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Chapter 121 - Chapter 130

144 Chapters

#120. 파멸의 도화선, 불타오르네

이 깊은 밤, 밀폐된 공간.난 바로 곁에 내려앉은 차준호를 보며 크게 숨을 집어삼켰다. 그에게서 은밀하게 스며 나오는 명품 남성 향수의 잔향이 차가운 공기 중에 녹아들며 내 심장을 죄어왔다. 인간적인 온기와 자본주의 사회 정점에 이른 오만한 위치, 그리고 날것의 남성적인 매력이 한 몸에 뒤엉킨 지독하리만치 모순적인 존재.그런 대단한 차준호가 지금은 기자들의 접근을 막아주겠다고 공언하고 있었다. 심지어, 연인 관계의 경계를 시험해 보려는 듯한 노골적인 제안까지 건네면서.‘잠자리? 나 원 참!’입가에 맴도는 노골적인 질문을 간신히 삼키자, 어둠 속에서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한순간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가 이렇게 다정하게 굴어준다면, 못 이기는 척 그 품으로 넘어간다고 판단한 건가.나를 뭘로 보고.“천만에요. 그런 확인 따위 필요 없을 만큼, 우리는 이미 다 끝났어요.”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린 미소가 짓눌린 입안에 비참한 씁쓸함을 남겼다. 링거 폴대를 붙든 손끝이 파르르 떨렸지만, 나는 등을 곧추세워 욕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그때, 마치 내 위태로운 균형을 단숨에 빼앗으려는 듯. 그가 내 손에 쥐인 폴대를 거칠게 가로채며 거대한 몸을 아슬아슬하게 기울여왔다. 숨결이 닿을 거리였다.“끝은 무슨. 시작도 안 한 사이였을 수도 있는데······.”그러면서 남자는 잔인하리만치 나른한 한마디를 덧붙였다.“······사람 일은 또 모르지. 신하늘이 나랑 잠자리하자고 먼저 말하는 날이 올지도······.”이 남자가 정말 어디까지 갈 작정인 걸까. 하지만 너무나도 확신에 찬 표정으로 내뱉는 그에게서 기묘한 위화감이 엄습했다. 그는 나에 대해 대체 얼마나 깊이 알고 있는 걸까. 그의 입가에 매끄럽게 맺힌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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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그 남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니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최기범은 강소희와 어떻게 통화를 종료했는지 제대로 인식도 하지 못한 채 깊은 고민에 휩싸였다. 도국이나 이아준은 그렇다 치더라도, 차준호까지 개입해 이렇게 일을 키우다니. 차준호가 전면전으로 나오면 신하늘이 그의 비서였으니 당연히 세간에 알려지는 수순이었다. “이걸······ 설마 노렸다고?”신하늘을 비호하는 대한민국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거물들이 총출동해 있었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어머니 김희주를 향해 사방에서 서슬 퍼런 칼날이 들어오는 형국이었다.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아무리 원망스러워도 김희주가 신경 쓰이는 건 자식으로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한남동 본가마저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음을 직감한 최기범은 황급히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차준호든 신하늘이, 당장 누구 하나라도 만나 담판을 지어야만 했다.***최기범은 곧장 대한종합병원으로 향했으나, 병원 측으로부터 신하늘의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일절 면회가 불가하다는 통보만 받고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일부러 자신을 거부하는 걸까.하지만 로비에 깔린 기자들의 웅성거림을 살펴보며, 최기범은 기어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 속 김희주는 천하의 나쁜 권력자, 최악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김희주가 어떤 여자를 눈밭에 쓰러지도록 가방으로 때렸다고 목격자 진술이 나왔다더라고.”“CCTV 없는 사각지대라고 유명한 곳에서 저질렀다며? 술까지 만취 상태였다던데, 보좌진들은 왜 안 말렸지?&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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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큰 그림 속에 삼켜지긴 싫어

화요일 오후가 되었다.허기찬은 병실 앞을 진치고 있는 기자들을 상대하느라 어제오늘 아주 미칠 뻔했었다.그래서 오후에는 외근을 나가라는 차준호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병원을 튀어나왔다.“우리 신 비서는 지난 1월 초 내내 이런 지옥에 시달렸던 거잖아?”자신은 총무과에서 파견 나온 서진원 대리의 서포트를 받으면서도 버티기 힘든데, 신하늘은 차준호에게 3년 치 회사 업무를 보고하면서 악마 같은 기자들까지 홀로 상대했다고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동행한 서진원이 세종동 서쪽 동네 초입에 차를 세우며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런데 지금 터진 기자들 규모는 그때보다 더 대단하네요.”“우리 대표님이 전면전에 등장하신 덕분이지.”그래서일까. 차준호의 지시를 받고 신하늘을 구하기 위한 증거 수집을 하러 세종동에 도착한 그들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선의를 베푼 사람에게 돌아온 것이 탐욕스러운 국회의원의 분탕질이라니.허기찬은 인생 처음으로, 날것의 인간애가 그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김희주 의원, 이번 기회에 법적으로 아주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지”“김 의원이 손을 쓰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증거를 확실하게 확보해 두시죠.”나중에 무슨 법적 공방이 생겨도 완벽하게 카운터를 날릴 수 있도록 나선 차준호의 계획은 역시나 정확했다. 벌써 김희주 측에서 물밑으로 움직이며 서쪽 동네 사람들을 매도하고 여론을 조작하려는 징후가 포착되었기 때문이다.허기찬은 곧장 차에서 내려 칼바람이 몰아치는 판자촌 골목길을 누볐다. 사람들을 풀어 그날의 사건을 목격한 주민들을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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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나를 위해 그물을 던진 남자

뜬금없이 서쪽 동네 주민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니. 평생 힘 한 번 써보지 못한 그 힘없는 어르신들이 대체 무슨 동력으로 그 거대한 국회의원을 상대로 목소리를 낸단 말인가.톱배우 세나와 JW 소속사의 강소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와 사적으로 스치듯 닿은 인연 외엔 이렇다 할 친분도 없는 그들이 왜 리스크를 감수하며 내 방패를 자처하고 나서는 걸까.내가 이대로 입을 닫고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면 다 해결되는 문제일까. 아니면 이 기괴한 권력 농단의 한복판에 서서 그들이 떨어뜨리는 전리품이나 챙기면 그만인 걸까.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기이한 확신이 뇌리를 스쳤다. 김희주라는 오만한 권력자를 단두대에 올리기 위한 완벽한 도화선, 그게 바로 나였다.‘결국 모두들 나라는 존재를 명분 삼아, 각자 취할 이익을 계산하고 있는지도 몰라.’도국과 이아준은 나를 비호하겠다는 순수한 의리와 부채감으로 모든 것을 걸고 전면에 나서주었다 쳐도, 강소희와 세나는 분명 다른 목적이 있어 보였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침대 위로 향했다. 나는 미동도 없이 곤히 잠들어 있는 차준호를 바라보며 숨을 깊게 집어삼켰다.만약 이 남자에게 어필하고 싶은 여자의 욕망으로 강소희가 판을 흔든 거라면, 세나 역시 도국이라는 거대한 축이 있으니 납득이 가는 상황이었다. 결국 이 모든 톱니바퀴의 중심축에는 차준호가 있었다.나는 태블릿 화면 속 기사들을 천천히 스크롤하며 느리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부모님이 과거에 당했던 모욕이 마침내 수면 위로 드러났다. 그 천박한 광기는 국회의원이라는 사회적 지위에 전혀 걸맞지 않은 수준이어서 입안에 지독한 씁쓸함이 감돌았다.이 소란을 시작으로 모든 말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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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날개가 꺾여 버린 예비 악녀

3년 전이라니.김희주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가 귓가에 거슬리게 맴돌아 머릿속이 시리도록 차갑게 굳어버렸다. “준호가요?”그 질문에 김희주는 그저 귀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깊은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세종동을 꿀꺽 하려는 게 분명해. 그 녀석 머릿속에는 어릴 때부터 징그러운 능구렁이가 들어앉았었거든. 내가 사람을 잘못 건드렸어.”조(兆) 단위의 CC그룹의 지분을 이미 물려받은 차준호가 그깟 세종동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김희주 역시 소파에 신경질적으로 몸을 던지며 가사 도우미에게 물을 가져오라 턱짓했다. 벌컥벌컥 생수를 사납게 삼키는 소리가 최기범의 예민한 고막을 긁어내렸다.“어릴 때라니요?”최기범이 되묻자, 김희주는 아들의 눈치를 슬그머니 살피더니 헛기침을 하며 비열하게 웃었다.“내가 라온초등학교 학교운영위원장 하면서 학교를 자주 드나들었잖니. 그때 본 차준호는 보통 내기가 아니었어. 어쨌든 차준호 그 오만한 놈도 바닥으로 추락시켜 버릴 테니까 두고 봐.”의기양양하게 독기를 뿜어내는 김희주를 보며, 최기범은 머리가 깨질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어머니. 제발 멈추세요. 그다음 일은 제가 수습할 테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계시라고요.”“넌 어서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을 준비나 해. 이번 일은 보좌관들에게 이미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해 뒀으니까.”눈이 멀어 폭주하는 김희주를 바라보며, 최기범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불길한 예감에 다시 생수를 들이켰다. ‘준호가 분명히 경고했었는데······.’김희주는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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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아픈 진실과 구차한 반격

더 이상 완벽한 사람인 척 모른 체하며 자판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한 번 떠보기로 했다.“대표님, 이 목걸이도 익숙해져서 차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과거에 뭐 그리 연연하세요?”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건 거짓말도 아니었다.그때 차준호가 낮게 실소를 터뜨렸다. 위협적일 만큼 환하게 웃어 보인 그가 아예 내 침대 가장자리에 깊숙이 걸터앉았다. 남자의 묵직한 체중이 실리며 매트리스가 기우는 감각에 척추가 바짝 긴장했다.“그래. 맞아. 현재 말고는 내게 의미 없지. 과거도 미래도 말이야.”그가 상체를 숙여 나와의 거리를 좁혀왔다. 훅 끼치는 그의 체온과 짙은 스킨 향이 밀폐된 병실의 공기를 단숨에 장악했다.나는 결론적으로 그의 방패 덕분으로 이리 편하게 몸조리를 하고 있었다.빨리 내 책임을 다하고 그와 멀어지는 수순만 가질 뿐이었기에 다시 노트북 자판을 사납게 두드렸다. 살을 파고드는 듯한 차준호의 집요한 시선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애써 호흡을 고르며 완벽한 차분함을 가장했다.“저 목요일 퇴원은 반드시 해야겠어요.”그때 차준호가 호선이 휜 입술로 넌지시 웃어 보였다. 내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눈빛이었다.“신하늘, 곧 있으면 설 명절이라 연휴일 텐데······. 조금만 참고 병원에 붙어 있다가 그때 나가서 쉬면 되잖아.”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오기가 생겼다. 나는 노트북에서 기어이 시선을 뗀 뒤, 차준호의 깊고 새까만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 눈빛에 삼켜지지 않으려 이 악물고 강단을 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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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얄팍한 거짓은 금방 찢어질걸?

[ㄴ세종동 봉사하는 그 사람 때문에 거기 어르신들 이사 못 가는 거 아니야? 무슨 꿍꿍이가 있나?][ㄴ아직도 남아 있는 판자촌 때문에 서울 시내 경관도 흐리고 우범 지대라 살기도 힘든데···. 빨리 없어졌으면 좋겠네.][ㄴ김희주 국회의원이 때린 건 나쁘지만, 세종동에 사는 동쪽 동네 사람들 대변해서 그런 거 아니야?][ㄴ김희주 그 사람이 그나마 세종동 발전시켜 놓았잖아. 봉사하는 사람 때문에 괜히 서쪽 동네도 발전만 늦어진 거 같은데.]최기범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설마 제 어머니가 이토록 추악한 방식으로 여론을 조작하려 들다니. 강소희가 눈치챘을 정도니 차준호 역시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이렇게 얄팍하게 건드려 봤자, 결국 부메랑이 되어 김희주의 목을 조르게 될 것이 분명했다.최기범의 속은 이미 까맣게 타버려 흔적도 남지 않았다.***어둑어둑한 수요일 밤.세나는 지금 도국의 차 안에서 밀도 높은 데이트를 즐기는 중이었다. 각자 야간 안무 연습을 마치고 늦은 귀가를 하던 중, 시간대가 맞아 충동적으로 만나게 된 터였다.한적한 한강 공원 주차장. 두 사람은 은밀한 어둠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채 깊게 입을 맞추었다. 서울의 밤 풍경은 열기로 달아오른 성인 남녀의 마음을 더욱 거칠게 부추겼다.한강 위로 길게 늘어진 동쪽의 잠실대교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차량의 헤드라이트로 은하수처럼 반짝였고, 서쪽으로 우뚝 솟은 영동대교는 찬란한 별빛을 받아 빛을 뿜어냈다. 강을 가로지르는 지하철은 막차를 앞두고 바삐 달려댔으며, 여기저기 솟아오른 마천루의 현란한 불빛들도 하나둘 숨을 죽이고 있었다.“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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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겨울을 벗고, 반전의 봄으로

한국이 목요일 새벽의 지독한 불면과 기묘한 여론으로 들끓고 있을 시각, 지구 반대편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는 맑게 갠 햇살이 내리쬐는 한낮을 통과하고 있었다.이아준은 미국 지사에서 회의를 끝내자마자 쏟아지는 휴대전화 알림들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감히 하늘이를 건드려? 김희주, 그 여자는 나중에 어떤 피눈물을 흘리려고 이따위 수작을 부리는 거지?”지평선 끝까지 아득하게 뻗어 있는 광활한 텍사스 공장 부지를 바라보며, 그의 매끄러운 눈매가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안경을 올려 쓰며 눈썹을 찌푸리자, 옆에 서 있던 김정규가 다급하게 다가왔다.“아이고, 사장님! 지금 한국에 계신 회장님께서 난리가 나셨습니다. 대체 왜 김희주 의원을 대놓고 건드려서 이 사단을 만드냐고요! 빨리 전화 한 통만 넣어주세요.”비서인 김정규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징징거리듯 외쳤다. 그의 유난스러운 호들갑에도 이아준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며 통화를 할까 말까 잠시 저울질하던 그가 이내 귀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우리 할아버지랑 김희주랑 무슨 상관인데 난리야? 신경 끄고, 여기 일이나 빨리 마무리하자고.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지.”“사장님, 제발요. 그럼 더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네?”김정규는 이아준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삐죽거렸다. 본가에서 사장님을 어떻게든 뜯어말리라는 불호령이라도 떨어진 게 분명했다.“싫어. 나는 내 마음대로 할 거야.”“어른들 보시기에 너무 티 나는 행동 좀 하지 마세요. 회장님은 김희주 의원이랑 사적으로 꽤 돈독한 사이란 말입니다.”그 말에 창밖을 보던 아준의 시선이 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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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서로 이용 당하는 남녀 사이

차준호는 내 손을 유심히 바라보며, 내가 목걸이를 풀어내리는 모든 과정을 차갑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는 내 결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전혀 다른 묵직한 사실부터 전해왔다.“이미 공론화가 되었어. 주말 100분 토론부터 매일 SNS 개인 방송에 기사까지 쏟아지고 있으니까.”이 사건이 이토록 걷잡을 수 없이 번지다니.난 관자놀이가 욱신거려 현기증이 느껴졌다. 무슨 난세의 잔다르크도 아니고. 물론 내가 지은 죄는 없었다. 단 한 번도 불순한 의도로 세종동에 남아 있었던 적이 없었으니, 지레 위축될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하지만 악독한 김희주가 나의 치부를 들추고, 부모님까지 운운하며 그동안 세종동에서 해온 진심 어린 일들을 죄다 깎아내리려 들지 않을까 그건 두려웠다.“일단 저는 제 할 일부터 해야겠어요. 게임 출시가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우선 내게 주어진 책임을 외면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단호하게 행동하기로 했다.차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두 걸음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거리를 좁혀올수록 숨이 막히는 부담감에 몸을 돌려 피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커다란 체구로 나를 몰아붙여 결국 창틀에 걸터앉게 만들었고, 양팔로 나를 가두어 벽을 쳤다.“기특하네. 돌아가면 기범이가 아주 좋아하겠어.”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였다.“돈을 받았으니 대가를 치러야죠. 회사에서 철야 작업을 해서라도 2월 말까지는 확실하게 일할게요. 그리고 이거 받으세요.”나는 조금 전에 풀어두었던 목걸이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동안 소리 없이 옥좨어 오던 미련이었는데. 하지만 이게 정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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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아찔한 쇼윈도 커플 탄생

“기억을 찾아가면서, 내 마음도 이제 좀 알아 버렸거든.”그가 이렇게 솔직한 남자였던가. 하긴, 어쩌면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솔직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을지도 몰랐다.차준호는 나를 마주하며 천천히 거리를 좁혀왔다. 그의 눈동자에는 일절 흔들림이 없었다. 이미 무겁고 확고한 결심을 마친 사람처럼, 내 모든 것을 낱낱이 꿰뚫어 보듯 단호한 눈빛으로 그가 말을 이었다.“그래서요?”“덕분에 요즘 거짓말의 묘미를 알아버렸어. 그러니까 일이 술술 풀리더라고. 전리품은 확실하게 챙겨줄 테니 걱정 마.”휘청, 눈앞이 아뜩해지는 현기증에 난 말문이 막혀 버렸다.그를 이용하라니. 전리품이라니. 그가 대체 이런 위험한 짓을 사서 하며 얻는 실익이 뭐가 있다고 이토록 당당한 걸까.“그래도 전 제 마음대로 할 거예요.”가쁘게 떨리는 호흡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나는 차준호를 빤히 응시했다. 호기롭게 말은 내뱉었지만 현재 내게 뾰족한 대책이 있는 건 아니었다. 만약 내가 홀로 온전히 서지 못한다면, 결국 도국이나 이아준이 내 방패를 자처하며 나설 게 분명했다. 그 꼴을 보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그야말로 벼랑 끝으로 몰린 형국이었다.“신하늘, 하고 싶은 거 다 해. 내가 기꺼이 네 방패가 되어 줄 테니까.”차준호의 눈동자가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금빛 여명 속에서 칼날처럼 번뜩였다. 호선으로 매끄럽게 휘어지는 그의 입꼬리는, 뜨거운 햇빛 아래 만개한 독꽃처럼 위험하리만치 아름다웠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그의 태도는 시종일관 여유롭기만 했다.그의 치밀한 계획에 편승할지, 아니면 홀로 이 무서운 세상과 맞설지. 거대한 갈림길의 기로에서 고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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