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다음 날 정오. 양재 JW 엔터테인먼트 대표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강소희는 주원형과 마주 앉아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김훈과 회사의 법률 대리인까지 피를 말리는 회의를 하고 간 터라, 집무실 내부를 감도는 공기는 유난히 흉흉하고 무거웠다.
주원형은 강소희의 초대형 악재를 막아주는 조건으로, 그녀의 다음 행보를 제멋대로 결정지었다. 결국 거액이 오가는 블록버스터급 영화의 메인 주연 계약서에 강제 통보나 다름없는 서명을 해야 할 판국이었다.
벼랑 끝에 선 기분에 휩싸인 강소희는 이 숨 막히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주원형에게 날카로운 화풀이라도 뱉어내야만 했다.
“대표님, 정말 나를 이렇게까지 굴릴 거예요?”
변호사와 실장마저 모두 방을 나가고 단둘만 남게 되자, 강소희는 주원형의 무릎 위로 올라가 앉으며 그의 셔츠 단추를 거칠게 풀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가슴팍을 실크 이불로 살짝 가린 채, 협탁 위 생수를 집어 들어 목을 축였다.“가만히 숨어 있어도 어차피 바늘방석인걸요. 당연히 출근해야죠.”“착각할까 봐 미리 말해두는데, 회사는 신하늘 하나 없어도 아무 탈 없이 잘 돌아가.”물론 내가 게임 개발실에서 뼈를 갈아 넣는다고 한들 전체적인 대세에 거창한 영향을 주진 못할 터였다.하지만 이까짓 스캔들 따위엔 눈 하나 끔쩍하지 않는다는 걸, 몸소 출근해서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그동안 직장생활 3년 동안 뼈저리게 깨달은 생존 법칙이 하나 있었다.때로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진실을 외쳐본들, 그들이 귀를 기울여 주는 데에는 철저히 '타이밍'이 존재한다는 사실을.“돈을 받았으니 제값을 해야죠. 계약서대로라면 내 몫은 다해야 하지 않겠어요? 제 공백 때문에 남한테 피해 주는 건 질색이라서요.”“기특하네.”늘 차가운 거리를 두면서도 지독하게 내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 그의 전매특허였건만, 어느 순간부터 저 오만하고 얄미운 차준호의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감돌고 있었다.스스로 속내를 솔직히 드러내지 않은 채 항상 타인의 상황을 관찰하는 방관자 역할만 하던 그가, 나 하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거리를 좁혀 주다니 고마운 일이었다.“대표님 덕분에 아주 달콤한 휴가를 보낸 기분이네요.”밉고도 미웠던 남자가 옆에 밀착해 있는데도, 주말 내내 단잠을 이룰 수 있었던 이상한 나날이었다.시간이 멈춘 듯 까마득한 101층 상공에 매달려, 이 지옥 같은 도심에서 견뎌내게 해준 그에게 인사는 건넬 필요가 있었다.“나도 즐거웠어. 내 호텔 비밀번호 안 잊어버렸지? 언제든지 와.&r
깊은 밤.그 시각, CH-컴퍼니 테헤란로 본사 10층 휴게실.걸그룹 ‘에스텔라’는 신곡 발매를 앞두고 땀에 젖은 안무 연습을 이어가다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하나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더니, 경멸과 은밀한 호기심이 뒤섞인 열띤 목소리로 비난을 쏟아냈다.“어머, 신하늘 그 여자.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악녀네. 증거도 쫙 깔렸잖아?”하나의 말에 두나는 신하늘이 명품을 두른 채 차준호와 공식 석상에 등장했던 기사 사진들을 훑으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그러게 말이에요, 언니. 김희주 의원이 터트린 게 마냥 억지는 아닌가 봐. 새벽에 대표님이랑 그렇게 은밀하게 가까이 지내면서도 뒤로는 참 여러 남자를 만났네요.”그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나나까지 입을 삐죽이며 한마디를 거들었다.“처음엔 신 비서님 동정했는데, 알고 보니 최악이네요. 나 같아도 내 아들이 이 남자 저 남자 어장 관리하는 여자랑 친하게 지내면 질색할 것 같은데.”동료들의 험담이 이어지는 내내, 세나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제 코가 석 자였으니까.도국과 한창 달콤하게 관계를 이어가던 차에 이런 대형 스캔들이 터져 버린 것이다.이번에 만나면 함께 밤을 보내기로 은밀하게 약속까지 했던 터였다. 아무리 비즈니스 계약 연애라 해도 아직 50일이라는 기한이 또렷이 남아 있었다.이대로 유야무야 끝나는 건 아닐까, 불안에 애가 탔다.“세나 언니 속 터지겠다. 도국 오빠도 이름만 안 나왔지 사실상 거론된 거나 마찬가지잖아.”나나의 말에 갑자기 어깨가 찌릿하게 움찔거렸다.자신이 마음을 품은 남자가 다른 여자의 스캔들 한가운데에 얽히는 것을 보고 기분 좋을 여자가 세
세상 모든 시름을 다 해결해 주겠다는 듯, 그는 오만하리만큼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언론은 일단 그대로 놔둘 거예요. 회사도 정상적으로 근무하러 갈 거고요.”내 말에 차준호는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고개를 저었다.“굳이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딜 필요 없어.”물론 그 부분은 이미 각오가 서 있었다.나와 함께 근무하는 회사 사람들은 세상의 여론을 의식해 나를 대할 테니까.나는 그의 손길에서 스르르 벗어나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협탁 옆에 두었던 실크 로브를 집어 들어 몸에 걸친 뒤, 아득한 통유리창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렇다고 피하면 제가 다 인정하는 꼴이 되잖아요. 전 당분간 평범하게 제 일상을 살아낼 거예요.”시야에 담긴 풍경은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보다 한층 더 컴컴했다. 눈이 오고 있어 그런지 칠흑 같은 밤하늘에 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심의 화려했던 조명도 대부분 꺼져 있었다.앞으로 펼쳐질 내 앞날도 이런 암흑뿐이려나.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것이 정답이라고 가슴속 심장이 강렬하게 울리고 있었다.우리가 조금 전 나눈 것은 단지 육체의 번잡함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은밀한 의식이었을 뿐이다.차준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로브를 걸쳐 입더니, 차가운 오렌지 주스병을 든 채 내 곁으로 다가왔다.“씩씩하네. 게임 출시 일정은 연장할 거야. 4월 1일로 한 달 늦출 테니 부담 갖지 마.”차준호라는 남자가 나 하나를 위해 얼마나 큰 결심을 내린 걸까. 이미 해외 공급 계약에 대대적인 프로모션까지 전부 마친 상황인데.나 때문에 주가가 하락하는 꼴이라니, 그런 초라한 배려는 사양이었다.나는 입술을 일자
JW엔터테인먼트 프라이빗 숙소. 통유리창 밖으로 도심의 불빛이 차갑게 깜빡이고 있었다.“풋, 천하의 신하늘이 세상의 쓴맛을 이리 볼 줄이야! 하하!”강소희는 구름 위를 걷듯 기분에 취해 넓은 침실을 울릴 정도로 자지러지게 웃어댔다.신하늘의 추락이 주는 가학적인 쾌감과 주원형의 뜨거운 몸짓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기분 좋게 배출하는 듯한 해방감이 전신을 감쌌다.실크 한 조각 걸치지 않은 나체 상태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볼거리가 생긴 듯 좋아 죽을 것만 같았다.주원형은 혀를 쯧쯧 차며 강소희의 허리를 슬며시 끌어당겼다.“어째 심보하고는.”“그렇게 고고하고 도도하게 굴더니 순식간에 천하의 쓰레기가 됐잖아요? 아, 고소해.”강소희는 몇 년 동안 가슴에 얹혀 있던 답답한 체증이 단번에 내려가는 기분이었다.차준호에게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그렇게 새침하게 굴더니, 도국은 물론이고 이아준과도 그렇게 은밀하게 가까운 사이였을 줄이야.거기다 최기범까지 등에 업고 SNS에서 스타처럼 굴던 신하늘이 '국민 악녀'로 전락했기에 신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못나 보여. 그만해.”“난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요. 남 잘되는 거 진짜 싫은데. 아, 속이 후련하다.”강소희는 그리 말하며 주원형의 품으로 파고들었다.세상은 역시 자신을 저버리지 않았다.그 꼴 보기 싫은 신하늘이 이리 무너지니 세상 재미있어 미칠 것만 같았다. 김희주가 얼마나 무서운지 다시 한번 알게 된 강소희였다.자신이 이렇게 짓밟힌다면 연예인으로 몇 년은 매장당할 텐데. 그럼 좋은 세월 다 가고 퇴물이 되어 버릴 터였다.생각만 해도 끔찍했다.&ldq
나를 이토록 몰아붙인 건 분명 차준호였다.대한민국, 그것도 눈 오는 서울 한복판을 까마득히 내려다보는 101층 최상층에서 세상을 발아래 둔 채 그가 지금 내 입술을 탐하고 있었다.목덜미를 은밀하게 쓸어내리던 그의 커다란 손길이 허리선으로 미끄러져 내려오며 나를 가차 없이 옭아맸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러나 세포 하나하나가 기억하는 그의 체온이 혈관을 타고 번졌다.나는 그의 앞에서 궁지에 몰린 애처로운 여자로 서 있었고, 그는 내 앞에서 내 운명을 좌지우지할 위험한 남자로 존재하고 있었다.물론 머릿속의 이성은 경종을 울려대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제정신이 아니었다.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희대의 꽃뱀이 바로 나인 것이다. 이제는 억울해하며 화를 낼 필요도 없이 순순히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하지만 그런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손가락질과 오해를 받느니, 차라리 확실하게 저질러 버리고 욕을 먹는 편이 훨씬 낫겠다는 오기가 솟구쳤다.애증의 결정체, 차준호.‘이 남자가 미치도록 미운데······.’알고 있었다. 나와 연인 관계도 거부하고 미래조차 꿈꾸지 않으면서 제멋대로인 그가 너무 야속했다는 것을.진심으로 그 앞에서 자존심을 굽히지 않은 채 날을 세우고 이를 악물고 있었지만, 결국 나는······.‘······여전히 싫지 않아. ······바보같이, ’이게 가장 지독한 문제였다. 내 마음은 아직 그를 향한 감정을 완벽하게 털어내지 못
이아준은 능청스러운 도국을 바라보며 하마터면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역시, 도국의 의미심장한 말 속에는 수많은 계산이 은밀하게 깔려 있었다.당황한 이아정이 입을 다문 채 어쩔 줄 몰라 하자, 이아준이 입꼬리를 한가롭게 올리며 말문을 열었다.“할아버지, 오셨으니 좀 앉으세요.”그가 시치미를 떼며 손님을 맞이하듯 구니, 순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거실의 공기가 뒤틀렸다.이왕춘은 미련 없다는 듯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속 시끄러운 일은 없는 거겠지?”‘대체 뭐가 속 시끄러운 일입니까?’는 반발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도국이 이아준의 마음을 다 읽은 듯 먼저 이왕춘을 향해 다가섰다.“저희끼리 시끄럽게 수다도 좀 떨고, 게임도 즐길 예정입니다.”그 말을 듣자마자 이왕춘은 기가 찬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분위기가 묘하게 서먹해진 찰나, 뒤에 서 있던 이아정이 헛기침하는 척하며 나지란을 빤히 노려보았다.“아준이 너, 행동 똑바로 해. 우리 L그룹의 명예가 걸린 일이야.”나지란의 말에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이아준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만약 자신이 진짜 마음을 품은 상대가 도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저 인간들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제가 누구에게 마음을 주든 신경 쓰이시는 게 당연하겠죠. 어찌 됐든 전 L그룹의 얼굴이 될 몸이니까요.”이아준의 나른한 응수에 옆에 서 있던 도국조차 참지 못하고 낮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결국 나지란은 눈을 하얗게 뒤집으며 이왕춘의 눈치를 살폈다.“기고만장하기는. 쯧!”다시금 거실
‘이 나쁜 자식!’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1월 1일, 재벌가 차준호와 톱여배우 강소희! 둘만의 밀월여행이었나· 강원도에서 추락 사고!][CC그룹 후계자 차준호·한류스타 강소희! 과연 현재 상태는?][사고 직후 불거진 비밀 연애 의혹· 관계자들은 어떤 입장을···][과연 차준호와 강소희 사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새해의 태양이 채 떠오르기도 전,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차준호는 강소희를 자신의 세단에 태운 채 1월 1일 새벽 강원도 산길을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십여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단순한 교통사고인지, 범죄와 연관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