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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1화

“태하야, 너는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가장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도. 건강, 장수 그리고 내가 영원히 네 곁에 있는 것까지 전부 다. 네가 듣고 싶다면 언제든 말해줄게. 천만번이라도 내 마음은 안 변해.”강지현의 목소리가 따뜻한 전류처럼 김태하의 마음속 가장 시린 구석까지 흘러들었다.순간, 죽음조차 그리 두렵지 않다는 생각이 스쳤다.김태하는 엷은 미소를 띤 채 강지현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휴대폰을 밀어 내려놓았다. 강지현 역시 조용히 눈을 감았다....두 사람이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다음 날 정오 무렵이었다.사실 강지현은 진작 깨어 있었다. 수면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온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서 있어 도저히 더 잠들 수가 없었다.반면 김태하는 약기운 때문인지 깊은 수면에 빠져 있었다.그의 단잠을 깨우고 싶지 않았던 강지현은 품에 안긴 채 내내 숨을 죽이고 움직이지 않았다.시간이 제법 흘러 당직 의사의 회진 시간이 되어서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어제의 그 주임 의사와 여의사는 이미 한참 전부터 병실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회진을 마친 의료진은 김태하의 안색이 확연히 좋아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강지현이 상태를 묻자 의료진은 회복 속도가 굉장히 빠른 편이며 초기에 투여한 강력한 약물이 제 효과를 내고 있다고 설명했다.하지만 강지현이 신경 쓰는 건 고작 이번 고비가 아니었다. 김태하의 병을 완치할 수 있느냐였다.이곳의 의료 수준이 세계 최고라 한들, 지금은 강력한 약물로 증상을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종양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건 여전히 높은 벽이었다.의사들의 소견은 대체로 일치했다. 상태가 더 악화하지만 않는다면 약물 치료를 유지하며 추후 수술을 고려해 보자는 것.다만 김태하의 병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아 앞으로의 경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게다가 독한 약을 장기간 먹었을 때의 부작용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명했다. 결국 몸을 서서히 망가뜨리는 길이었다.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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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2화

김태하는 강지현의 말이 그저 가장 이상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보통의 연구 프로젝트는 늘 완치를 공언하지만 실제로 성공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게다가 그렇게 먼 곳까지 가기에는 현재 강지현의 발이 이곳에 완전히 묶여 있는 상태였다.김태하는 화면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너랑 떨어지고 싶지 않아. 지금 같은 시기엔 나한테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어젯밤 강지현은 이미 그에게 열흘의 약속을 하고서 이곳으로 왔노라고 털어놓았었다. 두 사람 앞에는 여전히 주씨 가문과 얽힌 난제가 버티고 있었다.강지현이 자신을 위해 이토록 무리를 해주었으니 그 역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와 함께 맞설 생각이었다. 결코 강지현을 패배하도록 내버려둘 순 없었다.김태하는 이미 최동윤을 미래 그룹으로 보내 조사에 착수하게 한 터라 지금은 매 순간이 결과를 좌우할 결정적인 시간이었다.“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이미 그쪽과 이야기는 끝내 두었으니까 이쪽 일이 해결되면 같이 가자.”강지현은 김태하의 손을 맞잡으며 눈을 반짝였다.“이미 다 생각해 둔 길이야. 주상 그룹에 반드시 내가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대표 자리 같은 건 물러나도 괜찮아.”강지현이 던진 열흘의 기한은 충동이 아닌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다.그녀가 엄경미의 계략에 빠져 사면초가에 몰렸을 때, 강지현의 라인은 이미 진작 엄경미의 측근을 포섭해 둔 상태였다.엄경미가 주호석의 곁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면 분명 함정을 파놓았을 터였다.강지현은 엄경미가 꺼낼 패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상대의 방심을 유도한 뒤 그 틈을 타 되돌려주는 방식은 지금까지 실패한 적이 없었다.엄경미의 신경은 온통 강지현에게만 쏠려 있었기에 강지현의 사람들이 이미 자신의 수하를 매수했다는 사실 따위는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을 게 뻔했다.강지현은 홀로 M국에 오면서 아무리 많은 인원을 대동하더라도 자신이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음을 짐작하고 있었다.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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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3화

“무슨 소리야?”강지현의 말을 들은 김태하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가 미처 더 입을 열기도 전에 강지현이 제 생각을 침착하게 이어 나갔다.설령 주상 그룹에서 물러나더라도 엄경미가 자산을 더 챙겨가게 두지는 않을 작정이었다.오히려 물러나 준다면 엄경미가 자신을 겨냥할 명분이 줄어들 테니 도리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상대를 칠 수 있었다.그 공백기 동안 김태하의 곁을 지키며 치료를 도울 수도 있었고 동시에 자신만의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는 것도 가능했다.주상 그룹이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주씨 가문의 후광 때문이 아니었다.주승호의 경영 이념, 그리고 초심을 잃지 않은 모든 임직원의 노력이 일구어낸 결과였다.만약 자신이 남아서 주상 그룹을 발전시키기는커녕 내분만 키우게 된다면 차라리 깨끗하게 물러나는 길을 택하겠다는 뜻이었다.“정말 다 정리된 생각이야?”확고한 어조에도 김태하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여전히 묵직한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수천 가지 이유를 댄다 한들, 강지현이 이런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 주된 원인이 결국 자신 때문임을 잘 아는 탓이었다.강지현의 성격상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사람이라 엄경미가 물러나라고 압박할수록 오히려 정면으로 들이받았으면 받았을 터였다.게다가 주승호의 회사를 잇는다는 건 강지현에게 일종의 이상과도 같았다.부녀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음에도 주승호가 전 재산을 그녀에게 남겼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깊은 신뢰이자 정이었을 테니까.강지현은 타인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자신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았다.“확실하게 정리했어. 넌 나를 무조건 지지해 준다고 했잖아. 그 마음 변함없는 거 맞지?”강지현은 김태하가 또다시 깊은 고뇌에 빠질까 염려되어 그의 손을 맞잡고 덤덤한 어조로 달래듯 물었다.“당연하지.”김태하는 진중한 표정으로 그녀의 두 눈을 응시하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하지만 지현아, 만약에 말이야...”강지현은 그가 뒤이어 꺼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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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4화

특허 허가권이 없다면 미래 그룹의 신제품 생산 라인은 즉각 마비될 판이었다.최동윤이 이 점만 제대로 틀어쥐고 있다면 김무언이 새로운 프로젝트 협력을 강행하는 것을 완벽히 저지할 수 있었다.현재 김무언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부심은 다름 아닌 미래 그룹 내에서의 입지였다.만약 생산 라인이 자신 때문에 가동을 멈춘다면 그는 미래 그룹 주주들로부터 완전히 축출될 게 뻔했다.하지만 김무언은 워낙 완고한 성정이라 김태하가 강경한 수단을 쓰면 쓸수록 도리어 더 비협조적으로 버틸 가능성이 컸다.그래서 김태하는 할머니에게 부탁해 은주희가 나서도록 주선했다. 현재 김무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은주희뿐이었다.유화책과 강경책을 동시에 구사하며 오직 김무언이 그때의 일을 스스로 털어놓기만을 바랐다.만약 김무언 쪽이 통하지 않는다면 강지현이 쥐고 있는 패를 움직이는 방법도 있었다.다음 날 아침, 해원시.하원영은 막 잠에서 깨어 아래층으로 내려오다가 주시언이 전화 통화를 하는 소리를 들었다.아직 이른 시간이었으나 주시언은 다이닝룸을 초조하게 서성거리며 전화받고 있었고 그 모습은 다소 불안해 보였다.“그래, 알았어. 최대한 빨리 회답할게. 너희는 괜찮아? 그래, 몸 잘 챙기고.”주시언은 미간을 찡그린 채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몸을 돌리는 순간, 잠옷 차림에 긴 머리가 살짝 흐트러진 채 잠이 덜 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원영과 정면으로 마주쳤다.등 뒤에서 쏟아지는 아침 햇살 덕분에 평소 날카롭고 매서워 보이던 하원영의 인상이 한층 부드럽고 앳되게 느껴졌다.“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잘 못 잤어?”주시언은 잠시 멍하니 넋을 잃었다가 이내 차분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이 새집은 본래 하원영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었다. 방은 많았지만 주시언은 그녀가 불편해할까 염려해 지난 이틀간 방 정리를 도울 때만 하룻밤 묵었을 뿐 이후에는 주로 제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었다.그러다 어젯밤 접대 자리에서 과음한 탓에 저도 모르게 발길이 이곳으로 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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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5화

하지만 하원영은 방으로 돌아가서도 편히 눈을 붙이지 못했다.주시언이 아프거나 다치는 불길한 악몽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깨고 말았다.때마침 주시언도 일어났는지 아래층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나도 잘 잤어. 어젯밤에 내가 예고도 없이 이리로 오는 바람에 많이 놀랐지?”주시언은 조금 멈칫하다가 하원영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스스로 생각해도 몹시 민망한 노릇이었다.왜 그랬는지 차에 타자마자 비서에게 이곳 주소를 뱉어버린 탓이었다. 뒤이어 무작정 문을 두드렸던 무모한 행동도 전부 기억에 남아 있었다.하원영이 이미 깊이 잠들었을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문이 열릴 때까지 막무가내로 두드려 댔었다.“그게...”하원영이 운을 떼기도 전에 주방에서 나오던 도우미가 넉살 좋게 끼어들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당연히 놀라셨죠! 어느 집 아내가 남편이 그렇게 인사불성이 돼서 들어오는데 안 무섭겠어요? 사모님께서 어젯밤 대표님 걱정돼서 밤새 곁을 지키셨다고요. 앞으로는 일만 하지 마시고 가정에도 신경 쓰면서 되도록 매일 집으로 퇴근하세요. 사모님 혼자 외롭게 두지 마시고...”“아주머니!”도우미의 입이 어찌나 빠른지 하원영이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말이 쏟아져 나왔다.사실 주시언은 번거로운 상황을 피하고자 도우미에게 두 사람이 신혼부부라고 속여 둔 상태였다.자신이 이곳에서 지내지 않는 건 일이 바빠서 그런 것이니 그저 하원영만 정성껏 돌봐달라고 당부했었다.하지만 눈치 빠른 도우미는 주시언이 하원영을 끔찍이 아낀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고 하원영 역시 매일 혼자 퇴근해 주시언이 없는 넓은 집을 보며 우울해한다고 여겼다.보통 부부가 따로 사는 건 사이가 나쁘기 때문이겠지만 이 젊은 부부는 분명 애정이 뚝뚝 떨어지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서먹하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결국 도우미는 주시언이 너무 바빠서 두 사람이 연애할 시간조차 부족해 서먹해진 것이라고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 터였다.“어젯밤에 네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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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6화

도우미는 이내 눈치를 살피며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하원영은 여전히 화끈거리는 얼굴로 막 입을 열어 무어라 변명하려 했으나 주시언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듯 나섰다.“괜찮습니다. 앞으로 저희 사이의 일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집사람이 워낙 낯을 가리고 부끄러움이 많아서요. 먼저 일 보세요.”“아, 네! 감사합니다, 대표님.”주시언이 부드럽게 상황을 무마하자 도우미는 미안한 기색으로 하원영을 슬쩍 훔쳐보고는 서둘러 자리를 비워주었다.그녀의 안색에 앙금이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하원영은 마음속의 불편함을 겨우 가라앉혔다.“아주머니가 정이 많으셔서 그래. 내가 너한테 소홀하게 굴까 봐 걱정되셨나 봐.”주시언이 덤덤하게 운을 뗐다.정곡을 찔린 하원영의 당혹스러움을 읽었으나 정작 속이 타들어 가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어젯밤 꿈이라 치부했던 파편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와 자신이 대체 얼마나 선을 넘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혹여 하원영이 이런 제 추태에 환멸을 느끼진 않았을지 덜컥 겁이 났다.주시언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려다 차라리 어젯밤의 일은 이쯤에서 묻어두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배고프다고 하지 않았어? 음식 다 됐어.”주시언은 몸을 돌려 테이블 위에 차려진 샌드위치를 하원영의 앞으로 슬쩍 밀어주었다. 하원영은 묵묵히 샌드위치를 바라보다가 잠시 숨을 고른 뒤 나직하게 물었다.“방금 전화 통화한 거 강지현 씨예요?”“어떻게 알았어?”“말투만 들어도 알아요.”주시언은 오직 강지현에게만 영락없는 든든한 오빠의 다정하고 세심한 어조를 쓰곤 했다.“응.”“강지현 씨한테 무슨 일 생겼어요? 전화받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요.”“상황이 좀 복잡해. 둘째 삼촌 주승호와 관련된 일이야. 나한테 몇 가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더라고.”주시언은 숨기지 않았으나 사안이 복잡한 만큼 길게 설명하지는 않았다.강지현 역시 비교적 간략하게 상황을 전달했기 때문에 그 또한 대략적인 맥락만 파악하고 있었다.그리고 강지현이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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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7화

하원영이 멈칫하며 바라보자 주시언이 나직하게 덧붙였다.“하씨 가문 사람들도 올 거야. 레스토랑 오픈 전에 아버지가 지인들을 많이 초대하셨는데 그중에 하씨 가문 어르신 두 분도 포함되어 있거든. 하지만 네 자리는 특별히 따로 예약해 뒀어. 전망도 좋고 조용하니까 남들 눈 신경 쓸 필요 없어. 네가 새로운 메뉴를 맛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해서.”주시언의 집안은 주로 브랜드 레스토랑 경영과 대외 무역을 하고 있었다.특히 주병찬은 주시언이 아주 어릴 때부터 외식업에 몸담아 왔으며 그가 거느린 브랜드 산하의 고급 음식점들은 해원시 외식 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했다.어릴 적 주시언은 종종 하원영을 데리고 새로 오픈한 매장에 가서 신메뉴를 맛보곤 했다.하원영 역시 주시언과 함께 남몰래 레스토랑을 찾아가 요리를 음미하던 그 묘한 기분을 무척 좋아했었다.매번 두 사람은 당당하게 들어가 큰 테이블 가득 요리를 주문해 먹고는 계산할 때가 되면 곧장 자리를 뜨곤 했다.들키지만 않으면 짜릿한 긴장감을 마음껏 즐겼고 집에 돌아가서 주시언이 아버지에게 잘못을 인정하며 대신 벌을 받았다.반대로 들키는 날에는 주시언이 제 신분을 밝혀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이것이 두 사람이 예전에 즐기던 짓궂은 장난이었다.하원영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비로소 이 장난을 그만두었다.“그럼 나 오늘 밥 먹으러 가서 돈 내야 해?”잠시 침묵하던 하원영이 나지막이 물었다. 주시언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자 하원영도 그의 웃음소리에 못 이겨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안 내도 돼.”오후가 되었을 때, 하원영은 주시언이 보낸 택배를 받았다. 그는 미리 문자로 알려 왔는데, 상자 안에는 이브닝드레스가 들어 있었다.프렌치 레스토랑이라 복장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 곳이었기에 만약 하원영이 너무 캐주얼하게 입고 가면 분위기에 어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하원영은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포장을 뜯었다. 상자 속 드레스는 은은한 연분홍색의 슬림한 머메이드라인 스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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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8화

하원영은 일부러 한 번 더 못을 박았다. 단지 드레스 코드 때문일 뿐이라고.“아, 참. 우리도 그 레스토랑에 초대받았어요. 주시언 씨가 지현 언니 밑에 있는 직원들 챙겨주라고 직접 사람을 보냈더라고요. 마음껏 먹고 오라고 복지를 내려주셨는데 원래 하원영 씨랑 같이 가자고 하려 했건만 내가 참 눈치가 없었네요. 굳이 내가 같이 가자고 나설 필요가 없었던 건데.”현다영이 은근슬쩍 농담을 던지자 하원영은 부끄러움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런데 드레스 코드가 있긴 하더군요. 안내 문구에 가급적 정장을 갖춰 입고 와달라고 적힌 걸 우리도 봤거든요.”현다영은 제 몰골을 슬쩍 훑어보았다.다른 직원들은 힐에 미니 정장 재킷이나 원피스를 매치했고 마땅한 옷이 없는 사람들은 집에 가서 갈아입고 오거나 근처 쇼핑몰에서 원피스라도 한 벌 급하게 살 생각이었다.하지만 정작 자신은 후드티에 청바지 차림으로 지나치게 캐주얼한 데다 굳이 옷 한 벌에 돈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그냥 난 가지 말아야겠어요. 역시 맛있는 음식이랑은 인연이 없나 봐요.”현다영이 입을 삐죽이며 시무룩해하자 하원영이 즉시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가요. 원피스가 필요하면 내가 예쁜 걸로 한 벌 사줄게요.”“아니에요. 어떻게 그런 신세를 져요.”현다영이 한사코 손사래를 쳤으나 하원영은 단호하게 그녀를 이끌었다.“사줄게요. 현다영 씨한테 주는 내 보답이라고 생각해 줘요.”“보답이라뇨? 나한테 보답할 게 뭐가 있어요?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어쨌든 내 마음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나도 지금 쇼핑몰에 가서 헤어랑 메이크업을 좀 받아야 하니까 나랑 동행해 준다고 생각해요.”하원영은 결단을 내릴 때면 충동적이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현다영은 더 거절하려 했으나 이미 그녀의 손에 반강제로 이끌려 로비 밖으로 나온 뒤였다.현다영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하원영은 잘 알고 있었다.그날 현다영이 곁에서 용기를 북돋워 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결코 제 마음이 이끄는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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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9화

“사람을 쳐다보는 게 뭐가 무례하다는 거지?”주단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현다영이 날을 세우며 대꾸해 오자 오히려 흥미가 돋는 모양이었다.하원영은 즉시 손을 뻗어 현다영을 붙잡으며 굳이 더 말 섞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주단우가 현다영을 도발하는 것을 즐긴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현다영이 자신을 감싸려다 오히려 그의 덫에 걸려드는 상황은 두고 볼 수 없었다.하지만 하원영이 성급히 손을 뻗은 탓에 주단우는 그녀의 넷째 손가락에 끼워진 거대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똑똑히 목격하고 말았다.10캐럿은 족히 넘어 보이는 큼직한 나석이었다. 세공마저 상당히 정교하여 유독 눈에 띄었다.설령 하씨 가문이 부유할지언정 하원영의 개인 수중에는 돈이 그리 많지 않았고 스스로 이런 최고급형 보석을 살 위인도 못 되었다.주단우는 특유의 예리한 감으로 곧바로 심상치 않은 사연이 있음을 알아챘다.“하원영 씨, 반지가 참 예쁘네요. 혹시 결혼반지인가요?”그의 날카로운 질문에 하원영은 마치 전류에 감전된 듯 황급히 손을 거두어 숨겼다.“아니에요.”무심결에 부인하긴 했지만 하얗게 질린 긴장한 표정이 이미 모든 것을 자백하고 있었다. 하원영을 끈적하게 훑어보는 주단우의 눈가에 비열한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오늘 주시언 집안의 새 레스토랑이 문을 연다고 들었어요. 이 근처라던데 하원영 씨는 개업식 연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인가 보죠?”하원영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주단우가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보아하니 주시언과의 관계가 급진전한 모양인데 설마 오늘 저녁에 주시언이 대중들 앞에서 두 사람 결혼했다고 공식 발표라도 하려는 건 아니겠죠?”“부대표님,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재미없어요.”현다영은 주단우가 하원영을 대놓고 떠보고 있음을 눈치채고 즉각 방어막을 치며 끼어들었다.“그래, 재미없겠지. 농담이 아니니까.”주단우의 눈빛이 한순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현다영을 바라보았지만 정작 내뱉는 말은 하원영을 겨냥한 듯했다.“내가 듣기로 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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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0화

하원영은 주단우가 자신을 떠본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엄경미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면 주병찬 측도 머지않아 모든 내막을 알게 될 터였다.정작 제 처지는 걱정되지 않았다. 다만 이 일로 인해 주시언이 문책을 당할까 봐 덜컥 두려워졌다.“그나저나 하원영 씨, 주시언 씨랑 진짜로...”현다영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하원영의 손가락을 조심스레 훔쳐보았다.전에는 워낙 무심해서 미처 알아채지 못했는데 그 화려한 다이아몬드 반지는 다름 아닌 넷째 손가락에 박혀 있었다.하원영은 슬그머니 손을 움츠렸다. 하지만 현다영에게까지 비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지난번 현다영이 용기를 불어넣어 준 덕분에 용기를 내어 혼인신고를 하러 갔던 사실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현다영은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정말로 결혼까지 속전속결로 지르리라곤 예상치 못했기에 내심 무척 경악했다.하지만 그보다 주시언에 대한 감탄이 더 앞섰다.주시언은 겉보기에 온화하고 깍듯해서 주단우보다 오히려 집안 어른들 말씀을 고분고분 들을 것 같았는데, 그런 그가 이토록 대담한 판짜기를 감행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탓이다.“이유가 어찌 되었든 주시언 씨는 그저 나를 돕기 위해 나선 것뿐이고 나 역시 한순간에 이성을 잃었던 거예요. 지금은 정말로 나 때문에 그 사람까지 진흙탕에 연루될까 봐 겁이 나요.”하원영의 그 절박한 우려를 현다영은 충분히 이해했다.어느 누가 걱정되지 않겠는가. 하원영에게는 방패가 되어줄 친부모도 없었고 주시언이 아무리 유능한 후계자라 한들 그 위에는 거대한 주씨 가문과 주병찬이 버티고 있었다.“그럴 리 없어요. 내가 보기에 주시언 씨 아버지도 완전히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니신 것 같거든요. 게다가 두 사람이 진심으로 서로 사랑한다면...”“현다영 씨, 주시언 씨는 그저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에요. 나한테 잘해주는 것도 약속과 동정심 때문이지 나를 진심으로 좋아해서가 아니고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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