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의 모든 챕터: 챕터 111 - 챕터 120

143 챕터

#110. 눈부신 진실이 아프게 파고드는 그 순간

도국은 이아준에게 전화를 걸기 전, 굳게 닫아걸었던 과거의 기억부터 느리게 짚어 나갔다.이아준이 신하늘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오랜 전제가 있었기에, 그는 단 한 번도 신하늘을 이성으로 바라보지 않으려 제 감정을 원천 차단해 왔었다. ‘하늘이가 좋아. 한 번도 싫었던 적은 없었어.’그건 사랑보다는 애처로움에 가까웠는데. 꿋꿋이 세상의 풍파를 버텨내는 가녀린 모습에 동정심이 일었고, 제 품에 숨겨 보호해주고 싶다는 오만한 책임감이 치밀었을 뿐이다.그렇다고 그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최기범이 날카로운 메스로 제 속을 거침없이 들쑤셔 버린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하던 감각이 생생했다. 빈손으로 시작해 가시밭길을 기어가며 정상이라는 신기루를 향해 피투성이가 되도록 달려온 것도 결국 그 둘에게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어서였다.그러나 각자 어른이 되고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하자,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던 관계의 축이 뒤틀려버린 게 문제였다. 도국은 이제 이아준의 진심부터 확인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다.화면을 보니 벌써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미국은 늦은 오후를 지나고 있을 시각. 마음이 폭풍에 휩싸인 이상, 더는 지체할 수 없는 결단의 순간이었다. 단축 번호를 누르자, 고요한 새벽 공기를 찢고 갈증 나는 신호 대기음이 이어졌다.그리고 잠시 뒤, 덜컥 수화기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슈퍼스타께서 밤새도록 고생해 놓고 왜 아직 안 자고 있어?낮게 울리는 다정한 이아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도국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소중한 녀석을 위해서라면 세상 끝에서라도 추락할 수 있을 터였다. 도국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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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치밀한 덫에 걸린 여자

“잠깐만요!”처음 듣는 목소리였으나, 그 안에 담긴 날 선 분노가 날카로운 공포감을 자아냈다.문을 열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머릿속의 경고등이 요란하게 울렸지만 이미 내 몸은 홀린 듯 현관문을 열고 나가고 있었다.밤새 얼마나 많은 눈이 쏟아진 건지, 컴컴한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발걸음마다 발목이 푹푹 빠져들었다. 아픈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급하게 맨발로 구겨 신은 운동화 사이로 차가운 눈송이가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마치 얼음송곳이 살점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쿵쿵! 쾅쾅쾅—![신하늘! 이 발칙한 년! 감히 누구한테 꼬리를 쳐? 빨리 문 안 열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경찰이라니. 대문 고리를 잡은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담벼락을 넘어 날카로운 육두문자가 그 뒤로도 쏟아지자 내 눈앞이 캄캄했다. 내가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런 소리를 들을 만큼 무거운 죄를 지었던가.“···도대체 제가 무슨 일을 했다고 이러세요? 누구세요?”떨리는 손으로 대문을 삐걱이며 열자, 좁고 미끄러운 골목길을 가득 메운 광경에 숨이 턱 막혔다. ***주위를 둘러보니 골목은 적막할 정도로 고요했다. 하필 일요일 밤 시각이라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가뜩이나 이 동네는 CCTV마저 고장 난 채 방치된 곳으로 유명했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고립감이 지독한 공포가 되어 심장을 조여왔다.안 그래도 눈 때문에 좁아진 골목길에 시커멓고 고급스러운 대형 세단 몇 대가 위압적으로 정차해 있었다.대문을 부술 듯 두드리고 서 있던 중년 여성은 나를 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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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질척이는 한겨울의 그 밤

눈이 소복이 쌓인 골목길로 뼈를 에듯 차가운 한기가 파고들었다.고열과 오한으로 머리가 어지러워 온 세상이 기괴하게 일렁였다. 얼어붙은 바닥에 처박혔다는 사실도, 국회의원 김희주가 자신을 폭행했다는 현실도 지독하게 비현실적이었다.하지만 그 모든 충격보다 서늘하게 살을 파고드는 건, 지금 자신이 차준호의 품에 단단히 안겨 있다는 사실이었다.“······대표님.”“가만히 있어. 에너지 낭비하지 마. 알아서 해줄 테니까.”낮게 가라앉은 준호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 시선의 끝에는 흉흉하다 못해 잔혹한 난폭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가 왜 이 타이밍에 이곳에 있는지 의문을 가질 새도 없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차준호의 수행비서와 허기찬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들어왔다.허기찬은 이미 휴대전화를 높이 든 채, 고요하던 밤의 정적을 깨뜨리며 고의적인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여기요! 폭행 사건입니다! 목격자 있으십니까! 경찰에 신고 부탁드립니다!”일요일 깊은 밤,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골목길에 누가 나올까 싶었지만, 굳게 닫혀 있던 연립주택의 창문들이 하나둘 열리기 시작했다.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김희주는 보좌진들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안경을 치켜 올렸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독사처럼 번뜩였다.“차준호. 네가 왜 여기 있어? 한 대기업의 수장이라는 인간이 이 야밤에 남의 지역구 골목길을 사사건건 기웃거리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아무도 없을 때는 악을 지르더니. 지금은 차분하게 변한 가증스러운 목소리였다.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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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포식자의 타깃이 된 사냥감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럼 내 부모님의 악담도 지금처럼 퍼붓고 폭행까지 했단 말인가.나는 고개를 돌려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찾으려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이미 허기찬이 그분에게 다가가 여러 가지를 캐묻고 있었다. 아, 이런 고마울 때가.나는 본능적인 당혹감으로 차준호를 올려다보았고, 그는 거 보라는 듯 오만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차준호가 슬쩍 손짓을 하며 허기찬에게 신호를 보내던 바로 그때,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큰일이네, 허 변호사. 김희주 의원이 도망치려고 하는 것 같은데.”차준호의 연기는 아카데미상을 받을 만큼 완벽했고, 그 눈동자엔 살기까지 돋아 있었다. 그건 마치 정글 속에서 먹잇감을 발견한 최상위 포식자의 눈빛과도 같았다.“내가 왜 도망가? 누가 와도 날 체포 못 해.”“언젠가 구치소부터 가게 될 테니 기대하십시오. 의원님.”순간, 차준호가 이 일과 별개로 김희주와 해결해야 할 빚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허기찬은 내 몸을 걱정하는 듯하면서 김희주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사람을 핸드백으로 때려서 눈밭에 넘어뜨렸으니, 폭행에 폭언에 이건 범죄잖아요?”격앙된 어조로 그리 말을 늘어놓자, 주변 공기가 긴장감으로 차올랐다. 김희주는 뭐라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몰려드는 사람들과 커져가는 사이렌 소리에 입을 다물고 그녀 역시 보좌진들의 부축을 받으며 부들거렸다.그 순간, 나의 뇌리에는 과거의 조각들이 유리 파편처럼 파고들었다.어린 시절 내 부모 때문에 동네가 썩어간다고 조롱했던 사건과 더불어, 부모님과 언성을 높이던 사람도 종종 있었는데. 그게 설마 김희주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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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영리하게 진실을 포장할 순간

선우현은 다름 아닌 CC그룹 차진철 회장의 유능한 최측근 수행비서였다.그가 직접 움직였다는 것은 곧 차준호가 전면적으로 개입했다는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외아들을 끔찍하게 아끼기로 재벌가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차진철 회장이었으니까.“차준호 대표님이 신하늘 씨를 과하게 보호할 테니, 이쪽은 안심하고 계시라는 뜻으로 보낸 것 같습니다.”이아준의 미간이 험악하게 좁혀지자, 곁에 있던 김정규가 눈치를 보며 재빨리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 정교한 설명조차 이아준의 들끓는 불길을 끄지는 못했다.“그 인간이 최근까지 우리 하늘이 제일 고생시켜 놓았으면서, 감히 누구더러 안심하래?”“그 과오를 보답하려는 모양입니다.”과연 그게 이런 행동으로 대체가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이아준은 손에 쥔 수건을 부서질 듯 꽉 잡아 쥐었다. 열기로 달아올랐다 식어버린 땀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명령했다.“씻고 나올 테니까 한국 L본사 라인 연결해. 당장 화상회의 준비시키고, 미국 일정은 모두 앞당겨.”그 서슬 퍼런 결단에 김정규의 눈이 외려 매섭게 빛났다.“역시, 본업 모먼트 제대로 켜지셨네요! 우리 사장님이 버텨 주셔야 신하늘 씨도 기댈 기둥이 생기는 법이죠. 즉시 준비하겠습니다.”김정규가 바람처럼 몸을 돌려 나가자, 이아준은 가늘어진 눈매로 통창 너머 붉게 타오르는 텍사스의 석양을 노려보았다.오래전부터 세종동 보육원을 지워버리지 못해 안달이 났던 인간, 김희주. 추악한 과거의 파편들이 떠오르자 이아준의 전신이 살기로 굳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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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정글 속에 숨겨진 흑막

양재동 JW 신사옥 펜트하우스.그곳의 거실은 오늘도 두 남녀가 뿜어내는 은밀한 열기로 인해 밀도가 묵직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폭설이 그치고 월요일 오후 햇살이 통창을 넘어 거실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소파 위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얽혀 있는 주원형과 강소희는 그 빛마저 통째로 삼켜버릴 듯 서로에게 몰두했다.알몸으로 맞닿은 살결 사이로 뜨거운 숨결을 탐닉하면서도, 두 사람의 대화는 지독하리만치 이성적이었다.“TV 소리 좀 시끄러운데······.”단조로운 앵커의 음성이 정국 판세와 날씨를 건조하게 읊조리고 있었지만, 강소희의 붉은 입술은 그 소음을 지우듯 주원형의 단단한 목덜미를 거칠게 핥아 내렸다. 그는 굳이 귀담아들을 필요 없는 뉴스를 배경음 삼아,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기며 무심히 말을 흘렸다.“세상 돌아가는 건 알아야지.”사실 정치가 어떻게 굴러가든 그에게는 안중에도 없었다.주원형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직 JW 소속 연예인들의 스캔들 방어뿐이었으니까. 뉴스를 끄라며 투덜거리는 강소희의 몸은 이미 그의 손길 아래에서 정직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서로의 체온에 휩쓸린 본능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최근 강소희의 스케줄을 화보나 CF 정도로 제한하며 의도적으로 쉬게 만든 건 주원형의 계산이었다. S급 여배우인 그녀를 놀리는 건 기획사로서 막심한 손해이기는 했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였다간 예상치 못한 리스크가 터질 것 같았기에 값싼 배역에 소모시키고 싶지 않은 의도도 있었다.그래서일까. 그 유예 기간 동안 주원형은 눈에 띄게 다정해졌고, 그녀의 몸을 찾는 횟수도 잦아졌다.“대표님, 무슨 책잡힌 사람처럼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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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올가미처럼 자꾸 조여오잖아

도국은 의아했다.그저 우연의 일치가 겹쳐 신하늘의 곁을 맴돌며 도와준 줄 알았던 차준호가 아니었나.“도국아, 김희주 그 여자 진짜 악질 중의 악질이야. 이번에 그렇게 눈 뒤집혀서 날뛴 거, 다 시커먼 속셈이 있어서 그래.”속셈이라니. 도국은 마른침을 삼키며 숨을 크게 집어삼켰다. 이동근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올 다음 말을 숨죽여 기다렸다.“그게 뭔데?”주변을 극도로 살피며 눈치를 보던 이동근이 마침내 제 턱을 바짝 붙여오며 나지막하게 소리를 흘렸다.“김희주 남편이 건설회사 대표잖아. 세종동 재개발 사업권, 그거 자기 남편 회사로 밀어주려고 자그마치 10년 동안 뒤에서 온갖 더러운 작업은 다 쳤거든? 근데 거기에 뜬금없이 3년 전부터 차준호 본가인 CC건설이 끼어들었단 말이지.”도국의 눈동자가 일순 의아함과 충격으로 크게 흔들렸다.사실 도국 자신도 그곳에 건물을 올리고 싶어 부지를 확보하려 움직였었고, 무엇보다 이아준 역시 앞장서서 세종동에 L그룹의 자본을 밀어 넣으려 달려들었던 거대 사업이었다. 악착같이 모두들 부지를 선점하려 애썼음에도, 어느 순간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더는 지분을 늘리지 못했던 것이 차디찬 현실이었다.“3년 전이라니······.”그런데 시기가 묘했다. 3년 전이라면 신하늘이 CH-컴퍼니에 입사한 시점인데. “CC건설이 예고도 없이 세종동 재개발 컨소시엄에 지분을 들이밀면서 김희주 라인이 올해 공중분해 되려고 하나 봐. 지금은 차준호 쪽 지분이 압도적인 탑이야.”차준호가 왜 세종동 재개발 사업에 그토록 집착하는 걸까.단순히 거대 기업의 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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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그 짐승이 하게 될 탁월한 거짓말

역시, 차준호는 그날 밤의 소란스러웠던 사건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해 낸 것이 분명했다.그 짧은 기억의 파편을 붙잡고 제멋대로 오해하며 착각했던 못난 나. 그 한순간의 빈틈을 파고들어, 남자는 이 숨 막히는 타이밍에 기어이 확인사살을 하려는 걸까.그의 단단한 손끝이 내 머리카락을 만지려 허공을 가르던 바로 그때였다.탁!“그것도 이제 의미 없어요. 전 앞으로 절대 대표님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으니까요. 3월이 되면 미련 없이 회사는 그만둘 거요.”나는 상체를 뒤로 거칠게 물리며, 그의 손길이 단 1밀리미터도 살결에 닿지 않도록 손등을 거세게 쳐냈다.순간 링거 호스가 비명 지르듯 경련하며 출렁였고, 손등에 박혀 있던 서늘한 바늘이 살점 깊숙이 파고드는 찌릿한 통증이 엄습했다. “그런데, 어쩌지? 난 이제 당분간 신하늘의 남자로 세상에 묶여 있어야 할 것 같은데.”숨이 턱 막힌 듯 입술이 차갑게 굳어졌다.차준호의 손에 들린 리모컨이 마치 장전된 총구처럼 검은 텔레비전 화면을 겨누었다. 삐-, 소리와 함께 켜진 뉴스 채널의 화면에는 실시간으로 이 병원의 전경이 적나라하게 송출되고 있었다.[서울 모 쪽방촌의 수호천사를 폭행한 중진 국회의원! 왜 그런 만행을 저질렀나!][모 의원, 재개발 지역 봉사자에게 폭언과 폭행 뒤 설원에 방치······ 피해자는 혼절.][재개발 지역에서 10년째 봉사를 이어간 XX재단 운영자이자 모 기업 비서는 왜 이 모진 일을 겪었나!][중진 여성 국회의원, 지역구 봉사자 폭행으로 고발당해! 현행범이나 불체포 특권으로 인하여····&mid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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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도발, 책임감은 집어 치워

세나의 조용한 목소리 끝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미세하게 섞여 들었다.예상치 못한 그녀의 영리하고도 헌신적인 대답에, 도국은 일순 거대한 블랙홀에 빠진 듯 심장이 거칠게 반응했다. 이 모순적인 상황이 왜 제 차가운 피를 이토록 뜨겁게 달구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왜······ 널 이용하라고 하는 거야?”-신 비서님 때문이잖아요. 저 다 이해해요, 오빠.순간 도국은 온몸이 움찔거릴 만큼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휴대전화 너머에서 세나가 숨겨둔 쓸쓸함이 묵직하게 묻어 나왔다. 그녀의 외로운 목소리가 어째서 현재 제 가슴을 짓누르는 감정과 기묘하게 겹쳐 보이는 건지, 도국은 스스로도 이유를 찾지 못했다.“너무 앞서 나가지 마. 그런 거 아니니까.”룸미러 너머로 매니저 이동근과 찰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동근은 골치 아픈 생각은 접고 그저 세나와 잘해보라는 듯, 운전대를 잡지 않은 한 손으로 장난스레 엄지를 척 올려 보였다. 도국은 제 존재 자체가 이상한 나라에 갇혀 버린 동화 속 주인공만 같았다.-오빠, 나 진짜 여자 만들어 주실래요?“뭐?”순간 도국의 입에서 당혹감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오빠의 ‘충실한 애인’ 역할, 이왕이면 좀 뜨겁게, 남들 하는 건 다 하면서 하고 싶어서요.철렁.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도국은 세나의 도발적인 제안에 절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입술 사이로 더운 김이 훅 끼쳐 나오는 듯했다.“너······ 후회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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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길들여지지 않는 짐승인데

그 시각, 한남동 차진철 회장의 저택은 지독하리만치 고요했다.중국 출장을 마치고 막 돌아온 그의 무거운 발길에 맞춰, 사방은 숨소리조차 삼켜버린 듯 적막했다. 차진철은 피로가 묻은 수트 재킷을 벗으며, 퇴근하려던 선우현 실장을 머리짓으로 불러들였다.“선 실장, 고생했어. 내일은 하루 쉬어.”“감사합니다, 회장님.”선우현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이번 출장길은 비행기가 몇 시간이나 연착되는 바람에 뼛속까지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현지 해외 사업이 워낙 대성공을 거두어 사방에서 축배를 들어야 마땅한 타이밍이었지만, 차진철의 미간은 출국 전보다 더 험악하게 패여 있었다. 기분이 좋아야 할 순간에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차준호라는 거대한 가시가 끊임없이 그의 신경을 찔러대고 있는 탓이었다.“회장님.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내어드릴까요?”“그래······. 뭐라도 들이켜야 겨우 잠들 수 있을 것 같군.”차진철이 거친 한숨을 내쉬며 가죽 소파 깊숙이 거구를 파묻었다. 선우현은 조용히 걸음을 옮기며 나직하게 덧붙였다.“고혈압 약도 함께 챙겨 오겠습니다.”“허, 그래. 내가 그 준호 녀석 때문에 정말 혈압이 남아나질 않아.”차진철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마른 신음을 뱉었다.이윽고 선우현이 온기가 부드럽게 피어오르는 찻잔과 함께 알약이 담긴 종지를 트레이에 받쳐 다가왔다. 차진철은 그것들을 받아 단숨에 삼켜버린 뒤, 탁자 위의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뉴스를 틀어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할까 하다가, 이 새벽에 굳이 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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