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놓자, 비로소 내가 사랑을 알았다: Chapter 171 - Chapter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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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화

문밖에 진혁의 모습이 나타나고 나서야, 준희는 조금 얌전해졌다.야윈 몸을 이불 속에 웅크린 채 새하얗게 질린 작은 얼굴로 누군가 다가오는 걸 몹시 두려워하는 듯했다.“준희야, 이것 봐. 아저씨가 우리 준희 보러 오셨어.”초연이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지만, 준희는 몸을 움츠리며 피하더니 고개를 돌리면서 진혁의 품으로 와락 안겨들었다.초연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준희가 트라우마 때문에 과민 반응을 보여서 그래. 나든 경호원이든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네.”진혁은 침대 곁에 선 채 아이가 매달리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지만, 미간은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준희는 말 없이 진혁을 꼭 끌어안고만 있었다.잠시 후, 아이의 작고 가냘픈 어깨를 잡은 진혁이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추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준희야, 무서워하지 마. 아저씨가 여기 있잖아.”멍하던 준희가 정신을 차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이의 작은 두 눈에는 앞으로의 일에 대한 막막함만이 가득했다.초연이 진혁 곁으로 다가왔다.“준희가 지난번 추락 사고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가오는 걸 몹시 거부해.”“심지어 나한테까지 곁을 안 주는데, 진혁 씨한테는 예전처럼 이렇게 의지할 줄 몰랐어.”진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네가 엄마잖아. 당연히 널 더 따라야 하는 거 아니야?”초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몰래 주먹을 꽉 쥐며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나도 모르겠어. 어쩌면 애가 날 원망하는 걸지도 몰라.”“그날 내가 나랑 같이 있자고 고집 부리지만 않았어도, 그런 끔찍한 일은 안 생겼을 텐데.”진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병상에 앉은 준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준희는 이불을 꼭 쥔 채 멍한 표정으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본래 통통했던 볼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야위어 있었다.반면 초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꾸민 채 전혀 지친 기색이 없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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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2화

진혁은 고요한 눈빛으로 초연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너무 조급하게 굴었다는 것을 깨달은 초연이 황급히 진혁의 팔에서 손을 떼었다.“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걱정돼서...”“하씨 가문 본가에서, 네가 걱정할 게 뭔데?”진혁이 미간을 찌푸렸다.초연은 말문이 막혀 차마 진혁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임순자가 초연을 힐끗 보았다. 마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보는 듯했다.“문초연 씨, 하씨 가문에서 아이를 당분간 머물게 해준 것으로도 고마워해도 모자랄 판에, 사모님과 도련님께서 직접 아이를 돌봐 주시길 바란 겁니까?”“이 아이는 어찌 됐든 하씨 성을 가지지 않았으니까요.”그 한마디에 초연은 꼼짝없이 말문이 막히면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임순자가 준희의 손을 잡자, 준희는 겁먹은 듯 손을 빼내려고 했다.하지만 진혁의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는 순간, 준희는 임순자에게도 악의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얌전히 손을 내주었다.준희가 임순자를 따라 떠난 후, 초연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억지로 웃음을 쥐어짜 냈다.“우리 준희 잘 부탁해.”진혁은 정장 재킷을 여미며 짧게 대답했다.“응.”...꼬박 3일 동안, 이담은 진혁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보나 마나 그 모자와 함께 있겠지.’아침에 작은 수술이 하나 있어서, 이담은 7시부터 병원에 도착해 간호사 스테이션에서 환자의 CT를 확인하고 있었다.그때 초연이 차트를 넘기면서 사무실에서 걸어 나왔다. 이담과 마주치자 일부러 다가간 초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준희가 진혁 씨를 따라 하씨 가문 본가로 갔어요. 심 선생님, 설마 어린애 하나 가지고 마음에 담아두고 그러진 않겠죠?”이담은 덤덤하게 초연을 힐끗 보며 대답했다.“문 과장님이 아이를 데리고 하씨 가문에 들어간다고 해도, 전 전혀 신경 안 쓰는데요.”초연은 입가에 띤 미소가 굳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담은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자료를 챙겨 곧장 수술실로 향했다.수술을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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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약국에 들어간 기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차로 돌아왔다. 창문을 통해 몸을 굽힌 기사가 진혁에게 뭔가를 속삭였다.진혁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사무실로 돌아온 이담은 임신 테스트기로 검사를 한 뒤 5분을 기다렸다. 결과는 한 줄이었다.이담은 그제야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임신은 아니었다.이담은 약제실에 들러 한약 처방을 받았다.탕비실을 지나가던 중, 우연히 간호사 두 명이 소연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들었다.그러고 보니, 지난번 수술 때 초연의 미심쩍은 행동을 귀띔해 준 이후로 소연을 본 적이 없었다.알고 보니 소연은 그날 이후 곧장 병원을 그만둔 상태였다.사무실로 돌아온 이담이 소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이력서 기록을 통해 집 주소를 알아낸 이담은 오후가 되자 직접 소연을 찾아 나섰다.이담은 좁은 골목 근처에 차를 세웠다. 건물들이 붙어 있고 길이 너무 좁아서 차가 들어갈 수조차 없는 곳이었다.편의점에서 나오던 소연은 집 밖에 서 있는 이담을 발견하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화들짝 놀랐다.“심 선생님?”이담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후, 이담을 집 안으로 안내한 소연이 물을 내어주며 말했다.“가족들은 다 외출하고 저 혼자 있어요. 선생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이담이 고개를 들었다.“병원 그만뒀다면서요.”소연은 말 없이 침묵했다.이담이 빤히 바라보았다.“문 과장님 때문인가요?”“아니요. 그냥 개인적인 문제예요. 더는 병원에 다니고 싶지 않았어요.”소연은 손을 꽉 쥔 채 차마 이담의 눈을 마주보지 못했다.이담은 말 못 할 사정이 있음을 눈치채고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물을 마신 뒤 입을 열었다.“나랑 강성병원으로 같이 갈래요?”소연이 깜짝 놀랐다.“강성병원으로 가신다고요?”“진작에 전근 신청을 해 뒀어요. 강성병원이 경성병원만큼 대우가 좋진 않지만, 적어도 마음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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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4화

‘데리러 온다고?’이담은 의아했다.‘이 사람, 오늘 왜 이래?’이담이 좀처럼 대답하지 않자, 진혁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싫어?]‘됐어. 굳이 거절할 필요 없지.’“국제무역센터 사거리야.”진혁은 알았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이담이 국제무역센터 사거리의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낯익은 차 한 대가 길가 화단 옆에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이담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안전벨트를 맸다.곁에 앉은 진혁은 이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속을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몸이 어디 안 좋은 데 있어?”이담은 멈칫했지만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괜찮아. 약 먹었어.”진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담은 문득 중요한 일이 떠올라 진혁을 쳐다보았다.“나 옷도 갈아입어야 돼?”아무래도 오늘 저녁 자리는 꽤 격식을 차려야 할 터였다.등받이에 기댄 채 진혁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이담은 더 묻지 않았다.저녁 7시, 이담과 진혁은 강원 레스토랑에 도착했다.경성시에서 가장 유명하고 럭셔리한 레스토랑이었다.제왕 룸만 해도 엄청나게 호화로운데,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연회장인 구름바다 룸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화려했다.이 공간 하나만 대관하는 데도 하룻밤 최소 대관료가 1억 이상이었다.게다가 돈이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예약할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이담은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눈앞의 광경에 잠시 말을 잃었다.궁전을 방불케 하는 전통 양식의 웅장한 건축, 정교한 조각과 옥으로 빚은 화려한 인테리어가 눈앞에 펼쳐졌다. 상류층 사이에서조차 예약하기 어렵다는 그 명성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진혁이 등장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그중에는 각 지역의 시장들을 비롯해 경성시 의학협회에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저명한 교수와 전문가들도 적지 않았다.그중 몇 명은 이담에게도 낯익은 얼굴이었다.한 중년 교수가 이담을 알아보곤 말을 건넸다.“아니,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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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화

하동민이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허미란이 곧바로 말을 가로챘다.“권 대표님, 지난번에는 저희가 미처 말씀을 못 드렸네요. 이담이는 저희 하씨 가문의 며느리랍니다.”진혁이 이담을 이런 자리에까지 데리고 나온 이상, 두 사람의 관계를 밝힌다 해도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게다가 허미란은 은호가 이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기에, 만약 은호가 이담에게 마음이 있다면 이참에 미리 선을 그어두는 편이 나았다.진혁이 잔에 담긴 술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제 아내입니다. 꽤 놀라신 모양이군요.”은호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이담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지연의 태도가 떠오르자 헛웃음이 나왔다.“확실히 꽤 놀랍군요. 아무래도...”은호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하씨 가문 며느리 같아 보이진 않아서요.”진혁은 눈길 한 번 돌리지 않고 은호를 빤히 응시했다.허미란이 웃으며 말했다.“권 대표님, 그건 좀 섭섭한 말씀이시네요. 이담이가 왜 하씨 가문의 며느리 같지 않다고 그러십니까?”“따님이 지난번에 이담 씨를 곤란하게 만들던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원수지간인 줄 알겠더군요. 어떻게 새언니라고 생각했겠습니까?”은호의 그 한마디에 허미란의 안색이 확 변했다.진혁의 표정을 눈치챈 하동민이 목소리를 낮춰 꾸짖었다.“자식 단속 좀 잘하라고 하지 않았소? 애가 왜 또 새언니를 못살게 구는 거요?”지연이 이담을 이런 식으로 겨냥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사적인 자리라면 굳이 간섭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 특히 진혁 앞에서는 아버지로서 어느 정도 체면을 차리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허미란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지연이 성격 당신도 잘 알잖아요. 애가 워낙 솔직하고 거침없어서 그래요.”“솔직하고 거침없는 것과 생각이 없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따님 교육을 다시 시키셔야겠더군요.”술잔을 내려놓은 은호는 하동민 부부의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이담을 향해 걸어갔다.진혁은 은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잔에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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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화

초연은 해외에서 6년이나 머물렀으니 영어 실력이 뛰어난 것은 당연했다. 사람들의 칭찬이 쏟아졌지만 초연은 조금도 겸손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초연의 시선이 사람들 틈에 섞인 이담을 힐끗 향했다.오만하게 턱을 살짝 치켜든 모습은, 비록 집안 배경은 평범할지 몰라도 해외 유학파라는 학력만큼은 이담보다 앞선다고 과시하는 듯했다.게다가 안데르 교수는 M국 사람이라서, 스스로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안데르 교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지연은 신경외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초연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자, 초연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한층 동경심이 깃들었다.“오빠, 거봐. 내가 초연이 엄청 대단하다고 했잖아.”그러면서 경멸이 가득한 눈빛으로 이담을 흘겨보았다.“주제도 모르고 자리만 꿰차고 있기만 하는 누구랑은 다르게 말이야.”이담은 철저히 무시했다.그 모습을 본 초연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지연아, 그런 말 하지 마. 다들 각자 전문 분야가 있는 법이잖아. 선생님은 신경외과 수술을 가장 잘하시는 분이니, 분명 나 못지않게 아는 게 많으실 거야.”“쟨 그냥 평범한 학사 출신이잖아. 외국어는 한마디도 못 할 텐데? 어떻게 초연이랑 비교가 돼?”지연이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어찌 됐든 지연의 눈에 이담은 그저 하찮고 같잖은 존재일 뿐이었다.은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남들이 이담을 헐뜯고 깎아내리는 것을 듣고 있자니 왠지 묘하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게다가 곁에서 한마디도 거들지 않고 침묵하는 진혁을 보자니 기가 막혔다.‘저게 명색이 남편이라는 사람이 보일 태도인가?’지금 이 순간, 이담이 하씨 가문에서 어떤 대접을 받아왔을지 짐작이 가자 은호는 마음이 쓰렸다.조수 한 명이 안데르 교수 곁으로 다가와 귓속말로 뭔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기대에 차 있던 안데르 교수의 얼굴에 아쉬움이 드리웠다.“거기 여성분. 신경 줄기세포 이식 연구에 대해 아주 해박하시군요. 하지만 방금 말씀하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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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7화

“행동이 좀 지나치지 않습니까?”은호도 이담이 영어를 못 알아듣는 줄 알았다.안데르 교수 곁에는 통역사가 있는데도, 이 남매가 굳이 이담 앞에서 영어로 떠드는 이유쯤은 짐작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은호가 이담을 감싸고도는 모습을 본 진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은호를 쳐다보았다. 진혁의 주변으로 무겁고 위험한 기류가 맴돌았다.진혁이 입을 떼기도 전에 이담이 은호를 붙잡으며 덤덤하게 말했다.“됐어요. 저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신경 안 써요.”이담은 영어를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끝내 내색하지 않았다.더욱이 안데르 교수 앞에서 이런 문제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지도 않았다.가짜는 어디까지나 가짜일 뿐, 결코 진짜를 대신할 수 없을 테니까.은호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도저히 신경을 끄기가 힘들었다....연회가 한창 진행 중일 때, 휴게실에서 걸어 나온 허미란이 종업원 한 명을 불러 세웠다.들고 있던 술잔을 쟁반 위에 올려놓은 허미란이 팁을 주면서, 그 술을 은호에게 전해주라고 눈짓했다.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은호와 이담이 계속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조급해졌다.무슨 일이 있어도 딸의 혼사를 성사시켜야만 했다.허미란은 핸드폰을 꺼내 지연에게 문자를 보냈다.허미란의 문자를 받았을 때, 지연은 마침 초연과 진혁의 곁에 서서 쉴 새 없이 조잘거리고 있었다.진혁은 별다른 관심도 없는 듯 잔 속의 술을 가볍게 흔들며, 초연과 지연이 무슨 말을 하든 그저 무심하게 대꾸할 뿐이었다.진혁의 시선은 유리잔 너머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 사람에게 머물러 있었다.종업원이 은호 곁으로 다가가 술을 건넸다. 은호는 한창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던 탓인지 의심 없이 잔을 받아 들고 천천히 들이켰다.얼마 지나지 않아서, 은호는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오빠, 왜 그래요?”이담이 이상한 걸 눈치채고 물었다.은호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대답했다.“머리가 좀 어지럽네.”“제가 휴게실까지 부축해 드릴까요? 좀 쉬는 게 좋겠어요.”은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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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8화

“권 대표님, 우리 딸이 호의로 휴게실까지 모셔다드렸는데, 어떻게 애를 희롱할 수가 있어요!”허미란은 재빨리 입을 열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은호가 희롱했다는 사실을 기정사실로 만들려 했다.하동민 역시 원래부터 이 혼사를 성사시키고 싶어 했다.‘굳이 나설 필요도 없이 일이 잘 풀렸군.’이담이 미간을 찌푸렸다.“의식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희롱할 수 있다는 거죠?”“그게 무슨 소리야?”허미란이 불만스럽게 쏘아붙였다.“우리 딸이 스스로 몸을 함부로 굴렸다는 뜻이니?”“저는 그저 의학적인 관점에서 사실만 말씀드리는 거예요. 의식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정상적인 성관계를 할 수 있겠어요?”주변 사람들은 듣고 다소 민망해했지만, 현장에 있던 상당수가 의학계 종사자였기에 이 말에는 확실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어디서 사실 운운하며 말장난이야, 내 딸이 순결을 잃었다는데!”허미란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눈시울을 붉혔다.“우리가 권씨 가문과 사돈을 맺고 싶어 했던 건 맞지만, 아직 확정도 안 난 상태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권씨 가문에서 책임지고 해명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하씨 가문이 권씨 가문이랑 혼사를 맺는다고?”“어쩐지 정략결혼 얘기가 오갔다면, 이제야 앞뒤가 맞네.”진혁의 시선이 이담의 얼굴에 꽂히며 눈빛이 한층 차가워졌다. 잠시 후,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권 대표님, 확실히 해명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이담이 진혁을 쳐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이렇게 대놓고 편드는 건 너무 심하잖아!”진혁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네 남편으로서, 네가 다른 남자 걱정하는 꼴을 참아주는 것도 한계야. 나한테 약속한 거, 다 잊었어?”게다가 진혁은 여전히 이담이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믿고 있었다.지금의 진혁은 이담이 알던 사람과는 전혀 달라 보였다.눈앞에 전혀 다른 남자가 서 있는 것 같아 낯설기만 했다.‘애초에 하진혁이라는 사람을 제대로 안 적이 없었던 것 같아.’초연 역시 이 순간 안색이 어두워졌다.“그쯤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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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9화

진혁이 그린힐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 11시 반이었다.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과 침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진혁은 조명을 켜고 침실 문을 열었다.바깥에서 새어 들어온 은은한 불빛에 의지해 침대 위에서 세상 모르고 잠든 이담을 바라보던 진혁의 얼굴이 한순간 딱딱하게 굳어졌다.침대 곁에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던 진혁은, 겉옷을 벗고 옆방인 손님방으로 가 샤워를 했다....다음 날 아침, 커튼 틈새로 새어 들어온 한 줄기 햇살이 침대 머리맡에 내려앉았다.이담이 천천히 눈을 뜨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진혁의 늠름하고 잘생긴 얼굴이었다.진혁의 팔이 이담의 허리 아래 골반 쪽에 얹혀 있었다.행여나 배가 눌릴까 조심하는 섬세한 몸짓은, 마치 이담을 진심으로 애지중지하며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인가! 갓 결혼한 신혼부부처럼 다정한 모습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마주 보고 있어도 닿을 수 없을 만큼 멀었다.이제는 도저히 좁힐 수 없을 만큼.이담 역시 두 번 다시 진혁의 세계로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이담은 곧바로 진혁의 손을 치워 버렸다. 미세한 움직임에 진혁도 잠에서 깼다.진혁은 눈앞의 이담을 빤히 응시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아주 푹 자던데.”“어쩔 수 없지. 때가 되면 졸린 게 이미 습관이 돼 버렸으니까.”이담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예전에 이담은 불면증이 심했다. 밤의 절반은 새벽 늦게까지 진혁을 기다리는 데 썼고, 도저히 졸음을 참지 못할 때면 소파에서 쪽잠을 자곤 했다.그 시절, 이담은 꽤 집착이 심했고 미련도 많았다.하지만 사람이 너무 한곳에 집착하는 건, 결국 좋을 게 하나도 없는 법이었다.진혁이 무슨 말이라도 덧붙일 줄 알았건만, 그저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아이가 생겼으니 잠이 많아지는 것도 당연하겠지.”‘무슨 소리야?’이담이 멍해져서 되물었다.“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네가 약국에서 뭘 샀는지, 굳이 내 입으로 다시 말해줘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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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0화

오후, 이담은 하씨 가문 본가를 찾았다.임순자와 고용인 몇 명이 마당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작은 사모님, 어르신들 다 거실에 계십니다.”이담은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따라 거실로 향했다.마동순은 곱게 다듬은 꽃가지를 화병에 꽂으며 장식하고 있었고, 곁에 있던 이만옥의 시선이 이담을 따라 움직였다.이만옥은 이담의 아랫배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임신이라는 큰일을 왜 우리한테 말하지 않은 거니?”“어머님, 할머님. 사실 전...”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한 남자아이가 갑자기 뛰어 들어왔다. 문밖에 있던 고용인이 미처 막지 못할 만큼 순식간이었다.이담은 준희를 보고도 얼굴에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 아이가 본가에 들어와 있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고용인은 아이를 막지 못했다는 사실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황급히 들어와 아이를 데리고 나가려고 했지만, 준희는 도우미의 손을 뿌리치며 막무가내로 버텼다.마동순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만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애 하나 제대로 못 보고 대체 뭘 한 거야?”“죄송합니다, 사모님. 지금 바로 데리고 나가겠습니다.”고용인은 파리해진 얼굴로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 준희를 잡아 끌었다.준희가 반항하며 떼를 썼다.“아저씨 볼 거예요! 나랑 같이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단 말이에요!”“어디서 떼를 쓰는 거야!”이만옥이 가차 없이 호통을 쳤다.“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이 집에 머물게 해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 줄 알아야지, 어디서 함부로 떼를 써?”준희는 뭔가 끔찍한 기억이라도 떠오른 듯, 그 벼락같은 호통 소리에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결국 바지에 오줌을 싸고 말았다.곧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이만옥은 그 꼴을 보자 질색을 했다.“빨리 애 안 데리고 나가고 뭐 해?”이만옥은 코와 입을 틀어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짜증 나게. 다 큰 애가 바지에 오줌이나 지리고.”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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