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지만 너는 인질의 모든 챕터: 챕터 21 - 챕터 30

51 챕터

EPISODE 21

새벽 5시 30분.유진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또 다시 눈이 자동적으로 떠졌다.알람도 울리지 않은 이른 시간.유진은 홀린 듯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확인했다.예상대로 정원 한편의 자욱한 새벽안개 사이로... 묵묵히 움직이는 실루엣이 보였다.잠시 후 서둘러 간단한 샤워를 마친 유진이 물기도 채,마르지 않은 머리를 대충 묶은 채 로즈마리 화단으로 향했다.허리를 숙여 흙을 만지던 에구치가 기척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유진은 그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선 채,쿵쾅거리는 심장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안녕히 주무셨어요? 혹시… 어제 저희 언니가 밤늦게까지 불편하게 해 드린 건 아니죠?”“네. 괜찮습니다”“다행이네요. 워낙 대책 없는 스타일이라 걱정했거든요”“그럼… 다음에 뵙죠”에구치가 덤덤하게 고개를 숙이며 돌아서려 하자,유진이 저도 모르게 다급하게 그의 옷소매를 잡을 뻔하다가,허공에서 손을 거두며 외쳤다.“저! 제가 버스정류장까지 태워 드릴 게요”“네?”에구치의 짙은 눈동자가 유진을 향했다.유진은 괜히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얼버무렸다.“여기…지대가 높아서… 아래 정류장까지 걸어가려면 꽤 멀고 힘드니까”“괜찮습니다. 바이크로 와서…”에구치가 헬멧을 집어 들며, 담담하게 대꾸했다.그리고 정원 한 편에 서 있는 블랙 색상의 바이크가 눈에 보였다.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묵직한 바이크 시트 위로 무심히 걸쳐지는 순간…엔진이 거칠고 와일드한 배기음을 토해내며 새벽의 정적을 찢었다.매캐한 가솔린 냄새와 에구치의 묵직한 잔상이 안개 속으로 멀어졌다.유진은 자신이 선의로 베푼 호의가 단칼에 베어나가자, 가슴 한구석이 쌉싸름했다.마치 자신과 친해지기를 꺼려 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에게 너무도 정중했다.어제 저녁 순대국밥집에서,유정의 엉뚱한 궤변을 들으며,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던 그 남자와는 사뭇 다른 차가운 온도감.멀어지는 그의 등 뒤에서, 유진은 가슴 한구석이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전공 강의실 문을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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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2

이 시간에 낡고 비좁은 자취방 침대에 누워 있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었다.매일같이 이어지는 밤낮 없는 노동 속에서, 휴식이란 사치에 불과했다.오늘 저녁에도 시큼한 포르말린과 죽음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장례식장 운구 및 밤샘 아르바이트가 예정되어 있었다.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들,갑작스럽게 내동댕이쳐진 두 자매의 가출 소동에 휘말리는 바람에,일복이 터진 일상을 강제로 쉬어가게 되었다.대타를 구하느라 사장에게 머리를 숙여야 했고,오늘 손에 쥘 수 있었던 일당은 허공으로 날아갔다.허탈함과 피로가 뒤섞인 한숨을 내쉬며,에구치는 간만에 찾아온 휴식을 위해 일찍 침대에 누웠다.천근만근 무거운 몸은 당장이라도 기절하듯,잠에 빠져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하지만 사방이 꽉 막힌 독방 같은 공간에 타인의 존재가 끼어들자,아주 사소한 소음조차 뇌수를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신경을 건드렸다.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거실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옷자락의 마찰음,그리고 숨을 죽인 듯한 나직한 발소리.한동안 철저히 혼자만의 요새였던 이 집에,다른 누군가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그의 온몸을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히기 충분했다.그는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어떻게든 깊은 수면 속으로 밀어 넣으려고 애를 썼다.베개를 귀 위에 얹어보기도 하고,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써 보기도 했다.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아무리 뼛속까지 피로가 절여져 있다고 해도,평생을 야간 노동으로 길들여진 몸은 이렇게 이른 시간의 휴식을 거부하고 있었다.기이할 정도로 뇌는 더욱 또렷해졌고,신경은 종이 한 장 차이로 찢어질 듯 날카로워졌다.에구치는 눈만 감은 채, 시체처럼 억지로 누워 있었다.답답한 마음에 공용 공간인 거실로 나가는 것도 극심한 눈치가 보였다.가출하고 처음으로 피붙이도 아닌 낯선 남자의 집에서 지내게 된 여자.오직 이름 석 자만 간신히 아는 여자의 존재가,도리어 집주인인 그를 제 침대 위로 움츠러들게 만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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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3

백화점 식품관에서 최고급 식재료들과 온갖 간식,그리고 셰프급 주방 도구들을 두 손 가득 무겁게 사 들고...유정과 유진은 에구치의 임대 아파트로 향했다.텅 비어있는 좁은 주방.그곳이 새로 산 각종 조리도구들로 가득 채워졌다.그리고 쾅쾅거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유정이 번개처럼 주문한 4인용 최고급 세라믹 식탁 세트와...번쩍이는 최신 주방 가전들이 집 안으로 배달되어 들어왔다.“와… 이렇게 가구까지 들어오니까 꼭 어렸을 때 너랑 나 소꿉놀이 주방세트에서 엄마놀이 하는 것 같다. 여기 부엌 사이즈가 딱 그때랑 비슷한 것 같지?”“여기 공용 공간인데… 우리 맘대로 이렇게 짐들 채워도 되나? 집주인한테 미리 말은 해야 하지 않을까?”“딱 보면 몰라? 진짜 컵라면 밖에 안 먹은 부엌이야. 아무 것도 없잖아. 심지어 접시도 수저세트도 컵도 딱 2개씩. 그리고 나 혼자 쓰자고 이래? 다 같이 쓸 거고 거기다 이렇게 텅 빈 주방을 꽉꽉 채워준다는데 감사해야지 무슨?”유정은 새로운 장난감을 가진 아이처럼 온통 신이 나 있었다.반면에 유진은 남의 영역을 강제로 침범한 것 같은 기분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불도저 같은 유정의 말대로 상황은 종료되었다.마블링이 예술인 최고급 한우 등심을 듬뿍 넣은 불고기 오일 파스타…은은한 레몬 소스를 곁들인 그릴 납작복숭아 샐러드…그리고 달콤하게 토치로 그을린 크렘 브륄레까지.유진은 고등학교 시절 스위스 요리학교에서 배운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역시! 우리 유진… 결혼 수업 한다고 배운 솜씨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까워. 너 아예 이쪽으로 커리어를 잡아도 될 듯! 사실 파리에서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보다 네가 해 준 음식이 더 그리웠어”새 식탁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들을 보며, 유정이 만족스러운 듯 얼굴에 미소를 가득 채웠다.언니의 미소에, 잠시 불편했던 유진의 마음도 스르르 풀어졌다.“음식 식는데… 언제 오신다고 했어?”유진이 은근슬쩍 현관문을 흘낏 바라보며 묻자, 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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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4

두 사람에게 오붓한 시간을 주려고 화장실로 도망친 유진은...일단 찬물로 손부터 씻고 거울 속 씁쓸했던 자신의 표정을 진정시켰다.잠시 후 도서관 1층 구석에 있는 자판기 앞에 멍하니 섰다.그리고 그녀는 한참 동안 불이 들어온 음료 버튼들만 의미 없이 바라보았다.학창 시절 내내 늘상 있었던 익숙한 풍경이었다.사교의 여왕이었던 유정의 곁에는 늘 남자가 있었고,그 옆에는 언제나 어색하게 서성거리며 슬그머니 꼽사리를 끼고 있는 조연인 자신이 있었다.익숙한 소외감에 씁쓸한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그때 자신의 곁으로 훅 하고 커다란 그림자가 다가왔다.유진은 본능적으로 자리를 비켜주었다.“뭐… 마시려던 거 아니에요?”익숙한 목소리… 에구치였다.“네? 아…”예기치 못한 그의 등장에,당황한 유진은 손에서 만지작거리며 쥐고 있던 신용카드를 그만 바닥에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순간 긴 다리로 에구치가 그녀의 곁으로 훅 다가왔다.그리고 허리를 숙이고 그녀보다 먼저 카드를 주워,그녀에게 건네고 자판기 리더기에 자신의 카드를 대신 슬쩍 집어넣었다.그때 코끝으로 훅 다가온 남자의 머스크 향에, 유진은 심장이 움찔 조여들어 숨을 멈췄다.“뭐 마실래요?”유진은 당황해하며,눈에 바로 보이는 파란 불이 들어온 아이스 커피 버튼을 아무 생각없이 누르고 말았다.조금 뒤 덜컹 소리를 내며, 떨어진 차가운 아이스 커피 캔과 따뜻한 커피 캔…그는 자판기 배출구에서 캔 두개를 커다란 한손으로 가볍게 꺼내 들었다.유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뽑은 차가운 커피에 손을 뻗었다.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이 차가운 알루미늄 캔에 닿으려던 찰나…에구치의 큼직하고 단단한 손이 그녀의 손가락을 스치듯 지나쳤다.그러고는 차가운 캔을 휙 채어갔다.순간 스친 그의 단단한 손끝은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살짝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유진의 가녀린 손바닥 위에...그가 차가운 커피 대신 온기 가득한 따뜻한 커피 캔을 얹어주었다.“괜찮음 이거 대신 마셔요. 갑자기 밖에 기온이 떨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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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5

유정의 날카롭고 직설적인 질문에...에구치의 깊은 눈동자 속으로 찰나의 당황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당황을 감추려는 듯 애써 낮고 관심없는 목소리로 물었다.“뭐? 그건… 왜 물어?”“그냥 할 얘기가 없어서 스몰 토크 하는 거예요”유정은 턱을 괴고, 에구치의 미세한 균열을 흥미롭게 관찰했다.에구치는 시선을 슥 돌리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어… 근데 같이 지내다 보면 어색한 부분은 자연스럽게 편해질 거야. 그러니까 너무 애 쓰지 마”“나… 요스케 앞에서 잘 보이고 싶은 거 티 났어요?”유정의 거침없는 도발에, 에구치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삼켰다.“뭐? 아… 괜찮아”“뭐가 괜찮은데?”“어? 아니…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근데 동생 너무 안 보이는 거 아니야?”“오겠죠. 걔가 얘도 아니고…”은근 슬쩍 대화의 화제를 또다시 유진 쪽으로 돌리는 에구치…마치 Firecracker (폭죽놀이) 끝에 붙어 있는 화려하게 타 들어가는 불꽃이 한 순간에 꺼지듯…그런 그를 보며... 그 남자에게 향했던 흥미와 열정이 훅 꺼졌다.유정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쿨하게 일어났다.“다 먹었어요? 다 먹었음 시험 준비 해야할 텐데 저희는 그만 갈게요”“어? 어… 고마워. 근데 아직 안 왔는데 어디 갔지?”“아마 근처 어디 자판기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텐데… 좀 찾아서 보내줄래요? 나… 차에서 기다릴게요. 갑자기 춥다”유정은 가방을 챙겨 미련 없이 주차장으로 걸어갔다.*[그깟 남자 하나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유진과 얼굴을 붉힐 수는 없지. 거기다 유진한테 정신 나간 남자를 내가 무슨 수로…]유정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았다.학창시절 유진은 학교 최고 여신이었다.그 유명한 전 세계 최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스위스 보딩스쿨…특히 이목구비가 남다른 북유럽의 백인 아이들로 가득한 그곳에서…그녀는 자신의 주변에 어떤 미모도 빛을 잃게 만들었다.유진은 그야말로 독보적인 미의 상징이었다.그런 그녀의 곁에서 유정은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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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6

다시 아침 6시.자욱한 안개 속에서 로즈마리 화단 정리를 막 끝낸 에구치에게 유진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언제나처럼 그는 정해 놓은 안전거리를 엄격하게 유지한 채 서 있었다.“저… 혹시 주방에 가구들이랑 주방식기들… 저희가 너무 맘대로 가져다 놓은 것 같아서… 괜찮으세요? 언니가 음식을 하고 싶다고 해서 사긴 했는데… 뭐라고 직접적으로 하시기 불편하실 수도 있어서… 말씀해 주시면 제가 치우라고 언니 설득할 게요”“괜찮습니다”“편하게 말씀 하셔도 돼요. 저도 이건 좀 너무 한 거 아닌가… 걱정 했거든요”“원래 음식을 하지 않아서 필요하면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네. 그럼 언제든 편하게 쓰세요. 어차피 함께 쓰려고 언니가 샀으니까”“네. 감사합니다”“그리고 어쩌면 언니가 욕실이나 공용 공간 인테리어를 바꿀 수도 있어요. 언니 부모님이 미술관을 하셔서 원래 미적 감각이 남다르거든요”“……”“그래도 혹시 너무 하다 싶으시면 꼭 말씀 해 주세요. 그리고 언니 굉장히 유쾌하고 좋은 사람이니까 함께 지내시다 보면 재밌고 좋으실 거에요. 다시 한번 언니랑 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네”“그럼 안녕히 가세요”유진은 어제 저녁부터 내내 마음에 걸렸던 불편한 질문을 그에게 건넸다.그리고 그저 괜찮다는 말 그의 무뚝뚝한 말 한마디에, 조금은 편해졌다.그렇게 좋게 그와의 대화를 마무리 했다.그런데 그 순간 늘 먼저 칼같이 돌아섰던 그가, 갑자기 돌아서려는 유진의 등 뒤에서, 가만히 질문을 던지며 그녀를 붙잡았다.“어제… 왜 그렇게 도서관에서 오래 있었어요?”“네?”예상도 못한 질문에 유진은 어쩔 줄을 몰랐다.“혹시 일부러 우리 자리 만들어 준 건가요?”“네?”순간 정곡을 찔린 유진은 당황해하며, 갈 곳 잃은 눈동자를 잘게 굴렸다.에구치는 유진의 흔들리는 황금빛 눈동자를 무섭도록 정직하게 응시했다.그리고 나직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어제 유정에게도 말했지만….”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서늘하게 이어 붙였다.“친해지려고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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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7

“어…”깜깜한 지하 계단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의 실체를 확인한 유진은…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리고 술기운에 중심을 잃고 계단 아래로 크게 비틀거렸다.“조심해요”에구치…그가 낮고 안정된 목소리로 하지만 다급하게,유진을 부르며 긴 팔을 뻗어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두 손으로 단단하게 끌어안았다.하마터면 가파른 콘크리트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질 뻔한 그녀가 대신 그의 품으로 강하게 안겼다.그리고 그의 넓고 단단한 가슴에 얼굴이 파묻혔다.순간 서늘한 밤 바람 냄새가 훅 느껴졌다.“아… 죄송해요”유진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부끄러웠다.급하게 그녀는 몸을 추스르고, 그의 품에서 거리를 두며 떨어져 나왔다.“걸을 수 있겠어요?”“아… 네. 괜찮아요. 먼저 가세요. 전 유정언니가 데리러 오기로 해서”에구치는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붉어진 유진의 얼굴을 잠시 아무 말 없이 응시했다.그의 깊은 눈동자에 묘한 감정이 스쳤다.“유정이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저한테 전화 했더라고요”“아… 그래요? 무슨 일이지?”유진은 바로 휴대폰에서 통화버튼을 눌렀다.받지 않는 전화…순간 유진은 겁이 덜컥 났다.“어디로 갈래요? 평창동… 아님 유정이 방?”“지금 시간이 밤 8시… 애매한데… 아직 평창동 저택에 다들 깨어 있어서... 이 상태로 집에 들어가면 바로 들킬 거예요… 언니 방으로 갈 게요. 거기서 술 좀 깨고 집에 갈게요”“그럼 가죠”유진은 계단 난간을 꽉 붙들고 조심스럽게 내려왔다.혹여 에구치 앞에서 또다시 추한 모습을 보일까 봐, 잔뜩 긴장한 상태로 걸었다.하지만 이미 풀려버린 다리는 여전히 중심을 잡지 못하고 사정없이 흔들렸다.뒤에서 묵묵히 바라보던 에구치는 잠시 짧은 고민을 했다.그러다 그녀의 앞에 툭 팔을 내밀었다.“잡아요!”“아… 괜찮습니다”“아니… 안 괜찮아요. 그러니까 넘어지기 전에 내 팔이라도 잡아요”“아… 죄송해요”그녀는 아주 조심스러웠다.그리고 그의 다부진 팔뚝 대신 그의 하얀 셔츠 소매 끝자락을 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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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8

어느 순간 유진은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가느다랗게 정신을 차렸다.그리고 흐릿한 시야 사이로 낯선 천장이 들어왔다.놀란 유진의 시선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자신의 바로 곁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는 거대한 남자의 실루엣…그녀는 당황함과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일단 조심스럽게 몸을 웅크려 그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 자리에서 살짝 일어났다.그때 달빛을 받아 하얗게 드러난 남자의 얼굴이 그녀의 시선을 강하게 붙들었다.진한 속눈썹 아래 가려져 있던 미소년의 풋풋한 민낯…평소의 강인하고 위험해 보이던 퇴폐적인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오직 달빛 아래 무방비하게 가라앉은 순수한 얼굴에…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흡 하고 삼켰다그리고 주체할 수 없이, 그녀의 심장이 박동수를 늘리며 두근거렸다.그때 찰나의 인기척을 느낀 에구치가 짙은 속눈썹을 떨며,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그리고 그의 가라앉은 눈동자가...자신을 내려다보던 유진의 황금빛 눈동자와 허공에서 부딪혔다.순간 둘의 시선이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엉킨 채…공간 전체가 얼어 붙은 듯 서로만을 아찔하게 응시했다.주위의 모든 소음이 사라진 것 같은 좁은 방 안…동시에 날뛰기 시작한 두 사람의 거친 심장 소리가 서로의 고막을 사정없이 쿵쿵 때렸다.숨이 막힐 것 같은 대치 속에서,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유진이었다.“저… 몇 시죠?”“아… 두 시쯤 됐네요”“아… 제 휴대폰이… 앗!”유진은 당황한 듯, 급하게 일어나 휴대폰을 찾았다.그리고 그녀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주사바늘이 살을 찢으며 급하게 빠져 나갔다.순간 그녀의 가느다란 팔 안쪽 핏줄에서 붉은 피가 순식간에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잠깐만… 가만히 있어요!”에구치가 거칠게 유진의 손목을 낚아채며, 침대 위로 상체를 숙였다.그는 노련하고 신속하게 주사바늘을 안전하게 제거한 뒤, 유진의 팔 안쪽 상처 부위에 반창고를 붙였다.그리고 지혈을 위해 그의 두꺼운 엄지손가락이 유진의 연약한 살결을 강하게 내리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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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9

달칵.문이 굳게 닫힌 어두운 방 안.적막을 깨고 에구치의 방문이 살며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아주 미세한 마찰음이었지만,귀를 기울이고 있던 유진에게는 천둥소리만큼이나 거대하게 박혔다.침대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있던 유진은...순간 온몸의 세포가 꼿꼿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척추를 타고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유진은 들이쉬던 숨을 그대로 멈췄다.어둠 속에서 오직 심장만이 주책없이 쿵쾅거렸다.스아아아-.이내 거칠게 쏟아지는 샤워기 물소리가 문틈 너머로 조용히 들려왔다.두꺼운 벽과 문을 통과해 들려오는 물소리는 기묘하게 축축하고 은밀했다.유진은 물줄기가 그의 단단한 어깨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릴 모습을...자기도 모르게 상상하고는, 불 타는 뺨을 차가운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휴대폰 화면을 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새벽 4시 30분.차갑고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창문 틈새로 겨우 스며드는 시간이었다.정확히 30분 뒤.물소리가 멎었고,5시쯤 샤워를 끝낸 그가 다시 주방으로 나오는 기척이 느껴졌다.덜컹거리며 냉장고 문을 여는 소리,얼음이 부딪히는 서늘한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유진은 침대 위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잠시 망설였다.이대로 방 안에 갇힌 채, 날이 밝기를 기다리기엔 속이 너무 답답했다.결국 유진은 스르륵 방을 빠져나왔다.“좀 잤어요?”물컵을 든 채, 돌아보는 에구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방금 샤워를 끝내고 나와서인지, 그에게선 옅은 비누 향과 함께 기분 좋은 체취가 풍겼다.그리고 아직 말라붙지 않은 물기가 머리카락 끝에서 쇄골로 툭, 떨어졌다.그리고 여전히 젖어 있는 그의 목젖...이 야심한 새벽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유진은...그의 압도적인 섹시한 실루엣에, 수줍은 듯 가만히 고개만 가로로 저었다.그러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입술을 뗐다.“저 때문에… 쉬지도 못하시고.”“난 충분히 잤어요. 아까 링겔 맞고 있을 때 잤으니까.”에구치가 컵에 든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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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0

“그 말이…… 혹시 무슨 뜻인 줄 알고 나한테 말하는 거예요?”에구치가 흙 묻은 무릎을 일으키며 한 걸음 다가섰다.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안개 낀 정원의 고요함을 짓눌렀다.함께 밤을 보내고, 이 서늘한 새벽까지 단둘이 있는 상황이었다.그런 상황에서 이런 단어를 던지기에는… 너무도 위험하고 치명적인 제안이었다.에구치의 시선이 느릿하게 내려앉았다.지난밤, 자신의 품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때 보았던 유진의 붉어진 입술.그리고 새벽바람에 가늘게 떨리는 얇은 블라우스 자락 위로...그의 은밀하고 묵직한 시선이 날카롭게 내리꽂혔다.남자의 눈빛은 이미 그녀의 옷가지 너머를 더듬고 있는 것처럼 뜨거웠다.“네?”하지만 유진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그를 이상하게 쳐다볼 뿐이었다.정말로 배가 고파서...그저 순수한 호의로 던진 제안이었다는 듯,동그랗게 뜬 그녀의 눈망울이 지나치게 무해했다.그 순진무구한 얼굴을 마주하자, 에구치의 팽팽하게 당겨졌던 이성이 툭 풀렸다.그리고 그의 단단한 입술 끝에 작은 실소가 잠깐 비치다 순식간에 사라졌다.[아, 내가 이 어린 여자애를 두고 무슨 생각을 한 거지…]“주면 고맙게 먹을게요. 사실 여기 나가면서…… 요 앞 사거리 국밥집에서 아침 먹을 생각이었어요.”“아! 그럼 들어오세요. 7시 30분까지는 보통 이 저택에 아무도 없어요. 편하게 들어오셔도 돼요.”유진은 안도하며, 그를 이끌고 1층 주방으로 향했다.넓고 차가운 주방에, 에구치의 거대한 체구가 들어서자,공간이 단숨에 좁아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유진은 괜한 긴장감이 차올라, 급하게 캐비닛을 뒤져 라면 두 봉지를 꺼냈다.삐-.인덕션에 전원이 켜지는 날카로운 기계음이 울렸다.유진은 프라이팬을 올리고, 송송 썬 파와 라면 스프를 먼저 넣었다.달궈진 기름에 스프를 달달 볶아 매콤한 향을 가득 유도한 뒤,미리 받아둔 물을 부어 끓이기 시작했다.물이 끓어오르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주방의 공기는 어색하게 흘렀다.유진은 시선을 둘 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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