었으며, ‘하지만 감히 다가설 순 없다’는 절제이기도 했다.이수는 눈을 내리깔았다.“…경까지 그리 말하면 소첩이 더 흔들릴 일만 남지 않소.”자신을 낮추지 않는 어투 속에 오늘 하루 내내 간직해야 했던 무게가 살짝 새어 나왔다.그녀는 이어 말했다.“이 궁에서 빈의 자리란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곳이오.경이 그런 마음을 보이면… 그 또한 소문이 되어 경을 해치게 될 것이오.”도진의 시선이 순간 미묘하게 흔들렸다.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세자의 눈빛이 자신을 향할 때의 얇은 금을.“…소문의 칼은 이미 저를 향하고 있사옵니다.”도진이 조용히 대답했다.“빈마마께서 ‘경’이라 부를 때마다, 저 또한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사실만 더 분명해질 뿐이옵니다.”그 말은 경계선 위에 놓인 감정이었다.한 걸음만 더 나가면 마음이 드러날 것이고,한 걸음만 물러서면

  • 천년의 기억   58. 빛이 닿지 못한 자리들

    궁의 아침이 조금씩 활기를 되찾으며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이수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천천히 낮추고 있었다.대비전에서 내려온 무거운 말들,회랑에서 마주한 도진의 눈빛,그리고 마지막에 스쳐 지나간 세자의 침묵까지그 모든 것이 마음의 바닥을 얇게 갈라놓은 듯했다.그녀는 복도 끝에 놓인 난간에 손을 가볍게 올렸다.햇빛이 부서진 곳이었지만, 손끝은 조금도 따뜻함을 느끼지 못했다.''저하께서는… 무엇을 생각하고 계신 것이옵니까.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이 입술 사이에서 소리 없이 흩어졌다.그 순간, 뒤쪽 회랑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궁녀 두어 명이 서로 가까이 붙어 작게 숨죽이며 지나가고 있었다.이수는 그들의 눈이 잠시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그 시선에는 경계와 탐색이 묻어 있었다.마치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를 살피기라도 하듯.궁녀들이 발걸음을 재촉해 사라지자 남겨진 공간은 한층 더 적막해졌다.이수는 한참 만에 몸을 돌렸다.오늘은 대비전뿐 아니라 각 전각에서 정해진 일정이 빽빽했다.그 일정이 그녀를 쉬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지켜보는 눈을 더 많이 늘린다는 뜻이라는 것을 이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멀리서 내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빈마마! 빈마마를 뵙고자 하는 이가 있사옵니다.”누구냐 묻기도 전에 그 목소리가 이어졌다.“세자저하시옵니다.”이수의 손끝이 차갑게 굳었다.잠시 숨이 멈춘 듯했다.세자는 회랑의 가장 끝, 햇빛이 닿지 않는 그늘쪽에 서 있었다.빛이 닿지 않는 자리였지만 그의 존재는 그림자를 밀어내는 듯 선명했다.그는 이수를 보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그 거리는 길지 않았다.그러나 그 몇 걸음 사이에 이수의 심장은 두 번, 세 번 더 뛰었다.“빈.”세자의 목소리는 단정했다.그러나 단정함 안에 숨겨진 무언가가 굳은 선처럼 느껴졌다.이수는 조심스레 예를 갖추었다.“저하를 뵙사옵니다.”세자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아주 미세하게 낮추었다

  • 천년의 기억   57. 금(裂)의 현상화

    도진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궁에서는 어떤 위험은 말로 입 밖에 내는 순간 현실이 된다.그는 만약이라는 가정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궁의 바람이 거칠어졌사옵니다.”한참 끝에, 그는 그렇게 답했다.“빈마마께 향하는 시선이 너무 많사옵니다. 그 시선이… 언제든 칼이 될 수 있사옵니다.”세자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그 시선이 빈에게 칼이 된다면.”그는 조용히 물었다.“그 칼을 막을 사람은 누구이어야 하느냐.”그 질문은 답을 알고 하는 물음이었다.도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그러나 대답만은 명확했다.“신이옵니다.”그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신은 저하의 검이옵고, 저하의 곁에서 빈마마 또한 지켜야 할 책임이 있사옵니다.”세자는 잠시 침묵했다.그 침묵 안에서 많은 것들이 들렸다.오랜 세월 함께해 온 기억들,도진의 검끝이 지켜왔던 수많은 순간, 그리고, 이제 막 생겨난,그러나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은 감정의 금. 그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그래.”짧게 인정하는 듯한 어조였다.“너는 나의 검이다.”그 말은 오래도록 변치 않았던 사실이었다.그러나 이어진 말은 오늘에서야 처음 꺼내지는 내용이었다.“허나, 검이 주인을 향해 흔들려서는 아니 되지.”그 순간, 공기 속 온도가 한 번 가라앉았다.도진은 눈을 들지 않았으나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둔한 사람은 아니었다.세자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게 가라앉았다.“너는 빈을 지켜야 한다 했다.”짧은 숨이 이어졌다.“그 지킴이…어디서 어디까지인지는 너 또한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그 말은 직접적으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그러나 그 안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었다.한 발자국 더 다가서지 말 것.보호와 감정의 사이에 선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세자의 시선이 도진에게 오래 머물렀다.“내가 너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목 안에는 알 수 없는 쓰라림이 걸려 있었다.“다만, 궁이라는 곳이 너의 마음까지 믿어주지는

  • 천년의 기억   56. 음(音)의 유예

    이미 보고도 다시 묻는 질문이었다.내관은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도진 나으리가 곁에 있지 않았사옵니까.”세자의 시선이 짧게 흔들렸다.잠깐 눈앞이 허옇게 번지듯 흐려졌다.그는 바로 시선을 거두며 창가로 다가갔다.창틀 너머로 해가 이미 어느 정도 떠올라 있었다.그러나 빛이 환한 만큼, 그 안에서 숨고 싶은 마음도 짙어졌다.“저하는…”내관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도전 나으리를 조금 전에도 찾으려 하시지 않았사옵니까.”세자는 대답 대신 입술만 굳게 다물었다.그를 찾으려 했었다. 정말로 그랬다.회랑에서 본 장면을 분명하게 확인하고 싶었다.그 눈빛은 무엇이었는지,그 표정은 무엇을 가리는 것이었는지.하지만 입술 사이로 나가려던 명령은끝내 음으로 완성되지 못한 채 목 안에서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세자는 자신의 그 머뭇거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그는 대신, 조용히 다른 말을 꺼냈다.“…전하께 올릴 보고가 있다 하지 않았느냐.”“예, 저하. 잠시 후 정해진 시각에… 상참 전하러 가셔야 하옵니다.”세자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알았다. 준비하겠다. 나머지는…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지.”나중. 그 말은 곧, ‘지금은 감정을 정리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도진은 수련장에 다시 나와 있었다.아침 햇빛이 비스듬히 수련장 바닥으로 떨어지며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그 그림자 위에 그가 서 있었다.검을 쥔 손은 겉보기에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으나손목 안쪽 깊은 곳에서 아주 희미한 떨림이 느껴졌다.그는 다시 한 번 자세를 취했다.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발을 굳게 내딛었다.“하압”검이 허공을 베었다.공기가 칼끝에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그러나 그는 그 소리가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았다.오늘 베어야 할 것은 눈앞의 허공이 아니라,가슴 안에서 자꾸 자라나는 모호한 감정이었기 때문이다.머릿속에는 회랑에서 마주친 이수의 얼굴이 여러 번 겹쳐 떠올랐다.대비전에서 나올 때, 세자와 마주했을 때,

  • 천년의 기억   8. 어둠이 새긴 흔적

    이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침묵이 짧게 흘렀다.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많은 말들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하루… 마마께서 많이 지치셨을 듯하여 저하께서도 염려가 깊으셨사옵니다.”그 말은 조심스럽고 공손했다.그러나 그 속에는 세자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이수는 시선을 창호로 옮기며 말했다.“…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숨을 감추고 있는 곳이더이다.”도진은 그 말에 정답처럼 대답하지 않았다.오히려 아주 짧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

  • 천년의 기억   7. 밤이 삼킨 경계

    그 말은 단순한 배려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품으려는 의지가,그리고 동시에 도진을 묘하게 견제하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전각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새소리, 바람 소리, 궁인들의 바쁜 발걸음.이수는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거기 호위무사.”도진은 고개를 돌렸다.“예, 마마.”“저하와 내가… 잘 어울리오?”이 질문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도진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이수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 천년의 기억   6. 시선의 감옥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

  • 천년의 기억   5. 열리지 않는 상자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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