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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1화

게다가 이곳은 사람들이 다 보는 자리였다. 상식적으로 주시언도 육나래의 체면 정도는 세워 줘야 했다.소란을 들은 주병찬이 서둘러 사람들을 데리고 내려왔다.그는 오늘 육나래와 함께 급히 귀국한 참이었다. 마침 주시언 쪽에서 새 레스토랑 오픈식을 열어 귀빈들을 많이 초대했다기에, 육나래도 함께 데려온 것이었다.오는 길에 주병찬은 주시언에게 전화를 걸어 억지로 마중 나오게 했다.주시언은 몇 번이나 핑계를 대며 거절했지만 결국은 모습을 드러냈다.주병찬도 주시언이 당사자 동의도 없이 밀어붙인 이 혼담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하지만 육나래만 한 여자는 재벌가 안에서도 쉽게 찾기 어려웠다. 게다가 주시언은 옛정을 쉽게 끊지 못하는 성격이었고, 두 사람은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다른 정략결혼 상대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더구나 이번 연회에서 육씨 집안 사람들을 만나고서야 알게 된 사실도 있었다. 육나래가 학창 시절부터 주시언을 마음에 두고 있었고, 지금까지 누구와도 제대로 사귀지 않은 채 주시언을 기다려 왔다는 것이었다.이런 기회를 주병찬이 그냥 흘려보낼 리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육씨 집안 어른들과 두 사람의 혼담을 정해 버렸다.어차피 주시언은 빠른 시일 안에 정략결혼 상대를 고르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누구를 고르든 마찬가지라면, 차라리 서로를 잘 아는 사람이 낫다고 여겼다.육나래는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며 사양하려 했다. 하지만 주병찬이 직접 중매를 서고, 주시언도 반드시 받아들일 거라 장담하자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주병찬은 두 사람에게 따로 이야기할 시간을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매장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위층으로 올라가, 지인들과 귀빈들을 상대하고 있었다.그런데 자리를 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주시언이 또 일을 냈다는 말이 들려왔다.주병찬의 뒤에는 하씨 부부도 함께 내려오고 있었다.주시언과 얽힌 일이라면 하원영이 빠질 리 없었다.옆에 있던 직원에게 대강 자초지종을 전해 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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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2화

“하원영과 시언이는 그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일 뿐입니다. 시언이 약혼녀는 나래예요!”주병찬이 단호하게 입을 열자, 순식간에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가라앉았다.일이 이렇게 된 이상, 오늘 주시언에게 확실한 답을 받아내지 못하면 주병찬 역시 체면이 서지 않았다.말을 마친 주병찬은 육나래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고 룸으로 향했다.그런데 주시언은 안에서 문을 잠가 둔 상태였다.밖이 난장판이 되는 동안, 그는 룸 안에서 하원영에게 해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주병찬이 제멋대로 혼담을 정했다는 사실도 주시언은 바로 전날에야 알았다.주시언은 두 사람의 결혼 사실을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길 생각이었다. 그래서 주병찬이 갑자기 이런 판을 벌이자, 그로서도 완전히 허를 찔린 셈이었다.하원영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그녀가 괜히 오해할까 봐서였다. 먼저 방법을 찾아 조용히 해결할 생각이었는데...육나래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주시언은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뒤, 따로 육나래를 만나 이 일을 제대로 설명하려 했다.하지만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병찬이 곁에 붙어 있었고, 주시언은 하원영에게 미리 귀띔할 틈조차 없었다.거기에 하지유가 끼어들면서 상황은 완전히 꼬였고, 주시언은 우선 하원영부터 진정시켜야 했다.“오빠 바보예요? 고작 나한테 이 말 하려고... 빨리 나가서 사람들한테 제대로 설명해요.”하원영은 일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했다.육나래도 함부로 건드릴 만한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지난번 연씨 가문 아가씨가 앙갚음했던 일만으로는 아직도 교훈이 부족한 건가?설마 주시언은 그녀의 곁에 있으면 정말 불운해지는 운명이라도 되는 걸까.“내가 뭘 설명해야 하는데?”하원영이 흥분하자, 주시언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그는 문을 열러 가려는 하원영의 손을 붙잡았다.“오빠랑 난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설명해야죠. 오빠랑 육나래 씨는...”“안 돼.”주시언이 하원영의 말을 끊고 그녀를 다시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낮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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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3화

하원영은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눈앞의 일을 덮겠다고 내가 애매하게 굴거나, 혼약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 그건 육나래를 속이고 이용하는 거야. 난 그렇게 못 해.”“하지만... 오빠가 지금 혼약을 거절하면 사람들 다 들고일어날 거예요. 게다가 육나래 씨도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고요.”하원영은 몇 초 동안 말문이 막혔다. 주시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 상황이 허락하지 않을 뿐이었다.이미 두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육나래를 내버려 두고 들어와 버렸다.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면, 주병찬이 주시언을 가만둘 리 없었다.그때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이윽고 주병찬의 목소리가 안쪽까지 파고들었다.“주시언! 문 열어라.”하원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 순간, 귓가에 주시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무서워?”“뭐가요?”하원영이 미간을 찌푸렸다.“우리 결혼한 거 밝히는 거.”굳어 있던 주시언의 얼굴에 문득 장난기 어린 기색이 스쳤다.하원영은 온몸이 굳어 버렸다.사실 그녀가 무서울 건 없었다.그동안 온갖 욕설을 듣고 살아왔다. 하씨 가문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이제 와서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다.그런데도 사람들 앞에서 주시언과의 결혼을 밝힌다는 말에는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서고 싶어졌다.하씨 가문이 얼마나 날뛸지는 상관없다 해도, 주시언은 어떡한단 말인가. 그는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까.“충동적으로 굴지 마요. 오빠 아버님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내가 충동적으로 굴었던 게 한두 번이야? 그리고 너에 비하면 난 별로 충동적인 편도 아니지.”주시언이 피식 웃었다.하원영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는 아직도 자신을 놀릴 여유가 있었다.문 앞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새 매장 오픈 행사라 모든 게 어수선한 탓에, 주병찬도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직원에게서 룸 열쇠를 받아 올 수 있었다.문이 열리는 순간, 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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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4화

그 모습을 본 하씨 부부도 급히 끼어들었다.“하원영! 약혼자들끼리 만나는 자리에 네가 왜 끼어들어 소란이야? 네가 시언이랑 친한 건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 집에 가. 여기서 더 망신당하지 말고!”이연화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하원영을 몰아붙이며 곧장 그녀를 끌고 가려 했다.하지만 그녀의 손이 하원영에게 닿기도 전에 주시언이 먼저 앞을 막아섰다.“아주머니, 아저씨, 육나래.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제 일로 오해를 빚어 즐거워야 할 식사 자리를 불편하게 만들어 죄송합니다.”“하지만 이미 오해가 생긴 이상, 솔직히 얘기해 드리겠습니다.”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하원영은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옆에서 바라본 주시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에는 희미한 웃음기까지 어려 있었다.육나래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주시언을 바라보았다.주병찬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곧바로 주시언을 꾸짖으며 말을 막으려 했다.하지만 주시언은 그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죄송스러움이 묻어 있었지만 입을 여는 목소리만큼은 단호했다.“저와 하원영은 이미 혼인신고를 마쳤습니다. 저희는 법적으로 부부입니다. 그러니 저와 육나래의 혼약은 법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순식간에 사방이 술렁였다.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주시언 곁에 서 있던 하원영조차 예외는 아니었다.심장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뛰었다. 주시언에게 붙잡힌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그런데도 주시언은 그녀의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말없이 힘을 건네는 것처럼.“나래야, 불편한 일에 휘말리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나랑 원영이는 결혼 사실을 숨기고 있었어. 아버지께 제대로 말씀드리지 않고 제멋대로 결정한 탓에, 아버지께서 아무것도 모르신 채 혼약을 정하신 거야.”“이번 일은 너랑 아무 상관 없어. 난 늘 너를 좋은 친구이자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생각해 왔어. 이해해 줬으면 해.”주시언은 이어 육나래에게 정중히 사과했다.육나래는 당황한 듯 잠시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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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5화

“하원영, 다시는 시언이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네 입으로 약속했잖냐. 그런데 이게 뭐냐? 너 양심은 있어? 예전에 시언이 그렇게 힘들게 만든 걸로도 모자랐어?”“죄송합니다.”하원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사과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약속을 어긴 건 사실이었다. 주병찬이 자신을 얼마나 몰아붙이든, 하원영은 감수할 생각이었다.아버지가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며 주시언도 괴로웠다. 하지만 자신이 택한 일이었으니 어떤 결과가 오든 피할 생각은 없었다.주시언은 하원영을 다시 제 옆으로 끌어당기고 주병찬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아버지, 전부 제가 한 일입니다. 벌을 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아버지 뜻 거스른 적 거의 없고, 이렇게 간절히 부탁드린 적도 없습니다.”“오늘 한 번만 제 뜻을 들어주십시오. 저희 결혼, 허락해 주십시오.”하원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시언이 왜 자신을 위해 여기까지 하는지 알 수 없었다.정말 현다영의 말처럼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는 걸까. 하지만 자신이 그런 마음을 받아도 되는 사람일까.“허락? 내가 이 결혼을 허락할 것 같으냐!”주시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병찬이 버럭 소리쳤다.평소의 여유로운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잇새로 짓씹듯 흘러나온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내일 당장 이혼해.”“아버지...”“여자 하나 때문에 집안도 버리고, 네 아버지 체면도 짓밟고, 네 앞날까지 내던지겠다면 마음대로 하거라.”주병찬은 시선을 돌렸다.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지만, 입가에는 오히려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주시언과 하원영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 두 사람 모두 흔들렸다.주병찬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주시언, 네가 다 컸다는 건 나도 안다. 네 선택까지 내가 일일이 막을 수는 없겠지. 그러니 잘 생각해.”“내일 아침 이혼하든가.”“아니면 지금 이 여자 손 잡고 여기서 나가든가.”주시언이 입을 열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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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6화

주시언이 대답할 틈도 없이, 하원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하석철의 말 때문도, 주병찬의 압박에 떠밀린 것도 아니었다. 하원영은 그저 주시언이 조금이라도 난처해지는 게 싫었다.남의 집 눈치 보며 사는 생활은 이미 익숙했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주시언까지 그런 삶을 살게 만들 수는 없었다. 하물며 그의 앞날까지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죄송합니다.”하원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시언의 목소리가 뒤따랐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낮게 말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또렷하게 들렸다.식당 안은 다시 죽은 듯 조용해졌다. 주병찬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들었고 몰래 웃던 하지유의 표정도 그대로 굳었다.주시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불효했습니다. 앞으로는 곁에서 아버지를 모시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와 부자 관계를 끊으신다 해도 제게 아버지는 영원히 아버지입니다.”“...”아무도 주시언이 정말로 아버지와 하원영 사이에서 선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그런데 주시언은 하원영을 택했다.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주병찬도 한참 동안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는 꿈에도 몰랐다. 늘 효심 깊고 살가웠던 아들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거스를 줄은.하씨 부부도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역시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오빠!”하원영은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그를 말렸다.“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얼른 방금 한 말 취소해요. 우리 그냥 이혼하면 되잖아요.”“너랑 이혼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결혼하지도 않았어.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질 거야.”주시언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 말을 들은 주병찬이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웃음소리는 소름이 끼칠 만큼 섬뜩했다. 심지어 그는 박수까지 치기 시작했다.텅 빈 식당 안에 박수 소리가 유난히 낯설게 울렸다.“좋다. 역시 내 아들이구나. 제 선택에 책임을 지겠다라. 그래, 대단하다. 배짱 하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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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7화

그때 곧바로 은행 문자 하나가 떴다.그의 카드가 정지됐다는 내용이었다.하원영도 문자를 보았다. 주병찬이 정말 행동에 나섰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돌아가요. 나 혼자 갈 수 있어요.”하원영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주시언이 곧바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하원영, 지금 나 버리고 가겠다는 거야? 너 양심 있어?”주시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감정이 실렸다. 방금 전까지 그토록 담담하던 얼굴에도 희미한 분노가 번져 있었다.하원영은 다급함에 얼굴까지 붉어졌다.“미안해요, 오빠.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어요. 주 회장님은 한다면 하는 분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얼른 돌아가서 잘못했다고 하세요.”“난 그러고 싶지 않아.”“내가 좋아하게 된 사람은 단 한 명뿐이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잘못이 아니니까.”하원영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주시언이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늘 부드럽기만 하던 그의 눈빛이 그 순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하원영은 가슴 한가운데를 찔린 것처럼 그대로 굳어 버렸다.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이 들었다.주시언이 지금 자신에게 고백한 건가?“오빠, 지금...”“네가 나를 조금이라도 좋아하든, 아니든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널 좋아해.”“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그게 뭐가 잘못됐는데?”주시언의 말이 한마디씩 내려앉을 때마다, 하원영은 생각할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그녀는 멍하니 주시언을 바라보았다.순간 기억이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도, 주시언은 그녀에게 좋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둘 다 어렸으니 누구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오빠...”하원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속은 거센 물결처럼 흔들렸고, 도무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마터면 튀어나올 뻔한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늘 열등감과 미안함을 함께 떠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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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8화

집에 돌아오자마자 하원영은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그녀가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자, 주시언은 마음 한쪽이 묘하게 불편했다.혹시 자신이 너무 큰 부담을 준 건 아닐까. 괜히 마음을 드러낸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순간 후회가 밀려왔지만 오늘은 분위기에 휩쓸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주시언은 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방으로 돌아왔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아버지가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파고들었다.명예든 앞날이든, 사실 그는 그리 집착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지금의 성과가 모두 주씨 가문 덕분이라고 말했고, 그 역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래서 더 조심했고 더 노력했다. 언젠가는 떳떳하게 가문 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였다.지금 이 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주씨 가문을 떠나면 오히려 자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더 분명히 알게 될지도 몰랐다.다른 재벌 2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자신이 생각하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그가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아버지에게 준 상처였다.주병찬은 어릴 때부터 그를 크게 간섭하지는 않았지만, 필요한 가르침만큼은 아끼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효를 지켜야 하고 의리와 책임이 있어야 하지만 결국 그는 그 원칙을 어기고 말았다.하지만 주시언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에게는 많은 것이 있었고, 자신 역시 그 거대한 권력 구조 안의 일부에 불과했다는 걸.반면 하원영은 달랐다.그녀에게는 지금 자신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결과를 감당할 생각이었다. 설령 아버지가 부자 관계를 끊는다 해도 끝까지 책임을 지고 곁에서 효도할 생각이었다.똑똑.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어 문 너머로 하원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자요?”“아니.”그가 일어나 문을 열었다.하원영은 얇은 잠옷 위에 숄을 걸친 채 방 안으로 들어왔다.방 안은 어둑했다. 그는 커튼을 열어 둔 상태였고 창밖의 달빛이 침대 위로 은은하게 내려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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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9화

“난...”“원영아, 그거 알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은 오래 좋아해 온 시간에서 시작돼. 그리고 오래 좋아한다는 건, 그 사람의 부족한 모습과 못난 모습까지 다 보고 난 뒤에도 생겨나는 마음이야.”주시언은 하원영을 몰아붙이고 싶지 않아 먼저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부분까지 끌어안고 싶어져. 그것까지 전부 너니까. 내가 네 좋은 모습만 좋아하고, 네가 조금이라도 못난 모습을 보인다고 마음이 식는다면, 그건 너무 얕은 감정 아니야?”그 말은 하원영의 마음을 깊이 흔들어 놓았다.“네가 너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널 좋아하니까. 언젠가는 내가 보는 네 모습도, 너 스스로 좋아하게 만들어 줄게.”주시언은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말했다. 아이를 달래듯 건넨 말이었다.그는 하원영이 예민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았다. 오늘 밤 자신이 아버지와 맞서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분명 자신보다 더 괴로웠을 것이다.하지만 그 말을 마치자마자 하원영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질 줄은 몰랐다.“왜 울어.”“흐...”하원영은 끝내 참지 못했다.참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지금까지 그녀는 주시언 앞에서 참고 또 참아 왔다. 하지만 자신을 이렇게 오랫동안 진심으로 기다려 준 사람 앞에서, 어떻게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원영아...”주시언은 당황해 하원영의 눈물을 닦아 주려 했다. 하지만 몇 번 닦기도 전에, 하원영이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울음소리는 더 커졌다.“이러지 마. 내가 말 잘못했어?”“아니...”하원영은 한참을 훌쩍인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목소리에는 짙은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오빠, 진짜 미워요.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 줘요...”“알아요? 오빠가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지 않았으면, 나도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거예요.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처럼 느껴지지도 않았을 거고요.”하원영이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보자 주시언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그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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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0화

하원영은 미처 예상하지 못해 본능적으로 몇 번 밀어냈다. 하지만 곧 힘이 풀린 듯 주시언의 품에 무너졌다.주시언의 입맞춤은 점점 깊어졌고 손길은 갈수록 조심스럽고도 다정해졌다.하원영은 애초에 얇은 잠옷 차림이었다. 어깨에 걸쳤던 숄은 어느새 바닥으로 흘러내린 뒤였다.불도 켜지 않은 방 안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끌리듯 침대까지 갔다.하원영의 머리칼이 베개 위로 흐트러졌다. 주시언은 그 머리칼 사이로 조심스레 손을 넣었다.오랫동안 눌러 두었던 마음이 한순간에 터져 나온 듯했다. 더는 막을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었다.주시언은 중간에 잠시 멈춰 무언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하원영이 먼저 그의 입술을 물었다.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하원영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옷가지가 하나둘 흘러내리고 차가운 달빛만이 방 안에 고요히 번졌다....다음 날 눈을 떴을 때, 하원영은 온몸이 부서진 것처럼 아팠다.하원영에게는 처음이었다. 주시언이 끝까지 조심하려 애썼지만, 서로를 향한 마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밤이라 몸이 성할 리 없었다.눈을 떴을 때, 주시언은 이미 곁에 없었다.하지만 이불 속, 그가 누워 있던 자리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지난밤의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걸 또렷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하원영은 주시언의 욕실에서 샤워를 마친 뒤, 조금 긴장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곧 음식 냄새가 풍겨 왔다. 오픈형 주방에서 주시언이 뭔가를 하고 있었다.하원영은 곧장 그쪽으로 다가갔다.역시 주시언은 곱게 자란 도련님이었다. 누가 봐도 주방일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옆 접시에는 달걀프라이가 여덟 개나 놓여 있었는데, 그중 일곱 개가 새까맣게 타 있었다.주시언은 그 와중에도 조심스럽게 새 달걀을 굽고 있었다.“내가 할까요?”갑자기 들린 하원영의 목소리에 주시언이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손에 든 프라이팬을 떨어뜨릴 뻔했다.다행히 하원영이 얼른 그의 손을 붙잡았다.“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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