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Chapter 131 - Chapter 140

144 Chapters

#130. 오만한 그 남자의 손을 잡을 수밖에

 가슴이 심란해서 그런가.택시에서 내려 로비에 들어서면서도 내 마음은 온통 어수선했다. 집에서도 내내 허둥지둥거렸고, 회사에 들어서서도 역시 나를 향해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 때문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아, 신 과장님.”“어머······.”“······오랜만이시네요.”기분 탓이 아니었다. 확실히 모든 직원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거리감이 얽혀 있었다.회사 대표와 은밀한 관계라는 소문이 그새 퍼졌으려나. 어쩌면 최기범 실장하고도 이상한 오해나 받는 꽃뱀으로 낙인찍힌 건 아닐까. 모두들 김희주 의원의 편에 서서 내게 손가락질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종동 주민들을 선동해 재개발 이익이나 챙기려는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몰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아득해졌다.이대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멀리 도망쳐 버리면 어떨까 하는 심정이었다.큰 충격을 받아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 상태였는데, 주변의 시선들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온몸을 따끔따끔 찌르는 고통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무거운 걸음을 옮겨, 드디어 나는 23층 게임 개발실에 이르게 되었다.과연 이곳의 동료들은 내게 어떻게 반응해 주려나.손바닥에 땀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들어섰다.***사무실은 늘 그렇듯 차분했다.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이나 헤드셋을 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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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향기로운 제안이 펼쳐진 순간

‘날 고발한다고?’나는 서둘러 휴대전화를 열었다. 이미 내게 고소장이 접수되었다는 절차 안내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김희주 측에서 고소와 동시에 언론에 자료를 뿌린 게 분명했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보니, 아침까지만 해도 잠잠했던 메인 화면에 ‘김 의원, 허위사실 유포자 엄벌 선언’ 같은 자극적인 기사들이 벌써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중이었다.원래라면 이렇게 빨리 진행될 리가 없을 터였다.김희주는 정말 지독한 인간이었다. 온갖 죄목을 붙여 내게 고소장을 던지다니. 내가 대체 뭘 어쨌다고.그제야 차준호가 왜 자신에게 기대라고 했는지 절실히 이해가 갔다. 역시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살면 안 되는 법인데. 가만히 침묵하는 것도 죄가 되고, 뭐라 변명하려 해도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싫든 좋든, 이제는 차준호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오고야 만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잔다르크나 독립투사처럼 비장하게 세상에 목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거대 권력 앞에 한없이 초라해지는 내 모습에 씁쓸함이 밀려왔다. 지은 죄가 없는데 왜 내가 죄인 같은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걸까.[난 당당하니까 뭘 하든 상관없어요. 법이 알아서 판단해 주겠죠.]화면 창에 띄운 내 문장은 사실 껍데기뿐이었다. 법은 결코 평등하지 않으며, 가진 자들에게 훨씬 유리하다는 것쯤은 성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이건 그저 내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자, 치기 어린 허세에 불과했다.[그래야 신하늘답지. 차라도 한 잔 같이 하고 싶지만, 지금 아버지가 오셔서.]차진철 회장이 회사를 찾아왔다고? 나 때문인가?이제 또 다른 고민이 밀려왔지만, 그저 일이나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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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사정 없이 길들이려는 남자

“준호야,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넌 질 테니까.”“설마, 제가 진다고요?”묵직한 공기가 내려앉은 대표실.탁 소리와 함께 차진철의 투박하고 단단한 손끝이 검은색 퀸을 밀어 넣었다. 판세는 아직 어느 쪽으로도 완벽하게 기운 상태는 아니었다. 차진철은 체스판에서 느릿하게 시선을 떼어 차준호를 직시했다. 그의 낮고 투박한 목소리에는 뼈가 서려 있었다.“녀석, 원하는 게 있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난 네가 내걸 조건 따위 궁금하지 않다.”승패를 확신하는 차진철의 오만한 경고에도 차준호의 눈빛은 일절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긴 손가락이 하얀색 킹을 느긋하게 만지작거렸다. 피부와 매끄러운 체스 말이 맞닿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내기를 안 하시려거든 판을 덮으세요, 아버지.”차준호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킹을 툭 내려놓으며 정면으로 받아치자, 고요하던 대표실에 찰나의 정적이 감돌았다. 이내 차진철의 묵직한 목울대가 크게 울리더니, 호쾌하고 굵직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허허, 허!”가소롭다는 듯, 그러나 묘한 대견함이 서린 웃음이었다. 차진철이 가죽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좁고 날카로운 눈으로 아들을 흥미롭게 응시했다.“이 녀석 봐라. 기억이 다 돌아왔구나? 드디어!”본성을 숨기고 죽은 듯 엎드려 있던 맹수가 마침내 이빨을 드러낸 것을 알아챈 그의 눈에 위험한 빛이 스쳤다. 하지만 차준호는 차진철의 감탄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을 재촉했다.“그래서 내기 하실 겁니까, 안 하실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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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브레이크가 고장 났나? 통제 불가

카페테리아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이 회사 대표가 일개 과장을 찾아와서 밥 먹자고 하다니. 심지어 난 지금 국민 악녀가 되기 일보 직전이라 주목을 받고 있는 데다가 차준호에게 보살핌을 받아 구설에 오르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이러면 어쩌자는 건가.“신하늘, 빨리.”한숨이 입가에 맴돌다 천천히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고개를 젓는 턱 끝이 떨리는 것을 애써 참았다. 차준호와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공개적으로 특별하다고 굳이 알릴 필요도 없는데, 손까지 잡고 있다니.“대표님, 저는 오늘 이 부추전이 너무 먹고 싶네요. 저녁은 허 실장님하고 드세요.”차준호를 향한 거절에 그의 미소가 카페테리아 한편에 나 있는 파노라마 창에 반사된 햇빛처럼 번뜩였다. 나정아와 한은숙을 향한 시선에선 의도된 무심함이 묻어났다.“잘 됐네. 나도 먹고 싶었는데. 신 과장하고 할 말도 있었는데. 여기서 먹으면서 할까? 아니면 대표실로 갈까?”이 남자의 머릿속엔 대체 무슨 생각이 깃들어 있을까. 차준호를 누가 말리겠는가. 늘 자기가 원하는 답으로 사람을 몰고 가는데.한은숙이 허둥지둥 일어나 은박지로 전을 싸는 손길이 부산스러웠다.“하하! 대표님도 참. 이거 싸 가지고 가셔서 신 과장님하고 두 분이서 드세요. 저희는 알아서 먹을게요.”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 뜻이 아닌데. 나정아와 한은숙에게 진심으로 미안해서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그 둘은 엄지 척!을 하면서 다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더 마음이 불편한 나였다.***편하게 식사하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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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쳇, 직진으로 덤벼들다니

한 입, 또 한 입.눈에 힘을 주고 도시락만 응시하는 사이, 느릿느릿 숟가락이 무의미하게 입속을 오갔다. 발끈해서 당장이라도 대표실을 뛰쳐나갈까 하다가도, 이 잔인한 상황을 지혜롭게 이용해야만 한다는 냉정한 자각이 머릿속을 울렸다.그동안 살면서 부모를 잃은 어린 내게 김희주도 그렇고, 동쪽 동네 사람들이 쏟아낸 말들은 대단하리치만큼 잔인했었다. 언제까지 사정 봐줘야 하냐고, 지긋지긋하다며 빨리 개발 좀 하자고. 어르신들이 집세를 내지 못하자 진짜 주인들은 모조리 내게 책임을 떠넘겼다. 모두들 떠나지 못하게 내가 발목을 잡은 건 아니었는데.“대표님이 무슨 신이라도 되신 듯, 저에게 구세주 역할을 하고 싶으신가 보네요?”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기에는 차준호에게 휘둘린 자신이 안쓰러워, 일단 날이 선 가시를 그에게 뱉어 보았다.“그래, 현재 난 김희주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지.”그동안 도국과 이아준이 부지를 매입하려 발버둥을 쳐도 이미 늦었다고 했었다. 이미 팔렸다는 집도, 주인이 누구인지 도통 알 수 없다는 집도 허다했다. 남은 어르신들은 모두 세입자여서 더 이상 대항할 힘조차 없었다.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세종동을 둘러싼 모든 갈등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설마, 정확하게 3년.지독한 소름이 온몸의 솜털을 훑고 지나갔다. 차준호는 그럼 지난 3년 동안 세종동의 부지를 남모르게 늘려간 걸까. 김희주가 상대하기 가장 껄끄러운 절대적인 존재가 바로 CC그룹이니, 내게 3년간 거대한 우산이 되어 거짓 평화를 선사한 셈이었다. 결국 차준호가 모든 판의 키를 쥐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뼈저리게 알아차리게 되었다.“그래서, 제가 밥도 잘 먹고 대표님 말씀 잘 들으면 해피엔딩의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거네요?”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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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욕이 절로 나오는 상황

그 시각, 이아준은 드디어 인천공항에서 기지개를 켰다.“아, 오랜만에 한국 땅을 밟네.”자신 뒤로 주렁주렁 따르는 비서진과 경호원들을 뒤로하고는 바로 휴대폰부터 꺼내 들었다.그는 만사를 미루고 제일 먼저 도국에게 전화를 돌렸다.녀석이 얼마나 바쁜지 잘 알았기에 한 번에 받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고 통화 연결음만 들으며 입국 수속을 밟았다.-아준아, 드디어 온 거야?“럭키. 우리 국이가 전화를 바로 받다니. 아, 행복하다. 너 바쁘지?”이아준은 도국의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푸근해져 성마르게 주절거리며 말을 쏟아냈다.-너보다는 덜 바빠. 왜 이리 오래 걸렸어?“그렇게 됐어.”이아준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소리 같아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예상보다 미국 텍사스의 공장 건립 허가를 빠르게 마무리하였기에 빨리 온다고 온 것이 지금이라 구구절절 설명은 아꼈다.-고생했어.좋아한다고 언급한 바람에 도국이 불편할까 싶었는데 이리 예전처럼 대해주니 다시 이아준도 마음이 편해졌다.“어서 게임이나 같이 하고 싶네.”-네가 지금 경제계를 주무르고 있는데, 태평하네.마음 편한 것을 가장한 이아준이었다.사실 그룹 임원진들이 가하는 압박은 상상을 초월하는 요즘인 것을.미국 공장 진출과 세금 문제 그리고 그룹의 사업 확장을 어느 정도 해결해서 그렇지 하마터면 5월까지 돌아오지도 못할 뻔했다.자신의 능력을 하나하나 검증하는 이 상황은 자다가 가위에 눌릴 정도로 고통의 강도가 엄청났다.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얼마나 일거수일투족 흠집을 내고자 파고드는지.하지만 힘든 건 공유할 필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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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나를 지켜줄 기사들이 등장했다고?

내 입에서는 허- 하고 나직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래된 기사 속에서 묘한 해답을 찾았기 때문이었다.온몸의 피가 빠르게 돌며,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안개가 기적처럼 걷혀 갔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깨달음이 파도처럼 세차게 몰려왔다.‘이제 좀 알 것 같네.’숨겨진 진실을 똑똑히 마주한 내 입꼬리가 느릿하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김희주가 왜 그토록 눈에 불을 켜고 나와 부모님을 폄하하며 서쪽 동네를 밀어내려 발악을 했는지,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지독한 탐욕의 실체가 무엇인지 비로소 완벽하게 이해가 갔다.나는 가슴 깊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떨리는 두 주먹을 화면 아래에서 불끈 쥐어 보였다.세상의 모든 진실이 다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이면에는 늘 다른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제 나도 그런 어른들의 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김희주도 그렇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차준호 역시 마찬가지였다.내가 마냥 세상 물정 모른 채 친구들의 비호나 받는 온실 속 공주님이라고 생각했다면 아주 커다란 오산이었다. 지금까지 난 항상 내가 하고자 하는 결정을 스스로 내려왔고, 한 번 의지를 세우면 반드시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해 냈던 나였다.차준호가 지금 내 인생에 제멋대로 끼어들어 나를 구원하겠다는 듯 휘두르고 있지만, 나는 드디어 그가 없어도 이 지옥 같은 상황을 타개할 단 하나의 확실한 희망을 보게 되었다.화면을 뚫어지게 노려보던 그때,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 전화 진동이 요란하게 울리며 액정 위로 문자 한 통이 떠올랐다.[하늘아, 국이와 같이 세종동에 오늘 자정쯤 도착할 것 같은데. 괜찮아?]언제나 벼랑 끝에 서 있을 때마다 내 편이 되어 기꺼이 손을 뻗어주던 소중한 친구들이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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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틈 없이 조여 오는 그림자

하루가 저물어가는 자정. 사위에 어둠이 깊게 깔린 시간이었다.오랜만에 회사에 복귀해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사람들과 부대끼며 시달린 하루였지만, 생각보다 피곤하지는 않았다. 드디어 나 스스로 이 지옥 같은 상황을 타개할 앞날의 선명한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일까. 오랜만에 맞이할 소중한 친구들을 기다리는 동안, 내 입가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머물렀다.내가 집 안으로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난히 커다란 인기척과 함께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하늘아!”“왔어?”나 역시 겉옷을 벗으며 고개를 돌리자, 이아준이 서둘러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하늘아, 너도 이제 막 들어온 거야? 얼굴이 왜 그래?”하긴, 그 소동 이후로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 데다 눈가가 퀭하게 가라앉아 있었으니 이아준이 경악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요즘 일상이 좀 피곤해서 그래.”“빌어먹을 김희주! 내가 초호화 변호인단을 꾸려줄게!”오랜만에 만난 이아준은 양손 가득 들고 온 선물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내 안색을 꼼꼼히 살폈다. 홧김에 내뱉는 말일지라도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온몸이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그 뒤를 따라 들어오던 도국 역시 묵직한 한숨을 내쉬며 텅 빈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보일러 제대로 돌아가는 거 맞아? 집이 왜 이렇게 차.”“이제 막 틀어서 그래. 오랜만에 들어온 집이라 온기가 통 돌지 않네.”“고생 많았어.”친구들의 낯익은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온종일 팽팽한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마음이 봄눈 녹듯 스르르 풀어져 내렸다.사실 차준호가 병원에서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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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경고, 함부로 파고들다니

나는 물끄러미 도국의 휴대 전화를 바라보다가 녀석과 시선이 얽혔다.이아준은 소파 테이블 가득 차려진 산더미 같은 음식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팔짱을 낀 채 오직 나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차준호가 주는 압박에 나는 왜 이토록 지독한 긴장감에 사로잡히는 걸까. 그의 짙은 그림자가 내 온몸을 단단히 붙잡고 늘어지는 것만 같았고, 친구들의 무거운 시선도 서늘하게 느껴졌다. 이왕 이렇게 엎질러진 물이라면, 차라리 도국이 통화가 끝나고 나면 모든 이야기를 폭포수처럼 쏟아내리라 결심했다. “뭡니까, 이 시각에. 편하게 전화 통화할 사이는 아닌 걸로 압니다만.”도국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나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노는데 왜 간섭이냐고 나서서 한마디 거들려다가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그 순간, 전화기 너머에서 차준호의 묵직하고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그러게. 전화 따위 안 하게 만들었어야지.대체 차준호는 이제 스토킹까지 서슴지 않는 건가 싶어 어이가 없었다. 그저 간섭이 과하다 생각하며 애써 넘기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도국의 날카로운 눈빛이 거실 유리창 너머를 확인하더니, 이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급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그리고 휙, 거실 창을 거칠게 젖히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밖의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아직은 조용합니다.”“무슨 일이야?”이아준 역시 놀란 얼굴로 도국이 서 있는 창가로 서둘러 향했다. 나 역시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녀석들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칠흑 같은 어둠만이 내려앉아 있어야 할 골목길 모퉁이에는 차가운 헤드라이트 불빛이 번뜩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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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가지가지, 거슬려

다음 날 정오. 양재 JW 엔터테인먼트 대표실.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강소희는 주원형과 마주 앉아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김훈과 회사의 법률 대리인까지 피를 말리는 회의를 하고 간 터라, 집무실 내부를 감도는 공기는 유난히 흉흉하고 무거웠다.주원형은 강소희의 초대형 악재를 막아주는 조건으로, 그녀의 다음 행보를 제멋대로 결정지었다. 결국 거액이 오가는 블록버스터급 영화의 메인 주연 계약서에 강제 통보나 다름없는 서명을 해야 할 판국이었다.벼랑 끝에 선 기분에 휩싸인 강소희는 이 숨 막히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주원형에게 날카로운 화풀이라도 뱉어내야만 했다.“대표님, 정말 나를 이렇게까지 굴릴 거예요?”변호사와 실장마저 모두 방을 나가고 단둘만 남게 되자, 강소희는 주원형의 무릎 위로 올라가 앉으며 그의 셔츠 단추를 거칠게 풀기 시작했다.진흙탕을 굴러야 하는 액션 영화만큼은 정말이지 질색이었다. 게다가 멜로나 로맨스라면 몰라도 거친 액션이라니. 하지만 지금은 눈앞의 주원형을 구슬려 판을 뒤엎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유혹이든 해야 할 처지였다.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목을 짚어오자, 거세게 요동치는 맥박의 혈류가 강소희의 손끝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굴리긴. 지금 상처 하나 안 들키게 내 품에 곱게 감싸 쥐고 보호해 주는 중인데.”주원형은 강소희의 가냘픈 허리선을 따라 실크 치마 아래를 완만하게 쓸어올리며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김희주 그 여자가 너무 싫어! 또 세종동 판자촌 출신이라는 과거로 날 협박하다니. 너무 한 거 아니에요? 내가 죄지은 것도 아니고.”“그 집 아들이랑 친한 거. 그게 죄라잖아? 남편 회사 계열사가 거액을 후원하는 영화라니까 토 달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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