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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1화

김태하의 태도가 워낙 단호하자, 최동윤도 더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김태하가 강지현을 지키는 걸 택했다면, 자신은 김태하를 지키면 될 일이었다.강지현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 김태하는 이미 체크아웃한 뒤였다.텅 빈 스위트룸에는 그가 머물렀다는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 오후, 두 사람이 서로를 놓지 못하던 순간만은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강지현이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때, 김태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지현아, 나 해원시로 돌아갈 거야. 걱정하지 마.]짧은 한 줄이었다.강지현이 곧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다. 탑승 직전이라 해도 김태하가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을 리 없었다.그는 강지현이 반드시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마음을 굳혔다는 뜻이었다.강지현이 주씨 가문과 김태하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김태하가 대신 결정을 내려 버린 것이다.무슨 일이 있어도 강지현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그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런데도 강지현은 화가 나서 울고 싶었다.‘정말 제멋대로야.’어떻게 그녀 마음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적어도... 적어도 무사한지만 확인하게 해 줬어야 했다.김태하라면 알고 있을 텐데. 그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지 못하면 그녀는 절대 마음 놓지 못한다는 걸.강지현은 방 한가운데 선 채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눈물이 소리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울음소리조차 삼킨 채 버텼지만 속은 돌덩이를 잔뜩 삼킨 듯 답답하기만 했다.고요한 거실, 빈 소파를 바라보자 김태하가 사람들에게 서두르라고 지시하던 모습이 그려졌다.틀림없이 안색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창밖을 바라보던 눈빛도 어제보다 더 어둡고 흔들렸을 테지.어제만 해도 그녀 손을 놓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대체 얼마나 큰 결심을 했기에 이렇게 급하게, 이렇게 매정하게 떠날 수 있었을까.“지현 씨.”배아름이 문가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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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2화

배아름은 깜짝 놀라 얼른 강지현을 부축했다. 등을 가만히 쓸어 주며 진정시킨 뒤, 서둘러 휴지를 건넸다.“지현 씨, 괜찮으세요? 속이 안 좋으신 거예요?”“모르겠어요. 며칠 전부터 자꾸 속이 메스꺼워서...”강지현은 몇 번 더 헛구역질하더니 겨우 말을 이었다.배아름은 순간 무언가 짚이는 듯했다.“며칠 전부터 계속요?”강지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휴지를 받아 입가를 닦았다.배아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다른 데는 불편한 곳 없고, 그냥 메스껍기만 하세요?”그녀는 강지현의 팔을 살며시 잡아 맥을 짚어 보았다. 잠시 뒤, 배아름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배아름은 주호석 곁을 오래 지켜왔다. 주호석은 나이가 많아 종종 몸이 불편해졌고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려면 곁에 있는 사람들도 기본적인 간호 지식을 익혀야 했다.배아름은 가끔 직접 침이나 지압으로 주호석의 몸을 풀어 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맥을 짚는 법도 어깨너머로 어느 정도 익힌 상태였다.“네.”강지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배아름의 표정을 보고서야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설마...’배아름이 목소리를 낮췄다.“이번 달에, 생리는 하셨어요?”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이미 예정일은 한참 지나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정신이 없어 깜빡하고 있었다. 며칠째 속이 울렁거렸는데도 전혀 다른 쪽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다.설마 임신한 걸까?김태하와 관계를 가진 횟수도 많지 않은데, 정말 이렇게 운 좋게 아이가 생긴 걸까.놀라움과 기쁨이 동시에 밀려왔지만 그 감정은 곧 불안과 착잡함에 묻혀 버렸다.‘아가, 하필 왜 지금 온 거니...’“지현 씨, 돌아가면 병원에서 제대로 검사부터 받아 보세요. 저도 확신할 수는 없어요.”배아름은 차마 더 노골적으로 말하지 못했다. 앞에는 운전기사가 있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 해도, 이런 이야기를 함부로 흘릴 수는 없었다.지금 주호석은 김씨 집안을 좋게 보지 않았다. 더구나 강지현의 아이는 그가 바라던 변수가 아니었다. 그녀와 아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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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3화

누가 봐도 강지현은 이미 일어난 뒤였다.게다가 바닥에 널린 옷들은 잠옷이 아니라 외출복이었다.주호석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곧장 배아름을 노려보자, 배아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쭉 흘렀다.주호석이 성큼 방 안으로 들어가자, 배아름도 멈칫했다가 얼른 뒤따라 들어갔다.그런데 일행이 막 방 안으로 들이닥친 순간, 욕실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이어 물소리가 뚝 끊기더니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아!”수건으로 몸을 감싼 강지현은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놀라 비명을 질렀고, 곧장 다시 욕실 문을 닫아 버렸다.“다들 나가세요!”배아름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앞으로 나섰다. 주호석 뒤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낮게 꾸짖자, 다들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방 밖으로 물러났다.주호석의 얼굴에도 잠깐 멋쩍은 기색이 스쳤다. 그 역시 고개를 돌린 채 한쪽으로 물러섰다.곧 욕실 안에서 강지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할아버지, 들어오실 거면 말씀이라도 하셨어야죠. 저 씻고 있었잖아요!”강지현이 따지듯 말하자 주호석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배아름이 재빨리 끼어들었다.“지현 씨, 회장님께서 걱정하셔서 그러신 겁니다. 오늘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셔서 아직 주무시는 줄 아셨나 봅니다.”“일단 나와라. 나와서 이야기하자.”주호석이 낮게 말했다. 그러고는 바닥에 널린 옷들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강지현이 정말 씻고 있었다 해도 저 옷들은 이상했다. 이제 막 일어난 사람이 입고 있던 옷이라고 보기에는 분명 외출복이었다.배아름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주호석이 눈짓으로 막았다.배아름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옆에 가만히 섰다.잠시 후, 강지현이 목욕 가운을 걸치고 욕실에서 나왔다.짙은 향이 확 풍겼다. 주호석은 강지현을 위아래로 살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씻은 듯했고 목덜미까지 살짝 붉어져 있었다.“오늘 아침에 밖에 나갔느냐?”주호석이 대뜸 물었다.강지현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밖이요? 저 이제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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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4화

“김태하가 여기 온 건 알고 있었느냐?”주호석은 숨을 내쉬고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빙빙 돌려 말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배아름은 손을 꽉 쥔 채 강지현이 들어간 방 쪽만 바라보았다.“알고 있었어요.”강지현의 대답은 뜻밖에도 담백했다.주호석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진작 알고 있었단 말이냐?”“뉴스에 뜨기 조금 전에요.”강지현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왔다.“저희 매일 연락해요. 태하는 이쪽에 도착한 뒤에야 저한테 말했어요.”그 말에 바짝 굳어 있던 주호석의 기색이 조금 누그러졌다.그는 무심코 배아름을 돌아보았다. 배아름도 한결 풀린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지현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이었다.사실 강지현이 김태하가 온 사실을 모른다고 잡아뗐다면, 주호석은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그렇게 거짓말을 했다면 오히려 누군가가 파 놓은 덫에 걸려드는 꼴이었다. 어렵게 쌓아 올린 주호석과 강지현의 신뢰도 그 순간 무너졌을 터였다.하지만 이렇게 순순히 인정하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김태하가 강지현을 찾아온 건, 따지고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주호석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마침 강지현도 방에서 나왔다. 옷은 이미 갈아입은 뒤였고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려 있었다. 전체적으로 여유롭고 태연해 보였다.“그래서 네 생각은 어떠냐.”주호석이 강지현을 살피며 물었다.“김태하가 너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마음이 흔들렸느냐?”강지현이 솔직하게 나온 이상, 주호석도 두 사람이 이미 만났는지까지는 캐묻고 싶지 않았다.정말 김태하를 따라 떠날 생각이었다면, 강지현은 지금 이 자리에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다만 강지현이 감정에 휘둘려 김태하를 택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그 순간부터 주호석에게 강지현은 더 이상 손녀가 아니었다. 주상 그룹 역시 강지현에게 맡길 수 없었다.주호석에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 점이었다.강지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배아름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채고 황급히 눈짓으로 말렸다.배아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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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5화

주호석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했다.“열흘? 지금 농담하느냐?”엄경미가 주승호의 죽음을 조사하는 데만 몇 달이 걸렸다.김무언 뒤에는 김씨 가문이 있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복잡한 세력이 얽혀 있을지도 몰랐다. 실마리 하나 붙잡는 것도 쉽지 않은 판에, 열흘 안에 결론을 내겠다니.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농담 아니에요.”강지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주호석의 눈빛을 담담히 받아냈다.깊은 밤, 도심 한가운데 있는 사립 전문 병원.김태하는 병상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었다.그는 줄곧 잠들어 있었다. 곁에 있던 여의사는 해 질 무렵부터 밤이 깊을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창밖에서 흘러든 달빛이 침대 옆으로 내려앉았다. 창백한 얼굴 위로 옅은 빛이 번졌지만 또렷한 이목구비와 차갑고 단단한 분위기만큼은 흐려지지 않았다.“대표님은 이제 큰 고비는 넘긴 것 같으니, 너도 그만 들어가서 쉬거라.”담당 의사가 밖에서 들어오다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의사를 보고 말했다.하지만 여의사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졸리지 않아요.”이번 위출혈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자칫하면 병세가 더 나빠지기 전조일 수도 있어 두 사람 모두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결국 이쪽에서 이름난 전문의들까지 불러 회진을 받은 뒤, 강한 약을 쓰기로 했다.국내에서는 잘 쓰지 않는 약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한 번만 써도 몇 달은 버틸 만큼 상태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문제는 부작용이었다.투약하는 동안 통증이 극심했다. 의료진은 처음엔 좀 더 순한 약을 권하려 했지만 김태하는 끝내 그 약을 고집했다.하루라도 빨리 회복해야 했다.그래야 강지현을 도울 수 있었다.오후 내내 약이 들어갔다. 곁에 있던 사람들은 김태하가 이를 악물고 버티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그 와중에도 김씨 집안에서는 계속 전화가 걸려 왔다. 김태하는 그 전화를 모두 직접 받았다.통증 때문에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고 한마디를 뱉을 때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힘을 줘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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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6화

김태하가 눈을 떴다.흐릿한 시야 너머로 침대 곁에 선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강지현인 줄 알았다.차갑고 단정한 눈매에 걱정이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곧 시야가 또렷해졌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토록 보고 싶던 강지현이 아니었다.몸이 이렇게까지 무너지고 나니, 강지현이 더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리움은 덩굴처럼 미친 듯이 자라나 몸의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김태하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방금 꿈을 꾸었다.강지현이 자신을 찾아오는 꿈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있겠다고, 절대 혼자 두지 않겠다고 했다.꿈속의 김태하는 더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강지현을 제 곁에 붙잡아 두었다. 하지만 꿈에서 깨자, 현실은 다시 두 사람을 멀리 갈라놓았다.김태하는 링거 바늘에 멍든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을 조금 오므리자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김 대표님, 어디가 많이 불편하세요? 따뜻한 물이라도 좀 드세요.”여의사는 김태하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얼른 따뜻한 물을 따라 건넸다.하지만 김태하는 받지 않았고 그저 제 손등만 내려다보았다.담당 의사는 김태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여의사가 무언가 더 말하려 하자, 그는 조용히 손으로 막았다.그는 링거 속도만 조금 조절했다. 통증이 얼마나 줄어들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뭐라도 해야 했다.“나가 주세요. 혼자 있고 싶습니다.”김태하가 낮게 말했다.고요하고 텅 빈 병실 안에서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쓸쓸하게 들렸다.여의사는 담당 의사의 눈치를 보며 못내 아쉬운 얼굴로 돌아섰다. 그러다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다시 멈춰 섰다.“김 대표님, 아프면 그렇게 무조건 참지만 마세요.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하셔도 되잖아요.”여의사는 누군가를 깊이 사랑한다는 게 정확히 어떤 마음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김태하가 이토록 사랑하는 여자라면, 그렇게 약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그날 호텔 방에서 변장까지 하고 김태하를 찾아온 강지현을 보았을 때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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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7화

김태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따뜻한 물 한 잔이 손 옆으로 내밀어졌다.컵을 쥔 손가락은 가늘었다. 그리고 그 손에 낀 낯익은 반지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김태하는 물컵을 받다 말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그는 그 손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마침내 침대 곁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순간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착각인가. 지현이가 어떻게 여기에...’지금쯤 주호석 곁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었나.강지현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문 채 김태하를 노려보고 있었다.속은 이미 엉망이었다. 강지현은 흐트러지는 숨을 억지로 눌러 삼켰다.“지현아? 네가 어떻게...”김태하는 한참이나 눈앞의 사람을 확인하고 나서야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강지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은 김태하의 창백한 얼굴에서, 미처 다 닦이지 않은 피가 묻은 입술로 내려갔다. 그리고 바닥에 번진 검붉은 핏자국에 멈췄다.마지막으로 다시 김태하의 눈을 마주했다. 충격으로 살짝 커진 눈동자가 그대로 강지현의 시야에 박혔다.김태하가 아직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강지현이 침대 옆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병원복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평소라면 아무리 화가 나도 품위를 잃지 않던 강지현이었다. 이렇게 거칠고 흐트러진 모습은 김태하도 처음이었다.“이게 몸이 좀 안 좋은 거야?”“나더러 걱정하지 말라며. 알아서 잘 챙기겠다며. 그 결과가 이거야?”“김태하! 너 왜 또 약속 어기고 나한테 거짓말해!”그녀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더는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화도 났고 슬펐고 무서웠다. 너무 놀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옷깃을 쥔 손에서 힘이 빠졌고 손끝도 제멋대로 떨렸다.“...”김태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강지현은 눈물이 차오르는데도 이를 악물고 꾹 참았다. 그 모습을 보자 가슴이 몇 배, 몇십 배 더 아파 왔다.김태하가 기억하는 강지현은 언제나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다. 때로는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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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8화

김태하는 이를 악물고 강지현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강지현은 조금만 힘을 줘도 김태하가 더 다칠 것 같아, 차마 그를 세게 밀어내지 못했다.김태하는 강지현의 뺨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한 숨이 피부에 닿았다.낮게 떨리는 목소리에는 애원에 가까운 기색이 묻어 있었다.“내가 잘못했어. 너한테 숨기지 말았어야 했는데. 화내지 마, 응?”강지현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미칠 만큼 화가 났지만 달려와서 이렇게까지 망가진 김태하를 보는 순간, 자기 자신조차 원망스러웠다.김태하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무너졌을 리 없었다. 그동안 두 사람이 함께 보낸 행복한 시간들 속에서, 김태하는 대체 어떤 심정으로 웃고 있었을까.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다.그토록 가까이 있었으면서. 조금만 더 살폈다면 그의 작은 변화쯤은 얼마든지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강지현은 제 행복에 취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김태하는 이번 일을 김씨 집안 사람들에게까지 숨기고 있었다. 최동윤마저 끝내 김태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그때 강지현은 김태하에게 정말 큰일이 생겼다고 확신했다.그래서 주호석 앞에서 열흘 안에 증명하겠다고 못 박았다. 그렇게 겨우 열흘의 자유를 얻어 냈지만 그럼에도 늦고 말았다.“그럼 말해 줘.”강지현이 겨우 입을 열었다.“너 대체 무슨 병을 앓고 있는 거야?”얼마 지나지 않아 김태하의 의료진도 놀라 병실로 달려왔다. 의사들은 병실 안에 있는 강지현을 보고 하나같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강지현의 눈가는 붉게 부어 있었다. 그래도 표정만큼은 애써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강지현은 김태하의 상태를 물었다.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담담한 척해도 지친 기색은 감출 수 없었다.대략적인 상황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다. 종양이라고 해도 아직 위험도가 낮은 단계라면 관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담당 의사는 김태하의 눈치를 한 번 살핀 뒤 곧바로 입을 열었다.“강지현 씨,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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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9화

강지현이 돌아오자 김태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수액은 이미 끝났지만 손등의 멍은 더 짙어져 있었다. 링거를 맞은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강지현은 그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쥐고 몸을 기울여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아파?”“안 아파.”“또 거짓말하네.”김태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부정했다.그가 미리 당부해 둔 탓에 의료진 중 누구도 강지현에게 약의 부작용을 자세히 말하지 못했다. 김태하는 원래도 잘 참는 사람이었고 강지현을 본 뒤로는 정말 기뻤다. 온 신경이 그녀에게 쏠린 덕분에 통증도 조금은 가라앉은 듯했다.강지현은 고개를 숙인 채 그의 몸을 조금씩 주물렀다. 벌어진 옷깃 아래부터 어깨, 등줄기까지.“진짜야. 지금은 그렇게 많이 안 아파.”김태하는 낮게 숨을 삼켰다. 강지현이 애틋한 눈으로 자신을 살피는 모습에 마음이 더 크게 흔들렸다.“내가 있어서 덜 아픈 거야?”강지현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부드러웠다. 그의 목덜미와 귓가에 닿는 숨결마저 편안하면서도 묘하게 사람을 흔들었다.하지만 강지현은 그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뿐이었고 손길도 조심스럽게 주무르고 어루만지는 데에서 그쳤다.“응.”김태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럼 나 꼭 안아.”강지현은 김태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최대한 슬프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눌렀다.김태하는 그녀가 말한 대로 팔에 힘을 주어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VIP 병실이라 해도 침대는 넓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니 몸을 뒤척이기도 어려웠다.그래도 지난 며칠 사이, 두 사람에게 이보다 더 편안하고 안심되는 곳은 없었다.김태하는 강지현을 품에 안고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녀의 머리칼 냄새와 체온, 익숙한 숨결을 탐하듯 깊이 들이마셨다.강지현은 젖어 든 눈가를 감춘 채 그의 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여의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지금은 약효가 가장 강하게 올라오는 시간이었다. 당연히 통증도 가장 심해야 했다. 그런데도 강지현을 안고 있으니 김태하는 그저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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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0화

“그건 네가 말 안 해도 알아.”강지현은 코를 훌쩍이며 낮게 말했다.그녀는 김태하가 이런 말을 하는 게 가장 싫었다.그의 사랑은 너무 크고 너무 이타적이었다. 하지만 강지현은 차라리 그 사랑이 조금은 이기적이고, 조금은 앞뒤 가리지 않는 것이었으면 했다.그래야 그녀 마음도 조금은 덜 아팠을 테니까.“김태하, 잘 들어. 우리는 부부야. 내가 너랑 결혼한 순간부터 우리 사이에 네 일, 내 일은 없어. 네 일은 곧 내 일이고, 네 목숨도... 내 목숨의 절반이야.”김태하는 순간 숨을 삼켰다. 검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고 눈가에 금세 물기가 어렸다.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설령 강지현이 그저 듣기 좋으라고 속여 주는 말이라 해도, 김태하는 그것만으로도 이 생이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지현아...”“김태하, 내 허락 없이 죽으면 안 돼. 그러면 다음 생에 가서도 용서 안 할 거야. 알아들었어?”김태하의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전류가 팔다리를 관통하는 것처럼 온몸이 저릿했다.이제 통증 따위는 그의 생각을 흐트러뜨리지 못했다. 김태하는 피식 웃었다. 그 순간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굴러 내려 입가에 닿았다.“응, 알았어.”그가 낮게 대답했다.강지현은 김태하를 안은 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자, 결국 김태하에게 붙들려 얼굴을 들 수밖에 없었다.역시나 그녀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그 안쓰러운 모습이 약보다 더 김태하를 아프게 했다.그는 휴지를 뽑아 강지현의 눈물 자국을 닦아 주었다. 강지현도 휴지를 한 장 뽑아 그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았다.김태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눈가에는 옅은 물기가 어려 있었다.두 사람은 비좁은 병상 위에 무릎을 꿇고 마주 앉아 있었다. 덩치 큰 김태하가 가녀린 강지현을 거의 품 안에 감싸 안은 모양새였다.두 사람의 팔이 엇갈리자, 꼭 혼례 자리에서 술잔을 나누는 신혼부부 같았다. 희미하게 밝아 오는 창가 앞에서, 두 사람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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