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번 생은 가족부터 다시 선택할 거야: Chapter 261 - Chapter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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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1화

채여진은 머리에 꽂힌 점취 비녀를 매만지더니, 한껏 교태를 부리며 자리에 앉았다.소명주는 좋아 죽겠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여진 언니, 조심해서 앉으세요. 언니는 이제 예비 구황자비 마마시잖아요.”채여진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며 얼굴을 붉혔다.“명주야, 그런 말 마라. 아직 정해진 것도 없는데 무슨…”“정해진 게 없다니요? 구황자 전하께서 언니에게 비녀까지 직접 주셨잖아요. 제가 보기엔 조만간 좋은 소식이 들릴 것 같은데요!”소명주는 그렇게 말하고는 얄밉게 웃으며 소설아를 힐끗 쳐다보았다.‘소설아… 자기가 구황자 전하와 은밀한 사이라도 되는 양 방자하게 굴더니, 전하의 진짜 정인이 채여진일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하긴 당연한 일이야. 구황자 전하께서 어찌 몰락해 가는 후작부의 수양딸을 정비로 맞이하시겠어. 전하께서 예전에 소설아를 도와주신 건 그저 장난삼아 한 번 가지고 논 것에 불과했던 거야.’소명주는 지금쯤 소설아의 속이 완전히 뒤집어졌을 거라 생각하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속이 후련했다.“설아 언니, 기분이 영 안 좋아 보이네요?”소설아는 담담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짙은 눈동자에는 일말의 동요조차 없었다.“방금 그토록 흉측한 춤을 추고 왔는데, 기분이 안 좋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명주 네가 아니니?”그녀는 깊은 계곡에 핀 난초처럼 우아하고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난 내기에서 은자도 듬뿍 땄고, 앞으로는 향로도 날개 돋친 듯 팔릴 거란다. 앞으로 벌어들일 은자를 생각하니, 생각만 해도 참 기분이 좋구나. 오히려 은자 만 냥을 잃은 여진 언니야말로 속이 쓰리시지 않겠느냐.”채여진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한순간 굳어버렸다.소명주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맞받아쳤다.“언니가 기분 나쁜 게 아니라면, 어서 여진 언니에게 축하 인사나 건네시는 게 좋겠어요. 여진 언니가 구황자비가 되시면, 그깟 만 냥쯤은 새 발의 피일 테니까요.”소명주는 채여진을 향해 방긋 웃었다.“여진 언니, 나중에 혼례 올리실 때 꼭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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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2화

채여진이 자리를 옮기자 소설아는 오히려 잘됐다 싶어 차분하게 여유를 즐겼다. 그녀는 가무를 감상하며 손에 든 명부를 살폈다. 거의 모든 규수들이 향로를 구매하겠다고 나섰으니, 오늘 또 쏠쏠한 수익을 챙긴 셈이었다.‘경성 시장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니, 이제 더 큰 시장인 강남으로 눈을 돌려야겠어. 사업을 확장할 방법을 찾아봐야지.’강남의 거대 세력인 서씨 가문의 힘을 빌린다면 좋을 터였다. 서경수에게 도움을 청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장공주는 한참 동안 연회를 지켜보다가 서경수가 보이지 않자 오 내관을 불렀다. “경수는 아직 안 나왔느냐? 옷 갈아입는 데 시간이 왜 이리 오래 걸리는 게야?”추영우도 이미 마음에 둔 규수를 찾았는데, 그녀의 적장자인 서경수만 뒤처질 수는 없었다.그때 오 내관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공주 마마, 서 군왕 전하께서 영 기분이 좋지 않으신 모양이옵니다.”장공주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기분이 안 좋다니? 내 보기엔 아주 좋아 보이던데. 나를 꼬드겨 노름판까지 벌이게 하지 않았더냐. 비록 내기에서는 졌지만, 실속은 챙겼으니 어찌 기분이 나쁘겠느냐?”오 내관은 슬며시 은표 두 장을 내밀며 나직이 말했다. “이건 소씨 가문 큰 아가씨께서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그러고는 서 군왕이 애써 준비하고도 소설아보다 수익이 적었다는 사실을 조곤조곤 설명했다. “공주 마마, 전 맹세코 단 한 마디도 새어 나가지 않게 조심하였습니다. 다만 소씨 가문 큰 아가씨께서 어찌나 야무지신지, 입이 마르도록 설득했음에도 끝까지 구황자 전하의 승리에 걸었답니다.”장공주는 유리 향로를 들어 올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소씨 가문 큰 낭자라… 참으로 재주가 비상한 아이구나.”서경수를 헛물켜게 만들다니,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소설아가 만든 향로가 마음에 든 장공주는 그녀가 이번 화연을 이용해 장사하는 것을 묵인해 주었다.“그 아이가 네게 하사한 은표이니, 그냥 챙기도록 하여라.”오 내관은 즉시 무릎을 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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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3화

곡조는 은은하고 노랫소리는 감미로웠다. 눈치 빠른 이라면 그 곡이 오직 구황자만을 위해 연주되고 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장공주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영우야, 네가 듣기엔 어떠하느냐?”추영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응시하며 냉랭하게 대답했다. “가식적이라 듣기 거북할 뿐입니다. 특히 저 두 소절은 노래라기보다 억지로 쥐어짜 낸 소리에 가깝군요.”장공주는 멈칫했다. '영우가 채 낭자를 마음에 둔 것이 아니었나? 어찌 저리 혹평을 한단 말이지?' 다행히 채여진은 멀리 떨어져 앉아 있어 이 말을 듣지 못했다.곁에 있던 서경수가 웃으며 거들었다. “구황자 전하의 안목이 저리도 까다로우니, 훗날 구황자비는 고생 좀 하겠습니다.”그는 추영우가 채 낭자를 마음에 두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눈빛에 혐오감까지 비치고 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분명 마음에 없는 눈치인데, 어째서 비녀를 내린 거지? 우리 아우님도 참 재미있는 구석이 있단 말이야.’*연주를 마친 채여진은 머리에 꽂은 비녀를 살며시 매만지며 사뿐히 단상에서 내려왔다.“미래의 황자비 마마, 제가 모시겠습니다.”한 규수가 재빨리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구황자의 성정은 익히 알려져 있었다. 차갑고 오만한 데다 여인에게 먼저 다가가는 법이 없었고, 심지어 곁에서 시중드는 궁녀조차 없다고 했다. 그런 전하에게 비녀를 받았다는 것은 채여진이 진정 그의 눈에 들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에 채여진의 든든한 가문 배경까지 더해지니, 그녀가 구황자비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처럼 여겨졌다.채여진은 쏟아지는 찬사를 기꺼이 만끽했다. 마치 이미 자신이 진짜 구황자비라도 된 양 우쭐했다. 연회가 끝나자, 사람들은 각자의 과일 바구니를 찾으러 흩어졌다. 바구니 안에 길조를 상징하는 거미가 거미줄을 쳤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채여진은 소명주와 소명지를 데리고 자신의 바구니를 찾으러 강가로 향했다.“여진 언니, 여기 언니 바구니예요!”소명지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바구니를 채여진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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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4화

장공주부의 화연이 끝나고, 귀족 규수들이 차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위원후부의 마차가 다가오자 소설아도 단이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려던 참이었다. 그때 갑자기 소명주가 불쑥 그 앞을 가로막았다.“명주야, 이게 무슨 짓이니?”소명주가 한 발짝 다가서며 마차 문을 꽉 붙잡았다. “언니, 사업 건으로 얘기 좀 해요.”소설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는 평소 장사꾼을 천하다 하며 업신여기지 않았더냐? 그런데 이제 와 먼저 사업 이야기를 꺼내다니, 네 그 고고하고 청렴한 이름에 먹칠이 될까 염려되지는 않느냐?”소명주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그건 언니가 신경 쓸 거 없어요.”“나는 너와 장사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구나. 훗날 부인이나 큰 도련님께서 이 일을 아시고 꾸짖기라도 하시면, 내가 어찌 감당하겠느냐. 네 그 고결한 품성은 천금을 준다 한들 바꿀 수 없는 것일 테니 말이다.”소설아는 빙긋 웃고 있었지만, 그 말끝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서려 있었다.소명주는 말문이 턱 막혔다.소설아는 애초에 그녀와 동업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저 둔한 머리로는 회귀를 했다 한들 제대로 살아갈 리 만무했고, 본디 장사와는 인연이 없는 부류였다.소명주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설아 언니, 이 사업은 언니에게도 엄청난 이득이 될 거예요. 제 말을 듣지 않으면 분명 후회하게 될걸요!”소설아는 코웃음을 쳤다.“어디 한번 후회하게 만들어 보렴.”그러고는 마부를 향해 출발하라는 눈짓을 보냈다.소명주는 황급히 마차 문을 붙잡았다. 손에 힘을 주어 문고리를 움켜쥔 채 다급히 외쳤다.“언니가 오늘 번 은자 구만 냥, 그중 절반은 제게 주세요! 그리고 향로 사업도 절반은 제가 가져야겠어요. 그러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 아버지께 전부 말씀드릴 거예요. 그럼 언니는 은자 한 닢도 손에 넣지 못할걸요?”옆에 있던 소명지가 얼른 거들었다.“설아 언니, 저희는 언니를 위해 이러는 거예요. 저희에게 나눠 주면 그래도 절반은 남지 않나요? 사람의 호의를 그렇게 무시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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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5화

소명주는 당황한 나머지 다급히 소리쳤다.“아버지, 고작 은자 이천 냥에 넘어가신 겁니까? 소설아가 내관들에게 건넨 은자만 해도 이미 이천 냥을 훌쩍 넘을 텐데요!”위원후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지금 감히 애비에게 이래라저래라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설아가 이미 나를 위해 오 도사 쪽 일을 알아서 정리해 두었다 하지 않더냐! 오 도사는 함부로 산에서 내려오는 분이 아니시다!”위원후는 당장 눈앞에 쥔 푼돈과 훗날 들어올 큰돈쯤은 분별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소설아는 장사 수완이 뛰어난 아이였다. 그녀가 향로 사업을 크게 일구어 낸다면 후작부의 살림 또한 예전처럼 넉넉해질 터였다. 다만 소명주 저 멍청한 것이 예전에 소설아의 항료 가게를 망쳐 놓은 전적이 있으니, 지금의 향로 가게에는 절대 손도 못 대게 해야 했다.“장사도 모르면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거라! 온종일 설아만 쳐다볼 것이 아니라 네 혼사나 신경 쓰거라. 너는 이미 명성에 흠이 났고 순결에도 금이 갔지 않느냐. 원씨 가문에서 너를 맞아들이겠다 하지 않았더냐? 어찌하여 아직까지 아무 소식도 없단 말이냐!”“열흘 안으로 원씨 가문에서 소식이 없거든, 너도 네 어미를 따라 사당에 들어갈 줄 알아라!”“네가 설아의 반만큼이라도 유능했더라면 아비가 이리 걱정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구제 불능 같으니라고!”위원후는 그 말을 남기고 홱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소명주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분노로 이를 악물었다.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만약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결코 자신을 이리 대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어머니라면 소설아가 내미는 푼돈 따위에 눈이 멀지도 않으셨을 터였다.소명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머니를 사당에서 구해 내야만 했다.*소설아는 후작부로 돌아가지 않았다. 장공주부에서 나온 그녀는 큰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큰어머니가 계신 그곳이 오히려 그녀에게는 진짜 집처럼 느껴졌다.“설아야, 나 드디어 사부님 모시기에 성공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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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6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왁자지껄한 웃음꽃이 만발했던 식사가 끝났다. 식사를 마치자, 큰어머니가 오색실을 가져와 식구들에게 팔찌를 엮어 주었다. 예로부터 오색실 팔찌를 차면 평안을 지켜준다는 속설이 있었다.“우리 설아도 엮을 줄 아니? 모르면 이 큰어머니가 가르쳐 주마.”“제가 워낙 손재주가 없어서요. 큰어머니께서 좀 도와주셔야겠어요.”“너를 위해 하는 일인데, 수고랄 게 뭐 있겠니?”큰어머니는 인자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자, 보렴. 먼저 이렇게 세 가닥을 나누고…”큰어머니는 차근차근 손을 움직이며 가르쳐 주었고, 소설아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진지하게 배웠다.소설아가 큰어머니 곁에 앉아 오색실을 엮고 있는 동안, 소명풍을 비롯한 삼 형제는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밖으로 빠져나갔다.밖으로 나온 소명풍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큰 형님, 설아한테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걸까요?”소설아는 언제 보아도 온화한 미소를 띠고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지켜본 끝에 그들은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난 여유가 아니라, 그저 늘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이제 겨우 열여섯 살인 아이건만, 어쩐지 세상사를 모두 겪어 본 사람처럼 초연한 기운을 풍겼다.반면 소설아와 동갑인 소명풍은 하루 종일 천진난만하게 웃고 떠들며 활기가 넘쳤다. 배불리 먹고 들판을 내달리는 망아지처럼 생기가 철철 흘러넘쳤다.그런 소명풍과 나란히 놓고 보면, 소설아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담담했다. 마치 젊은 나이에 있어야 할 생기와 열정이 모두 씻겨 나간 사람처럼 말이다.“혹시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생겼다가 상처를 받은 건 아닐까요? 둘째 형님, 얼른 우리 설아가 마음에 둔 사내가 누군지 좀 알아봐 주세요. 알아내기만 하면 제가 단단히 조사해 볼 테니까요. 감히 우리 설아의 마음을 가지고 놀았다면, 독을 먹여 혼쭐을 내주겠어요!”소명풍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머리 위로 딱밤 두 대가 연달아 떨어졌다.큰 형과 둘째 형이 거의 동시에 꿀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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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7화

소설아는 남들이 보기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후작부의 큰 아가씨라는 고귀한 신분에 든든한 오라버니들과 여동생이 있었고, 부모님 또한 모두 건재했다. 게다가 손에 쥔 재물마저 넉넉했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부족함 하나 없는 삶이었다.하지만 혈육의 정을 갈구하는 그녀의 모습은, 가진 것 하나 없이 메말라 버린 가련한 걸인과도 같았다.문득 소설아의 머릿속에 전생의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다.그날 민씨는 탕약 한 사발을 들고 와 억지로 그녀의 입에 들이부었다.탕약을 마신 뒤 까무러치듯 의식을 잃었던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곁에는 낯선 마부 하나가 누워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민씨는 사람들을 잔뜩 이끌고 득달같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다음이었다.그 마부는 되레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큰 아가씨가 먼저 자신을 꾀어 유혹했다고 억지를 부렸다. 마치 모든 일이 그녀의 잘못인 양 뻔뻔하게 모함한 것이다.그러자 몰려든 사람들은 일제히 안색을 일그러뜨린 채 그녀를 향해 온갖 폭언을 퍼붓기 시작했다.여인의 도리조차 저버린 독하고 뻔뻔한 년이라며 손가락질했고, 입에 담기 어려운 모욕을 서슴지 않았다.흉흉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뻗어 오는 손가락들은 마치 날카로운 비수처럼 가슴을 후벼 팠다.그녀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목이 쉬도록 항변해 보아도, 그 누구도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급기야 원태준이 파혼을 선언하자, 곁에 서 있던 소명주가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형부, 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 언니에게도 분명 남에게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겉으로는 두둔하는 듯했지만, 그 말은 오히려 소설아의 죄를 기정사실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소명천은 수치심도 없는 여자라며 욕을 퍼부었고, 소명준은 아무 사내에게나 몸을 허락하는 천한 여자라고 몰아붙였다. 소명지 역시 음탕하고 뻔뻔하다며 비난을 거들었다.결국 민씨는 하인들을 시켜 그녀를 꽁꽁 묶게 한 뒤, 차디찬 곳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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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8화

‘정말 좋다. 평생 이곳에서 살고 싶어.’식구들은 곁에 둘러앉아 한참 동안 말동무를 해주었다. 소설아의 마음도 차츰 가라앉았고, 이내 졸음이 밀려와 연신 하품을 하자 그제야 모두 그녀를 처소로 돌려보냈다.이곳은 소설아의 처소였다.정갈하게 가꿔진 뜰 한가운데에는 새로 단 현판이 걸려 있었다. 현판에는 '천상의 소리가 깃든 작은 집' 이라는 글귀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처소의 이름은 그녀가 직접 지었고, 현판의 글씨는 소명리가 손수 써 준 것이었다.방 안에는 은은한 향이 감도는 흰 난초 화분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고, 장식장 위에는 아름다운 무늬를 지닌 수석들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어느 하나 허투루 놓인 것이 없었다.곳곳에서 그녀를 아끼는 이들의 정성과 마음이 묻어났다.비록 사치스럽고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 어떤 금은보화로 꾸민 저택보다도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공간이었다.비로소 온전히 그녀만의 공간이었다. 이곳에 있으면 몸과 마음을 짓누르던 긴장이 저절로 풀어졌다.“단이야, 씻을 물을 준비해 다오. 오늘 밤은 여기서 쉬어야겠다.”단이가 재빨리 준비를 마치자 소설아는 세면장으로 향했다.그녀가 세면장 안으로 들어서자, 등 뒤에 놓인 사람 키만 한 옷장의 문이 아주 미세하게 벌어졌다.짙은 어둠 속에서 한 쌍의 눈동자가 방 안을 고요히 응시하고 있었다.그 주인은 추영우였다.그의 시선은 소설아의 뒷모습에 머물렀다. 소설아가 머리에 꽂은 옥비녀를 빼내자 검은 머리칼이 물결처럼 흘러내렸다. 이어 그녀는 옷매무새를 풀었다. 얇은 적삼과 치마가 스르르 벗겨져 내리고, 어느새 몸에는 붉은 가슴 가리개만 남아 있었다.세면장 안에 켜진 희미한 촛불이 그녀의 모습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붉은 가슴 가리개는 마치 촛불에 불길이 옮겨붙은 것처럼 선명하게 타올라, 시선을 떼기 어렵게 만들었다.추영우는 순간 숨을 멈췄다.이내 눈을 질끈 감았지만, 방금 보았던 모습은 쉽사리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눈을 감고 있음에도 희미한 촛불 아래 서 있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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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9화

처음부터 추영우가 옷장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옷장을 무서워했다. 어린 시절, 그는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용비의 손에 이끌려 옷장 안에 갇히곤 했다.자단목으로 짜 맞춘 옷장은 다섯 살배기 아이 하나가 겨우 몸을 웅크리고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황실 장인이 맞춤 제작한 물건답게 이음새 하나까지 빈틈없이 촘촘했고, 자물쇠를 채우는 순간 안쪽은 한 줄기 빛도 스며들지 않는 완전한 암흑으로 변했다.은은한 자단목 향이 꽤 좋았고, 용비가 일부러 의복에 향을 입히려고 향료까지 넣어두었건만, 어린 구황자에게 그곳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용비는 늘 웃으며 말했다. 자신은 매질이나 모진 욕설 대신, 그저 반성하라며 옷장에 가두었을 뿐이라고. 옷장 안은 조용하고 방해하는 사람도 없으니, 아홉째가 태부께서 내주신 공부를 차분히 복습하기에 딱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걸핏하면 회초리를 들어 태자를 체벌하는 황후나, 겉으로는 점잖은 척해도 뒤에서 몰래 삼황자에게 벌을 세우는 덕비와는 달랐다. 용비는 후궁에서 가장 자애롭고 현명한 어머니였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오직 추영우를 위한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처음 옷장에 갇혔을 때, 추영우는 무서움에 엉엉 울기만 했다. 하지만 울면 울수록 갇혀 있는 시간은 길어질 뿐이었다.초반에는 궁녀들이 몰래 문을 열어 물이나 다과를 건네기도 하고, 잠시 뒷간에 다녀오게 해주기도 했으나, 이마저도 용비에게 발각된 이후로는 일절 금지되었다.참지 못해 바지에 오줌을 지리기 일쑤였고, 굶주림과 갈증도 꼼짝없이 견뎌내야만 했다. 어느덧 그는 어머니에게 또다시 옷장에 갇힐까 봐 지레 겁을 먹고는, 밥도 조금만 먹고 물도 마시지 않게 되었다.처음엔 옷장 안에서 서 있을 수 있었지만, 몸이 자랄수록 그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견뎌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그는 울음을 멈췄고,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칠흑 같은 어둠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어둠 속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오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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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0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였지만, 그의 온몸은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오르고 있었다.마치 희롱당하는 쪽이 자신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이 스쳤다.소설아는 손을 뻗어 조심스레 그의 손을 잡았다.“그건 잘 모르겠고요, 전하. 우리 일단 여기서 나가는 게 어떨까요?”추영우의 손은 다시금 그녀에게 단단히 붙잡혔다. 소설아는 그를 어둠 밖으로 이끌려 했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이미 주도권이 뒤바뀌어 있음을 깨달은 추영우는, 마지막 남은 체면이라도 지키려는 듯 그 자리에 우두커니 버텼다. 순순히 끌려나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결국 소설아는 그를 끌어내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옷장 안으로 몸을 들였다.“그럼 제가 전하 곁에 있을게요.”구황자가 어둠 속에서 나오지 않겠다면, 자신 역시 이 어둠 속으로 들어와 함께하겠다는 뜻이었다.혼자 서 있기에는 충분히 넉넉했던 옷장 안은 성인 남녀 둘이 들어서자 순식간에 숨이 막힐 듯 비좁아졌다.“전하, 문 닫을까요?”추영우는 대답이 없었다.소설아는 잠시 그의 반응을 살핀 뒤, 조용히 옷장 문을 닫아걸었다.순간 짙은 어둠이 두 사람을 삼켰다.시야가 완전히 차단되자 감각이 한층 더 예민하게 살아났다.밀폐된 공간 속 공기는 금세 무겁고 끈적하게 가라앉았고, 좁은 옷장 안은 어느새 은은한 향기로 가득 차올랐다.소설아에게서 풍겨 나오는 가벼운 난초 향이었다.처음에는 희미하게 스며들던 향이 점차 공간 전체를 잠식하며, 빈틈없이 스며들었다.시각과 청각이 닫히자 후각과 촉각이 더욱 날카롭게 살아났다.그 향은 피부 가까이까지 파고들 듯 번져 들어갔다.추영우의 호흡이 점점 더 깊어지고 무거워졌다.결국 그는 옷장 문을 거칠게 밀어젖혔다.소설아의 손을 잡은 채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이 비좁고 밀폐된 공간에서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뒤따라 나온 소설아가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전하, 오늘 밤 이렇게 찾아오신 건 제게 여성의 날 선물을 주시려고 오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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